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엄마가 되면서, 뉴스 보기가 참 무섭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보고 싶지 않아도 메인화면에 뜬 자극적인 뉴스는 자동으로 그 내용이 각인된다. 자극적인 뉴스일수록 여러 매체를 통해 번갈아 가면서 나오니,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아는 척하는 게 창피한 일이지, 모르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아는 게 없으니 아는 사람한테 배우면 된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지만, 우리 마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줄 기관은커녕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이들이 그림책을 읽다가 글 책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있다. 그림도 없고 글만 가득한 페이지를 읽는다는 것이 굉장한 거부감이 있다. 그때 아줌마가 찾은 작가가 있다. “린다 수 박”, <사금파리 한 조각>이라는 책의 저자이다. 지금은 아동문학의 노벨문학상인 뉴베리상
모내기가 끝난 논은 연신 푸르름이 짙어진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벼는, 남의 집 아이 같다. 아줌마가 하는 농담이다. 우리 집 아이는 더디게 자라는 것 같은데, 남의 집 아이는 가끔 보니 볼 때마다 훌쩍 커져 있곤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남의 집
격세지감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아줌마가 봤던 공익광고다. 조금 과장한다면 TV만 틀면 계속 나온 말이다. 오죽하면 어린 내가 기억할 정도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낳으라고 해도 안 낳
선거철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어떤 사람에게 투표했는지 다 기억한다. 아버지는 누구에게 투표했다고 이야기하신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선거운동 기간 내내 뉴스에 나오는 피선거권자나 선거 포스터를 보고 아버지는 은연중에 이번 선거에 자신
살면서 기분 나쁜 일이 여러 가지 있다. 오늘 아줌마는 기분 나쁜 것 중 ‘비교’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줌마가 지금까지 하지 않는 것, 역시 ‘비교’다. 엄친아라는 말이 돌아다닐 정도니, 아줌마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에 다짐했었다. 이런
아줌마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결혼하기 전까지 제주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았다. 가수 혜은이의 <감수광>으로만 인식되던 제주어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폭삭 속았수다>를 통해 외계어처럼 들리는 제주어를 대중들에게 많이 전파했다. 제주어는 많이 사라졌고,
아이들이 유치원 때 일이다. 쌍둥이가 친구를 울렸다고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보통 친구를 울렸다고 전화하실 일이 없는데, 뭔가 또 있나 보다 싶었다. 잠깐 별의별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얼른 유치원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우
아줌마 집 앞에 편의점이 있다. 초등학교 앞에는 의례 문구점이 있고 각종 문구부터 간식까지 즐비하다. 학원 앞과 학교 앞 편의점은 매출이 보장되는 곳이다. 도심권 학원가 편의점과 빵집은 높은 권리금을 받을 수 있기도 하다. 경기가 안 좋고, 소비 심리가 위축된 요즘이지
미·중 무역전쟁이 트럼프의 당선으로 2차전을 시작했다.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경제를 좀 아는 엄마로서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걱정만 하고 있지는 않다. 경기 사이클로 인한 금리의 향방과 각국 정책으론 인한 영향을 파악하면 언제나 무사히 시간을 보내온
대한민국의 발전에 한 부분은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희생해야 했다. 대한민국 대표 수출품이었던 가발, 옷, 신발 등을 생산하는 공장 직원들은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15시간 이상 근무했다.
남녀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연애한다고 하면, 친구들의 반응이다. 여자는 20대에는 잘 생겼냐, 멋있냐, 키 크냐 등 외모에 대해 질문을 한다면 30대가 되면 직업이 뭐냐, 연봉이 얼마나 되냐 등 경제적인 관점으로 변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질문이 변한다는 게
아줌마에게는 세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가 같지만 세 아이는 모두 다릅니다. 생김새도 성격도. 한 배에서 함께 난 쌍둥이(첫째, 둘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줌마의 남편도 쌍둥이입니다. 게다가 일란성 쌍둥이. 정말 똑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르기도 합니다. 둘이 너무 잘
새해가 밝았습니다. 신년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작심삼일이 지났으니 벌써 신년 계획은 망해서 다른 계획을 또 세웠나요? 다른 계획이라도 세웠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냥 망했다고, 포기하셨나요? 제가 그랬습니다. 아줌마도 이십 대부터 신년 계획을 거창하게 세
아줌마는 결혼식과 장례식이 있으면 장례식을 간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어른들이 그렇다길래, 슬픈 일에 와주는 사람이 진짜 지인이라는 둥, 책에서든 지인에게서든 많이 들었고 귀에 인이 박혔다. 몇 번의 장례를 치른 지금, 아줌마는 알게 되었다
그날 그 밤.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일찍 잠이 든 밤, 아줌마는 어깨결림에 잘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홀로 보고 있었다. 비상계엄. ‘영화 채널을 보고 있었나?’ 리모컨을 잡았다. 모든 방송 채널에서 특별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일찍 잠든 남편을 깨워야 하
아줌마는 행복한 삶을 꿈꾸었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살면서 행복 지수가 더 높아지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도 행복한 삶을 어른이 되어서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상대적인 행복을 느낀다.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의식주가 해결되어도 불행함을 느낀다. 그래서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의 행복 지수는 낮다. 선진국보다 가난한 나라의 행복 지수가 높은 이유다. 물론 전쟁 중이거나 초 빈국은 제외다. 2020년대의 대한민국은 1970년대의 대한민국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두 시대의 행복 지수를 조사한다면 1970년대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 지수가 높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빈부격차가 생기고 미디어의 발달과 인터넷, 스마트폰의 개발은, 알려고 하지 않아도 굳이 알게 되는 다른 이들의 삶과 나를 더욱 비교하게 되고 나의 자존감도 행복 지수도 박살을 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갖고 싶었던 것을 구매하게 되었다고 하자. 몇 년을 기다리고 고대했던 소장의 기쁨은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감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 또한 그 행복의 깊이는 또 어떤가? 몇 년을 저축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소장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누가 더 고가의, 최신상을 구매한다면,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줬던 상품에 대한 애정은 금세 식는다. 그것이 어떤 물품이 되었든, 고가의 자동차든, 보석이든, 집이든 문제의 본질은 같다. 더 좋은 것과 비교하는 순간, 남과 비교하여 얻은, 상대적인 행복은 오히려 불행이 된다. 아줌마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이렇다. 내 인생에 찾아온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육아 지옥이던 시절, 단 서너 시간만이라도 잠 좀 자봤으면 하는 나날의 연속이지만, 새근새근 자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엄마라고 눈 맞춰주는 아이의 눈을 바라볼 때. 이제는 좀 컸다고 이부자리도 정리하고, 빨래도 정리하고, 나름의 역할을 해내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세 아이가 기분이 좋다고 꺼지지 않는 체력으로 계속 조잘대는 모습도, 온 식구가 막춤을 추는 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거실 구석구석을 차지한 모습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에 가장 많이 행복한 순간순간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오늘이지만,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지만, 연한 녹색을 띤 나뭇잎을 보게 될 때도 행복을 느끼고, 사계절을 창밖의 논을 바라보며 평온함을 느낄 때, 책에서 가슴을 울리는 한 줄의 문구에도 행복감이 밀려든다. 대체로 고요의 순간, 평온의 순간, 깨달음의 순간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행복감을 온몸으로 느낀다. 아줌마의 행복은 절대적이다. 비교 대상이 없다. 상대적인 행복의 기준은 ‘남과의 비교’다 비교는 물건을 구매할 때 가성비나 품질을 따질 때 주로 사용하는 생활의 지혜다. 그런데 그것을 행복에 갖다 대면 상대적인 행복이 생겨나고, 쉽게 파괴되는 순간의 행복감만 있을 뿐이다. 다른 이의 성공이나 뜻밖의 행운은 나의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진정한 축하보다는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된다. 절대적인 행복은 오롯이 나의 기준이다. 그래서 나의 행복이 다른 이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아줌마는 생각한다. 상대적인 행복은 진짜 행복이 아니라고! 진짜 행복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상대적인 행복은, 행복의 탈을 쓴 쾌락이 아닐까? 무엇보다 남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행복이라면 ‘노-땡큐’다. 아줌마는 오늘도 행복하다. 시끌벅적한 아침이 지나고 아줌마만의 고독이 시간이 찾아왔다. 밀린 일들을 해야 하지만, 커피 한 잔과 고요의 순간은 또 행복이다. 오늘은 또 어떤 순간의 행복들이 찾아올까?
겨울이다. 녹음이 가득한 논밭에 바람이 불면 연둣빛 파도가 장관이었던 여름이 지나고, 노오란 황금빛 물결에 감탄을 지어내던 가을이 지나서, 싹둑 잘려 나간, 추수가 끝난 논밭은 쌀쌀한 겨울바람에 휑하다. 논밭에 부모님의 삶이 있구나, 인간의 삶이 있구나 싶다. 예전에 유행했던 것 중에, 하나가 기억이 난다. “죽음 체험” 유서를 작성하기도 하고, 관속에 직접 들어 가보고,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 삶이 지치거나 힘든 사람도, 인생을 한번 되돌아보고 싶은 이도, 부모와 자식이 함께 서로의 장례식을 옆에서 지켜보기도 하고…. 그래서 당시에 모든 방송사에서 내가 죽을 때 묘비명에 어떤 글귀가 쓰여 있으면 좋을까 하는 관련된 프로그램을 다루기도 했다. 아줌마도 당시에 내 묘비명에 쓰이면 좋을 말을 한참이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 고민했던 그 문구처럼 살려고 지금까지 노력하며 살아왔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건강 검진을 했다. 마흔이 되면 자주 아픈 곳이 한 군데 생기고, 쉰이 되면 자주 아픈 곳이 여러 군데 생긴다는데, 몸소 경험하고 있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기계로 치면 50년을 썼는데 여기저기 탈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신기한 일이려니, 자연스레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다. 그래서 운동도 하고, 몸을 잘 관리하려 나름의 노력도 한다. 몸은 그렇지만 정신은 어떤가? 시간이 이만큼 흘렀으니 아줌마는 기성세대, 중장년층이다. 아직도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때의 그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대학 새내기 시절의 풋풋함과 열정이 가슴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있는데, ‘라떼는~’을 말하지 않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여기저기서 많이 느낀다. 이런 것도 자연스레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런데 아무리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도, 인생의 마지막 장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받아들인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별이다. 부모님과의 이별이다. 올해 초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아버지를 보냈다. 게다가 양가 어머님이 모두 편찮으시다. 시간이 지나면 양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결혼 초부터 인지했고,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양가 부모님을 자주 찾아뵈려 노력했다. 결혼 15년이 지나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찮으신 두 어머님을 뵈면서 아줌마는 여전히 어찌할 줄 모르겠다. 어머니 앞에서는 철없는 막내딸, 막내며느리로 지내다 오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면 억장이 무너진다. 뇌출혈로 쓰러진 엄마가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아무런 신체 반응이 없을 때도 아줌마는 엄마가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의지가 됐다. 다행히 많이 좋아지셨지만, 여전히 병원에 계시는 어머니.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아줌마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결혼하면서 나에게 생긴 또 한 분의 어머니도 편찮으시다. 그 몸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이 온다고 하면 엄마 손맛으로 담근 각종 반찬을 준비하신다. 집에 갈 때 가져가라고. 별 특이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맛이 좋은 것은, 어머님이 음식을 만드실 때 좋은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만드셔서 그런 것 같다는 형님의 말이 기억난다. 두 분 다 녹록하지 않은 형편에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분들이다. 막내딸, 막내아들에게는 강한 어머니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투병 생활로 살이 빠지시고 걷지 못하시고, 강한 약 때문에 고통스러워 우시고, 혼자 있는 순간에 ‘엄마’를 부르며 홀로 아파하시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을 때 아줌마는 또 무너졌다. 아줌마는 또 어머니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겠지만, 여전히 어머님이 안타깝고, 두 어머님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까, 두렵고 무섭다. 두렵고 무서운 나날이지만, 그런데도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주변에 선행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미 늦었다고 열변을 토하며 강의하는 엄마들도 있다. 아줌마는 그런 엄마들에게 아이가 학교 수업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갖는지 아는지 묻고 싶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학원에 다닌다. 몸으로 놀 시간도 친구도 없다. 학원과 학원을 이동할 때 혼자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학교는 심심하다. 선행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선생님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학교가 재미없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를 보면 한심스럽고 바보 같다. 선행으로 모든 교과목을 익힌 아이들에게 학교는 심심하고 지루한 장소이고 고문의 시간일 뿐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선행이 끝나면 그다음 학년의 선행을 또 한다. 그렇게 학교는 점점 더 지루한 고문관이 되어간다. 그 시간에 복습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엄마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엄마가 아침 9시부터 저녁 3시까지 주 5일간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구구단 등 이미 내가 아는 것들에 관한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수업 시간에는 딴짓을 못 하고 꼼짝없이 앉아서 무조건 들어야 한다면 하루라도 재미가 있을까? 그런 과정이 일주일, 한 달, 일 년, 이 년이라면…, 엄마는 제정신으로 그 시간을 오롯이 보낼 수 있을까? 특히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는 선행을 아줌마가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또한 선행의 의미를 많은 부모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선행을, 무엇을 했냐고 물어보면 과목을 이야기하고, 어디까지 무엇을 했냐고 재차 물어보면, 몇 학년 것까지 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가슴이 답답하다. 아줌마의 답답함이 이해되지 않는가? 수학을 예로 들어보자. 초등 수학은 중학 수학의 단원을 쪼개서 학년별로 구분해놨다. 중학교 때부터는 학년별로 모든 단원을 다 익혀야 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단계가 높아진다. 일차방정식, 이차방정식, 고차방정식, 이렇게. 예를 들어 한 학생이 집합부터 통계까지 모든 단원을 다 익혔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어떤 단원은 재미있고 어떤 단원은 어려워한다. 물론 모두 다 잘하고 모두 다 재밌을 수도 있지만, 보통의 아이들은 호불호 단원이 생긴다. 수학을 엄청 좋아했던 아줌마도 싫어하는 단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무시하고 모든 단원을 2~3년 선행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을 그르치는 길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일차방정식을 좋아하면 한두 단계를 넘어 이차방정식, 삼차방정식까지 선행하는 것은, 아이의 호기심과 성장에 불을 넣는 것이다. 그런데 함수를 싫어해서 일차함수도 겨우겨우 하는 아이에게 한 단계 넘어선 이차함수까지 선행하는 것은 아이의 호기심과 성장 동력을 끊어버리는 게 된다. 올바른 선행은 아이의 학습 능력과 호기심이 결합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서울에서 많은 서울 내 대학 입학생들이 나온다는 것은 사실이다. 타지역 대비 수도권이나 도심권에서 지방보다 높은 비율로 신입생을 배출하지만, 그 원인은 선행이 아니다. 초등학교 의예과반이 생겼다느니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보고 그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다시 학원을 보낸다는, 그런 뉴스에 나오는 선행을 장려한 학원가에서 서울 내 대학이나 의예과에 더 많은 학생을 입학시켰다는 통계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이에게 무분별한 선행을 강요한다. 누구를 위한 선행인가? 무엇을 위한 선행인가? 제대로 된 교육철학을 갖고서 아이를 대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자문해봐라. 다른 아이들도 다 해서, 우리 아이만 뒤처질까 봐한다고 답한다면, 다시 생각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