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36년 경주역을 사정동에서 성동동으로 이전했다. 대구에서 울산까지 이어졌던 협궤노선 경동선을 광궤로 바꾼데 따른 것이다.
이로 인해 경주 시가지 재편이 이뤄졌다. 무엇보다 성동동에 들어선 새 경주역은 일제의 행정기관이 밀집된 중심지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일제의 행정기관은 성벽이 허물어지기 전 경주읍성 내 공간에 자리 잡고 있었고 새 경주역은 읍성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 들어선 것이다. 이처럼 경주역 이전은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새 경주역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서 상권이 역을 중심으로 이동하고 경주시가지는 확대되기 시작한다. 지금 경주시가지 형태도 일제가 짜놓은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경주역, 성동동 시대 열려
성동동에 들어선 새 경주역 부지는 역 개설당시부터 그 터가 상당히 넓었다. 그 터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남고루의 남북 축을 중심으로 서편의 너른 땅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남고루는 홍수로 북천이 범람할 경우 경주시가지로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쌓은 둑으로, 지금은 집이 들어서고 길이 나면서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당시 경주역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사실은 지금 남아있는 급수탑과 경주역사 사이의 거리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역내에는 차량 정비를 위한 기관고, 보선구 등 부속건물과 여러 개의 선로가 깔렸다.
경주역은 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가장 너른 땅을 차지하고 우뚝 들어섰다. 지금도 경주역 광장에 서서 서천 방향으로 바라보면 화랑로는 경사가 약한 내리막길이다. 언덕에 세워진 경주역사는 일제가 경주에 새로 세운 상징물이자 새 관문의 역할을 했다. 당시 경주에서는 경주역사만큼 큰 건물이 없었다고 한다.
경주역사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737m²면적에 공사비 5만4000엔을 들여 건립했다고 한다. 일제는 서양건축기술을 설계에 반영했다. 역사는 단층건물임에도 상당히 높았고, 외관은 신라의 건축양식을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너른 기와지붕이 그럴싸하지만 용마루의 치미가 지붕에 비해 매우 작고, 지붕도 한옥의 곡선미가 없이 직선으로 뻗어내렸다는 점에서 한옥을 흉내 낸 ‘일본식 한옥’이었다는 평가도 따른다.
역사 바로 앞에 차를 댈 수 있도록 현관을 지붕 앞으로 내고, 벽체는 시멘트와 벽돌로 쌓고 인조석을 붙였으며, 석회로 마감했다. 기와는 함경도 회령의 도자기 가마에서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을 썼다고 한다. 당시 일제는 ‘역사적 배경을 지닌 지역의 역사는 전통건축양식을 적용한다’는 방침으로 수원·전주·남원·경주·불국사역 등을 건립할 때도 이를 반영하였다.
이렇게 조선 양식이 가미된 역사의 설립은 조선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이었지만, 나중에는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상징물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전통 건축양식 적용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시가지 확장 계기… 성동시장도 이 시기 형성
경주시가지의 변화는 크게 세 차례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제강점기 초기로 신장로와 협궤철도가 개설되는 1910년대다. 두 번째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일제가 읍내 시가지를 정비하던 시기다. 세 번째는 1936년 경주역이 성동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일제강점기 말기까지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시기에 지금의 경주시가지 모습이 갖춰지게 된다.
경주역이 1918년 사정동에 문을 열고 18년간 영업을 하는 동안 역 주변에 상가가 형성되는 등 역은 시가지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 성동동의 새 경주역은 상권을 또다시 이동시키고 시가지 확대를 가져왔다. 경주의 주 출입구가 시가지 남쪽에서 동쪽으로 바뀌면서 교통망과 유통망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광궤철도 개성을 통해 관광객이 늘어나고 생산물 이동 등이 이뤄지면서 성동동 역사는 경주시가지 변화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
경주역 남쪽 지역에는 보선구와 역 직원의 관사와 합숙소가 생겼고, 북쪽에는 기관고와 화물을 취급하는 곳이 생겼다. 보선구는 철로와 노반 등을 다루는 부서로 주로 조선인이 맡았으며, 일본인은 열차를 정비하고 점검하는 기관고와 일반 역무를 맡았다.
역 주변에는 철도화물운송에 따른 화물운송 구역이 만들어지고 많은 일자리가 생겼다. 각종 가게와 음식점도 속속 생겨났다.
기록에 따르면 경주역 뒤쪽으로 야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이 있었는데, 여기서 조선인 중심인 보선구 야구부와 일본인 중심인 경주우체국 야구부 간 야구경기가 펼쳐지곤 했었다고 한다. 또, 규조토 공장도 인근에 생겨 곤로를 만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시가지 도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성동동 역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지금의 화랑로는 작은 길에 불과했다. 경주역이 들어서기 전 이 길은 경주경찰서 앞에 이르면 막혔다고 한다. 지금처럼 ‘법원사거리’가 아니라 ‘삼거리’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중앙시장 방향으로 길이 트인 것은 경주역 개통에 따라 일제가 도로를 확장하면서 이뤄졌다.
성동시장도 성동동 역사가 들어서며 형성된 것이다. 일제의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집경전 앞길에서 열렸던 경주 큰장과 난전들은 읍성 밖, 지금의 중앙상가 쪽으로 쫓겨났다. 쫓겨난 상인 일부와 난전꾼들은 새 역이 생기자 역 근처로 옮겨가 시장판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성동시장이다.
현재 경주역 앞을 지나는 원화로는 포항과 울산을 잇는 주 통로로 변했으며, 경주역 앞 너른 밭에도 집이 하나 둘 들어서게 된다. 이처럼 성동동에 들어선 경주역은 시가지 변화와 인구, 경제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옛 경주역, 시민·관광객 품으로
성동동 경주역사는 지난 2021년 12월 중앙선·동해남부선이 이설되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경주시와 경주문화재단은 이곳을 새 단장해 지난 2022년 12월 ‘경주문화관1918’이란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름에는 1918년 개통한 경주역 역사를 기리고 주민에게 문화의 힘을 높이기 위한 문화플랫폼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담았다.
시와 재단은 이 문화관에 미술 전시공간을 만들고, △공유 사무실 △3D프린터 작업실 △촬영·녹음을 위한 스튜디오 △커뮤니티룸 등을 마련해 시민이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경주문화재단은 이곳에서 꾸준히 전시와 공연,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면서 시민과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