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리단길에서 태종로를 교차해 북쪽으로 봉황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나있다. 길은 시작지점에서 200여m 거리에 있는 금관총과 봉황대 사이를 지나 대구지법 경주지원 방향으로 이어진다.    금관총을 지나 신라고분정보센터 앞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붉은색을 칠한 홍살문이 보인다. 이 홍살문은 경주시가 2009년쯤 복원한 것이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이 자리에 홍살문이 있었다.    홍살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붉은색으로 칠했고, 상부에 설치한 화살 모양의 나무살 때문이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공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 홍살문이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경주읍성의 남쪽 관문… 홍살문 18세기 말에 제작된 ‘경주읍내전도’를 보면 이 홍살문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지도 한가운데에서 위쪽으로 크게 사각형 모양으로 그려진 부분이 경주읍성이며 남쪽 성벽 가운데 부분에 그려진 건축물은 남문(징례문, 徵禮門)이다. 그리고 남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나무가 몇 그루 자라고 있는 고분, 봉황대가 있다. 그 왼쪽으로 홍살문이 보인다. 지금의 홍살문은 복원된 것이지만 지도 제작 당시에도 홍살문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홍살문은 경주읍성의 안녕을 위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을 오른쪽에는 큰 흙만두(土饅頭)가 보이며 왼쪽에는 남문이 보인다. 경성(서울)의 분위기를 축소한 것 같은 느낌이다. 흙만두는 분묘로 보이지만 묘하게 크다. (중략) 남문을 지나가면 은행나무가 두 그루 보인다. 그 나무들은 수령이 500~600년에 이른다고 한다” 이 글은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6월 3일 경주군청 서기관으로 부임한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가 남긴 것이다. 경주에 철도가 들어선 것은 1918년의 일로 기무라는 대구에서 마차를 타고 12시간쯤 걸려 경주에 도착했다. 과거 중국·일본 등에선 무덤을 속되게 ‘흙만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또한 봉황대를 비롯한 대형 고분을 ‘흙만두’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오른쪽에 고분군을, 왼쪽에 읍성 남문을 보면서 경주에 들어왔다고 썼는데, 봉황대 앞 동서를 가로지르는 길을 통해 경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읍내전도’를 보면 남문에서 홍살문까지는 직선도로가 나있지만 봉황대부터는 좁은 길이 남서쪽으로 비스듬하게 이어진다. 현재 홍살문에서 황리단길을 거쳐 서남산쪽으로 통하는 직선도로는 지도가 만들어진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직선도로는 한일병합을 전후해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신작로’(新作路) 혹은 ‘본정통’(本町通, 혼마치 도리)으로 불렸다고 한다. 1912년 11월 7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이 경주를 시찰하러 들어왔을 때의 사진엔 새로 생긴 도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진은 홍살문 주변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초가집 뒤로 보이는 언덕은 발굴 이전의 금관총이고, 왼쪽에 있는 기와로 된 건축물은 성덕대왕신종 종각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16세기 초반부터 1916년 4월까지 이곳에 있었다. ‘경주읍내전도’에도 봉황대 옆에 종각이 작게 그려져 있다. 종각 앞에서 읍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봉황로는 조선 말까지 ‘종로’(鐘路)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현재 이 길을 경계로 동쪽은 ‘노동리’(路東里), 서쪽은 ‘노서리’(路西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종로가 기준이 된 것이다.   동헌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 월성아문 조선시대 경주읍성 안에는 동헌 등 관아 건물들이 즐비했다. 이 가운데 실질적인 중심은 지방관이 행정집행을 하는 동헌이다. 이 동헌에 들어가기 위해선 거쳐야 하는 곳이 있었는데, 동헌 바로 앞에 있는 2층 누각, 월성아문(月城衙門)이었다. 진남루(鎭南樓)라고도 불렸다. ‘경주읍내전도’를 보면 읍성 남문과 월성아문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았다. 읍성 남문은 홍살문이 있는 곳에서 250m 정도 떨어진, 현 서울요양병원 옆에 있었다. 월성아문이 있던 곳은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과 경주경찰서 사잇길이다. 성 밖에서 동헌으로 가자면 남문을 통과해 월성아문 옆에 있는 역대 경주부윤 선정비 비각들을 지나야 했다. 당시는 현 경주문화원 앞에서 서쪽 방향으로는 다른 관청의 담으로 막혀 있어 다른 길이 없었다. 때문에 동헌으로 가자면 반드시 비각들을 지나 월성아문의 문루를 지나가야만 동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월성아문이 철거되기 전 옛 사진을 보면 월성아문 문루는 2층 3칸 구조로 돼있다. 동쪽으로는 문루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있었다. 2층 서편에 북을 매달아 놓고 관아 문을 닫을 때나 위급할 때 신호용으로 북을 쳤다. 시각과 상황을 알린 것으로, 봉황대 옆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이 타종되면 그 종소리에 맞춰 진남루에서도 북을 쳤다. 그래서 월성아문은 고각루(鼓角樓)로도 불렸다. 월성아문은 철거되기 오래 전부터 방치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을 칠 사람이 없어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멈추면서 고각루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조선 말 시계가 들어온데다, 북을 칠 시간을 먼저 알려주던 성덕대왕신종도 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일병합 이후 조선 관아가 사라지고 일제 군청이 들어서면서 월성아문은 존재감을 더욱 잃어갔다.   일제강점기 초 일제에 의해 철거 홍살문과 월성아문이 언제 철거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경주읍성 남문이 철거될 때 홍살문도 같이 철거됐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1912년 11월 데라우치 총독이 방문하기 전, 총독이 차를 타고 성내로 들어올 수 있도록 미리 징례문을 철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데라우치 총독의 차가 통과할 수 없어서 성문을 헐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료에 따르면 성문 입구의 높이는 3.75m, 너비는 3.59m, 홍예석 반경은 1.87m이다. 요즘 1t 화물차의 높이와 폭도 2m를 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를 태운 관용차는 이보다 폭이 넓거나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데라우치가 경주를 방문했을 당시 경주관리들과 징례문 철거 문제를 검토했을 개연성은 있다. 1912년은 일제가 경주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가지 정비에 들어갔을 때였다. 확실한 것은 1915년 8월 성덕대왕신종이 일제에 의해 봉황대 앞에서 경주박물관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으로 옮겨지게 될 때는 징례문이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는 점이다. 성덕대왕신종 높이는 3.6m이고, 성문 높이는 3.75m다. 따라서 신종 밑에 깐 통나무 굵기와 길이를 감안하면, 신종의 성문 통과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1912년에서 1915년 사이 징례문이 철거됐고, 이를 전후해 홍살문도 함께 철거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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