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경주역(현 경주문화관1918)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추억하는 기차역이다. 1960년대부터 신혼여행, 수학여행을 위해 경주를 방문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역할을 하면서 중장년층의 추억의 명소로 남아 있다. 인근 도시인 포항과 울산에서 교육도시 경주로 통학하던 학생들에겐 통학열차에 대한 추억도 남긴 곳이다.    경주역은 1918년 11월 1일 대구에서 울산까지 이어졌던 협궤노선 경동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이후 103년이 지난 2021년 12월 28일 영남권 복선전철 개통에 따라 임무를 다하고 문을 닫았다. 지금은 경주시와 경주문화재단이 건물을 새단장한 뒤 ‘경주문화관1918’이란 이름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처음 문 열어 “산기슭에서 떨어지면 왼쪽에 서악(西岳)이 보인다. 그 밑에 고분군이나 무열왕릉이 눈에 들어온다. 형산강(서천)의 철교(鐵橋)를 건너면 바로 고도역(古都驛)이다. 봉황의 알 모양의 서른 몇 개의 왕릉이 거대한 산이 되어 분지에 배치되어 있다” 대구 출신 소설가 장혁주(1905~1998)는 약 100년 전 기차를 타고 경주로 들어왔을 때 봤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지만 경주의 지리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경주역과는 유적의 위치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경주 첫 철길은 서악(선도산) 기슭에서 형산강을 건너 경주 시내로 이어져 있었다. 처음 지어진 경주역은 경주시 사정동 지금의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다. 역에서 내리면 북쪽으로 봉황대를 비롯한 대형 고분군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경주역은 1918년 10월 31일 문을 열었다. 대구를 기점으로 경주, 포항, 불국사역으로 이어지는 경동선(慶東線) 개통에 따른 것이다. 경주에 근대식 신작로가 개설되고 자동차가 등장한데 이어 마침내 철도라는 근대문명이 등장한 것이다. 경주가 ‘신라구도’(新羅舊都)를 내세우며 본격적인 관광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경주역은 사설 철도인 조철경동선(朝鐵慶東線)에 속했다. 대구역을 기점으로 경주 서악역에서 갈라져 한 갈래는 경주역을 거쳐 불국사역까지, 또 다른 하나는 포항의 학산역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학산역은 포항역을 지나 동빈내항 입구, 지금의 경북광유 인근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포항의 중심은 포항역과 학산역 사이였으며, 학산역은 일제가 철도를 통한 수산물 이송과 일본 항로가 고려된 물류 집합지 구실을 했다. 사정동에 들어선 첫 경주역은 우리에게 친숙한 성동동 역사(1936년 11월 30일 영업개시)가 들어서기 전까지 18년 동안 영업했다. 운영은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朝鮮輕便鐵道株式會社)가 맡았다. 이 회사는 1919년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고 1923년엔 ‘조선철도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1928년 7월 이 회사를 매입해 국유화했다.   일제, 경주역 증축에 서봉총 봉토 활용 경부선보다는 늦었지만 경주에 들어온 열차는 경주민들에게 생활공간을 확장시켰다. 이전까지는 걷는 게 유일한 이동방식이었다. 짐은 지게로 나르거나 소나 말의 힘을 빌렸다. 말이나 가마는 특수한 신분을 지닌 이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혼인 등을 위해 제한적으로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동선 개통으로 경주민들은 일정한 시간에 더 빠르고 편리하게 먼 곳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주역이 들어선데 따른 아픔도 있었다. 1918년 처음 문을 연 경주역은 관광도시의 관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1926년엔 경주역을 새롭게 짓고 기관고를 설치하는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경주역 증축공사엔 정지작업을 위해 많은 흙이 필요했다. 원래 다른 곳에서 흙을 가져올 계획이었으나 어떤 사정으로 흙 반출이 어려워지게 되자, 발굴 중이던 서봉총의 봉토를 활용하면서 서봉총은 봉분 없는 고분으로 남게 됐다. 1918년 처음 문을 연 경주역 사진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는 옛 경주역 사진은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생활상태조사’(生活狀態調査)에 실린 것으로, 증축공사 이후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철도역은 당시 경성역처럼 ‘문명국 일본’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서양건축 양식을 도입한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경주역은 단청까지 곁들인 전통 양식으로 지어졌다. 여기엔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의향이 반영돼 있었다. 철도국은 전통 도시의 철도역사엔 조선식 건물 외관과 색조를 도입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관광객에게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당시 경주역뿐만 아니라 전주와 남원 등 전통 도시에 지어진 역사도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협궤열차 “나의 중고교 재학시절(1931~1936)에는 3학년이 되어야 처음으로 먼 곳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3학년에 경주, 4학년에 금강산, 그리고 최종 학년인 5학년에 비로소 멀리 만주여행을 하였다. 그 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을 뿐 아니라 그 후 나의 생애의 길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준 것은 첫 번째 경주여행이었다. (중략) 그 해가 1933년 봄이니 지금부터 49년 전의 일이다. 그때 우리는 밤차로 서울을 떠나 새벽에 대구에 내려서 차를 바꿔 탔는데, 그때만 해도 기차는 좁은 협궤였고, 그 속도라는 것이 느려 터져서 심지어 고갯길에 차가 오를 때는 학생들이 차에서 뛰어내려 기차와 경주하는 장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경주에서는 안동여관에서 묵었다” 미술사학자로 동국대학교 총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황수영(1918~2011) 선생이 남긴 ‘경주 수학여행의 감명’이란 글이다. 그의 글처럼 경동선 철로는 폭이 76.2㎝에 불과한 협궤선이었다. 현재 표준 철로 폭인 145.5㎝의 약 절반 수준이었다. 당연히 속도를 낼 수 없어 대구에서 경주까지 4시간이나 걸렸다. 승객을 가장 괴롭힌 것은 ‘진동’이었다.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마차로 다니는 것보다 심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진동은 심각했다. 탈선 사고도 빈번했다고 한다. 당초 협궤로 설계된 경동선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철도를 국유화한 뒤 광궤로 교체된다. 조선총독부는 대구~경주~포항을 잇는 경동선 148㎞ 구간을 약 750만원에 사들인 뒤 광궤화에 나선 것이다. 대한민국 관광객에게 친숙한 성동동 경주역사도 경동선 광궤화에 따라 만들어졌다. 철길 선형이 직선화되면서 사정동에 있던 경주역은 폐역되고 1936년 성동동에 새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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