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지난 2023년 12월부터 2025년 2월까지 연중기획 ‘다시 돌아보는 효자, 열녀비’를 통해 13회에 걸쳐 총 31곳의 효자·열녀비에 담긴 내용을 다시 소개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본지에 기고했던 고 함종혁 선생의 글을 토대로 효자·열녀비를 다시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하늘도 감동한 부자지간의 효행 ‘양세정효비’ 경주 시내에서 내남면 방향 삼릉을 지나자 마자 도로 좌측편에 양세효자비(兩世孝子碑)가 세워진 한옥 구조의 비각이 있다. 이곳이 월성김씨 수만, 상태 부자의 효행이 담긴 양세효자각이다. 이 비에는 가선대부 예조참판 월성김공 수만지비(嘉善大夫 禮曹參判月城金公 壽萬之碑)와 동몽교관 조봉대부 월성김공 상태지비(孝子贈 童蒙教官 朝奉大夫 月城金公 相兌之碑)라는 비문에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수만 선생은 예법을 존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받아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부모님 섬기는 일에 정성이 남달랐다. 맛 좋은 음식과 다과를 보면 반드시 부모님께 드렸고, 커서는 어버이를 극진하게 모시는 마음을 으뜸으로 삼았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으로 어버이를 편안하게 모셨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병에 들었다. 아버지가 겨울철에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자 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동지섣달 추운 눈 속에 포도를 구하러 다니는 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제철이 지난 겨울에 포도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려는 효심을 하늘이 알았던지 하루는 날아가는 까마귀가 포도 한 송이를 물고 와 땅에 떨어뜨리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 포도를 병석에 있는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그만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수만 선생의 아들 상태도 아버지의 효심을 본받아 남달리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니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형산강 상류인 앞 냇가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낚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 같은 효심에 범도 감동했는지, 어느 날 밤 범이 개를 물고 와서 입 마당에 던져 주고 갔다고 한다. 아들 상태는 하느님이 내리신 효약으로 알고 개를 푹 다려 어머니를 봉양하니 병환이 언제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바로 쾌차했다. 또한 이들 부자는 예의범절을 주문공(朱文公) 가례를 따른지라 많은 선비들이 이들이 효행을 나라에 진정했다. 이에 1861년 조선 철종 임금이 양세효자로 정려(旌閭)했다. 1800년 문중에서 높이 95cm, 넓이 35cm, 두께 14cm의 양세효자비와 비각을 세워 이들 부자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자신의 피로 어머니 살린 ‘효자 묵암달성서공정려비’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7번 국도 강동면 호명리 구간 도로 옆에 한옥 목조의 정려각이 보인다. 주유소 못 미쳐 도로변에 위치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이곳에 효자비가 있다. 효자 묵암달성서공정려비(孝子 黙菴達城徐公旌閭碑)다. 효자 서 씨는 달성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정에서 충효 사상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무엇보다 효성이 지극했는데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어른들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어머니를 30여년 동안 하루같이 봉양해 장수를 기원했다. 하지만 어느날 어머니가 병에 들어 위독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로 어머니에게 수혈했다. 이 같은 서 씨의 효심을 하늘이 알았는지 어머니가 회생했다. 그 후 4년을 더 살다가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자 또다시 손가락을 끊어 수혈시켜 다시 4년간을 연명시켰다. 하지만 지극한 정성에도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장례 후에는 어머니 묘소까지 20리길을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를 다녔다고 한다. 이 같은 서 씨의 효행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를 내렸다. 1938년 달성서씨 문중에서 유학 월성 손영흔의 글을 받아 호명리 238-1번지에 정효비를 세우게 됐다. 충·효·열 행적 담긴 ‘이씨삼강묘비’ 본지가 강동면 소재 효자·열녀비를 찾아 나서던 중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의미 깊은 비각을 만날 수 있었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씨삼강묘비(李氏三綱廟碑)다. 강동면 다산리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비각으로, 비문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희룡 장군과 그의 아들 이문진 및 며느리 김씨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에는 그들의 충(忠)·효(孝)·열(烈)의 행적이 담겨있다. 이희룡은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위했으며, 영남의 적을 정찰하라는 왕명을 받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충주에서 적을 만나 전사했다. 아들 문진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다 신령에서 적과 대치하다 죽었다. 며느리 김씨가 이 소식을 듣고 손수 시신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같은 충·효·열의 깊은 뜻을 전해 들은 나라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조선 숙종 36년(1710)에 벼슬을 올려주고 정려각을 하사했다. 비는 네모난 비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비교적 큰 규모이나 별다른 무늬는 두지 않았다. 영조 42년(1766)에 비를 세웠으며, 대제학 남유용이 비문을 짓고,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재가 글씨를 썼다.
청년도전 지원사업은 사회 전반에 걸친 청년들의 구직단념, 은둔·고립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경주와 인근 경북지역은 경주시청년센터 ‘청년고도’가 청년도전 지원사업을 담당해 취업에 좌절한 청년들이 다시 사회로 나올 수 있는 발판을 제공 중이다. 본보에서는 4회에 걸쳐 청년도전 지원사업의 필요성과 단기·중기·장기 교육과정의 대상자와 프로그램 특성을 담당 매니저 인터뷰를 통해 알아봤다. 마지막으로 이번 호에서는 교육과정을 총괄하는 장재형 선임 매니저와 함께 청년도전 지원사업(청도지 사업)의 2024년 성과와 정말 사회로 나오길 희망하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어봤다. -편집자 주 청도지 사업의 가장 큰 성과, ‘꿈을 가지다’ 청도지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장재형 선임 매니저는 올 한 해 교육을 통해 여러 성과를 얻었다고 자평했다. 그중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단연 교육에 참여한 구직단념 청년들이 꿈을 가졌다는 점이다. 장재형 매니저는 청도지 사업에 참여한 청년들이 참여할 경우 주어지는 회차당 50만원의 참여 수당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 막연하게 여겼지만 교육을 이수한 후에는 뚜렷하게 사용할 곳을 찾게 됐다고 전했다. “각자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비록 큰 돈은 아니지만 청도지 사업을 통해 얻은 것에 ‘투자’를 하고 싶다는 거죠. 어떤 친구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해외여행에 보태겠다고도 하고, 또 다른 친구는 취업 준비에 사용하겠다, 뒤에서 많은 도움을 준 부모님께 작은 선물을 해드리겠다는 등 꿈을 가지는 청년들이 생겼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가지게 된 꿈이, 바라는 것이 외부에서 볼 때 비록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사회로 나오길 거부하던 모습에서 변화된 것을 바라보는 매니저로서 정말 보람찹니다” 지역 기관과의 연계로, 효과 상승 정재형 매니저는 올해 처음 시도한 경주시정신건강복지센터와의 연계한 대상자 모집도 큰 성과라고 밝혔다. 청도지 사업 대상이 사회와 괴리를 느끼고 밖으로 나오길 꺼려하는 청년들인데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연결해준 청년들은 많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과정 참여에 소극적이고 부끄러움을 느끼던 청년들이 또래와 함께 교육을 받으며 차차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매니저들에겐 큰 힘이 된다고. “정신건강센터에서 연결해준 청년들은 상대적으로 아픔이 많은 친구들입니다. 그래서 매니저들도 조심스럽게 접근해 함께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죠. 그 친구들이 조금씩 교육과정을 통해 적극적이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은 우리 매니저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청도지 사업이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발전하는 청도지 사업 2022년 시범사업을 거쳐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작한 청년도전 지원사업은 올해 또 다른 변화를 겪었다. 참여 청년들이 원하는 교육, 그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킨 것. 장재형 매니저는 청년들의 의견을 수렴해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이 참여도와 효과를 올리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청도지 투어 사업이 가장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단순히 청년들이 어디 가고 싶다는 것이 아닌,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면 어떤 것이 좋을지 스스로 생각하고 기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니저들이 기획한 프로그램도 좋지만 참여한 청년들이 필요하거나 하고 싶은 프로그램도 아주 효과가 좋았습니다. 청도지 사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사회와 단절된 청년들을 다시 사회로 이끌어내는 것이기에 청도지 투어와 같이 청년들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프로그램은 상당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뤘습니다. 앞으로도 청년들과 같이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할 생각입니다” 청년, 사회로부터 지원과 응원 필요 경주와 같은 지방 중소 도시들은 인구감소와 함께 청년 유출을 막기 위해 많은 예산과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청년들은 수도권 혹은 대도시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장재형 선임 매니저는 경주에 많은 청년들이 모이고 청년들이 사회로부터 괴리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양질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기성세대의 변화된 시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청년이면 성인인데 왜 지원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때때로 받기 때문이다. “간혹 청도지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청년들이 왜 지원을 받냐?’라고 되묻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여러 청년 지원사업이 불필요해 보인다는 것이죠.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했습니다. 사회는 더 치열해지고 청년들이 설자리가 의외로 많이 줄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청년들이 직업 적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죠. 청년들을 사회 초년생으로 보고 올바른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게 기성세대의 부정적인 시각이 아닌 지원과 응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경주시청년센터 ‘청년고도’에서 구직단념 청년들을 사회로 이끌어내기 위해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청년도전 지원사업(청도지 사업)’이다. 청년고도의 청도지 사업은 3개의 교육과정으로 구성돼 구직단념 청년 개별적인 상황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게 된다. 앞서 소개한 단기·장기 교육과정은 대상 청년들의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중기 교육과정에 참여하는 구직단념 청년들은 약간은 애매한 상황이기에 담당 매니저들의 고민도 큰 편이다. 단기처럼 급하게 취업해야 하지도 않고, 장기 교육과정 참여 청년들처럼 사회와 크게 단절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약간은 애매하지만 청도지 사업이 꼭 필요한 구직단념 청년들을 대상으로 15주의 중기 교육과정을 담당하는 한형진 매니저를 만나 중기 교육과정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주 취업 역량을 조금 더, 중기 교육과정 청년도전 지원사업 중기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한형진 매니저는 중기 교육은 5주의 단기 과정, 25주의 장기 교육과 달리 참여하는 청년들의 상황이 조금은 애매하다고 전했다. 당장 급하게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인 단기 청년들, 취업이 급하지는 않지만 구직단절 기간이 길어 자신감부터 시간을 두고 다시 일깨워야 하는 장기 교육 대상이 아니라 원하는 일자리가 있지만 채용 기간이 애매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중기 참여 청년들은 자신의 역량을 청도지 사업을 통해 강화시키고자 한다는 것이 한형진 매니저의 설명이다. “중기 교육과정에 참가하는 청년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조금 더 강화시켜 합격률을 올리고자 합니다. 취업하기 원하는 일자리의 채용 기간이 애매해 다른 기관의 취업 역량 강화교육을 받기에 시간이 부족한 청년들이 청도지 사업에 오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좌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 다시 취업에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한형진 매니저의 추천 프로그램, ‘피싱 예방교육’ 20대의 한형진 매니저는 여러 프로그램 중 청년들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피싱 예방교육’을 꼽았다. 일반적으로 각종 피싱 범죄에 젊은 사람들은 잘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례를 따져보면 청년들 상당수가 피싱 범죄 피해를 받고 있다는 것. 한 매니저는 피싱 범죄자들이 취업이나 대학교 합격 등 청년들의 간절함을 노리는 피싱 범죄가 상당히 판치고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싱 범죄 자체가 사람들의 두려움, 간절함을 노리는 범죄로 죄질이 모두 나쁘기는 하지만 청년들의 취업이나 진학 관련 범죄는 젊은 세대의 성장을 좌절시키고 세상과 단절시키기에 그 어떤 피싱 범죄보다 심각한 피해를 낳는다고 부연했다. 그렇기에 청도지 사업에서 필수적으로 ‘피싱 범죄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참가 청년들이 본인의 피해 예방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 지인들의 피해도 막아주고 있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전했다. “피싱 범죄는 정말 근절돼야 하는 죄질이 매우 나쁜 범죄입니다. 사람의 절박함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것이기 때문이죠. 더욱이 사회 초년생인 청년들에게 절박한 취업이나 진학을 이용해 합격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로 금전적인 피해를 입혀 그들이 사회에 적응하기도 전에 낙오시키기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청도지 사업 중 피싱 예방교육은 청년들이 사회에 올바르게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본인뿐만 아니라 연세 많으신 가족, 친지들에게까지 그 교육의 효과가 퍼지고 있죠” 본인에게 맞는 직업 선택이 가장 중요 청도지 사업은 기본적으로 구직을 단념하거나 은둔, 고립된 청년들을 사회로 불러내는 사업이다. 한형진 매니저는 청년들이 사회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대학 전공으로 인한 취업 제한, 코로나19로 자존감 상실을 꼽았다. 먼저 대학 전공과목과 관련된 직업을 골랐다가 본인의 적성에 맞지 않아 좌절감을 겪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전했다. 한 매니저는 청도지 사업에 참가하는 청년들의 개인적인 역량과 스펙 등은 상당하지만 취업을 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이직 준비를 위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 이들은 수많은 전공 관련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 등 나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이직을 하더라도 과연 나에게 맞는 직업일까?’라는 의문을 갖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이 한형진 매니저의 이야기다. 또 다른 이유는 코로나19라고 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채용 인원이 줄고, 취업 프로그램도 사라지는 등 정보의 공유와 소통의 장이 없어 청년들이 사회와 단절됐다는 것이다. “청도지 사업에 참여하는 청년들은 구직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잘하는지 확인해 볼 시간 없이 오로지 대학과 취업만을 향해 달려오다가 좌절을 겪고 취업을 포기하거나 멀리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년에게 재도전의 의지, 자신을 정확히 알게 하는 소통을 많이 합니다. 청도지 사업에 참여한다는 자체만으로 이미 다시 도전할 의지가 있기 때문이죠. 청년들에게 취업 역량도 좋지만 먼저 나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청도지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많은 것들을 깨닫고 알게 됩니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들이 왜 사회에서 멀어지는지에 대한 것들이죠. 꺼진 열정과 의지를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교육 최종 이수 후 참가자들이 건네는 감사와 격려는 아주 큰 보람과 힘이 됩니다. 만약 구직을 망설이고 있는 청년이 주변에 있다면 청도지 사업을 한 번 권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진행한 기획취재를 통해 일본의 문화유산 복원과 다양한 관광요소를 살펴볼 수 있었다. 또 일본 각 마을의 전통문화와 지역 축제에서 그들만의 장인 문화를 알 수 있었다. 한국 관광이 서울 등 대도시에 한정돼있는 현실에서 지방
구직단념 청년들을 다시 일자리로 불러내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청년도전 지원사업(청도지 사업)’. 경주시청년센터 ‘청년고도’에서는 구직을 단념하거나 포기한 청년들에게 단기(5주)·중기(15주)·장기(25주) 등 3개의 교육과정을 맞춤형으로 제공해 취업에 대한, 그리고 사회활동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고 있다. 이번 주에는 단기·중기·장기 교육 참여 청년 중 상대적으로 취업에 대한 의지가 살아있는 단기 교육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청년고도’ 김가연 담당 매니저를 만나봤다. -편집자 주 취업 효과 UP, 의욕 UP ‘청도지 사업’ 중 단기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김가연<인물사진> 매니저는 전체 프로그램 참여 청년들 중 단기 과정 참여자들이 상대적으로 취업에 대한 의지, 의욕이 강한 편이라고 전했다. 개인 사정에 의해 빨리 취업해야 하는 청년, 최근 취업에서 좌절해 다시 도전하고 싶지만 취업 성공에 대해 자신감이 떨어진 청년, 취업 준비를 하고 있지만 불안하고 조금 더 준비를 하고 싶은 청년 등이 5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되는 단기 교육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기간이 짧아서 취업 준비 중심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는 김가연 매니저는 취업하고자 하는 의욕이 남아있는 만큼 참여자들끼리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고도 전했다. 취업에 대한 의욕이 여러 사정에 의해 잠시 사그라들었지만 또래와의 만남, 취업 성공이라는 같은 목표 아래 교육을 받으며 꺼졌던 의욕이 다시 타오르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이러한 효과로 인해 단기 교육과정 참여자들은 교육 이수 후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으로 취업 전선에 복귀한다는 것이 김가연 매니저의 설명이다. “단기 교육과정 특성상 당장 취업을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데, 살짝 의지가 꺾인 친구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서로 상황이 비슷한 참여자들이 모여 교육을 받고 소통하기에 참여자들을 앞에서 끌어주는 리더의 역할을 하는 친구들도 생기더라고요. 이렇게 함께 교육을 받으면 서로 이해하고 응원하는 등 시들었던 취업에 대한 의욕을 다시 살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단기 교육과정의 꽃, ‘면접 교육’ 5주라는 짧은 기간 교육을 받기에 단기 교육과정은 취업 준비에 중점을 맞췄다. 김가연 매니저는 여러 교육 프로그램 중 가장 효과가 있는 프로그램은 면접이라고 설명했다. 당장 취업을 목표로 하는 단기 교육 참여 청년들에게 소위 ‘일타강사’의 지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 면접 교육에는 자기소개서, 이력서를 청년들이 직접 작성한 후 강사가 첨삭 등을 통해 실제 서류 전형에 합격률을 올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또한 면접관을 대하는 시선처리나 말투와 같은 면접 자세, PPT 능력 등을 향상시킬 수 있어 실제 취업 준비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 참여 청년들이 사전에 자기소개서 작성과 이력서를 준비해 오기만 한다면 교육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서류를 마련할 수 있다고 김가연 매니저는 전했다. 특히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가 교육 후에도 청년들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세심하게 가르쳐 줘 참여 청년들의 평가가 매우 좋다고도 덧붙였다. “단기 교육과정에 참여하는 청년들은 취업 준비가 가장 시급합니다. 면접 교육이 가장 효과가 있는데 전문 강사님의 세심한 도움과 교육 후에도 조언을 해주신다는 점이 가장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면접 교육 이외에도 청년들의 취업 의지를 북돋아주기 위해 기본적인 상담, 자존감 회복 프로그램도 참여자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데 한몫하고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 ‘청도지 사업’ 김가연 매니저는 40여명이 참가하는 ‘청도지 사업’ 단기 교육과정을 담당하면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강조했다. 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있고 없고에 따라 교육 결과가 차이 난다는 것이다. 결국 구직단념 청년들에게 제공되는 프로그램은 기본을 다지는 과정이기에 참여 청년들이 스스로 무언가 하려는,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굳게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저희 청년고도의 ‘청도지 사업’은 구직단념 청년들의 기초, 즉 바닥을 닦아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역량을 현재보다 조금 올려주는 것이죠. 취업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청년고도와 담당 매니저, 취업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진 참여 청년들이 함께 한다면 지역사회에서 은둔·고립, 구직단념 청년들은 확연히 줄어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경주시청년센터 ‘청년고도’는 구직을 포기한 구직단념 청년, 사회활동을 멀리하거나 포기한 은둔·고립 청년들을 사회로 이끌어 당당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청년도전 지원사업’이다. 청년도전 지원사업은 청년들의 개별적인 상황에 맞게 크게 3개의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상대적으로 취업이나 사회로 나오고 싶은 의지 등이 높은 청년은 단기 교육인 5주 교육, 그리고 의지가 많이 부족하거나 숫한 취업 좌절로 자신감이 떨어져 위축된 정도에 따라 중기(15주), 혹은 장기(25주)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각 과정마다 청년고도에서는 청년 매니저들이 구직단념 청년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사회 복귀를 돕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구직 의사가 부족하고, 지역사회와 윗세대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장기 교육 담당인 성희원 매니저를 만나 구직단념 청년들을 사회로 이끄는 ‘청년도전 프로그램’ 장기 교육과정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주 취업 의지와 자존감 회복, ‘청년도전 지원사업’ ‘청년도전 지원사업(이하 청도지 사업)’ 장기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성희원 매니저는 지난해 프로그램 참가자에서 이제 구직단념 청년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매니저가 됐다. 줄여서 ‘청도지 사업’이라고 일컫는 구직단념 청년 취업 프로그램 장기 교육과정은 전체 사업 참여자 중 매니저들의 많은 케어와 관심이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성희원 매니저는 여러 개인적인 상황으로 인해 장기 교육 참여자들은 자신감, 자존감, 의지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로 이들의 의지와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전했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구직단념 청년 스스로의 역량이 부족한 것이 아닌, 본인과 맞지 않는 직종·직업이라는 점을 참여자들에게 알리고 각자에게 맞는 곳에 취업하게끔 도움을 주고 있다. “프로그램 청년들은 절대 학력이나 능력 등 스펙이 부족한게 아니라는 것이 담당 매니저로서 생각입니다. 다만 본인이 잘할 수 있는 업무나 성향이 맞지 않기에 취업에 실패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거죠. 장기 프로그램에서는 먼저 상당기간 취업에 실패해 자신감이 결여된 구직단념 청년들에게 자신감과 자존감, 움츠러든 열정을 다시 불러 일으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현직자와 소통, ‘취업 토크 콘서트’ 성희원 매니저는 실제 교육 참여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취업 토크 콘서트’라고 말한다. 누구나 잘 아는 공기업부터 대기업, 중견기업을 비롯해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종의 현직 종사자들이 참여해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외부에서 생각하던 회사의 모습과 실제 일하는 현직자 입장에서의 업무 모습이 상이한 경우도 많아 참여 청년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 성 매니저의 설명이다. 또한 현직 종사자들과 모둠을 만들어 세부적인 업무와 회사 분위기, 면접 방식이나 내용 등 기본적인 회사의 사정과 업무, 취업 준비 방법까지 알아가는 기회가 돼 참여 청년들의 좋은 평가를 받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취업 토크 콘서트는 다양한 직종의 현직자들이 편안하게 참여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으로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서 청년들은 다시 한번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고, 취업 성공률을 올릴 수 있는 거죠” 성희원 매니저는 토크 콘서트 현직자들의 벽 없는 대화로 청년들과 소통하는 멋진 프로그램이라고 강조했다. 혼자는 안돼! ‘청도지 투어’ 취업 토크 콘서트가 구직단념 청년들에게 취업 힌트를 제공한다면 ‘청도지 투어’는 우선적으로 청년들이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사업이라고 성희원 매니저는 전했다. 개인 상황에 의해 취업이 좌절되고 집 안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을 다시 밖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청도지 투어’는 다양한 체험과 문화 생활을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특히 매니저부터 참여자가 모두 또래의 청년이기에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며, 당겨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참여자들끼리 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다. 결국 ‘청도지 투어’는 구직단념 청년들의 사회성을 일깨우는 사업이라는 것이 성 매니저의 설명.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마련했더라도 청년들이 참여를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청도지 투어’가 단순히 놀러가는 프로그램이 아닌 그들을 집에서 사회로 나오게 만들고 재미와 의지, 사라졌던 열정을 다시 살리는 아주 의미 있는 프로그램인거죠. 함께 소통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교육 효과가 극대화 되는 거 같습니다” “본인들이 원해서 사회로 나오지 않는 청년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여러 상황에 의해 청년이 가져야 할 꿈과 의지가 사그라든 거죠. 지역사회와 기존 세대들의 따뜻한 관심과 도움이 있다면 많은 청년들이 당당하고 유능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관광정책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면서 다양한 정책들이 관광청 등의 주도로 수립·시행되고 있다. 그 중 역사적 건물 등 문화유산을 활용해 독특한 숙박형 콘텐츠를 개발해 관광상품화한 사례들이 눈에 띄었다. 이번 호는 일본 간사이국제대학 교수진들의 협조를 얻어 일본의 관광정책과 성공사례를 살펴봤다./편집자주 코로나 엔데믹 이후 일본의 관광정책은 양적성장에 질적성장으로 전환했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지난해 2월 관광 진흥 추진 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025년까지 방일 외래객 1인당 소비액 20만엔을 목표로 잡았다. 또 해외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을 통해 체류 기간을 연장하는 등 질적 성장을 위한 관광정책을 제시했다. 또 일본 관광청은 2030년 방일 외래객 6000만명 유치를 목표로 하는 한편, 이를 위해 비자심사 요건 완화, 전자결제시스템 보급, 관광 매력을 발신하는 콘텐츠 개발 및 홍보 지원, 각 지역의 역사자원 활용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내 변화된 관광정책과 더불어 코로나 엔데믹 이후 여행 제한이 풀리고 엔저 현상까지 겹치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는 2506만6100명. 2500만명을 넘어선 것은 코로나19 이후 4년 만에 처음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소비도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여행 지출 금액은 5조2923억원엔(한화 약 49조2469억엔)으로 처음으로 5조엔대를 돌파했다. 국적별로는 대만이 7786억엔(14.7%)으로 가장 많았고, 중국 7599억엔(14.4%), 한국 7444억엔(14.1%), 미국 6062억엔(11.5%), 홍콩 4795억엔(9.1%) 등의 순이었다. 이들 상위 5개국의 소비 지출금액이 전체의 약 64%를 차지했다. 1인당 평균 소비액은 21만2000엔(한화 약 193만원)으로 2019년보다 5만3000엔이 늘어났다. 엔화 약세로 일본 국내의 서비스와 상품 가격이 저렴하게 느껴져 체류 일수가 크게 늘어나고, 숙박과 레저에 많은 비용을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독특한 숙박형 콘텐츠 개발 주력 일본의 관광정책이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내건 가운데, 특히 문화유산을 활용한 관광객 유치 전략이 눈에 띈다. 일본 관광청은 일본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성이나 신사, 사원, 고택 등을 활용한 독특한 숙박형 콘텐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머무는 관광객을 유치해 관광 소비 지출을 확대하며 질적 성장을 도모하고 있는 것. 실제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의 지출 중 숙박 비용은 2019년 29.4%에서 지난해 34.6%로 늘었다. 쇼핑비용은 같은 기간 34.7%에서 26.4%로 감소했고, 음식 비용은 21.6%에서 22.6%로 소폭 증가하는데 그친 것. 일본이 숙박형 콘텐츠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유산 활용 관광콘텐츠 개발 ‘신중’ 일본은 문화유산을 활용해 관광 콘텐츠를 개발할 때 4대 원칙을 적용해 신중하게 결정한다. 4대 원칙은 △문화유산 활용에 앞서 보존을 최우선 검토 △문화유산의 본질적 가치 활용 △문화유산이 안고 있는 과제 해결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협의 등이다. 이에 대해 나라문화재연구소 니시다 노리코 상석연구원은 “문화유산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함께 해온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 번 훼손되면 돌이킬 수 없다”면서 “이 때문에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보존을 최우선으로 두고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문화유산의 본질적 가치와 규모, 디자인, 역사적 배경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역사·문화에 주목해 특유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면서 “또 문화유산의 활용을 통해 그 매력과 가치를 알리고 관광객들이 찾아와 소비하는 등의 선순환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문화유산은 지역의 상징이며 지역을 특정 짓는 귀중한 자원으로서 이를 활용한 관광자원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소유자·관리자뿐만 아니라 지역과 관련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합의 형성 과정을 중요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역소멸도시에서 관광도시로 변신 ‘오즈시’ 일본이 문화유산 활용과 독특한 숙박형 콘텐츠 개발 등의 관광정책에 가장 부합하는 곳은 에히메(愛媛)현의 소도시 오즈(大洲)시다. 간사이국제대학 교수진들은 일본의 관광정책 전환에 따라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오즈시를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았다. 이들에 따르면 오즈시는 과거 인구감소로 경관보전지구 거리가 해마다 사라지고 마을의 황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인구는 연간 700명씩 감소했고, 빈집까지 늘며 400년 이상된 가옥들이 사라지는 등 지역소멸 우려까지 나왔다. 이에 오즈시는 지난 2018년 민간사업자, 금융기관과 연계해 주민 동의를 받아 거리를 재생하고, 역사적인 건물을 유지·보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즈시와 역사적 건조물 재생을 담당하는 일반사단법인 ‘노오토’, 호텔 운영을 담당하는 밸류매니지먼트(주), 그리고 현지 금융기관인 ‘(주)이요 은행’ 등이 연계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 아래 오즈시는 지역 DMO인 일반사단법인 키타 매니지먼트를 설립했다. 또 (주)NOTE, 이요은행그룹과 공동출자해 주식회사 KITA를 설립했고, 옛 민가의 보전 활동을 하던 단체 ‘YATSUGI’와 인근 주민들도 참여했다. 이후 KITA는 마을 경관을 형성하는 역사적 건축물을 임차 및 매입하기 시작해 그 문화성과 가치를 보전하면서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주)이요은행은 전체 사업의 자금조달원으로 ‘오즈마치 조성 펀드’를 조성해 이곳에 창업·출점을 희망하는 사업자가 진출하기 쉬운 환경도 만들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오즈성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무라이 저택과 연립 주택도 숙박 시설로 개조하면서 도시가 부활했다. 이와 함께 KITA가 리모델링을 통해 호텔사업자에게 임대를 제공함으로써 역사적 건축물 자체가 유지되고,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가 완성된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특히 이를 계기로 유턴 창업, 제2창업, 시외기업 유치, 지역 기업에 의한 사업전환, ITA창업, 지역 기업의 사업 확장 등도 이뤄지고 있다. 이 같이 오즈시는 사라져가는 고가옥의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지역 참여형 마을만들기에 성공하며 그린 데스티네이션(Green Destinations)으로부터 ‘세계 지속 가능한 관광지 톱 100’에 2022년, 2023년 연속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루 숙박비 100만엔 ‘오즈성 캐슬 스테이’ 오즈시의 독특한 숙박형 콘텐츠 개발의 성공사례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오즈성 캐슬 스테이’다. 오즈시 밸류매니지먼트는 지난 2020년 7월부터 ‘오즈성 캐슬 스테이’를 본격 운영했다. 이는 오즈성을 이용, 천수(天守. 성의 중심부인 아성(牙城) 중앙에 3층 또는 5층으로 제일 높게 만든 망루)에 국내외 관광객이 숙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본의 고성을 빌려 하루 동안 성주로 지낼 수 있는 특별 서비스가 제공된다. 1박에 비용은 무려 100만엔이지만 예약이 줄을 선다. 프리미엄 제품과 서비스를 찾는 국내외 부유층들이 주요 이용객이 되면서 보다 높은 경제효과를 창출하고 있다는 것. 오즈시 일반사단법인 키타 매니지먼트 관계자는 “2023년 법인이 운영하는 오즈성과 가류산장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수가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 비해 거의 2배로 증가했다”면서 “국가별로는 한국(9556명)이 가장 많았고, 대만(3193명), 미국(391명), 중국(344명), 프랑스(272명) 등의 순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일본의 성은 보존이 전부였지만, 오즈시는 민간과 연계해 보존하고 유효하게 활용해 사람들이 마을을 찾는 기회를 만들어나갔다”면서 “역사적 자원을 관광 자원화하면 지역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전국적으로 구직단념 청년들이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따르면 2024년 7월 ‘쉬었다’고 답한 15~29세 청년은 44만3000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또 이들 중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33만5000명에 달하며 ‘그냥 쉬었음’ 청년들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특히 급여와 직종 등 근로조건이 본인이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에 ‘그냥 쉬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장기적인 대책 마련이 절실한 상황. 경상북도 또한 이러한 추세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경주시청년센터 ‘청년고도’에서는 ‘쉼 청년’인 구직단념 청년들을 사회로 이끌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다시금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본보에서는 2024년 한 해 동안 경주시청년센터에서 진행해온 ‘청년도전지원사업’에 대한 성과와 구직단념청년들을 다시 사회로 이끌어 내기 위해 지역과 지자체가 해야 할 역할들에 대해 보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구직을 포기하거나 희망하지 않는 청년들의 비율이 증가하는 가운데 경상북도 또한 이러한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경북의 경우 청년 인구가 매년 감소하고 있기에 양질의 청년 일자리 확보는 지역사회와 지자체의 큰 고민거리이자 숙제이기도 하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경북 내 20~39세 청년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조금씩 감소하고 있다. 매년 청년 인구도 감소하고 있어 청년 유입에 대한 방안도 시급한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경제활동참가율도 소폭 감소하고 있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경주시청년센터 ‘청년고도’에서는 경주뿐만 아니라 인근 경북지역 청년들에게 원활한 구직활동 독려를 위한 프로그램 ‘청년도전지원사업’을 제공해 왔다. 구직을 포기하거나 구직 의사가 결여된 구직단념청년들을 노동시장에 참여시키고 취업을 촉진시키고자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했다. 특히 청년고도에서는 구직단념청년들과 함께 숨 쉬고 공감할 수 있게 또래의 매니저들을 배정해 프로그램 효율을 극대화 시켰다. 이번 청년도전지원사업은 사업 신청일로부터 6개월 이상 취업 및 교육, 직업훈련 이력이 없고 구직단념청년 문답표 확인 결과 30점 만점에 21점 이상인 18세 이상 39세 이하 청년들이 참여했다. 올해에는 경주를 포함한 경북 지역 청년 280여명이 ‘청년도전지원사업’에 참여해 취업을 위한 면접 이미지 컨설팅 교육 직업종사자 취업 토크콘서트, 사회생활을 위한 보이스피싱 예방 교육 등을 진행했다. 먼저 8월 13일에는 경북 도내 구직단념청년 60명을 대상으로 보이스피싱 예방 및 금융보험 교육을 실시했다. 이번 교육은 청년들에게 보이스피싱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고 피해를 당한 경우 신속한 대처 방법을 안내해 피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또한 면접 이미지 컨설팅 교육을 실시해 청년들이 효율적인 취업 준비를 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지난 7월에 열린 면접 컨설팅 교육은 퍼스널컬러 찾기, 면접 이미지 메이킹 등 취업 과정에 핵심인 면접에서 자신감을 갖고 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지난 9월에 열린 현직자 취업 토크콘서트는 구직단념청년들에게 취업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소통의 장이 마련됐다. 한국전력, 에어부산, 소방공무원, 웹툰 작가 등 다양한 직종에서 활동하고 있는 실무자들과 소통을 통해 취업 관련 궁금증을 해소하는 동시에 실질적인 취업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경주 청년고도 관계자는 “청년도전지원사업은 구직단념청년에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끌어내는 값진 프로그램으로 여러 가지 이유로 구직 활동을 멈추게 된 청년들에게 다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자 기획하고 진행됐다”면서 “올해의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더욱 발전시켜 경주와 경북 청년들이 취업과 건전한 사회생활 의지를 불러 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일본 교토시는 한 해 5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국제관광도시다. 일본 천년의 수도로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적 건물 등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매력을 품고 있다. 본지는 지난 9월 25일 일본 교토시와 니덱교토타워, 기요미즈데라 등을 찾아 교토의 관광 현황과 정책 등을 살펴봤다./편집자주 일본 교토시는 역사도시다. 794년부터 1869년 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1075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교토시는 오랜 세월을 지켜온 역사적 건물들이 자연경관과 어울리며 고풍스러운 도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도심의 동·서·북쪽 세 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에다 남북으로 두 줄기의 강과 역사적인 건물이 어우러진 고도의 경관은 가장 큰 매력이다. 옛 왕궁을 비롯해 헤이안신궁, 기요미즈데라 등 1000년 역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볼거리가 많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과 신사만 해도 17곳에 달한다. 교토시에 따르면 이 같은 경관과 문화유산 덕분에 지난해만 관광객 5028만1000명이 찾는 등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하고 있다. 교토시는 ‘시간을 초월한 빛나는 경관 만들기’를 위해 1930년대부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고풍스러운 경관을 지키기 위해 1930년 풍치지구 지정을 시작으로 시가지경관 조례 제정, 시가지 대부분을 고도지구(고도제한)로 지정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수립해 시행해왔다. 그러나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변화, 경제성·효율성 등으로 인해 역사적 건조물이 상실되는 등 문제점도 속출했다. 이에 교토시는 지난 2007년 9월부터 교토의 미래를 내다보고 역사도시 경관 보존을 위한 정책을 본격화했다. 대표적인 정책으로 고도지구 내 건물의 높이를 최고 45m에서 31m로 낮추는 대신, 높이의 최고 제한을 역사적인 시가지, 산기슭의 주택지, 공업지역 등 지역 특성에 맞춰 세분화했다. 건물 등의 디자인도 경관지구, 건조물수경지구, 풍치지구 등으로 세분해 디자인 기준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또 옥외광고물 역시 규제 대상에 포함시켜 품격 있는 아름다운 도시 경관 형성을 도모했다. 실제 교토시내 전역에는 건물 간판이 돌출되지 않고 입갑판과 같이 미관을 저해하는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현재 교토시 곳곳에는 역사적인 거리에서 지역주민의 생활과 생업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고, 전통문화가 유지되는 도시공간을 간직하고 있다. 높이 131m 교토타워 설립은? 교토시의 경관 정책이 본격화되기 전 큰 이슈가 일어난다. 지난 1964년 최고 높이 131m의 교토타워가 건립된 것. 지난 4월 1일부터 이 타워의 공식명칭은 니덱교토타워로 변경됐다. 타워 건립 당시는 고도제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도시 경관 등의 문제로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는 것이 교토시 관계자의 설명이다. 교토타워 건립 이후인 1966년 고도보존법 제정, 1972년 시가지 거대공작물 규제구역 지정, 1973년 시가지 대부분을 고도지구로 지정해 건물 높이 45m 이내의 제한 등이 이뤄진 것을 미뤄보면 당시 일었던 당시 논란을 짐작케하고 있다. 니덱교토타워 관계자에 따르면 “교토타워는 건립 당시 항공법에 의한 항공기의 안전 운항을 돕기 위한 항공 보안 시설로서의 기능으로 지어졌다”고 말했다. 교토타워 건설은 1958년 교토 중앙우체국 유적지 활용과 관련한 교토상공회의소 주최 간담회에서 신회사 설립을 결정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어 1959년 교토 중앙우체국 부지를 양도받아 주식회사 교토산업관광센터(현 교토타워주식회사)가 설립됐고, 사옥 건설이 계획됐다. 1961년엔 건설위원회가 설치돼 다음 해 건설계획의 기초가 마련됐다. 이 때만해도 타워 건립은 계획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관계자들에 의해 타워 건설 가능성이 제기됐고, 전문가 등이 참여해 건립 계획을 수립하면서 현재의 타워가 건립됐다는 것이다. 니덱교토타워의 높이는 피뢰침 부분까지 포함하면 총 131m로 교토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100m 높이에 위치한 전망대에서는 교토 전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교토가 자랑하는 세계유산을 비롯해 사찰, 유적지 등 문화유산과 시가지 등을 360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 전망실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또 타워 빌딩 내에는 호텔, 레스토랑, 스카이라운지, 쇼핑센터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니덱교토타워 관계자는 “타워 외관은 등대를 모티브로 해 시가지 옛집들의 기와지붕을 파도에 비유해 바다가 없는 교토 거리를 밝히고 있는 의미가 있다”면서 “오랜 역사를 지닌 타워는 쿄토의 상징으로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교토시의 매력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최고 높이 제한 폐지 이유는? 교토시가 그동안 유지해 온 경관 정책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교토시는 지난 2007년부터 시행해 온 건물 최고 높이 31m 제한을 폐지한다고 지난해 4월 발표했다. 본보의 이번 취재에서 교토시는 높이 제한 폐지와 관련한 규정 변경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높이 제한을 폐지하게 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고도 제한에 아파트 공급이 줄면서 주택 가격이 올랐고, 높은 주거 비용으로 젊은 층이 교토를 떠나고 있어 그 대응책을 마련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교토가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아파트 부지가 적은데 높이 제한 규제까지 있어 신규 공급이 대폭 감소한 게 주택 가격 상승의 주된 요인으로 보고 있다. 또 교토 인구는 2021년 한 해 동안 1만1900명이 줄었고, 일본에서 감소 폭이 가장 컸다. 교토시의 2021년 인구는 145만4000명 선으로 지난 2016년 147만1000명에서 매년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교토시의 출산율 감소보다는 30~40대 젊은 세대 전출이 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고도 제한 폐지라는 정책적인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오버투어리즘 대응정책 ‘눈에 띄네’ 지난 2022년 4월 기준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시의 중요문화재는 1898건으로 전국의 14%, 그 중 국보는 216건으로 전국의 19%를 차지하고 있다. 종교도시였던 교토는 사찰 건축이나 불상 등 불교미술, 정원 등 세계에서 유례 없는 독자적인 문화가 꽃피었다. 이와 함께 교회나 무덕전 등 근대건축이 상존하는 것도 매력이다. 이 같은 매력은 연간 5000만명이 넘는 관광객들 끌어들이고 있는 반면, 과도한 관광객으로 인해 지역 주민과 갈등을 초래하는 ‘오버투어리즘’ 현상은 고민거리 중 하나다. 교토 시민들에게는 교통 대란과 주요 관광지 주변 혼잡 등으로 몰려드는 관광객들이 마냥 반갑지만 않다는 것. 실제 기자가 지난 9월 25일 돌아본 교토 기요미즈데라(清水寺, 청수사)와 전통 가옥이 군락을 이룬 기온 거리는 평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관광객들과 관광버스 등이 몰려 혼잡했다. 청수사 인근에서 근무하는 요시다 아키라(56) 씨는 “버스에 관광객들이 많아 출퇴근이나 등하교하는 시민들의 어려움이 있다”면서 “사찰 인근 주차장은 만차가 돼 관광버스가 도로 위에 관광객을 내려주는 일도 허다하고, 좁은 도로는 차들로 뒤엉켜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오버투어리즘에 대응하기 위한 교토시의 대응책도 눈여겨볼 만하다. 먼저 관광지 혼잡도 예측 시스템이다. 스마트폰 사용자의 위치 데이터와 날씨 정보 등을 결합해 청수사, 교토역, 아라시야마 등 주요 관광지의 혼잡도를 5단계로 예측·분석해 관광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몰려 혼잡한 곳을 우회하거나 시간차를 두고 방문하라는 메시지다. 또 시내 일부 지역의 주차장 위치 및 실시간 공실 정보와 도로 교통정보 및 교통 혼잡 등의 상황도 제공하고 있다. 유명 관광지를 위주로 특정 계절이나 시간에 관광객들이 몰리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분산정책도 시행하고 있다. 비수기 고객 캠페인 진행, 아침·저녁 관광 콘텐츠 조성, 유명 지역 외 다양한 지역의 관광 매력을 전하고 있다. 일례로 하루 중 아침 관광으로 ‘걷기 좋은 자갈길’을 소개하거나 관광 비수기인 겨울철엔 평소 출입할 수 없는 신사 공개 등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또 관광객들이 캐리어를 끄는 소리를 줄이기 위한 세세한 해결방안도 시행 중이다. ‘빈손으로 하는 관광 정보’ 제공으로, 임시 수하물 보관 서비스 및 택배 서비스 센터 등의 위치를 홍보하고 있다. 이는 교토역 등 주요 장소에 1000엔을 내면 호텔까지 캐리어를 옮겨 주는 ‘핸즈프리 서비스’다. 교토시 관광정책국 관계자는 “시민 생활과 관광의 조화 아래 시민 삶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지속가능한 교토관광’ 실현을 위해 일부 관광지 혼잡 등의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면서 “교토 관광의 질과 만족도를 높이는 정책적인 대응을 추진해 관광·문화·경제의 선순환 창출로 연결시켜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상기후 탓일까? 무더웠던 9월이 지나자 가을이 서둘러 온 느낌이다. 짧은 가을의 시작을 알리듯 첨성대 동편 활짝 핀 핑크뮬리 단지에는 지난 20일 흐린 주말에도 인파들이 넘쳐났다. 안 그래도 짧은데, 이제는 정말 스치듯 지나는 계절이 될지도 모를 가을 풍경을 느끼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할 듯하다. 이 가을, 경주를 찾는다면 꼭 가보아야 할 단풍 명소 9곳을 소개한다. 핫스팟 외나무다리가 있는 ‘천년 숲 정원’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이 있는 ‘천년 숲 정원’은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이곳을 지나는 도로인 통일로를 기준으로 서쪽 영역과 동쪽 영역이 있는데 서쪽 영역에는 연구원 본관과 피크닉 쉼터, 숲 산책로 등이 자리한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동쪽 영역.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다양한 수목과 화초를 식재해 관리하면서 이를 일반에 공개하던 곳이었는데, ‘천년 숲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재개장했다. 입구로 들어서면 체험 정원과 가든 센터가 보이고, 이어 테마가 있는 소정원과 숲길, 신라의 역사가 녹아든 쉼터 등 다채로운 자연환경을 만날 수 있다. 그 중 포토스팟으로 유명한 외나무다리는 습지원, 일명 거울숲에서 있다. 가을에 특히 아름다운 포인트를 꼽으라면 메타세쿼이아 숲길과 마로니에라고도 부르는 칠엽수 숲길이다. 은행나무의 변신 ‘서면 도리마을’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던 서면 도리마을의 은행나무숲이 경주 가을 대표 명소가 됐다. 묘목 용도로 나무를 밀도 있게 식재한 덕에 은행나무가 양 옆으로 퍼지지 않고 마치 자작나무처럼 위로 쭉 뻗은 늘씬한 모양으로 자랐다. 그래서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외국의 어느 숲에 와 있는 듯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때 이곳의 풍경은 환상이다. 절정 시기를 살짝 지나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땅 위에 샛노란 양탄자가 깔린 모습 또한 비경이다. 은행나무 숲 외에 도리마을 내 포토제닉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볼거리를 더해주고, 은행나무 물드는 시기에는 주민들이 마을 회관 앞에서 먹거리 장터, 특산물 장터를 운영해 즐길 거리도 더한다. 통일전 은행나무길 통일전 영역 내에는 소담한 연못과 정자 화랑정이 있다. 또 갖가지 수목으로 아름답게 조경을 해 여유롭게 산책하며 둘러보기 좋다.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에 특히 아름답다. 통일전과 함께 은행나무 길도 꼭 감상해야 할 주요 포인트다.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통일전 앞으로 쭉 뻗은 약 2km의 도로 양옆 은행나무가 아름답게 물들어 걷고 싶은 길, 드라이브하고 싶은 도로로 만들어 준다. 억새가 장관을 이룬 ‘무장봉’ 함월산, 운제산과 이웃하고 있는 무장봉은 억새 장관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이 일대는 1970년대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장이었다. 목장이 문을 닫으면서 초지에 억새가 자생하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624m의 산 정상부까지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장관이지만, 땀 흘린 뒤에 얻는 절경은 100% 이상 만족으로 돌아온다. 탐방 안내소에서 정상의 억새군락까지 다녀오는 데 넉넉하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계획하면 무리 없다. 올라가는 길에 삼국통일 후 문무왕이 무기를 묻었다고 전하는 무장사 터가 있고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니 함께 보면 더욱 좋다. 수령 400년 은행나무 있는 ‘운곡서원’ 운곡서원은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과 조선시대 참판을 지낸 권산해, 군수 권덕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이곳의 가을 포토스팟은 서원 바깥에 있다. 서원 바깥 영역에 유연정이라는 별도의 정자가 있는데 그 앞에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400년에 달하는 거대한 은행나무로 나무줄기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가지에 샛노란 은행잎이 춤을 춘다. 은행나무와 정자 유연정을 함께 담으면 황홀한 풍광을 남길 수 있다. 세계유산과 단풍이 어우러진 ‘불국사’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때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때에 완성한 사찰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의 우수한 건축 기술과 예술성을 보여 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불국사와 다보탑,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등 국보가 가득하니 구석구석 찬찬히 불국사를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불국사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불국사에 방문해 보는 것이다. 불국사 가람 외부와 내부의 정원에는 단풍나무가 많이 식재돼 있다. 새빨갛게 물드는 단풍과 세계문화유산을 함께 담아 보자. 붉게 물든 단풍 감상 ‘경주 계림’ 계림은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으로 불렸는데, 닭과 관련된 김알지의 탄생 설화 때문에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리게 됐다. 이 천년의 숲에는 물푸레나무, 홰나무, 단풍나무 등 수령 지긋한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특히 아름다움을 더한다. 숲 사이로 산책로가 내어져 있어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서 사색의 가을 산책을 즐기기 좋다. 숨은 가을 명소 ‘용담정’ 용담정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이 포교를 하고 용담유사를 쓴 정자로 정자와 함께 수도원 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용담정과 멀지 않은 곳에 최제우 유허비가 있고 그 자리에 선생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니 함께 둘러보기 좋다. 이 일대는 동학의 발상지로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념관 건립이 완공돼 새롭게 문을 열기도 했다. 의미 깊은 동학 성지 용담정은 경주의 숨은 가을 명소이다. 용담정의 정문을 지나 정자인 용담정까지 오르는 길은 감탄을 자아내는 숲길이다.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곳곳에 있어 가을에 특히 아름답다. 유상곡수와 단풍의 조화 ‘포석정’ 경주 서남산 기슭에 포석정지가 있다.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던 놀이 ‘유상곡수연’을 위한 석조 기물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물은 구불구불 타원형의 물길을 따라 술잔을 움직인다. 신라인들의 풍류와 우수한 예술성을 동시에 보여 주는 유적이다. 이곳 포석정은 가을철이 되면 사진작가들의 인기 출사지로 변신한다. 유상곡수 유적 주변으로 나이 지긋한 단풍나무가 소담한 숲을 이룬다. 깊은 가을에 들러서 포석정의 만추를 꼭 경험해 보자.
오사카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해 나라시로 들어서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도시 풍경이 경주와 닮았다. 평성궁을 지나 나라시청까지 도심으로 가는 길에 고층 건물이 없고, 곳곳에 전통가옥들이 자리 하고 있는 모습도 어쩌면 유사하다. 고대의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를 떠올리며 바라본 나라시는 푸근하기 그지 없었다. 지난 9월 24일 본지 기자는 나라시청을 찾아 나라시의 문화유산을 활용한 관광정책 등에 대해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나라시 관광전략과 타데이시 켄지(立石堅志) 학예원, 문화재과 이케다 히로히데(池田裕英) 계장을 비롯해 부서별 담당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편집자주 [인터뷰] 일본 나라시 관광전략과 ‘타데이시 켄지’ 학예원 “1300년 전 역사 알리며 머무는 관광정책 수립에 주력” 일본 고도(古都) 나라시의 올해 3월 기준 지정문화유산은 총 978건. 이중 국보 121건, 중요문화유산 495건, 기념물 41건 등 국가지정문화유산만 총 661건에 이른다. 또 나라현 지정문화유산 154건, 나라시 지정은 163건으로, 말 그대로 유적의 보고다. 1300년 전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시의 역사적 가치가 지정문화재 수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 특히 나라시는 지난 1998년 헤이조쿄(平城京), 동대사, 약사사 등 8개 문화유산이 하나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에 따라 나라시는 세계유산을 중심으로 한 관광 활성화 정책을 추진해오고 있으며, 현재도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특히 인접한 오사카시와 교토시에 비해 부족한 숙박 관광객수 증가를 위한 정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나라시 매력 발신 “나라시를 찾은 관광객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즐길 수 있도록 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관광프로그램을 개발·시행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이자 사명이다” 나라시 관광전략과 타데이시 켄지 학예원은 나라시 문화재 활용 관광정책의 목표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나라시청에서 문화재와 관광 등 관련 부서에서 업무를 두루 거친 베테랑 공무원이다. 타데이시 학예원은 “나라시의 문화재 활용 관광정책으로는 먼저 전 세계를 대상으로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며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등 나라시의 관광자산을 홍보하는 팜플릿과 SNS, 홈페이지를 활용해 그 매력을 전 세계에 발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민간단체인 나라시 관광협회와 손을 잡고 세계유산과 연계한 여행루트와 상품 등을 개발해 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머무는 관광 위해 다양한 정책 개발·시행 타데이시 학예원은 나라시 관광의 현황과 향후 과제도 언급했다. 나라시 ‘관광입객수조사’에 따르면 지난 2023년 나라시를 찾은 관광객은 1219만9000명. 이중 숙박객수는 174만8000명으로 전체 방문객의 14.3%였다. 타데이시 학예원은 “현재 나라시의 가장 큰 문제는 매력적인 문화유산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인접 도시인 교토, 오사카에 비해 숙박 관광객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철도회사, 여행사, 관광협회가 협력해 8개 세계유산을 야간에 즐길 수 있는 이벤트, 그리고 이른 아침에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있다”면서 “또 나라현과 협력해 수준급의 호텔을 유치해 숙박 여행객을 늘릴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나라시는 야간 관광프로그램으로 ‘조용한 체험 관광’과 ‘야간 즐길거리’ 등 투트랙으로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민간단체와 지역 주민, 그리고 사원의 협조를 얻어 등불축제, 야간점등, 이벤트 등을 열고 있다. 맛집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나라시의 식당 개업과 영업 지원 덕분에 관광객 취향에 적합한 식당이 늘고 있다는 것이 타데이시 학예원의 설명이다. 그는 “번화가와 즐거운 분위기가 많은 오사카와 경쟁하기보다는 나라시 특유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식당에서 관광객들이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밝혔다. 또 나라시는 관광객들이 숙박 뒤 이른 아침 사찰 등지에서 참배하는 프로그램, 새벽 운치가 아름다운 동대사와 나라공원의 사슴 등 매력적인 프로그램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킬 계획이다. 8개 세계유산 투어를 통해서는 1300년 전 나라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다. 문화유산 관람을 위해 나라시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그 문화유산의 역사적인 배경과 가치를 제대로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전반적인 관광정책을 수립하고 있다는 것. 타데이시 학예원은 “나라시가 일본의 도읍이었던 시기가 1300년 전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관광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나라시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관광객들에게 흥미도 유발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개발해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나라시대 이외의 시대 어필 ‘주력’ 나라시는 1300년 전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시대 이외의 시대도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세기 말 일본 에도시대 이후의 역사적인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나라마치’다. 과거 나라의 상인들이 주로 머물렀던 이곳은 음식점, 카페, 갤러리, 잡화점, 숙박시설이 들어서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타데이시 학예원은 “나라마치는 에도시대, 18세기 말쯤에 세워진 건물들이 지금까지도 남아 가장 일본다운 거리로 보존되고 있다”면서 “나라시대 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 속에서 여러 시대의 모습을 어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는 관광객수가 코로나19 펜데믹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도 한국, 중국, 특히 대만에서도 많이 오고, 또 유럽 관광객들은 장기간 숙박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나라시는 오래 머무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긴 시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고 하나씩 시도해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뷰] 나라시 문화재과 ‘이케다 히로히데 ‘계장 “문화유산 활용해 다양한 관광프로그램 개발” 나라시 문화재과는 문화유산의 발굴과 정비 등 고유 업무와 함께 발굴·정비·복원현장 공개해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하나의 사례로 나라시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특별사적·특별명승 ‘궁터정원(宮跡庭園)’이다. 이 정원은 나라시대 대규모 정원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귀중한 유구다. 나라시대 뛰어난 정원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설계와 정원 축조방법 등을 알 수 있는 극히 드문 사례로, 1978년 특별사적, 1992년에는 특별명승으로 지정됐다. 특히 돌을 깔아서 만든 연못은 양호한 상태로 발굴돼 진품을 그대로 공개하고 있다. 1980년 발굴을 시작해 정비·복원을 거쳐 1985년 공개된 이 정원은 열화 현상으로 2014년부터 6년간에 걸쳐 재정비했고, 그 현장을 공개했다. 이케다 히로히데(池田裕英) 나라시 문화재과 계장은 “당시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전통 방식으로 궁터정원을 정비했다”면서 “현장을 공개함에 따라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정비 과정의 어려움을 시민들이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문화재과 차원의 문화유산 활용 방안에 대한 설명도 이어갔다. 이케다 계장은 “나라시대 조성된 평성궁 내 동원정원, 사찰 내 정원 등 고대 정원 투어를 개발해 시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며 “또 이들 정원을 활용해 국화전시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한국의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과 같이 나라시대에 실제 행해졌던 행사들을 재현하고 있다. 특히 평성궁의 위사대 의식 등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며 “문화재를 활용한 다양한 관광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시도들을 지속해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삼효자 월성김공지비(三孝子 月城金公之碑) 경주 시내에서 오릉 주차장 입구에 이르면 도로 왼쪽에 토담으로 된 한옥 고가가 있다. 고가 앞에는 삼효각(三孝閣)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목조기와의 대문을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 동편에 목조와가로 된 잘 정비 보존된 비각이 있다. 이 비각이 월성김씨 삼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삼효비(三孝碑)를 보호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경주 김씨 문중의 육대조이며 병조판서 충암공 귀일의 손자이신 응벽·응규·응정(應壁·應奎·應井)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을 왕명으로 건립한 비각이다’고 기록돼있다. 비문에 따르면 삼형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신을 묻은 채 자신들은 비바람과 눈서리를 피해 편안히 집으로 돌아설 수 없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꿇어 앉아 시묘(侍墓)에 비바람과 눈서리에도 중단함이 없었다. 묘에 예를 올릴 때는 항상 섬돌 위에서 곡을 하였다 한다. 그래서 삼형제가 밟고 디딘 섬돌이 뚫어져 깊이가 몇치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여름날 저녁 뇌성우가 치며 비바람이 크게 일고 문득 소리가 나자 삼형제는 머리와 귀를 모으고 들으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깜짝 놀라 움막 밖으로 나와 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뒤 또다시 소리가 나서 이상히 여겨 신주(神主, 위패)를 껴안고 움막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움막의 북쪽산이 좌우로 무너져 내려 삼형제가 거처하던 움막을 덮쳤으나 삼형제는 무사했다. 이는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에 하느님과 조상이 돌봄이 있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삼형제는 신춘(神春)이라는 개를 길렀는데 집 소식을 알고 싶으면 편지를 써서 개의 목에 달아 집으로 보내면 개는 능히 그 뜻을 알고 삼형제의 집을 왕복했다. 집에서도 글을 써서 삼형제에게 소식을 전하는 등 집과 묘 사이를 왕래하는 심부름을 맡아 했다. 이 개 또한 영리함에 앞서 삼형제의 지극한 효행에 감동했으리라. 3년이 지나 상복을 벗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침저녁으로 좋은 음식과 의복을 갈아 입지 않고 계속 조상의 사당뵙기를 종신토록 했다. 이 같은 삼형제의 출중한 효행은 널리 알려졌다. 후일에 명종이 삼형제의 행적을 알게되면서 명종 16년(1561년) 효자 정려를 내렸다. 또 이들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 귀감을 삼기 위해 삼효자각(三孝子閣)을 건립했다. 효자월성김공휘인학정려비(孝子月城金公諱仁學旌閭碑) 경주시 진현동 중리마을에 깨끗하게 정비·관리되고 있는 목조기와의 비각이 있다. 효자월성김공휘인학정려비(孝子月城金公諱仁學旌閭碑)다. 비문에 따르면 효자 김공(金公)은 정조 22년(1798년)에 태어나 월성최씨 재택(在擇)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김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남달리 어질고 섬김을 알아 한시도 부모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 앞에 나아가고 물러감과 말씀에 대답도 모두 부모님의 뜻을 따라 기쁘게 했다. 공은 연일군에 살았는데 자라면서 집안이 극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고, 시간이 날 때는 장작을 팔아 쌀·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사서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했다. 김공의 효행에 대한 소문은 인근 고을에까지 전해져 그를 칭송하는 일이 그치지 않아 좋은 본보기가 됐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키우는 소등에 나무를 싣고, 또 자신이 등짐을 지고서는 성내에 있는 장에 갔다. 나무를 팔아 부모님이 즐겨 먹는 생선과 양곡을 사서 소등에 얹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을 뒷산 고개에 이르자 난데없이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에 나타나 아버지를 해치려 했다. 기겁을 한 김공은 소의 코뚜레를 풀어주고 성을 내어 고함치기를 “너는 산군(山君)이니 부자의 예절을 알 것이다. 나의 부친을 해치지 말고 원컨대 내 몸으로 대신하거라”고 꾸짖었다. 이어 호랑이를 잡고 때리며 구르며 죽음을 각오하고 아버지를 구원했다. 같이 간 소도 주인이 해를 당함을 보고 怒號(노호, 성내 소리 지름)하며 범에 달려 들어 뿔로 받고 발로 차 마침내 호랑이를 물리쳤다. 그 소는 집으로 달려가 방황하며 슬피 우니 이에 놀란 집안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보니 소가 왔던 길로 다시 달려갔다. 집안사람들이 소를 쫓아 현장에 가니 아버지는 무사하나 아들 김공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오호라! 비록 소가 말 못하는 무지한 미물이나 주인의 효성에 음직여 의를 본받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로다’ 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져 가히 특별한 글을 쓸만한 것으로 사림(士林·선비)에서 글을 써 올리니 정조 임금께서 상으로 김공에게 효자로 정려했다. 또 소에게는 먹이를 내리는 한편 소를 팔지 못하도록 했다. 연일군 오천에 있는 김공과 소의 무덤을 월성김씨 문중에서 1967년(丁未) 경주시 진현동 중리마을 현재 위치에 효자각을 옮겼다. 현손 김원극이 비문을 쓰고, 높이 143cm, 넓이 46cm, 두께 23cm의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충효각에서 200m 떨어진 토함산 서쪽에 김공과 소의 무덤을 나란히 이장해 역사에 전하게 해 무릇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게 하였다. “효는 곧 오륜의 으뜸이고 백행의 근원이니 이 어찌 중하고 크지 않겠는가?” 이 비각은 지난 2015년 후손들이 개축을 통해 현재 깨끗하게 관리되면서 김공의 효 사상이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이상욱 기자 lsw8621@hanmail.net
일본 나라시의 헤이조쿄(平城京)는 710년부터 784년까지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헤이조쿄의 도성 영역은 남북 4.8km, 동서 4.3km의 남북으로 긴 방형을 띤다. 이곳은 지난 1998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헤이조쿄는 일본 고대 왕궁인 헤이조큐(平城宮·평성궁), 주작문, 동원정원 등 유적을 포함한 방대한 왕궁터다. 이 왕궁터에서 발굴·복원된 문화유산들은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경주 월성 등 핵심유적 발굴·복원 사업에서 참고해야 할 모범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 당국은 이곳 유적의 발굴과 복원을 위해 50년, 100년 앞을 내다보며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 실천해왔다. 헤이조큐 옆에 자리한 나라문화재연구소는 도성과 왕궁터에 대한 방대한 역사적 근거를 하나씩 쌓아가며 지난 1952년 설립 이후부터 기획발굴을 해오고 있다. 나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왕궁터에 대한 첫 조사는 19세기 중반에 이뤄졌고, 이후 주춤하던 학술발굴조사는 1950년대 본격화됐다. 대규모 발굴을 시작한 계기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시작된 개발과 관련 깊다. 먼저 1953년 11월 헤이조큐 동쪽 부지에 미군 캠프의 요청으로 농로 확장공사 중 대형주혈 등 대규모의 유구가 발견됐다. 1959년에는 당시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던 부지에 킨키철도주식회사의 조차장 건설 소식이 전해지자 학자와 민간인 등에 의해 전국적인 헤이조큐 보존운동이 전개됐다. 이어 논의 끝에 1963년 헤이조큐 전역이 사적으로 지정되고, 이곳의 보존과 발굴조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64년엔 국도24호선 우회도로 건설계획이 입안돼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동원이 발견됐다. 이 같이 큼직한 이슈를 거치면서 헤이조큐의 보존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어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이즈음 나라문화재연구소는 1963년 헤이조큐 발굴조사부라는 별도 조직을 만들어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나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을 위한 계획과 시행은 치밀하게 이뤄졌다. 20세기 초 헤이조큐 전체 유적군 분포지도를 작성했고, 1980년대에는 헤이조큐를 포함한 도읍 전체 유적들의 항공사진과 유물지도화 작업도 마쳤다. 지도 하나로 전체 발굴 현황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같은 작업과 발굴, 고증연구 등을 거쳐 헤이조큐 내에는 1990년대 이래 남쪽 정문 주작문을 비롯해 관청터, 동원터 등이 복원됐다. 이들 유적은 50~60년대 그 실체를 확인하고, 수차례 가상 모형실험 등을 하면서 10~20년간의 복원 과정을 거쳤다. 2010년 복원된 정전인 대극전의 경우 원래 유적터 흔적을 보존하고 그 위쪽에 기단을 만들었으며, 지진에 대비한 내진 설계까지 갖췄다. 2022년엔 주작문과 대극전 사이 왕궁으로 들어가는 대극문(大極門)을 복원했다. 발굴과 복원 방식을 두고 학계와 주민들 간 논의도 수십년간 끊임없이 이뤄졌다. 1852년 헤이조쿄 유적의 복원연구가 처음 진행된 이래 메이지시대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 기다 사다키치 등의 논쟁이 있었고, 숱한 주민과 전문가 토론회 등을 통해 궁궐터의 복원 범위와 활용 등에 대한 원칙을 공유해왔다. 또 어떠한 경우든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유적 정보는 조속히 상세하게 공개돼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주민들과 소통해왔다. 나라문화재연구소 우치다 카즈노부(井上 雅博) 박사는 “과거에는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렸고, 지금은 복원 현장을 공개하고, 동영상을 제작해 공개하는 등 소통을 지속해오고 있다”면서 “헤이조쿄는 50~100년 단위의 장기 발굴계획을 수립·추진해 세계유산 등재 전 이미 복원 계획이 수립됐고, 이들 계획을 일괄적으로 추진해 현재의 복원까지 이르게 됐다”고 밝혔다. 나라시대 중심 건축물 대극전 복원 나라시대 궁궐의 중심 건축물인 대극전은 지난 2010년 4월 복원을 완료했다. 대극전은 일본 천황의 즉위 등 국가의식을 행할 때 천황이 출어(出御)하는 고대 왕궁의 중심 시설이다. 현재 복원된 대극전은 제1차 대극전으로 나라시대 전반의 건물이다. 나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대극전은 1970년, 1971년, 1980년 발굴조사를 실시한 뒤 1982년 복원 초안을 완성했다. 1992년부터 대극전 복원 연구에 들어가 1/100, 1/10 모형을 제작했고, 기본 설계와 시설 설계 등을 거쳐 2001년 복원공사를 시작해 2010년 준공했다. 복원된 대극전은 정면 44m, 측면 20m, 높이 27m로 평성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나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대극전 복원은 유구와 기와, 석재 등 발굴된 유물이 가장 큰 근거가 됐다. 이를 토대로 기단 형태와 건물의 평면, 규모를 고증연구를 통해 복원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문헌 사료나 회화 자료도 근거가 됐다는 것. 다만, 목조건물은 형태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한정돼있어, 일본 내 현존하는 고대 건축물을 연구해 복원된 기단과 건물 평면에 일치하는 건물을 추정해 복원했다. 특히 중층 건축의 기본 구조는 현재 유일한 중층인 호류지(法隆寺, 법륭사) 금당을 토대로 했고, 건물의 공포나 처마 등의 형태는 시대가 비슷한 야쿠시지 동탑을 근거로 했다. 연구소가 대극전 건물의 근거로 삼은 ‘호류지’는 나라현에 있는 고찰로, 일본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이다. 요메이천황(用明天皇)의 아들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601∼607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대극전 복원에는 현존하는 고대 건축의 구조, 의장, 기법을 철저히 재분석하고, 기술의 원리를 지키면서 유구에 맞는 형태를 갖춰나갔다는 것이 연구소측의 설명이다. 평성궁 위용 짐작케하는 주작문 복원 나라시의 평성궁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1998년 복원된 주작문이다. 평성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주작문은 폭 25m. 측면 10m, 높이 22m 규모로, 나라시대 당시 평성궁의 위용을 짐작케하고 있다. 주작문의 위치와 규모는 1964년 발굴조사에서 처음 확인됐다. 이후 수차례의 조사를 거쳐 1989년 복원·정비를 앞두고 전면 재발굴해 기둥 중심 간 거리 5m, 정면 5칸(약 25m), 측면 2칸(약 10m)임을 밝혀냈다. 주작문의 복원은 반다이나곤에코토바(伴大納言絵詞)에 그려진 헤이안궁의 주작문이 이중문인 점을 근거로 했다. 또 주작문의 기본 구조는 호류지 중문을, 주작문의 부재 크기와 비례 관계 등은 나라시에 있는 도다이지 데가이몬(東大寺 轉害門·전해문) 등을 참고했다. 또 주작문은 나라시대 전기의 건축물로, 양식은 같은 연대인 야쿠시지 동탑의 기법과 의장을 참고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연회의 의식 행해진 ‘동원정원’ 복원 평성궁 동쪽에 위치한 동원정원은 10여년에 걸친 발굴과 고증연구를 거쳐 지난 1995년 10월 복원됐다. 동원정원의 특징은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 연못에는 물가를 따라 못 아래로 큰 옥석을 띠 모양으로 빈틈없이 깔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후기는 못 아래부터 기슭까지 전면에 걸쳐 자갈돌을 깐 얕은 연못 모습이다. 연회와 의식 등이 행해진 장소로 이용된 동원정원에는 중앙건물과 북동건물, 누각, 정문, 평교, 반교 등 목조 다리 등이 복원됐다. 이들 건물 역시 호류지 등의 고대 건축물을 근거로 삼았다. 미래 세대에 물려줄 프로젝트 연구도 병행 195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헤이조쿄는 현재까지도 발굴과 고증,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2026년 복원 예정인 동루(東樓)에 이어 향후 서루(西樓)와 성벽 및 회랑(回廊) 등의 복원도 추진 중에 있다. 이와 함께 일본 당국은 복원된 문화유산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한 체계적인 유지 관리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나라문화재연구소 니시다 노리코(西田 紀子) 상석연구원은 “근래 들어 복원에만 치중하지 않고, 주작문 등 복원 후 상당 시간이 지난 문화유산들을 보존하는데도 힘을 쏟고 있다”면서 “복원 유산들을 유지하고, 미래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프로젝트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백제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중 하나다. 기원전 18년 건국돼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31명의 왕이 재위했다.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해 63년(475~538),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해 약 122년(538~660년)을 영위하는 등 두 차례 천도했다. 부여군은 웅진성에서 천도한 백제 왕조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있던 곳이다. 관북리유적서 사비성 실체 하나씩 베일 벗어 사비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는 부여 관북리유적은 지난 40여년 간의 발굴조사를 통해 대형건물지(35m×18.5m)를 비롯한 왕궁 주요 시설과 토성 등이 확인됐다. 1983년 9월 충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돼 있다가 2001년 2월 사적으로 승격됐다. 지난 2015년 7월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1982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해 1983년 방형석축연지, 1988년 ‘북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 발견, 1992년 백제시대 도로유적과 배수시설 등이 확인됐다. 특히 중심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는 정전건물로 왕궁의 일부 시설인 것으로 보고 있다. 부여국립문화유산연구소와 부여군은 관북리유적 발굴 1단계 사업을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완료했다. 올해부터 2028년까지 2단계, 2038년까지 3단계 사업으로 나눠 발굴을 진행할 계획이다. 특히 지난해 관북리유적 16차 발굴지에서 백제 멸망 직전 마지막 전투 흔적으로 여겨진 칠피갑옷들과 함께 왕이 정무·의례를 주관하던 건물터와 연화문전 등이 확인됐다. 발굴된 건물 규모는 남북 방향으로 60m에 이르는데, 주변에선 폭 8~9m의 도로와 교차로, 상수도 유적도 발견됐다. 이에 따라 연구소는 2028년 2단계 발굴 사업을 완료하면 사비왕궁의 밑그림이 그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왕이 정사를 처리하던 정전 발굴이 머지 않았음을 시사한 것. 연구소측은 정전이 확인되고 왕의 사적 공간인 내조가 발굴되면 6세기 중반 이래의 백제 관직제도인 22부사의 실체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북리유적 뒤쪽은 사비시대 왕궁의 배후산성인 ‘부소산성’이다. 평소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전쟁 등으로 위급할 때는 방어시설로 이용된 중요한 산성이다. 지금도 백제시대 축조했던 성벽(토성)을 확인할 수 있다. 서쪽으로 백마강을 끼고 있는 부소산성 내에는 낙화암과 고란사 등 백제의 전설과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완벽한 균형미·비례미 자랑 ‘부여 정림사지’ 세계유산인 정림사지는 사비도성 중앙에 위치한 절터다. 이곳에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감성과 기술을 보여주는 국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 8.9m의 석탑은 탑의 원형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탑의 구조적 특징과 함께 완벽한 균형미와 비례미를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역사의 아픔도 탑신에 남아 있다. 백제 사비성을 침공한 당라나 장수 소정방이 탑의 1층 탑신에 승전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새겨놓았다. 이 때문에 과거 정림사지오층석탑은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발굴조사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고 쓰여진 명문기와가 출토된 이후로 절터는 정림사지, 탑은 정림사지오층석탑으로 불리우게 됐다. 이외에도 부여군에는 사비도성 동쪽에 위치한 성벽인 ‘부여 나성’과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있는 ‘부여 왕릉원’이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복원에 준하는 재현 ‘백제문화단지’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백제문화단지’가 지난 2010년 9월 문을 열면서 당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위치한 이 단지는 1993년 백제문화권 특정지역으로 지정된 지 17년, 1998년 기공식 이후 12년 만에 이뤄진 대역사로 평가받고 있다. 329만4000㎡의 터에 역사재현촌 등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설은 물론 위락, 쇼핑, 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투입 예산만 8077억원(국비 1709억원, 지방비 2145억원, 민자 4223억원)이다. 이 단지는 크게 △역사재현촌(148만4000㎡) △연구교육촌(16만㎡) △민자구역(롯데리조트·165만㎡) 등으로 나뉜다. 역사재현촌에는 왕궁과 능사(陵寺), 개국촌(開國村), 민속촌(民俗村), 군사통신촌(軍事通信村), 장제묘지촌(葬祭墓地村), 백제역사문화관 등이 들어섰다. 연구교육촌에는 2000년 3월 개교한 한국전통문화학교가 입주해 있다. 특히 사비궁은 백제역사문화의 절정을 이룬 사비시대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했다. 궁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천정전과 동쪽의 문사전, 서쪽의 무덕전 등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형태로 모두 14개동으로 이뤄졌다. 백제의 사찰 능사는 부여 능산리사지를 원형 그대로 재현했다. 또 높이 38m에 달하는 능사 오층 목탑은 국내 최초로 재현된 백제시대 목탑이다. 롯데그룹이 투자하는 민자구역에는 객실 322개를 갖춘 콘도미니엄과 아울렛, 골프장(18홀)이 조성돼있다. 당초 롯데그룹이 2017년까지 조성할 계획이었던 스파빌리지, 에코파크 등의 시설은 중국과의 문제와 코로나19 펜데믹 등으로 미뤄졌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충남도와 롯데그룹 간의 협의를 통해 1200억원 규모의 잔여 민자사업 투자계획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단지 내 루지, 미디어아트갤러리, 한옥빌리지, 글램핑장 등을 2026년 완공 목표로 추진 중이다. 충남도에 따르면 백제문화단지는 연간 25만~29만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또 민자시설인 콘도미니엄과 아울렛 등의 방문객은 연간 15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어 부여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인터뷰] 이강복 충남도 학예연구사 “백제문화단지 복원에 준하는 재현으로 보편적 가치 높여” “백제문화단지는 철저한 고증연구를 통해 백제 역사문화의 절정을 이룬 사비시대 왕궁을 복원에 가깝게 재현한 역사와 문화의 복합공간이다” 이강복 충남도 문화유산과 학예연구사는 백제문화단지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백제문화단지의 착공부터 현재까지 30년 가까이 근무하며 지켜온 산증인이기도 하다. 백제문화단지를 재현하면서 백제 시대 건축양식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런 논쟁에 대해 그는 “490회 이상의 전문가 자문을 거쳐 백제의 유구 및 유물에 대한 고증연구를 진행했다”면서 “당시 수많았던 논쟁이 지금의 단지 재현에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했다. 또 “조성 과정에서도 모든 건축물에 대해 고증을 거쳤고, 대목장 등 장인들이 투입돼 전통방식으로 건축했다”면서 “당시 참여했던 장인들을 비롯해 자문 및 고증팀들이 경주 월정교 복원 사업에도 투입됐다”고 밝혔다. 백제문화단지 조성 예산과 관련해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약으로 시작해 이명박 전 대통령 때 준공한 국책사업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며 “국가사업으로 추진해 예산 지원의 연속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단지 운영과 관련해 “준공 직후에는 충남도에서 직영해오다 2018년부터 민간위탁방식으로 전환됐다”면서 “현재 운영은 롯데그룹, 관리는 충남도에서 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어 시설 개선·보수가 용이하고, 예산면에서도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문화유산의 복원에 대해서는 “보존이냐 복원이냐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역사성과 진실성이 보장되면 복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며 “복원 후 추후 역사적인 사실이 더 밝혀지면 그때 수정해 나가면 된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백제문화단지 준공 이후 국내에서 문화유산 복원에 대한 개념도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단지를 조성하면서 고증연구와 건축물 축조한 기술 등 쌓인 경험은 복원 및 재현 사업의 기본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면서 “고대시대 건축물들에 대한 복원이 단지 재현 이후 충분히 가능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변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제문화단지는 현재도 복잡하게 평가되고 있지만 백제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민간시설에서 휴양도 할 수 있다”면서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공유·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보편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천년고도 경주의 핵심유적에 대한 정비·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들 문화유산을 활용한 다양한 관광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크다. 이번 호에서는 국내 고도 중 하나인 공주시의 문화유산 복원·정비 현황과 활용 정책 등을 살펴본다. 본보 기자의 현지 취재는 지난 8월 29일 진행됐다. /편집자주 백제의 대표적 문화유산은 공주, 부여, 익산 등 3개 도시에 걸쳐 있는 백제역사유적지구 8곳으로 크게 압축된다. 백제 후기(475~660년) 문화를 대표하는 왕성, 사찰, 왕릉, 외곽성 등 8개 문화유산으로, 지난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공주의 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왕릉원, 그리고 익산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 8곳이다. 이들 문화유산을 통해 1400여년 전 찬란했던 백제문화와 백제가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으로 활약한 국제성도 엿볼 수 있었다. 4대 문 모두 복원 완료 ‘공주 공산성’ 공주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중 하나인 공산성은 웅진백제시기(475~538년)를 대표하는 왕성이다. 공주시에 따르면 공산성은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인조 이후 석성으로 개축했다. 백제 때는 웅진성, 고려시대 공주산성·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현재는 동쪽 735m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는 석성이다. 공산성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475년) 후 성왕 16년(538년)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북쪽으로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총 2660m 길이의 성벽을 쌓은 공산성은 금강을 접한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산성 내 왕궁지와 왕궁부속시설지 등에서는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연못터가 확인됐고,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됐다. 특히 공산성의 4대 문은 모두 복원됐다. 동쪽에는 영동루, 남쪽에는 진남루, 북쪽에는 공북루가 있으며, 서쪽에는 현재 공산성 출입문으로 사용되는 금서루다. 그중 터만 남아 있던 영동루와 금서루는 공산지(公山誌)의 기록을 근거로 1993년 복원을 완료했다. 진남루와 공북루는 조선시대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문으로, 진남루는 1971년 모두 해체하고 원래대로 복원했고, 공북루는 1964년 보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총 7기 복원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시대 왕과 왕족의 무덤이다. 현재 무령왕릉을 포함해 왕릉원 1~6호분까지 총 7기가 복원됐다. 1~5호분은 돌로 방과 통로를 만들고 흙을 덮어 만든 굴식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을 터널 형태로 쌓아 만든 벽돌무덤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시대 제25대 왕과 왕비를 합장한 무덤으로, 1971년 발굴 당시 1500년 전의 화려한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는 상태로 발굴돼 세간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문화유산 활용 관광프로그램은? 공산성 금서루에는 대표적인 상설 문화관광 프로그램인 ‘웅진성 수문병 근무교대식’이 매년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공주시에 따르면 백제 왕성 성곽을 지키는 수문병 모습을 재현하는 것으로, 올해는 혹서기를 제외하고 매주 토·일요일과 공휴일마다 총 5회씩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매회 1000명 이상 관람객들이 관람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 활용 관광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공주시의 설명이다. 공산성 서문인 금서루 앞 회전 교차로에 지난 2021년 9월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 동상도 눈길을 끈다. 무령왕 동상은 높이 9.47m에 무령왕이 중국(양나라)에 ‘갱위강국’(更爲强國) 선포 국서를 보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좌대 안에 구동부를 설치해 동상이 360도 회전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무령왕릉 발굴 50년, 갱위강국 선포 15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무령왕 동상을 건립했다. 회전할 수 있는 동상은 바라보는 방향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면 무령왕릉이 있고, 북쪽은 고구려를 격파하고 갱위강국을 선포한 대왕의 위엄, 남쪽은 백성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군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공주시 관계자는 “무령왕은 백제의 가장 위대한 준주이자 공주의 자긍심 그 자체이다”며 “무령왕 동상은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역사도시로서 공주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공주시는 다양한 관광프로그램을 개발·시행하고 있다. 공산성과 무령왕릉 사이를 도보로 이동하며 백미고을, 회랑, 황새바위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지난 2022년부터 추진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유산길로 유명한 ‘한옥마을 둘레길’은 공산성과 국립공주박물관, 고마나루 솔밭길 등을 거닐며 백제의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백제 문화유산 활용 백미 ‘백제문화제’ 백제의 문화유산을 활용한 관광프로그램의 백미로 손꼽히는 축제는 올해 제70회를 맞은 ‘백제문화제’다. 백제문화제는 백제의 왕도인 충남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같은 일정으로 각각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달 28일부터 10월 6일까지 9일간 공주시에서는 금강신관공원과 공산성, 제민천 일원에서 열렸다. 부여군은 백제문화단지, 구드래, 정림사지 일원에서 개최됐다. 70년 전통을 지닌 백제문화제가 백제역사유적지구와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고 한다. 행사를 주관하는 (재)백제문화제재단에 따르면 백제문화제는 지난 1955년 부여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백제대제집행위원회를 구성해 ‘백제대제’를 거행하며 시작됐다. 11회째인 1965년까지는 부여군이 단독 개최해왔고, 행사 주체가 충청남도로 이양된 1966년부터는 행사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공주시가 백제문화제에 참여해 부여군과 동시에 진행했고, 부수적인 문화행사가 증가했다. 1975년(제21회)부터 4년간은 또 다른 변화를 시도했다. 백제문화제가 공주와 부여 이외에 대전에까지 확대 개최한 것. 충남 도내 전 지역으로 백제문화제의 열기를 높이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백제의 역사성과 상징성이 부족했던 대전의 백제문화제는 전시 위주의 행사로 진행됐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1978년을 마지막으로 대전 개최방식은 중단됐다. 이후 1979년부터 2006년까지는 홀수년에 공주, 짝수년에는 부여에서 대제(大祭)와 소제(小祭)의 개념으로 번갈아 개최했다. 백제문화제가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지난 2007년부터다. 당시 ‘통합개최’를 주관하는 조직으로 재단법인 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현 백제문화제재단)를 설립해 관주도형에서 민간주도형 축제로 전환했다. 이 시기에 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발전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이 재단 측의 설명이다. 특히 2010년(56회) 9월 18일부터 10월 17일까지 30일간 정부공인 국제행사로 열렸던 ‘2010세계대백제전’은 전국에서 가장 성공한 축제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공주시에 따르면 당시 369만명의 관람객이 방문했고, 2499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거뒀다. 또 백제문화제는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가 국내에서 12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고,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널리 각인시키는 축제로 성장해오고 있다. 공주시 관계자는 “백제문화제는 축제를 넘어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통해 세계적인 축제로 도약하도록 민관이 힘을 모아 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상욱 기자 lsw8621@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손(祖孫) 간의 남편에 대한 열행 전해 내려와 -열부유인충주지씨·영산신씨 양세정려각(烈婦孺人忠州池氏·靈山辛氏 兩世旌閭閣) 경주시 충효동 문화중·고교를 지나 야척마을로 들어서면 왕복 2차선 도로 왼쪽에 아담한 한옥 목조 건물의 비각이 있다. 이 비각 내에는 열부유인충주지씨(烈婦孺人忠州池氏)와 열부유인영산신씨(烈婦孺人靈山辛氏)조손 간의 비석 2기가 자리하고 있다. 왼쪽 비는 열부유인지씨정려각(烈婦孺人池氏旌閭閣), 오른쪽 비는 열부유인신씨정려비(烈婦孺人辛氏旌閭碑)라는 비문을 새겨 이들의 효행을 전하고 있다. -열부유인지씨정려각 열부유인지씨정려각의 주인공인 지씨 부인은 지석절(池錫浙)의 딸로 태어나 평해(平海) 황치술(黃致述)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삼종(三從)의 도를 지키면서 치밀하게 계획해 밤마다 길쌈을 하며 재산을 모았다. 또 진심으로 남편을 내조하며 착한 배필이 되어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살았다. 황씨 집안은 평해고족(平海 古族)으로 대대로 상조(上祖)는 봉군(封君) 받고, 중조(中祖)는 조관(朝官)으로 좋은 가실(家室)을 이뤘다. 중년에 들면서 액이 있어 남편이 병이 들었다. 지씨 부인은 남편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 간절하니 산도 가히 뚫고 돌도 가히 통하는 법, 정신이 일도에 무엇이 구애되랴. 이 비의 비문에는 지씨 부인은 남편을 위해 ‘흰 칼날 들이대어 자신의 허벅다리 살점을 베어내고, 좌우의 다리를 한번 베고 두 번 벤다’고 기록했다. 이어 ‘선혈이 흘러내려 선약같이 떨어지니 귀신이 감동하고 천리가 도운지라 남편은 부인 정성 의뢰하고, 부인은 열녀되니 저 하늘 크게 밝아 그 절개 감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부인의 정성에도 남편은 1934년 사별했다. 부인은 손수 옷을 지어 여한 없이 남편을 보냈다. 그후 1971년 지씨 부인도 남편 따라 죽으니 살아서는 한 집이요,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안장됐다. -열부유인신씨정려비 열부유인신씨는 지씨 부인의 손자 며느리다. 신씨 부인은 승지(承旨) 신상동(辛尙憧)의 후손인 덕술(德述)의 딸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해 어버이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고, 항상 규문(閨門) 안에 거처하며 음식, 길쌈, 바느질 등 부녀자가 할 일을 잘 익혀 한 사람이 능히 백 가지 공부를 다했다고 한다. 또한 단아해 가히 내칙편(內則篇)에 편입될만했다고 전한다. 신씨 부인은 16세 때 평해황씨 가문인 황백운에게 출가했다. 열부 신씨가 들어온 이후부터 황씨 가문은 더욱 복운이 온 집안에 가득해 상하가 휘황하게 빛나니 종친과 인척이 모두 칭찬해 가히 집안의 창성을 기대하게 됐다. 하지만 이 무슨 액운인지 남편이 병이 들어 몇 달이 지나도록 약효가 무효하고, 마침내는 생명을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신씨 부인은 능히 손가락을 끊어 선혈을 남편 입에 드리우고 기절했던 남편을 되살리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뜻하지 않게도 4일을 연명한 후 마침내 운명하고 말았다. 열부는 실올 같은 한 생명을 따라 죽기를 이미 마음 속에 결정했다. 그리고 손수 남편의 염습과 장례를 마친 후 밤빛을 틈타 스스로 칼을 꺼내 자결을 하려 할 즈음 가족에게 발각됐다. 이어 음식을 전폐하고 이로 인해 병이 되어 백방으로 간호했지만, 시부모를 봉양하는 도리에 어려움이 있는지라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고 느꼈다. 결국 자기가 죽은 후의 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겨 벽에 붙이고 간수를 마시고 남편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순절했다. 당시 나이는 17세였으니 결혼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이 같은 지 씨 할머니와 손부 신 씨의 열행은 東康讀誌差之 2㤠友便(동강독지차지 2열우편) 문헌에 기재됐다. 이후 1989년 5월 높이 186cm, 너비 45cm, 두께 20cm의 비신에 月星 李鍊代(월성 이연대) 씨의 비문을 받아 김형진(金亨鎭) 씨가 새긴 열녀비와 비각을 세워 이들의 열행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극진한 효성에 눈먼 어버지 눈 뜨게 해 -효자성균진사월성최공지비(孝子成均進士月城崔公之碑) 경주시 내남면 소재 내남초등학교에서 서쪽 200여m 지점 논 뒤편에 말끔히 단장된 한옥 건물의 비각이 있다. 효자성균진사월성최공의 정효비(旌孝碑)다. 효자 최씨는 월성인으로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15세손이다. 그는 아버지가 눈에 병이 들어 앞을 보지 못하자 명의를 찾아 약을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그 정성에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영영 눈이 어둡게 되자 출입을 할 때 손을 잡고 안내하며, 음식을 드실 때는 수저로 떠드리는 등 마음과 몸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최씨는 평소에 과거에 급제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해드리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네가 과거에 급제했느냐”하고 물었다. 최씨가 “예. 급제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크게 감격해 일어나는데 두 눈을 갑자기 뜨게 됐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모두 그 효성에 감동해 이뤄진 것이라 했다. 효자 최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이조 때 비각이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 동안 퇴락이 심해 1988년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년고도 경주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이 진행 중이지만 문화유산의 특성상 추진 속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을 두고 시각차가 분명한 가운데 발굴과 연구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되면서 핵심유적의 복원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경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복원·정비 방향과 이를 활용한 관광정책 등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은 경주뿐만 아니라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근간이 되는 사업으로 정의된다. 대한민국의 뿌리를 되살려 새로운 문화융성 시대를 열어가는 국가사업인 것이다. 하지만 천년을 뛰어넘은 신라문화를 부활하는 것으로, 발굴과 고증을 거쳐 복원까지 가는 과정은 만만찮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고증을 거쳐 복원해야 하는 문화유산의 특성상 오랜 시일이 걸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의 역사 신라왕경 핵심유적의 정비가 거론되고 추진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경주를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로 조성하기 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면서다. 이 계획에 따라 연차적으로 경주지역 사적지 정비와 대규모 숙박단지, 보문관광단지 건립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197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의 서거 후 대부분의 사업은 중단되고 만다.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2007년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 기본계획과 2011년 경주고도보존계획 수립 등에 따라 신라왕경에 대한 발굴과 정비가 재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큰 진전을 이루진 못했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2014년부터다. 당시 2025년까지 9450억원을 투입해 경주 월성과 황룡사 등 8대 핵심유적에 대한 발굴과 정비·복원 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수립됐고, 곧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또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추진단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전기를 맞은 것은 2019년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신라왕경법)’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이듬해 시행되면서다. 2020년 신라왕경법 시행령까지 제정되면서 사업비는 기존 9450억원에서 1조53억원으로 증가했다. 또 신라왕경 핵심유적의 범위도 기존 8곳에서 14곳으로 확대했다. 기존 사업 대상은 월성, 황룡사지, 동궁과 월지, 첨성대, 대릉원 일원, 동부사적지,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등 8개 유적이었다. 여기에 인왕동 사지, 천관사지, 낭산 일원, 사천왕사지, 분황사지, 미탄사지 삼층석탑 등 6곳이 추가되며, 총 14개 유적에 대한 발굴·정비·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복원된 월정교·금관총,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 중 가장 먼저 완료된 것은 월정교다. 지난 2008년 월정교 복원을 위한 첫 삽을 뜬 이후 10여년 만인 2018년 9월 완공됐다. 월정교는 신라왕궁인 월성과 남산을 잇는 대표적 다리로 신라왕경의 규모와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고대 교량 건축기술의 백미로 교각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압도한다. 야간경관조명은 주변과 어우러져 경주의 야간 명소로 떠오르며 경주 관광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신라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과 신라고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신라고분정보센터’도 완공돼 지난해 6월 30일 정식 개관했다. 두 곳 모두 2023년 5월까지 내부 정보화 구축사업을 거쳐 건축면적 1641.32㎡(금관총 617.32㎡, 고분정보센터 575.90㎡), 연면적 1555.9㎡(금관총 575.9㎡, 고분정보센터 980㎡) 규모로 조성됐다. 금관총과 신라고분정보센터는 신라고분의 우수성을 알리고, 핫플레이스인 황리단길과 도심을 잇는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실물복원 보다 디지털 복원에 집중 복원 등의 사업이 완료된 월정교와 금관총·신라고분정보센터를 제외한 나머지 핵심유적들은 현재 발굴과 고증연구에 치중돼있다. 국가유산청이 지난 2021년 3월 내놓은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5개년(2021~2025) 종합계획에 따르면 핵심유적의 실물복원 보다는 디지털 복원계획안이 대거 포함됐다. 이 종합계획은 신라왕경특별법에 따라 국가유산청이 신라왕경 핵심유적의 복원·정비를 위해 5년마다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것으로, 특별법 시행 후 처음으로 수립된 계획이다. 종합계획에는 신라왕궁과 황룡사구층목탑 등 대형 핵심유적의 실물복원 계획은 수립되지 않았다. 실물복원을 위한 고증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반면 디지털 재현사업과 XR(확장현실) 등 디지털 복원안이 대거 포함됐다. 첨단디지털 기술을 적용해 일부 핵심유적을 재현하고, 복원 활용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복안이다. 핵심 중 핵심 ‘월성·황룡사’ 복원·정비 현황은? 신라왕궁(월성)의 경우 지난 2012년부터 중·장기 계획으로 월성복원 연구, 월성 경관 복원 연구, 성벽 축조공법 복원 연구 등을 중심으로 사업이 추진 중이다. 신라왕궁 실물복원은 이 같은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고, 원형 고증이 이뤄진 이후에나 진행할 방침이다. 대신 지난 2022년 3월 경주 월성해자 재현·정비사업이 완료됐다. 또 월성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연구하는 시설인 신라월성연구센터 ‘숭문대(崇文臺)’가 지난 6월 13일 준공식을 가졌다. 숭문대는 지난해 연구동과 전시동 준공에 이어 고환경(古環境) 연구동과 관람객 주차장을 완공하면서 조성사업을 마무리했다. 숭문대는 월성에서 발굴된 유물의 ‘분석-보존처리-보관’에 이르는 과정이 한 공간에서 이뤄진다. 특히 지난해 완공된 전시동에는 ‘실감 월성해자’ 전시로 현재까지 3만여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가면서 또 다른 명소로 자리매김 중이다. 신라의 궁궐이었던 월성을 소개하는 ‘신라왕궁영상관’도 새단장을 완료하고 지난 5월 1일 재개관했다. 또 다른 핵심사업으로 황룡사지 9층 목탑 실물복원 역시 2025년까지 진행되는 종합계획에는 들지 못했다. 대신 황룡사 중금당 디지털 콘텐츠 제작과 중문 및 남회랑 AR(증강현실) 서비스 등 디지털 복원안이 포함됐다. 지난 2021년 12월 황룡사 중문·남회랑 증강현실 콘텐츠를 완성해 체험이 가능하다. 또 황룡사 9층 목탑 증강현실 콘텐츠를 개발한 상황이다. 현재 실물 복원사업으로는 황룡사지 진입부 기단정비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추가된 핵심유적은? 신라왕경특별법 시행령으로 추가된 7개 유적의 일부는 복원계획이 수립돼 추진 중이다. 먼저 분황사지는 모전석탑 구조안정과 원형연구를 시작으로 심화연구를 거쳐 중·장기 계획으로 석축배수로와 담장 복원, 창건금당지, 강당지, 동서회랑지, 문지 등을 순차적으로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인왕동사지는 석탑과 연지·우물을 2025년까지 복원하고, 장기적으로는 금당지, 강당지 등도 복원할 계획이다. 낭산일원은 먼저 황복사지 정비와 중기 계획으로 능지탑소조상 3D 복원, 능지탑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또 사천왕사지는 서탑지 기단이 복원됐고, 2025년까지 금당지 기단 복원에 이어 중·장기 계획으로 귀부 주변과 강당지·회랑지를 복원키로 했다. 문화유산 연계한 관광정책 개발 ‘절실’ 지난 2021년 수립한 종합계획에 따라 일부 핵심유적이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를 토대로 복원·정비되면서 더디지만 하나씩 가시화되고 있다. 하지만 발굴·복원 중이거나 복원을 완료한 문화유산을 연계한 관광프로그램이 부재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천마총, 쪽샘유적발굴관, 금관총과 고분정보센터는 신라시대 고분으로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3개 고분을 연계하는 탐방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월성과 숭문대, 도심과 경주읍성 등지의 문화유산을 연계해 관광 자원화할 수 있는 소재가 경주만큼 풍부한 곳도 없는데도 이를 연계한 관광프로그램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각각의 문화유산에 대한 홍보에만 치중되다 보니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이 신라 천년의 역사에 대한 이해도 얕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에 대해 경주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현재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주요 문화유산을 찾지만 고도 경주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기존 핵심 문화유산과 발굴 또는 복원된 문화유산을 연계한 관광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스토리텔링해야 국제적인 관광도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주시 관계자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계획의 차질 없는 추진을 통해 핵심유적의 원형 복원과 관광자원을 확대하고,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신라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해나가겠다”며 “핵심유적 공간 내에서의 문화유산들을 가시화시키고 이를 연계한 관광정책들을 수립해 천년고도의 면모를 되살려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