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대학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어가는 그 와중에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그 죄과를 씻기 위한 방법으로 삼성 차원에서는 한국비료공장을 정부에 기증하고 이병철 회장 개인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구대학을 헌납하
수많은 여행객들이 남산의 삼릉·금오봉·고위봉 구간을 통해 노천 박물관이라 불리는 남산을 탐방한다. 특히 서남산 방향으로 포석정을 지나 삼릉에서 좌측으로 금오산을 향해 오르면 상선암과 마애불 그리고 바둑바위를 지나 정상에 이르는데, 바둑바위에 오르면 북쪽으로 경주 시
아줌마는 엄마가 되면서, 뉴스 보기가 참 무섭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보고 싶지 않아도 메인화면에 뜬 자극적인 뉴스는 자동으로 그 내용이 각인된다. 자극적인 뉴스일수록 여러 매체를 통해 번갈아 가면서 나오니,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1980년대만 하더라도 경주로 여행을 온 많은 사람들은 경주역에 첫발을 내렸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도 경주역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이런 이유에서 상당수 대한민국 국민들의 추억 한 자락이 경주역에 머문다. 하지만 추억 속 경주역은 이제 ‘경주문화관1918’로 이름이
그렇다면 청구대학은 어떤 대학일까? 이 글을 들어가기 앞서 이번 원고의 내용은 최염 선생의 회고를 기반으로 당시 신문기사와 청구대학에 대해 기록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무위키’ 등 자료 및 한겨레 신문, 오마이뉴스 등에 실린 최해청 선생의 아들 최찬식 선생의 인터
폰, 생태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손바닥 안의 작은 문명 어딜 가나 손바닥 안의 작은 액정에 빠진 장면을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찻집에서 만난 친구와 연인들도 거기에 눈은 거기에 두고 대화를 한다. 기차와 버스 안, 찻집 어디서나 나와 너, 나와 주변 생명체의 관계
중학생이 있는 가정의 냉장고에는 우유나 유제품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당연하다. 자식의 건강을 고려한 엄마의 선택이겠다. 따라서 집 밖에서 본인 용돈으로 사 마시는 건, 어쩌면 엄마가 싫어할 만한, 탄산음료다. 그것도 빨갛고 노란 착향탄산음료라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박목월(1915~1978) 시인의 시비는 시인의 명성을 말해주듯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다. 지금도 세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고향 경주에는 모량리 목월 생가터, 모교인 건천초등학교 교정, 황성공원, 보문관광단지 목월공원, 보문호수 둘레길에서 시비를 찾아볼 수 있
광복절이 열흘 지난 1964년 8월 25일, 대구대학이 정식으로 설립인가가 난 1947년 9월 이후 만 17년 만에 대구대학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재단이사장에 취임하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 이병철 회장은 학교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학교
경주최씨 백사(白沙) 최동언(崔東彥,1594~1672)의 가계는 7대조 최예(崔汭) 그리고 증조부 최삼택(崔三宅), 고조부 운암(耘菴) 최봉천(崔奉天)으로 이어진다. 조부 최경천(崔擎天)은 아들이 없어 재종인 최신보(崔臣輔)의 넷째 아들 남포현감을 지낸 육의당(六宜堂)
아는 척하는 게 창피한 일이지, 모르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아는 게 없으니 아는 사람한테 배우면 된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지만, 우리 마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줄 기관은커녕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일제는 1936년 경주역을 사정동에서 성동동으로 이전했다. 대구에서 울산까지 이어졌던 협궤노선 경동선을 광궤로 바꾼데 따른 것이다. 이로 인해 경주 시가지 재편이 이뤄졌다. 무엇보다 성동동에 들어선 새 경주역은 일제의 행정기관이 밀집된 중심지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이병철 회장은 대학을 인수한 후 재단이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모든 절차를 차곡차곡 밟아나갔다. 재단 이사에는 이병철 회장 자신과 둘째 아들인 이창희 씨를 비롯해 자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일단의 사람들이 포진됐다. 물론 문파 선생의 요구대로 선생 역시 이사로 참여했고 그 역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인터넷에서 ‘한국인을 고문하는 방법’들을 찾아냈다. ‘라면 먹을 때 김치 안 주기’ 나트륨 과다 섭취가 우려스럽지만 나도 김치 없이는 라면을 잘 먹지 않는다. ‘식후에 커피(아·아) 못 마시게 하기’ 나는 이상하게 생선구이 같은 걸 먹은 날에는 꼭 커피믹스를 마신다.
“대구대학을 인수해서 인재를 키우자!” 최염 선생이 회고하는 신현확 씨 관련 사실에 따르면 당시 이런 제안을 하자 이병철 회장이 두 가지 의문을 신현확 씨에게 표했다고 한다. 먼저 요즘 세상에 학교를 그냥 내줄 그런 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대학을 그
뜨거운 여름날 신선이 노닐었던 신유림 낭산을 오르며 지난 역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실성니사금 12년(413) 8월에 “구름이 낭산(狼山)에 일어 바라보니 누각 같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실성왕이 ‘이는 필시 선령(
아이들이 그림책을 읽다가 글 책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있다. 그림도 없고 글만 가득한 페이지를 읽는다는 것이 굉장한 거부감이 있다. 그때 아줌마가 찾은 작가가 있다. “린다 수 박”, <사금파리 한 조각>이라는 책의 저자이다. 지금은 아동문학의 노벨문학상인 뉴베리상
옛 경주역(현 경주문화관1918)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추억하는 기차역이다. 1960년대부터 신혼여행, 수학여행을 위해 경주를 방문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역할을 하면서 중장년층의 추억의 명소로 남아 있다. 인근 도시인 포항과 울산에서 교육도시 경주로 통학하던
화창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였다. 멀리 남산 꼭대기에 서 있는 금오정이 훨씬 크게 보였고 집 뒤 가산(假山)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적당히 시원했다. 그날 특별한 손님이 오기로 한 최부자댁은 작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문파 선생은 오랜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고 혹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