경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경주의 역사, 신라문화유적지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져 본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산재한 많은 사적지들은 당연히 있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 와중에 최근 배기환 서장이 부임해 우리가 근무하는 지역인 경주, 신라의 역사·문화를 아는 것이 치안에 도움이 되고, 직원들도 함께하면 좋겠다는 제의로 ‘경주경찰 문화 탐방동아리’가 발족했다.
지난달 28일 첫 탐방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댁, 최초의 국학 교육기관인 경주향교, 최근 복원해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을 자랑하는 월정교로 향했다.
먼저 교촌마을 인근 식당에서 이른 점심과 간단한 동아리 창립행사를 마치고 최부자 아카데미 최창호 이사의 해설로 진행됐다. 해설은 대릉원에서 교촌마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놋전거리’의 유래로 시작했다. 최부자댁에 공급하기 위해 이곳에 놋전이 생겼고, 교촌마을 일대가 누워 있는 소[臥牛]의 형상이라 게으름을 막기 위해 소의 목에 해당하는 지점에 방울을 달기 위해 놋전이 생겼다고 한다. 또 최부자댁 서편 아름드리 나무가 일제강점기 소총 개머리판을 만들기 위해 무참히 베어나갔다는 해설과 함께 최부자댁에 도착했다.
솟을대문을 지나 작은 화단을 가진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엔 800석을 저장했던 곡식창고, 그 사이로 중문을 지나 ‘ㅁ’자 형태로 지어진 안채가 있는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하지만 12대 만석꾼 집치고는 낮은 솟을대문과 사당을 안채 동쪽에 배치하지 않고 서쪽에 배치한 점, 기둥을 낮게 만들어 집 높이를 낮추고 집터를 낮게 닦은 점 등은 옆에 위치한 향교를 배려한 최부자댁의 건축적 특징이다.
화재로 소실 후 지난 2006년 복원한 큰 사랑채에는 면암 최익현,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의친왕 이강 공(公),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당시 왕세자) 등 당대 인사들이 머물렀다. 특히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기 위해 만든 ‘백산상회’도 이곳 사랑채다.
흔히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는데 12대 만석꾼을 이룬 배경에는 남다른 가훈인 육훈(六訓)을 통해 집안을 다스렸기에 가능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은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이들 육훈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현재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존경받을 가문으로 지속되길 기대한다.
최부자댁의 육훈이 이 시대와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절제와 베풂을 통해 과욕을 멀리하는 모습이 배금주의(拜金主義) 시대를 사는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신라 국학의 요람인 경주향교. 문화관광해설사 김희옥 씨의 해설로 진행됐다. 경주향교는 신라 신문왕 2년(682년) 설립한 교육 기관인 국학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려시대 향학, 조선시대에는 향교로서 지방교육기관의 역할을 이어왔다. 1492년 중수했지만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소실돼 1600년 경주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진사청을 중건, 1616년 광해군 6년에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 양무를 중건했다고 한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향교로 앞쪽 높은 곳에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보물 제1727호)과 동·서무를 두고 뒤쪽에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를 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 일곱분과우리나라 유학자 18분(동국 18현 또는 동방 18현)을 모시는데 그중에 신라시대 설총과 최치원이 포함된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경주지역에서 소과에 합격(진사)한 사람은 237명이고 현재 향교는 교육기관의 명맥은 사라졌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전통 혼례장소로 지역민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어 세 번째 방문지는 최근 복원해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을 자랑하는 월정교다. 월정교는 ‘삼국사기’ 경덕왕 19년(760년)조에 의하면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춘양(春陽), 월정(月淨)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후에 춘양교는 일정교(日精橋)로 월정교는 한자가 바뀐 월정교(月精橋)로, 두 다리가 각각 해와 달의 정령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남천에는 이 두 다리 외에도 느릅나무로 만든 나무다리(유교, 楡橋)도 여러 개 있어 서민들이 편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니어클럽 문화관광해설사 김상곤 씨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를 이어준 다리는 월정교가 아니라 서민들이 이용한 유교에서 물에 빠져 인근에 있는 요석궁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동방 18현 중 한분인 설총이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월정교 앞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마지막으로 이날 경주경찰의 신라문화탐방 첫 번째 이야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