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다섯 번째 탐방지였던 오릉에서 내남 방면으로 내려가다 보면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숲이 있다. 어쩌면 흔할 수도 있는 이 숲이 경주시민들에게 특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신라시대 가장 아름다웠던 이궁지이자 신라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포석정(포석정지, 사적 제1호)이 있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 서쪽에 위치한 포석정은 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과 정자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복 같이 생긴 이 구불구불한 모양의 돌홈, ‘곡수거’만이 남아있다. 수로에 흐르던 물길의 길이는 약 22m로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술잔이 흐르는 방식과 시간이 다 달랐다고 한다. 이미 오랜 세월을 거쳐 온데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무분별한 보수로 지금은 원형이 많이 파손되긴 하였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모양을 보니 신라인들의 뛰어난 석조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제49대 헌강왕대(875~885년)의 태평스러운 시절에 왕이 포석정에 들러 좌우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흥에 겨워 춤추고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왕들이 신하들과 함께 포석정 수로에 술잔을 띄워 놓고 시를 읊으며 연회를 하던 장소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포석정이 누구에 의해, 어떤 용도로 축조되었는지는 다른 건물들의 흔적이 없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음이 알려지고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됨에 따라 포석정이 단순히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을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포석정에서 나와 왼편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능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신라 제6대 지마왕(112~134)이 잠들어 있는 곳, 지마왕릉이다. 지마왕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던 왕이라고 한다. 지마왕릉도 역시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반 원형봉토분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단아하면서도 절제된 듯한 자태가 느껴지는 듯 하였다.
지마왕릉 옆에는 또 다른 목적지로 안내하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햇빛을 적당히 가려주는 나무들과 길을 따라 나있는 싱그러운 풀잎들을 만지며 걷다보면 다양한 수생식물이 공존하고 있는 생태공원 태진지가 나온다. 태진지를 건너 소나무숲을 지나면 움직이는 햇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신비한 미소를 지녔다는 배리 삼존석불입상(보물 제63호)이 있다. 이 세 석불은 이곳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워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특히 중앙에 자리잡은 불상은 극락 세계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에 풍만하고 네모난 얼굴, 둥근 눈썹, 통통한 뺨에서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이 느껴졌다. 그 아름답다는 삼존불의 미소는 이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삼존불 자체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은 사람들에게 미소를 안겨주었다.
신라인들의 풍류와 기상이 담긴 포석정에서부터 지마왕릉과 삼불사 배리삼존불까지 이번 탐방을 통해 골짜기마다 수많은 불교유적과 왕릉이 살아 숨쉬고 있어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경주 남산지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어서 더욱 뜻깊은 탐방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경주의 찬란했던 시간들이 잘 보존되어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이신화 순경여성청소년과 여청수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