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 서부동엔 ‘서경사’란 이름을 지닌 독특한 모습을 한 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 불교 사찰 건물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 제290호로 지정돼 있다. 광복 이후 농촌지도소, 해병전우회 사무실, 판소리 전수관 등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빈 건물로 남아 있다.
서경사는 광복 이후 많은 일본식 건축물이 철거된 상황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매년 적게는 수십여 명, 많게는 100명이 넘는 일본 건축학도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신라시대 고대 유적과는 달리 한국 근대사의 암울했던 시기를 증언하는 역사적 장소라는 의미도 지닌다.
조선불교 행정 장악한 일제, 석굴암 주지 선출도 관여
경주는 신라 때부터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다. 석굴암과 불국사가 아니더라도 경주의 불교가 얼마나 흥성했는지는 ‘절은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와 조선이 일어서는 동안, 거친 세월에 씻기고 전란의화를 입어 경주 불교는 퇴보 일로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왕조 500년 동안은 도성 출입조차 금지되는 등 경주 불승들의 처지도 곤궁 그 자체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천주교와 기독교가 들어오고, 천도교가 일어나는 등 일대 변화가 일어났으나 적절하게 대응할 여력을 경주 불교는 갖고 있지 못했다.
여기에 중앙에서는 일제가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흡수하려는 각종 책동이 계속되었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이 종단을 좌지우지했다. 다행히 송만공, 석전 박한영, 만해 한용운 등의 선구자들이 있어 조선불교의 명맥만은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는 기독교에 황국신민화정책을 강요한 것 이상으로 불교계를 옥죄었고, 그중에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6월에 반포한 사찰령을 통해 조선불교를 행정적으로 완전히 장악했다. 한해를 넘겨 1912년 7월에 사찰령의 시행규칙이 나왔는데, 그때 전국 사찰 가운데 30개 사찰이 본산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지역의 여타 사찰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경주군 내의 여러 사찰도 본산으로 지정된 기림사의 관할 아래로 들어갔다.
당시 기림사와 가까운 양북면 호암리(虎岩里)에 승려 마을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약 20가구에 비구승과 비구니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이는 기림사의 위상과 관계가 깊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승려와 그 가족들 대부분은 평소엔 농사를 짓고 부업으로 양봉을 했다고 한다.
일제는 사찰령에 따라 전국 사찰의 주지 임명에도 관여했다. 비록 형식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행정적으로 주지 임명은 일제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했다. 일례로 석굴암 주지 임명에 일제가 관여했다는 내용이 ‘동아일보’ 1939년 9월 23일자 ‘석굴암 주지에 김수길 씨 신청’이란 기사에 남아 있다.
경주 거류 일본인 위해 들어온 일본불교
일제강점기 경주에 사는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들어온 불교 사찰에서 종교생활을 했다. 1931년 기준 일본인 불교 신자는 모두 1844명이었다. 천주교인 3명을 제외한 절대 다수가 일본 불교를 믿었다. 그들은 경주에 살면서 고향 일본을 그리워했고, 그들끼리 절에 가서 예불을 드리며 식민지 경주생활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리고 낯선 식민지에서 서로 이익과 이해를 도모하고, 경주에서 태어나고 죽는 이들을 위해 일본 절에 가서 축복을 받고 명복을 빌었다.
경주에 들어온 일본불교의 각 종파들은 경주 일본인들에게 안식처 구실을 했다. 당시 일본인 승려들은 왕릉 발굴현장 등 일제의 각종 행사에 초청돼 불교의식을 주재했다. 반면, 조선 승려가 이 같은 행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발굴은 어디까지나 일제가 시도했기 때문에 굳이 조선 승려를 초빙해 의식을 치를 이유가 없었을 터. 일본 승려를 초청해 일본말로, 그들의 예법에 맞춰 제를 거행했을 것이다.
1931년을 기준으로 경주에 있었던 일본 종교단체는 그들의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 쪽의 천리교(天理敎)와 부상교(扶桑敎)가 있었고, 불교에는 정토진종(淨土眞宗)과 조동종(曹洞宗), 진언종(眞言宗), 진종본원사파(眞宗本願寺派) 등이 있었다. 이들 불교종파들은 경주군 내에서 일본인을 중심으로 포교를 했다.
경주에 남아있는 서경사도 이런 배경에서 지어진 사찰이다. 경주에 거류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신앙생활과 커뮤니티를 유지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으로 조선인은 아예 포교대상이 아니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서경사는 1936년과 1937년 사이 경주 거류 일본인 시바타 단쿠로(柴田團九郞)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사찰의 종파도 정토진종 서본원사파다. 널리 알려진 ‘1932년 건립된 조동종 사찰’이라는 잘못된 정보는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아픔 간직한 건축물
이와 함께 서경사는 대다수 사람들은 모르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건축물이란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서경사 건립을 주도한 시바타 단쿠로는 1915년쯤 지금의 계명대 동산병원 자리에 시바타 여관을 개업해 갑부가 된 인물이다. 시바타 여관은 경주 제일의 여관으로 번창했고, 당시 일본인이 쓴 경주 기행문에도 자주 등장한다. 1927년에는 시바타가 본인의 환갑을 축하하는 연회 잔치를 사흘 연속으로 지역사회에 베풀어 대성황을 이뤘다는 기사도 남아있다. 그렇다면 시바타는 이 같은 막대한 재산을 여관업만으로 축적한 것일까.
경주에 살며 경주지역 근대사를 연구하는 아라키 준 박사에 따르면 시바타 여관 인근엔 구리하라(栗原)라는 골동품 가게가 있었다. 이 가게 주인은 여행객 등 손님이 들어오면 우선 그 사람의 행색을 관찰한 뒤 골동품에 관심이 있거나 고가의 골동품을 구입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판단되면 구입 의사를 타진한 뒤 시바타를 소개했다. 시바타는 골동품 애호가였으며 많은 물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손님이 본인의 소장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고가의 골동품을 원하면 “더 좋은 물건이 있다”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소개했다.
모로가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경주왕’이라고 불릴 정도의 권세를 누린 지역의 권력자였다. 그는 대서업을 개업하면서 취미로 경주의 문화재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탁월한 화술과 처세술로 경주분관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는 1933년 조선인 도굴꾼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그가 경주의 고분 도굴에 관여하고 귀중한 문화재를 밀매매한 사실이 드러나며 경찰에 체포되기에 이른다.
당시 경주엔 ‘구리하라-시바타-모로가’라는 문화재 밀매매 루트가 형성돼 있었고, 시바타의 막대한 재산 축적에 문화재 밀매매가 깊게 관련돼 있었다는 게 아라키 준 박사의 설명이다.
살펴본 것처럼 서경사는 시바타 단구로의 그런 재력을 기반으로 건립됐다. 일본인들이 문화재 약탈 등으로 번 돈으로 세운 일본인을 위한 종교시설이었던 것이다.
서경사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문화재 약탈에 은밀하게 관련돼 있었다는 점 또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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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근대를 거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