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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사상 탄생한 천도교 발상지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14호 입력 2026/01/08 14:21 수정 2026/01/08 17:04
경주, 근대를 거닐다[25] 용담정

 


어두운 숲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 오르면 햇살에 안긴 용담정이 나타난다. 수운 최제우가 시천주의 길을 얻었다는 곳으로 1975년 교인들의 모금으로 지어졌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어두운 숲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 오르면 햇살에 안긴 용담정이 나타난다. 수운 최제우가 시천주의 길을 얻었다는 곳으로 1975년 교인들의 모금으로 지어졌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경주는 신라 천년고도이자 불교문화를 꽃 피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 대한민국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탄생한 곳이 경주란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천도교의 뿌리인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1824~1864)가 경주에서 동학을 창시하고 전파한 기간은 불과 4년 남짓이지만, 그 사상의 연원엔 우리 민족이 수천 년 간직한 조화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때, 그 많은 민중이 왜 동학에 참여했는가를 물으려면 역시 동학의 시작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경주시내에서 북서쪽으로 10㎞쯤 떨어진 현곡면 구미산 자락엔 용담정이 있다.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자 천도교 최고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주차장 앞 포덕문을 지나면 작은 정원이 펼쳐져 있고 왼쪽에 수운 최제우의 동상이 서 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주차장 앞 포덕문을 지나면 작은 정원이 펼쳐져 있고 왼쪽에 수운 최제우의 동상이 서 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몰락한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최제우는 1824년 용담정이 있는 현곡면에서, 몰락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남 퇴계학파 유림인 아버지 최옥으로부터 출중한 무예와 영민한 머리를 물려받았지만, 재가녀인 청주 한씨의 아들이라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3년 뒤인 1827년 동학의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태어났고, 1830년에는 일본 메이지유신과 우익진영의 상징인 요시다 쇼인이 태어난다. 일본의 독립과 이익을 위해 조선을 반드시 속국시켜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일본 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일본제국 원수 아마가타 아리토모,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다.

 

최제우는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19세 때 박씨 부인을 얻고, 이듬해 집이 불타는 아픔을 겪는다. 생의 기반을 잃은 그는 1년 뒤 보부상의 모습으로 10년간의 팔도주유에 나선다.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장사꾼의 신분으로 전업한 것이다.

 

그는 성리학이 제 역할을 못하는 조선사회에서 부정부패로 백성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봤다. 지방의 향촌 사회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파탄에 이르렀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 국제질서의 변화를 목격했다. 이러한 조선 후기 사회상을 두고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다”고 한탄했다.

 

1854년 최제우는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동으로 정착했다. 이듬해 ‘을묘천서’라는 책을 접했고 세상을 떠도는 대신, 내면의 수련을 이어갔다고 한다. 1859년 반드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각오로 고향인 경주 구미산 용담정에 들어간 그는 이름을 ‘최제선’에서 어리석은 백성을 구한다는 뜻의 ‘최제우’로 고쳤다.

제자 최시형과의 만남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해월 최시형 또한 포항 검등골에서 용담까지 70리 길을 왕래하며 공부했다고 한다. 1860년 최제우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창시한다. 그는 그 깨우침을 글로 적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오심즉여심’의 이치도 이때 나왔다.

최제우의 사상은 민중들의 삶 속으로 직접 들어가 실천하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시켰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사람은 며느리로 삼았다. 조선 사회에서는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수운이 깨달음 얻은 용담정


용담정이 있는 곳은 경주의 북서쪽 현곡면 가정3리 구미산(龜尾山) 자락이다. 해발 594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거북 구(龜)자에 꼬리 미(尾)자를 가진 구미산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장소라고 전해진다.

 

용담정 가는 길은 포덕문(布德門)에서부터 시작한다.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편다’는 의미다. 문 아래 왼쪽 관목 앞엔 ‘성지’라고 새겨진 작은 바위가 서 있다.

포덕문을 지나면 작은 도시공원과 같은 정원이 펼쳐진다. 그 왼쪽에 수운 최제우의 동상이 하늘 높이 서 있다. 한 손엔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또 다른 손은 하늘을 향해 있다. 대구 달성공원의 수운 동상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다.

직선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성화문(聖化門)이 나온다. 문 왼쪽으로는 용담(龍潭)이라는 이름의 작은 못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백색 건물이 자리 잡았다. 천도교인들의 수도원이라고 한다.

용담정 가는 길은 넓고 단정한 숲길이다. 왼쪽에는 계류가 흐른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길은 용담보계(龍潭寶溪)라고 불린다.

숲길을 10여 분쯤 오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용담교 너머 환한 햇살에 감싸여 앉은 팔작지붕의 건물이 보인다. 용담정(龍潭亭)이다. 1975년에 새로 지은 말간 얼굴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용담정 안에는 수운의 영정과 직접 쓴 거북 ‘구(龜)’자가 걸려 있다. 그는 생전에 후학들의 마음급함을 질타하며 조급해하지 말라는 뜻에서 ‘龜’자를 많이 써주었다고 한다.

용담정 위쪽 계류 앞에는 용추각(龍湫閣)이란 현판을 단 작은 정자가 있다. 2003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멋스러운 풍치다. 안에는 최제우 선생의 부친인 근암 최옥 선생의 문집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원래 원적암이라는 산사 터였다. 절이 폐사되자 최제우의 조부 최종하가 아들 근암 최옥의 학업을 위해 매입했고, 이후 1815년에 근암공이 ‘용담서사’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 집을 떠나 세상을 두루 돌아다닌 그가 이곳으로 돌아 온 건 36세 때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60년, 수운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侍天主)’를.

시천주는 곧 평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동학(東學)’을 천명한 것은 1862년이다. 그는 1860년부터 1863년 사이 이곳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썼다. 동경대전과 함께 동학의 기본 경전인 용담유사는 민중이 보다 쉽게 접하도록 한글 가사체로 쓰였다.

이런 내용이 있다. ‘우습다 저 사람은/ 지벌(地閥)이 무엇이게 군자를 비유하며/ 문필이 무엇이게 도덕을 의논하노’. 지위도 학식도 인간됨의 척도가 아니란 걸 말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우리 역사는 ‘문경새재를 넘으니 시천주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던 조정은 동학은 민심을 현혹하는 사악한 학문이라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운은 1863년 11월 체포됐고, 이듬해 3월 ‘바르지 못한 도로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대구에서 처형됐다. 2대 교조인 최시형도 1898년 같은 죄명으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후 3대 교조인 손병희는 1905년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걸고 교명을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하기에 이른다. 최제우의 사상이 천도교란 이름으로 이어지게 된 배경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이어진,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우린 기억한다.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것. 모두가 부처고, 모두가 예수라는 것. 때문에 우리 모두는 존엄하다는 것. 시천주라는 이 한마디가 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시대가 있었다. 이 같은 역사를 경주 용담정에서 만난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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