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는 1970년에 시작해 1973년 마무리되는데, 이 때는 일제강점기 총독부 공사의 남겨진 과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전체 회랑을 복원하고, 관음전이나 무설전, 비로전 등 당우 재건이 핵심이었다. 대석단 전면으로 넓은 마당을 확보하고 주변 조경에도 신경을 썼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불국사의 모습은 그때 결정된 것이다. 그 결과 불국사는 1995년 석굴암과 함께 문화·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얻는다.
1968년 대통령 경북 순시로 본격화
본격적인 복원공사의 출발은 1968년 대통령의 경북 순시 당시 청와대가 적극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다. 정부는 그 이듬해인 1969년 불국사복원위원회를 구성해 공사를 본격화했다.
같은 해 8월 7일 국내 언론사들은 ‘불국사 복원비 확보를 위해 기업인들이 1억5000만원을 시주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다. ‘굴지의 실업인 18명이 문공부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세종호텔에 모여 불국사 복원비 1억5000만원을 시주하기로 결의하고 5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각자의 시주액을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복원공사에 앞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1969년 8월부터 10월까지 3개월에 걸쳐 이뤄진 발굴조사에서 불국사 창건 이후 5차에 걸친 중건에서 가장 많은 변형을 가져온 조선시대 광해군~숙종 시기와 일제강점기(1923년)에 변모된 유구를 찾아냈다. 대웅전, 비로전, 관음전 주변은 완전히 복원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서남쪽 회랑은 절반밖에 확인하지 못했고 동북쪽 회랑은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복원계획의 설계가 마련됐다. 비로전 및 행랑, 해안문, 관음전 및 회랑, 육도문, 무설전, 우경루, 대웅전 회랑, 극락전 회랑, 우경루 석난간 등을 새로 짓고 연못인 구품연지를 파기로 했다. 문화공보부는 당초 재계 시주금 1억5000만원으로 완전 복원계획을 세웠으나 발굴조사 결과 그 범위가 늘어남에 따라 예산을 2억5000만원으로 늘렸다.
1970년 시작해 1973년 마무리
복원공사는 1970년 5월부터 시작됐다. 시공은 현대건설이 맡았다. ‘현대건설 60년사’는 당시 복원공사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준비단계인 토양처리공사부터 시작해 무설전, 비로전, 관음전 등의 복원공사와 대웅전 및 극락전 주위 회랑, 그리고 범영루 및 좌경루, 다음으로 일주문, 마지막으로 석축, 계단, 석난간 등의 순서로 공사를 진행했다. 무설전은 복원공사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건평이 96평, 초석상면으로부터 용마루끝까지의 높이가 31.8척이나 됐다. 대웅전의 회랑은 동서남북 회랑과 중랑으로 이뤄져 있었다. 여기서는 엔터시스 형태로 된 높이 9척의 기둥을 댔다. 주심도리(처마도리)는 주심장여를 세워 직접 대들보가 받도록 했다. 내부의 보 아래 받침인 보아지는 보편적으로 회랑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조선중기 이후의 양식으로 시공했다. 일주문의 경우 높이 11척의 기둥 4개가 일렬로 세워져 상부하중을 받도록 시공했다. 따라서 횡력에 약하게 되므로, 이 횡력을 억제하기 위해 초석과 기둥이 그랭이 수법에 의해 접합되도록 시공했다.’
문화재 복원공사는 발굴과 고증 과정을 거쳐야 하고 공법도 전통방식을 따라야 하는 관계로 공사가 오래 걸린다. 건축물의 경우 대형 소나무 확보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를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건조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3년가량 소요된다. 하지만 1970년 당시는 문화재 복원도 ‘빨리빨리’가 대세였다. 3개월 만에 발굴조사를 끝냈고 공사기간도 만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2008년 방화로 붕괴된 숭례문의 경우 단일 건축물인데도 복원에 5년 정도 소요된 점을 감안하면 불국사 복원공사는 공사기간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현대건설 측도 ‘현대건설 60년사’에서 공기를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기록했다.
‘지름 1.5m에 길이 10m 정도의 대형원목을 구입하기 위해 3개월간 전국 산판을 뒤졌다. 경북 호산과 강원 양양지방의 깊은 산골에서 겨우 구했다. 청운교와 백운교의 난간으로 사용될 직경 240㎝, 길이 8m의 대형 석재는 전국의 채석장을 뒤진 끝에 의정부 덕정에서 채취했다. 채취한 목재와 석재를 운반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설치하는 것은 더 큰 어려움이었다. 고건축이라 현대식 장비를 사용하는데 제약이 따랐기 때문이다. 현장에 크레인과 같은 중장비가 설치돼 있지 않아 윈치를 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손이 필요했다.’
고증 어려워 ‘상상력의 산물’ 비판
불국사 복원공사는 1972년 11월 몇몇 주변공사를 제외한 주요 건축물이 마무리됐다. 당초 신라시대 창건 때의 모습을 살리려던 계획은 수정됐다. 현존하는 신라시대 건축물이 없던 관계로 고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아있던 대웅전과 극락전이 조선중기의 양식인 관계로 전체의 어울림을 위해 신축한 구조물도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불국사 주지는 “재정적 문제 못지않게 복원설계에 대한 각계 전문가들의 이견을 통합 조정하는데 힘들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당시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장은 “옛 모습을 되찾은 불국사는 국가적으로 문화재정비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언론들은 복원공사가 현대적 시스템에 따라 진행되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문제점이라고 꼬집었다. 지금까지도 불국사의 상당수 건축물은 1970년대 공사 당시 장인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양식을 짜내어 지은, 고증되지 않은 근현대 건축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따라다닌다.
현재 남아있는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여러 차례 고증·설계 관련 회의를 열었으나, 터 외에는 신라 건축양식을 확인할 근거 자료가 전무했으며, 결국 기존 사찰의 경관 등을 고려해 고려 중기부터 조선 중기 양식까지 건축양식을 뒤섞을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들이 보인다. 당시 기술력이나 학계의 연구수준 등을 고려하면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복원공사에는 총 3억7000만원이 들었다. 시주금만으로 충당하려던 계획은 애초부터 틀어졌다. 시주를 약정한 18명의 경제인 중 2명이 빠지면서 시주금은 1억3500만원에 그쳤다. 나머지는 정부예산 1억6200만원과 경북도와 경주시 자금 1300만원 등으로 충당했다.
준공식은 1973년 7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박 대통령은 불이문 앞에서 자신이 쓴 토함산 불국사란 현판을 제막했다.
불국사 곳곳에는 1970년대 초의 각종 생활기록들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현대건설 60년사’에 따르면, 복원공사 때 기능공들이 도편수, 감독관 및 작업인들의 뒷얘기거리나 막걸리 한되의 가격, 쌀 한가마니의 가격 등 다양한 생활 자료를 종이에 적어 목재 사이사이 끼워넣었다고 한다. 아주 먼 훗날 불국사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견될 이들 자료도 사료로서 가치를 갖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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