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 첫 회에서 소개했던 화랑수련원(옛 야마구치병원 건물) 남쪽 벽면을 끼고 나있는 골목을 따라 50m쯤 가다보면 오른편에 고풍스런 건물 하나가 보인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건물의 모양새가 어색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채게 된다. 지붕 한쪽은 팔작지붕인데 다른 쪽은 맞배지붕 형식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경주부 관청 건물 중 하나였던 객사(客舍) ‘동경관’(東京館)의 일부다.
일반 백성 출입 제한된 권위 있는 공간
조선시대 경주읍성 안에는 경주부윤이 행정업무를 보던 동헌과 그 부속건물 외에도 집경전과 동경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이들 두 곳은 일반 백성들이 오갈 수 있었던 여느 관청건물과는 달리, 일반인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특히 집경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조정에서 참봉을 두고 관리하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동경관은 신성한 구역은 아니지만 재위 중인 임금이 경주에도 있음을 알리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신 곳으로 일반 백성의 출입이 제한됐다. ‘동경관’이란 이름은 당호(堂號)로, ‘경주객사’라고도 불렀다. 객사는 공무나 신분 높은 인물이 경주에 왔을 때 묵었던 곳으로, 전국의 주요 관청에는 객사가 딸려 있었다.
동경관의 통상적인 기능은 객사였으나, 왕을 상징하는 전패와 중국 황제를 나타내는 궐패에 대한 의식을 올리는 일도 동경관에서 행해졌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경주 부윤은 예를 갖춰 전패와 궐패 앞에서 고을의 한 달 계획과 성과를 말하고, 자신은 어떻게 경주를 다스리겠다고 다짐하는 행사를 했다. 이밖에도 동경관에서는 왜(倭)로 가는 사신들을 위한 영송연회(迎送宴會)가 빈번하게 치러졌다.
원래 동경관은 건물 3동이 하나로 길게 이어진 형태였다. 지붕이 가장 높은 가운데 건물은 ‘정청’으로 전패와 궐패를 모신 공간이다. 이 건물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서헌’과 ‘동헌’이 자리 잡았다.
조선 초기 동경관은 규모가 훨씬 컸다. 1552년(명종 7) 큰 불이 나 의풍루(倚風樓)와 대청 등 100여 칸이 불탔고, 1555년 경주부윤이 100여 칸의 객사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건물 전체가 소실됐고, 이후 중수가 거듭됐지만 규모가 줄어든 채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때까지도 건재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동경관은 정청, 동헌, 서헌이 모두 온전한 모습이었다. 다만 용도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1920년 경주고적보존회가 설립되고 신라유물을 모을 때 동경관 마당을 이용했고, 유물 전시장소로도 활용했다. 경주군청이 바로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비좁은 군청을 대신해 온갖 회의와 회합장소로도 쓰였다. 특히, 일제는 필요에 따라 동경관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회를 열고 통치여론을 만들어 나갔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의 것이라고 마구 허물지는 않았고 필요할 때엔 언제든 활용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예산을 들여 동경관 보존 공사도 했다.
당시 동경관 앞길에는 큰 시장이 섰는데, 동경관의 너른 마당은 수많은 공출품을 거둬들이고 쌓아두는 행정집행 공간이 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동경관의 본래 기능과 권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런 수난 속에서도 광복 이후까지 형태만은 온전하게 남아있던 동경관은 6·25 전쟁 때 또 다시 시련을 겪게 된다. 1950년 가을 경주로 내려온 수많은 피난민들이 추위를 피해 동경관으로 몰려들었고, 동경관 문짝과 마룻바닥을 뜯어 불 피우는 상황이 빚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선비가 동경관으로 달려와 “애국자들을 군청에 가둬넣던 경찰서는 왜 안 부수는가. 공출을 거둬가던 군청은 왜 놔두느냐. 정 필요하다면 날 죽이고 동경관을 뜯어 가라”며 사람들을 막았고, 그 결과 동경관은 완전히 훼손될 위기를 면했다고 한다.
큰비에 무너지고 서헌 건물만 남아
하지만 그 후에도 동경관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결국 1957년 큰비가 내리면서 정청이 무너졌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경향신문 1957년 11월 26일 자 ‘문화재 보호에 맹점’이라는 기사에 남아있다. “후손에 이르기까지 길이 보존되어야할 고적명승지 및 천연기념물 등 유적이 제대로 보수조차 되지 못하고 폐퇴일로에 놓여 있어 문화재 보호에 맹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전국 588개 지정문화재 중 4할에 해당하는 217개에 이르는 문화재가 보수되지 않고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략) 경주객사 동경관을 보수하지 않아 본관이 완전히 도괴되어 버렸다” 또, 같은 날 동아일보에는 한 경주시민이 “애호니 보호니 소리는 그만하고, 쓰러진 기둥이나 세워 달라”는 내용의 독자투고가 실렸다. 당시 문화재 관리가 얼마나 안 됐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 시기 대한민국 정부는 동경관을 보수할 여력이 없었다. 광복 5년 뒤 벌어진 6·25전쟁은 온 국토를 폐허로 만들어버렸고 국민들에게 가난을 안겼다. 문화재 보수나 보호에까지 쓸 돈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은 동경관 정청이 무너진 이듬해인 1958년 8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다. “이조 태종 때 건립해 신라 이래의 건국열성과 충신열사들을 배향해 온 경주 동경관이 지난해 풍우에 일부 퇴락한 그 자리에 경주교육구(현 경주교육청)에서 청사를 짓는다 하여, 경주 사림(士林) 700여명이 문교당국에 완전 중수를 호소. 삼한통합 영웅은 가고 천재흥망 세월이 흘렀다. 용쟁호투는 꿈이 되었고 구름은 흩어져 모을 길 없다. 약동하는 산 역사 위에다가 교육구를 지어 경주에는 그밖에 촌토가 없던가” 경주의 상징적 공간인 동경관 자리에 경주교육청이 청사를 짓겠다고 나서자 ‘교육청을 지을 땅이 경주에서 그곳밖에 없는가’라며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이 같은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경관 자리에 청사를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청사 건물은 1995년 경주교육지원청이 동천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됐고, 이후에는 경주지역 교육계 인사들의 단체인 경주교육삼락회가 사용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동경관은 서헌으로 불리던 건물이다. 이 건물 지붕이 단면으로 잘려나간 모습(한쪽은 팔작지붕인데 다른 쪽은 맞배지붕 형식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경주교육청을 지을 당시 무너진 정청과 동헌을 정리하고, 교육청 자리와 맞물려 있던 서헌을 동쪽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