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여행객들이 남산의 삼릉·금오봉·고위봉 구간을 통해 노천 박물관이라 불리는 남산을 탐방한다. 특히 서남산 방향으로 포석정을 지나 삼릉에서 좌측으로 금오산을 향해 오르면 상선암과 마애불 그리고 바둑바위를 지나 정상에 이르는데, 바둑바위에 오르면 북쪽으로 경주 시
경주최씨 백사(白沙) 최동언(崔東彥,1594~1672)의 가계는 7대조 최예(崔汭) 그리고 증조부 최삼택(崔三宅), 고조부 운암(耘菴) 최봉천(崔奉天)으로 이어진다. 조부 최경천(崔擎天)은 아들이 없어 재종인 최신보(崔臣輔)의 넷째 아들 남포현감을 지낸 육의당(六宜堂)
뜨거운 여름날 신선이 노닐었던 신유림 낭산을 오르며 지난 역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실성니사금 12년(413) 8월에 “구름이 낭산(狼山)에 일어 바라보니 누각 같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실성왕이 ‘이는 필시 선령(
경주향교는 유생의 수학장 그리고 선현을 모시는 제례 장소로 경주의 큰 자랑이다. 성균관 입성을 위해 지역의 선비들이 과거공부에 매진한 흔적이 역력한 향교에는 유교(儒敎)의 향기가 진동한다. 학업에 지친 젊은 유생들이 소나무 가득한 뒤뜰에서 휴양하였을 것을 생각하면 “옛
경주읍성은 동쪽에 향일문(向日門), 서쪽에 망미문(望美門), 남쪽에 징례문(徵禮門), 북쪽에 공진문(拱辰門) 성문이 있고, 성 안에 각각의 기능을 맡은 건축물이 가득하였지만, 일제강점기에 광폭(狂暴)한 총독의 사사로운 행보에 1912년 경주읍성과 많은 건축물이 훼손되거
서악동 서악서원을 지나 고분군을 따라 선도산(仙桃山) 정상부에 이르면 그곳에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성모사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어머니이신 선도성모정영(仙桃聖母精靈)을 모신 사당으로, 신라 때 건립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도산은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
어릴 적 필자는 해마다 석가탄신일이 되면 가족들과 집에서 가까운 분황사(芬皇寺)를 찾았다. 너른 들판의 황룡사 문화재 발굴지를 지나 좌측으로 분황사를 들어서면 3층의 웅장한 석탑(石塔)이 반기고, 탑을 돌아 팔각 우물의 맑고 청량한 물을 마시며 부처님께 합장 기도를 올
김호(金虎,1534~1592) 장군은 증조부 김이권(金以權), 조부 김원좌(金元佐)의 가계를 이루고, 경주부 남쪽 월남(月南) 식혜동(識慧洞)에서 부친 김숙린(金叔麟)과 분성김씨 김한보(金漢輔)의 따님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몸집이 크고 호걸의 기상을 지녔으며,
경주 출신의 노석(老石) 이능섭(李能燮,1812~1871)은 회재 이언적의 11세손으로 무첨당 옛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엄숙하고, 몸가짐이 굳세고 순수하였으며, 무리의 아이들과 놀 때 걸음걸이는 망동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는 암기를 잘하였으며, 찾아
이견대(利見臺)는 아들 신문왕이 부친 문무왕의 유지에 따라 장사지낸 뒤 추모하여 대를 쌓고 바라보았는데, 큰 용이 바다 가운데에 나타났다. 즉 용이 나타난 것을 본 장소가 이견대이다. 『고려사』 속악(俗樂) 이견대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 부자가 오랫동안 서로 헤
정자(程子)는 “옛날에는 25가(家)에 숙(熟)이 있고, 당(黨)에 상(庠)이 있고, 술(術)에 서(序)가 있어, 대체로 들어가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8살에 소학에 들어가고, 15살에 그 준수한 사람을 뽑아 대학에 들어가도록 하고,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은 돌아가
경주는 신라의 옛 도읍으로 남쪽에는 남천(南川), 서쪽에는 서천(西川), 북쪽에는 북천(北川)이 흐르고, 물의 형세가 고을을 빙 두르면서 아래로 흘러가고 있어 삼면이 모두 물이다. 남천은 외동읍 신계마을에서 발원해 형산강으로 흐르는 원동천(院洞川)으로 언제부터 남천으로
삼최(三崔)는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에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후백제를 도운 최승우(崔承祐), 고려의 최언위(崔彦撝,868~944) 등 최씨 3인을 말한다. 이들 모두가 6두품으로 골품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하였고, 빈공과에 급제
경주에서 토함산 터널을 지나 장항리에서 옛 도로를 타고 감포방향으로 가다보면 좌측으로 기림사와 골굴사(骨窟寺) 진입표지가 나타난다. 조금 더 가다보면 골굴사가 나타나는데 일주문을 통해 들어서면 맨 안쪽 큰 바위 정상부에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그 아래로 조성된 석굴이 드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의 학문과 삶을 따르는 것을 숭모해서 산수의 경치가 빼어난 승경에 은거지를 마련하고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구곡원림의 경영과 구곡시가의 창작은 경북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을 비롯한 동창천(東創川) 일대의 빼어난 승경의 구곡을 경영한 소요당(逍遙堂)
경주 금오산에 기거한 명나라 장수 편갈송은 귀화인으로 『경주의 조선스토리』에도 생소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관련 명나라 귀화인으로 지리에 밝은 두사충(杜師忠), 천만리(千萬里) 등이 유명하고, 경주 관련해서 편갈송(片碣頌) 장군이 있으며, 그의 제단(祭壇)이 금오산에
경주의 문무대왕면은 본래 신라 때 악지현(惡支縣), 약장현(約章縣)으로 불리었고, 6부 가운데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속하였다. 고려 때는 가덕부(加德部), 조선 때는 동해면으로 불리었고, 현재는 24개리로 개편되었으며, 그 가운데 앞산의 형상이 물고기를 닮은 벽촌마
KTX 경주역이 있는 건천읍 화천리에 신도시 높은 아파트와 대조적으로 조선의 역사가 서린 화강서당(花岡書堂)이 자리한다. 필자는 우연히 기차역을 지나다 화천1리 마을 길을 내려가는데 큰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화강서당은 옥산전씨 화천문중에서 1993년에 건립한 것으로 무관 파수(巴叟) 전계신(全繼信,1562~1614)을 모신 공간이다. 입구 앞에는 1993년에 세운 ‘화강서당 중건기’와 1977년에 세운 ‘화강사(花岡祠)휴허비’ 비석이 세워져 있고, 유허비는 도로편입으로 2009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계신은 대구 수성구 파잠리(巴岑里;파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역시 마을 이름을 따서 ‘파잠의 노인’ 즉 ‘파수’로 불리었고, 그의 후손들은 선조의 뜻을 기려 파수정(巴叟亭)을 세우고, 『파수선생실기』를 편찬해 그의 업적을 추모하였다. 증조부 전순손(全順孫), 조부 전익견(全益堅)의 가계를 이루고, 부친은 사재감정 전련(全璉), 모친은 달성배씨(達城裵氏)로 전숭년(全嵩年)·전계량(全繼亮)·전계의(全繼義)·전계례(全繼禮)·전계지(全繼智)·전계신·전계충(全繼忠) 등 자식을 두었다. 그 가운데 전계신은 전천행(全千幸:청도)·전득행(全得幸:화천) 두 아들을 두었고, 그의 후손들이 각각 청도와 경주 화천 등지로 흩어져 세거하였는데, 전득행이 경산에서 경주에 이거하면서 경주 건천읍 화천리 집성촌의 입향조가 되었다. 무관 전계신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출중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패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별시 무과에 합격해 무관이 되었고, 경상도우후·함안군수·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불리한 전세에 경상 좌수영의 동료 권응수(權應銖), 안이명(安以命) 등과 창의를 도모하였고, 청도를 거쳐 팔조령을 넘어가는 길목인 협곡에 매복해 왜놈을 섬멸하였으며,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과 인동·예천·안동·기장·흥해 등 경상도 여러 곳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아쉽게도 161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관직을 수행하다가 안주(安州)의 관서(官署)에서 병으로 죽었다. 전계신은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사후에 청도의 임곡서원(林谷書院)과 경주의 화강사에 제향되었다. 후손들이 화천2리에 화강서당을 지었으나,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다시 화천1리에 파수정을 건립하였으나, 태풍으로 소실된 것을 근대에 와서 문중에서 다시 화강서당을 건립해 현판을 걸었으니, 애틋한 후손의 마음이 전해진다. 전계신의 의병장 기록은 남원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자주 등장한다. 뛰어난 의병 활동으로 2019년 11월에 그를 위한 파동의 무동재(武洞齋) 동쪽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무동재는 전계신의 육촌 형 전경창(全慶昌,1532~1585)이 학문을 닦던 계동정사(溪東精舍)의 옛터에 지은 재실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경상도 체찰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추천으로 승려 유정(惟政)을 따라 일본에 회답사(回答使)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국왕 원가강(源家康)의 간절한 화친을 확인하기 위해 1601년·1606년 회답사로 대마도에 두 차례 파견되었다. 선조 25년(1592) 9월에 일본군이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과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헤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덕천가강(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이 먼저 국서(國書)를 보내고, 임진왜란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을 붙잡아 보내야 한다는 조건에 대한 이행 여부를 확인하고, 아울러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기 위하여 전계신 일행이 파견되었다. 이때 귤광련의 아들을 알아보고 위로의 말을 전하였고, 이 일을 경상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조정에 보고해 부산에 귤광련의 사당을 건립하기에 이른다.『난중잡록』에 의하면, 의를 위해 죽은 대마도 작은 두목 귤광련(橘光連:유즈야 야스히로;橘康廣)이 있었다. 귤광련은 1590년 임진왜란 발발 이전부터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조선에 내빙(來聘)하였는데, 겐소(玄蘇) 등과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명나라를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라고 조정에 고하였는데도, 그 말을 믿지 않고 결국 왜놈이 쳐들어와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한탄스럽다. 오봉 이호민의 글 가운데 「전계신이 일본 승려 겐소의 편지에 답하다(全繼信答玄蘇書)」가 전한다. 의병창의 그리고 임란 이후 회답사로 큰 역할을 맡은 전계신과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화천마을은 조선의 경주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창구가 되며, 이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쏠린다.
영양남씨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은 부친 남국형(南國衡)과 모친 여주이씨 이덕함(李德咸)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 이름은 해만(海萬)이었다. 14세에 종조숙부 남국선(南國先)의 양자가 되었고, 훗날 모친상을 탈상한 후에 식솔을 이끌고 경주 명활산(明活山) 아래로 이거해 살며 평생을 학문을 궁구하였다. 풍천임씨 임간세(任榦世)의 따님을 만나 남경채(南景采,1736~1811) 낳고, 서산류씨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의 따님을 만나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 남경화(南景和)를 낳았으니, 아들 역시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가 남긴 『활산집』은 원집(原集) 7권, 부록(附錄) 합 5책으로, 1790년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 1793년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지은 서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문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집안에서 많은 노력 등이 있었고, 특히 그의 둘째 아들 남경희의 정성이 특출하였으며, 차남 남경희가 「어록(語錄)」을, 장남 남경채가 「행장」을 지어 부친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이계 홍양호는 1760년 7월부터 1762년 6월까지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며 학교의 부흥과 문화발굴에 지대한 공을 들인 인물이다. 그가 부윤으로 있으면서 활산과 교유하였고, 물러난 뒤에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유를 이어갔으며, 남겨진 많은 시작품이 이를 대변한다. 특히 활산의 만사(輓詞)에서 “옛적 내가 이 지방을 다스렸을 때, 민풍을 살피러 옛 수도를 방문했네. … 명활산에 처사가 있으니, 고상한 걸음으로 그윽한 지조를 보존하였네. … 신령의 바람 말은 어디로 돌아갔는가, 남휘정(覽輝亭)을 찾아갔겠지.”라고 그를 추억하였다. 남휘정은 1771년 명활산 덕계에 지은 행랑채의 이름으로, 초봉암(招鳳菴)의 동편에 있었다. 활산은 「초봉암기(招鳳庵記)」에서 “나는 진정 세상을 벗어난 은자(隱者)로, 이곳에 집을 지었으니 진짜 봉황은 쉽게 볼 수 없음을 안다. 사람 가운데 봉황의 자질이 있는 사람 얻기를 구하였기에 그와 비슷한 지명을 따라 편액을 걸고 그들을 불러들였다. 지금 나를 따라 노니는 자는 모두 자주 날갯짓하려 하지만, 날개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아서, 바야흐로 멀고 가까운 거리를 막론하고, 모두가 날개를 나란히 하여 이른다면 그 가운데 무리 중 빼어난 자가 없을 것이라 어찌 알겠는가?”라고, 보기 드문 봉황의 출현과 은둔한 자신의 처지 그리고 봉황처럼 성군의 출현과 태평성대를 기대하는 그의 마음을 글로 대변하였다. 앞서 활산은 풍기군수로 있던 정범조를 찾아가 선조의 글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의 아들 남경희 역시 부친의 유집을 갖고 그에게 서문을 부탁하였으니,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긴요하다. 아들 남경희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문인으로, 이만운(李萬運)·손병로(孫秉魯)·송전(宋銓) 등과 교유하였고, 증광시에 합격 그리고 1777년 진사에 올라 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병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으며, 1791년에 사직하고 고향 경주 보문마을리로 돌아온 뒤 스스로 은거하였다. 듣기에 『활산집』이 국역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경주의 선비 활산 선생에 대한 자료를 다시 넘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문집의 서문을 소개한다. 활산선생문집 서문 - 이계 홍양호 계림은 신라의 옛 도읍으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천 년 동안 나라를 누렸다. 산천이 빼어나고, 신령이 돌보아 동방의 으뜸이 되었기에 이름난 신하와 큰 선비가 성대하게 배출되었다. 하지만 근세 이래로 차츰차츰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논하는 사람들이 개탄해하였다. 경진년(1760) 내[홍양호]가 동도의 부윤이 되어 학교를 일으키고 선비를 양성하는 일에 뜻을 두었다. 듣기에 진사 남붕로(南鵬路)가 온 고을의 존경을 받고 영남 좌도가 모두 그를 경모하였기에, 이에 예를 갖춰 그를 학교로 초청하였다. 많은 선비의 스승이 되어 문예(文藝)를 강론하고, 경술(經術)을 가르치니, 1년 만에 문장의 재목이 되었다. 배우는 자들이 명활산 아래 덕계(德谿) 가에 나아가 서당을 짓고, 무리를 이뤄 학업을 익혔는데, 내가 그 편액을 쓰고 서문도 지어주었다. 내가 조정으로 돌아오자 남붕로 역시 도백(道伯)의 천거를 받아 침랑(寢郞)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문고 연주하고 책 저술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매번 마음에 드는 시문이 있으면 번번이 천 리나 떨어진 나에게 부쳐 보여주었으며, 나 역시 그렇게 하였으니, 깊이 서로 인정함이 이와 같았다. 군의 둘째 아들 남경희가 젊어서 과거에 급제해 서울로 와서 나를 찾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붕로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만시(輓詩)를 부쳐 그를 애도하였다. 남경희가 이미 탈상을 하고 『활산유고(活山遺稿)』네 권을 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서문을 구하였다. 내가 다 읽어보니 … 질박(質樸)하나 속되지 않고, 심오하나 교묘에 빠지지 않았으니 … 말세의 소리가 아니었다. … 계축년(1793) 단오에 풍산인 홍양호 서문을 짓다.
안동권씨 오모재(五慕齋) 권복흥(1555~1592)은 단종의 충신인 죽림 권산해의 후손으로 경주 강동면 단구마을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사람과 종을 데리고 의병항쟁에 나섰는데, 이미 집안사람 가운데 매와(梅窩) 권사악(權士諤,1556~1612),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1557~1634), 노헌(魯軒) 권응생(權應生,1571~1647), 구사재(九思齋) 권복시(權復始,1556~1636), 노헌(魯軒) 권응생(權應生,1571~1647) 등 의병에 참여한 의사가 많은 것을 토대로 집안 대대로 임금에 대한 충심이 가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병장 권복흥은 어려서 발에 병을 앓아서 주위 사람들이 불편한 그의 모습에 의병 합류를 만류하였지만, 그는 발이 비록 병들었으나, 마음만은 병들지 않았다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지를 내세우고, “임금이 위태로움에 처한 상황에 발에 병이 있다고, 어찌 죽음으로 보답하지 않겠는가?”하고는 분연히 뜻을 세웠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1592년 4월 28일 다대포 진영 안에서 순절하였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는 「정려명(旌閭銘)」에서 “경주에 의로운 선비 권복흥은 어려서 다리에 병을 앓아 걸음이 좋지 않았는데, 임진년(1592)의 난리에 떨쳐 일어나 창을 들고 달려가 싸우다 죽었다. 그의 처 류(柳)씨가 달려가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남은 옷으로 초혼(招魂)하여 돌아왔다. 통곡하며 집안사람들에게 ‘지아비가 칼끝에서 죽었는데 그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이는 나의 죄입니다. 어찌 천지 간에 살아가겠습니까. 이제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니, 옷과 신발을 묻은 곳에 합장(合葬)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입을 다물고 음식을 끊어 9일 만에 죽었다. 방백이 그 일을 조정에 알렸고, 남편과 함께 선후로 정려문이 내려졌다”라고 칭송하였다. 이 일로 영조 13년(1737)에 ‘충신의사권복흥지려(忠臣義士權復興之閭)’정표를 내렸고, 사후에 후손과 유림의 공조로 1740년에 단계사(丹溪祠)에 배향되었다. 다시 단계서당으로 개칭하였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1924년에 재건립된다. 게다가 부인 서산류씨는 권복흥이 순절하자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부였기에, 그 뜻을 기려 정조 18년(1794)에 ‘열녀의사권복흥처서산류씨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정표를 내렸다.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1712~1779)이 「행장」을,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1727~1810)이 「권의사복흥전(權義士復興傳)」을, 면암(俛庵) 이우(李㙖,1739~1810)가 「휴허비」 등을 지었다. 그는 병든 발에도 불구하고, 종과 함께 먼 길을 내달려 다대포에 이르러 적진에서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장자』「덕충부(德充符)」를 보면, 공자가 월형(刖刑)을 받아 발꿈치를 잘린 무지(無趾)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전날 행실을 조심하지 않아서 이러한 우환을 당하였는가?”라고 하자, 무지가 “나는 세상일을 잘 알지 못하고 가벼이 몸을 놀리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와서는 발보다 더 존귀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힘씁니다(吾唯不知務而輕用吾身 吾是以亡足 今吾來也 猶有尊足者存焉 吾是以務全之也).”라고 하였다. 존족(尊足)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가리킨다. 발이 불편한 권복흥의 경우를 빗대어 최천익은 ‘존족’으로 그의 천성을 칭송하였고, 나아가 효에 대한 마음도 더불어 부각시켰다. ‘오모(五慕)’는 그의 호로, 『맹자』「만장장구」에서 “대효(大孝)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하니, 50세까지도 부모를 사모한 자를 나는 대순(大舜)에게서 보았노라”라고 순임금의 효도하는 뜻에서 취하였으니, 그의 효심 가득한 마음가짐을 알만하다. 화산 권 공 행장(花山權公行狀) - 농수 최천익 부친 권평(權平)과 모친 청안이씨 사이에 단구리 집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무리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말수가 적고 입이 무거워 철이 든 어른 같았다. 어려서 학문을 익혀 이미 대의가 있었는데, 매번 옛 성현께서 충과 효에 힘쓰는 구절을 만나면 문득 가슴에 새겨 외웠다. 어려서부터 성장해서까지 스스로 닦고 남을 가르치는 이유가 오로지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중히 여겼다. 공은 평소 다리에 병이 있었는데, 모두가 “군대를 따라가기 어렵고, 대오에 끼지도 못하니, 힘써 그 행동을 그만둬라”라고 말하였지만, 공은 개의치 않고 “나의 발은 비록 병들었지만, 여전히 발보다 귀한 것[尊足]이 남아있다. 절름발이로 죽음에 나아가도 달아나 숨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또 나의 검이 있으니 어찌 무리가 대수이겠는가? 마침내 가동 몇 사람을 거느리고, 활과 검을 차고, 말을 타고 날로 나아가 갑절의 길을 내달려 곧장 부산으로 향하였다. 다대포에서 적을 만나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다. 살상의 흔적이 매우 많았고, 검은 부러지고 화살은 다하여, 마침내 적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