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방송에서 조선통감부(조선총독부의 전신) 2대 통감이던 소네 아라스케(1849~1910)가 석굴암 앞에 서 있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소네 아라스케가)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한국의 문화재들을) 여기저기 훼손했다”며 “콘크리 트와 시멘트를 발라서 우리의 석굴암을 완전히 훼손시켰다”고 했다. 또 “석굴암은 수학과 기하학, 과학의 완벽한 결정체”라며 “(석굴암 훼손엔) 일본의 질투도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방송이 나간 뒤 포털 사이트와 소셜 미디어엔 “방송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질투도 정도껏 해야지 일본 너무하다”는 등의 글 수백 건이 올라왔다.
하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그의 주장이 명백히 틀린 사실에 근거한 역사 왜곡이라는 반론이 바로 나왔다. 일본이 석굴암에 콘크리트를 바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석굴암을 훼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수공사를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제는 1912~1923년 사이 총 세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라는 명목으로 석굴암을 조사하고 공사를 벌였다. 설씨는 마치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 훼손을 주도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실제 공사는 아라스케가 죽고 조선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뀐 뒤인 1912년 데라우치 총독이 시작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한국사 강사는 해당 방송에서 “일제가 손을 대기 전 석굴암은 1천년 이상 곰팡이 하나 안 슬었을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됐다”고 주장했지만, 문헌 기록에 따르면 이 또한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왜곡된 주장인 걸까.
일제강점기 세 차례 보수공사
1912년 당시 석굴암 조사 보고서를 보면 이미 석굴암 천장의 3분의 1 가까이가 파손돼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 흙이 쏟아져 본존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총 3차례 보수공사를 벌였다. 그 중에서도 1913년부터 1915년까지의 1차 공사는 석실 본체까지 전면 해체했다가 재조립하는 수준의 대규모 공사였다. 붕괴의 날만 기다리던 석굴암을 역설적이게도 이 땅을 침략한 외세가 되살려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몇 가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문제가 계속 발생했고 일제는 2차, 3차 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차 공사는 1912년 겨울 데라우치 총독의 방문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동양문명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일제의 입장에서 동양 최고의 불교유적이 망실되는 것은 제국의 수치였고, 조선 병탄의 최상급 전리품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제국의 큰 손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석굴암의 수난은 시작된다. 총독부는 1913년 봄 기초적인 학술조사를 거친 뒤 공사에 들어갔다. 당시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해 10월부터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본 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1915년 9월에 공사를 끝냈다. 일제는 이때 석벽을 보강하기 위해 석벽 주위에 시멘트를 석 자나 발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토를 하고 잔디를 입힌 뒤 드문드문 나무를 심었다.
준공 이후 석굴암엔 국내는 물론 일본 본토에서까지 관광객이 밀려들었다. 일제는 관광객들에게 천하의 보물인 석굴암의 가치조차 몰랐고 무너져가는데도 손도 쓰지 못한 조선 조정의 무능과 부패를 떠올리도록 하는 반면, 일본제국의 근대적 건축술을 과시했다.
1차 공사 후 후유증 심각
잘못된 의도와 잘못된 공사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가장 큰 패착은 콘크리트 시공이었다. 당시 시멘트는 최신의 건축소재로 각광을 받고 있었고, 일제는 자국 내에서도 일반건축물은 물론 고적 보존에 시멘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결국 일제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석굴암 복원에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석굴암 복원 공사 이후 콘크리트 층은 봉토층을 파고든 빗물을 빨아들였다. 이 물기는 시멘트의 독성과 결합해 석실 내부의 석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조각상들은 계절과 상관없이 곰팡이와 이끼가 서식하면서 시커멓게 변해갔다. 당시로서는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석 벽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몰랐다.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는 당장에는 가장 단단하고 시공이 편리한 공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화강석과는 상극이었다. 현재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한 경우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후 2~3년 동안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총독부를 향한 비난이 들끓었다. 일본 지식인들도 공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려던 총독부의 위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일제는 다시 봉토를 제거한 뒤 콘크리트 돔 표면에 석회 모르탈과 점토층을 만들고, 돔형 지붕 바깥으로 물이 빠지도록 시공을 한 뒤 다시 지붕을 덮었다. 1917년 2차 공사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누수현상과 습기, 바닥 침수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일제는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 방수를 위한 대대적인 재보수공사에 나서게 된다. 3차 공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일제는 1927년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해방 후에도 1947년, 1953년, 1957년에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다. 당시는 불상을 몇 년마다 닦아주는 것을 최상의 보존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의 가는 입자가 떨어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면서 중단됐다.
1960년대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했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일본인들이 만든 콘크리트벽 배후로 약 1m 가량의 공간을 두고 또다시 콘크리트로 된 돔을 씌우고 그 위에 미봉책으로 두터운 봉토(封土)를 덮었다. 더구나 개방돼야 할 석굴 전면에 목조 암자를 설치하면서 광창과 소감실 창구를 모두 없애버리고, 지하수 배수시설을 설치했다. 그러나 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습기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자 1966년 당국에서는 공기냉각장치를 설치해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석굴암 보수공사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고의 훼손 주장 근거 부족, 일제는 선전 목적 분명
물론 일제가 보수공사를 하며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쓰는 바람에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차는 등 상태가 나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역시 당시 문화재 보존 기술의 발달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었다는 게 한국 학계의 중론이다. 대통령령에 따라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일제의 보수공사에 대해 “당시 새로운 재료와 기법으로 등장한 시멘트의 효능을 믿고 사용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정부 때인 1963년 석굴암 연구의 대가였던 고(故) 황수영 동국대 교수 주도로 석굴암 원형을 복원하는 공사를 벌였지만, 이 역시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었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이때 석굴암 앞에 목조 건물을 세웠는데, 이게 원형에서 벗어난 것일 뿐 아니라 습기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단 지적이다.
또 당시 공사에서는 석굴암 입구 양쪽 팔부신중(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 가운데 맨 앞 한 쌍만 90도 꺾여 있는 것을 바로 폈다. 일제가 이걸 꺾었기 때문에 바로잡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7년 성균관대 박물관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일제가 첫 보수공사를 하기 전에 팔부신중의 맨 앞 한 쌍이 90도로 꺾여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신라시대 석굴암의 원형에 대해선 정확한 사료가 없을 뿐 아니라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했던 조선시대를 거치며 석굴암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조차 추측할 수 없기에, 뚜렷한 근거 없이 일제가 이를 고의로 훼손했다는 주장을 펴는 건 괜한 반일 감정만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다만, 일제가 석굴암 보수공사를 통해 조선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면서 문명화된 일본이 조선의 옛 영화를 되찾아 줬음을 과시한 점만은 분명하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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