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공들인 국가 프로젝트 당시 정부가 사업에 필요한 예산으로 책정한 금액은 225억7100만원에 달했다. 정부는 재원 마련을 위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차관 2394만달러를 요청했다. IBRD는 1973년 4월 평가조사단을 파견해 현지를 둘러본 뒤 ..
1905년 개항한 경주 감포항은 우리나라 근현대 어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감포항 일대는 일제강점기 번성했던 어항유적이 있고, 감포읍 감포제일교회 주변엔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적산(敵産)가옥들이 다수 남아있어 우리나라 근대 생활사를 잘 확인할 수 있는 곳..
경북 경주시 교동 교촌마을에 있는 ‘경주 최부자댁’(국가민속문화유산)은 한국판‘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종택이다. 최 부자 가문은 ‘12대 만석꾼,8대 진사’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해방 이후 전 재산을대학..
경주는 신라 천년고도이자 불교문화를 꽃 피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 대한민국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탄생한 곳이 경주란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천도교의 뿌리인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1824~1864)가 경주에서 동학을 창시하고 전파한 기간은 불과 ..
경주 시내 서부동엔 ‘서경사’란 이름을 지닌 독특한 모습을 한 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 불교 사찰 건물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 제290호로 지정돼 있다. 광복 이후 농촌지도소, 해병전우회 사무실, 판소리 전수관 등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빈 건물..
우리나라가 문화재 복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다. 1961년 7월과 9월, 숭례문(남대문) 복원공사와 석굴암 중수공사가 각각 시작됐다. 숭례문은 전쟁 중 폭격으로 인해 붕괴를 겨우 면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다. 더 이상 방치했다간 무너져 내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5월. 참배를 위해 경주 불국사를 찾은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왜병들은 절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어버린다. 감탄을 쏟아내며 이곳저곳 둘러보던 그들은 뜻밖에도 절 내 한구석에서 무기를 발견한다. 경상좌병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경주 불국사에 안 가본 사람이 있을까. 경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대한민국 여행 1번지’다. 많은 이들은 ‘경주’라는 두 글자에서 수학여행을 떠올린다. 그 수학여행에서 빠지지 않았던 곳이 바로 토함산 서쪽 기슭에 있는 불국사다. 불국사는
수년전 한 유명 한국사 강사가 TV 예능 특집 방송에 출연해 “석굴암을 일제가 고의로 훼손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 방송에서 조선통감부(조선총독부의 전신) 2대 통감이던 소네 아라스케(1849~1910)가 석굴암 앞에 서 있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
1907년을 즈음해, 경주의 한 우체부는 토함산을 넘어 우편배달을 가다가 우연히 폐허 상태의 유적을 발견한다.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던 이 유적은 바로 국보이자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경주 ‘석굴암’이다. 나비 표본을 찾아
경주는 언제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을까. 경주는 국내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유명하지만, 신라의 수도였다는 점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얼핏 수도와 관광도시 사이엔 괴리감이 있어 보이지만, 경주가 1천년이란 긴 시간 동안 신라의 수도였다는 점이 지금의 경
사천왕사 터는 일제강점기 철길 개설로 인해 피해를 본 대표적인 유적지다. 철길이 절터를 관통하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렇게 놓인 철길은 2021년 12월 영남권 복선전철이 개통할 때까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절터를 가로질러 달렸다. 경주에 들
경주의 동쪽 편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는 해발 115m의 야트막한 산이 있다. 낭산(狼山)이다. 동네 뒷산 같지만 옛 신라인에겐 신령스런 산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실성왕은 이곳에 하늘의 신령들이 내려와 노닌다고 해서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다. 4
경주 도심엔 세 줄기의 하천이 흐른다. 경주를 관통하는 형산강 중심 줄기인 서천을 비롯해 북천, 남천이 그것이다. 하천 이름이 된 방향의 기준점은 옛날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이다. 서천은 월성의 서쪽에, 북천과 남천은 월성의 북쪽과 남쪽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경주로 여행을 온 많은 사람들은 경주역에 첫발을 내렸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도 경주역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이런 이유에서 상당수 대한민국 국민들의 추억 한 자락이 경주역에 머문다. 하지만 추억 속 경주역은 이제 ‘경주문화관1918’로 이름이
일제는 1936년 경주역을 사정동에서 성동동으로 이전했다. 대구에서 울산까지 이어졌던 협궤노선 경동선을 광궤로 바꾼데 따른 것이다. 이로 인해 경주 시가지 재편이 이뤄졌다. 무엇보다 성동동에 들어선 새 경주역은 일제의 행정기관이 밀집된 중심지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옛 경주역(현 경주문화관1918)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추억하는 기차역이다. 1960년대부터 신혼여행, 수학여행을 위해 경주를 방문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역할을 하면서 중장년층의 추억의 명소로 남아 있다. 인근 도시인 포항과 울산에서 교육도시 경주로 통학하던
경주 황리단길에서 태종로를 교차해 북쪽으로 봉황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나있다. 길은 시작지점에서 200여m 거리에 있는 금관총과 봉황대 사이를 지나 대구지법 경주지원 방향으로 이어진다. 금관총을 지나 신라고분정보센터 앞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붉은색을 칠한 홍살문이 보인
조선은 개국 초부터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전국 주요 지역에 태조의 어진(임금 초상화)을 봉안했다. 경주 집경전을 비롯해 전주 경기전, 영흥 준원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등에 어진을 모셨다. 모두 태조 이성계와 깊은 관련이 있던 곳이었다. 현재 경주
이 시리즈 첫 회에서 소개했던 화랑수련원(옛 야마구치병원 건물) 남쪽 벽면을 끼고 나있는 골목을 따라 50m쯤 가다보면 오른편에 고풍스런 건물 하나가 보인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건물의 모양새가 어색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채게 된다. 지붕 한쪽은 팔작지붕인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