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개항한 경주 감포항은 우리나라 근현대 어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감포항 일대는 일제강점기 번성했던 어항유적이 있고, 감포읍 감포제일교회 주변엔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적산(敵産)가옥들이 다수 남아있어 우리나라 근대 생활사를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적산가옥은 2층 목조 가옥으로 낮은 간판을 달고 감포읍민의 생의 터전으로 듬성듬성 남아있다.
일본인들이 눈독 들인 황금어장
일제강점기 감포 지역은 경주군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었다. 1931년 말 기준으로 경주읍의 인구가 1만7432명인데 비해 양남·양북면을 합해 3만801명(일본인 958명 포함)이 살았다. 어민들은 구룡포, 울산 쪽 바다로 나가 조업을 하고 그 지역과 거래할 정도로 감포는 경주읍에서 독립적이면서도 고립된 지역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행정구역이 경주군이었기 때문에 어민들은 어물과 건어물 등을 경주시장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감포 앞바다는 수심이 깊고 도처에 작은 만을 이루고 해안 경사가 완만한 데다 한류 난류가 교차하는 곳이라 근해와 연안이 모두 천혜의 어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등어, 전갱이, 삼치, 가자미, 대구, 방어, 상어, 정어리, 미역, 돌김, 전복 등 해산물과 어종 또한 다양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며 일본은 그런 감포 바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대한제국이 유명무실해져 가는 사이 ‘천혜의 어장’을 노리며 일본인 어민들은 1905년쯤부터 앞다퉈 감포로 왔다.
당시 감포 어민들의 어구나 어법은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앞바다에서 잡아 올리는 어획량이라고 해봐야 겨우 밥상에 올리고 더 잡으면 내다 팔 정도였다. 반면, 일본 어민들은 달랐다. 동력선에, 근대 어구로 끌어올리는 그물마다 만선을 이뤘다. 가난했던 감포 어민들은 값싼 품삯을 받고 일본인 선주의 배를 타고 일했다.
1931년 말 기준으로 감포 지역 어선 수는 426척이었다. 이 가운데 범선이나 조선형 어선은 10여 척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일본형이거나 발동기선이었다고 한다.
자본은 물론, 사업의 주체도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이 시기 감포 지역에서 어업이나 제염업에 종사한 사람은 모두 1922명으로, 이 가운데 일본인은 592명에 불과했다. 많은 수의 감포민들은 일본인 선주나 가공업자에 고용돼 노동력을 공급했다.
일본인 자본가의 금고가 넘치고 일본인 선주들의 돈주머니가 두둑해지면서 요릿집이 차려지는 등 감포에는 유흥 분위기가 생겼다. 그들은 감포에서 귀족처럼 살았고, 근대 문물과 문화를 들여와 흥청거리면서 즐겼다. 일본인 자본은 감포 길거리를 일본식 건물로 채워갔고 전망 좋은 곳에 대저택을 짓기도 했다. 1920년대 초엔 경주읍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전깃불이 켜지고 전화가 설치됐을 정도였다.
1925년에는 현대 항구 개설의 일환으로 방파제(현 남방파제)가 준공됐다. 조선총독부 우정국에서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감포 송대끝’이라 명명하고 기념우표 및 엽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들과는 반대로 감포민들의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일본인 사업주의 고용어부나 공장 노동자로 일했으나 대부분 임금이 열악했다. 일본인 사업주들은 감포민들에게 부업장려 등을 명목으로 일거리를 더 만들었지만, 견디다 못한 감포민들은 북간도로 떠나거나 일본으로 밀항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삶의 흔적 고스란히
경주엔 ‘감포 깍지길’이란 이름의 걷기길이 있다. 감포항을 중심으로 해안과 마을 등을 잇는 길이다. 이 가운데 4구간 ‘해국길’은 일제강점기 흔적을 만나볼 수 있는 길이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인 건물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옛 골목의 정취를 간직한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600m 정도로 길지 않지만, 이름처럼 벽마다 그려진 해국을 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하다.
이곳 일대는 일제강점기 이주해온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당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고 한다. 일본 어민이 살던 ‘다물은집’을 비롯해 옛 창고 건물과 목욕탕 건물 등 적산가옥 여러 채가 골목길 곳곳에 남아 있다.
골목은 감포항 앞에 있는 감포공설시장 건너편에서 시작한다. 벽에 조그만 간판이 달렸는데, 주변 상인에게 물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해국 골목, 해국 계단, 옛 건물 지하 창고, 다물은집, 한천탕, 우물샘, 소나무집 순으로 걸으면 된다. 골목은 밖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좁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너비에, 몸을 옆으로 돌려야 통과할 수 있는 곳도 많다. 길바닥에는 거친 시멘트를 발랐다. 골목 양옆으로 작은 집들이 있는데,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설 법한 대문이 달렸고 창문은 도화지만 하다.
골목을 따라가는 벽마다 해국이 그려졌다. 색깔이며 모양이 전부 다르다. 하얀 해국도 있고, 보랏빛을 뽐내는 해국도 있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색깔이 바랜 해국도 눈에 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바닥에 커다란 딱정벌레가 그려진 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난 비탈길을 오르면 교회와 놀이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감포항과 동해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커다란 해국이 그려진 계단이다. 해국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이다. 여행객은 이곳에서 저마다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긴다.
계단 위쪽으로 올라가면 감포제일교회가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자리로, 교회 옆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계단이 있는 곳을 지나 골목을 따라가면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건물이 보인다. 갈색 문을 단 건물 벽면엔 ‘옛 건물 지하 창고’라는 안내판이 있다. 대피소 겸 지하 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2~3분 거리에 ‘다물은집’이라는 일본식 가옥이 있다. 일본 어민이 촌락을 이룬 흔적이다. 해국길을 걷다 보면 옛 일본 가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다물은집 건너편으론 우뚝 솟은 굴뚝이 시선을 붙잡는 옛 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감포 지역 최초의 목욕탕 건물이다. 이 건물은 한동안 비워져 있다가 5년 전쯤 복합문화공간 ‘1925 감포’로 거듭났다.
건물 옆으로 난 길을 따라 100여 m 가면 오래된 우물 터가 나온다. 두레박이 있고 우물 속에 물도 찰랑이지만, 마실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이라고 한다.
해국길 건너편 감포항에서 북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면 송대말 등대가 있다. 송대말은 ‘소나무가 우거진 대의 끝부분’이라는 뜻. 이름처럼 절벽 끝에 용틀임하듯 휜 소나무들이 있고, 그 사이로 푸른 동해가 흰 파도를 일으키며 넘실댄다. 소나무 숲을 지나 절벽 가까이 내려가면 새하얀 등대 2기가 보인다. 왼쪽관리소 건물 위에 있는 것은 감은사지삼층석탑을 본떠 지은 새 등대고, 그 옆에 1955년 무인 등대로 만들어진 옛 등대가 있다. 등대 아래로 검은 갯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100년 전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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