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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지어진 일제강점기 철도 유적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696호 입력 2025/08/07 11:04 수정 2025/08/07 11:07
경주, 근대를 거닐다[15] |장군교

 

경주를 관통하는 형산강 중심 줄기인 서천에 만들어진 장군교. 일제강점기인 1939년 중앙선 광궤선로가 경주 중심부로 진입하게 된데 따라 만들어진 철교였다. 1992년 경주 시내를 가로지르던 중앙선 철길이 이설되면서 경주시는 이곳의 철로를 걷어내고 2002년 시민 산책로로 새롭게 조성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경주를 관통하는 형산강 중심 줄기인 서천에 만들어진 장군교. 일제강점기인 1939년 중앙선 광궤선로가 경주 중심부로 진입하게 된데 따라 만들어진 철교였다. 1992년 경주 시내를 가로지르던 중앙선 철길이 이설되면서 경주시는 이곳의 철로를 걷어내고 2002년 시민 산책로로 새롭게 조성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경주 도심엔 세 줄기의 하천이 흐른다. 경주를 관통하는 형산강 중심 줄기인 서천을 비롯해 북천, 남천이 그것이다. 하천 이름이 된 방향의 기준점은 옛날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이다. 서천은 월성의 서쪽에, 북천과 남천은 월성의 북쪽과 남쪽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만큼 경주엔 하천에 만들어진 다리도 많다. 제일 강폭이 넓고 물줄기가 굵은 서천에는 경부고속도로 경주IC를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나정교를 비롯해 북쪽으로 경주 시외버스터미널 앞 서천교, 경주 도심과 동국대학교 와이즈캠퍼스를 잇는 동대교, 경주 도심과 현곡면을 잇는 금장교가 차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곳에 일제강점기 철도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서천교와 동대교 사이, 차가 다니지 않는 장군교라는 이름의 인도교가 그것이다.


장군교는 1936년 성동동에 새 경주역사가 들어선 이후 1939년 중앙선 광궤선로가 경주 중심부로 진입하게 된데 따라 만들어진 철교였다. 1992년 경주 시내를 가로지르던 중앙선 철길이 이설되면서 필요가 없어진 이 철교는 철로를 걷어내고 2002년 시민 산책로인 장군교로 다시 태어났다.



경주 철길과 유적지


철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육상의 도로 건설 방식과는 달리 기존 길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근대 이전 한양으로 가는 영남 옛길과 달리,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는 부산~대구~김천~영동~대전을 통해 서울로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노선이 확정되면 산자락이든 하천이든 직선에 가깝게 밀고 나간다. 산에 막히면 터널을 뚫고, 하천이나 강을 만나면 다리를 건설해 연결했다. 평지의 경우에도 예전부터 있었던 길이 아니라 논이나 밭에 새로 철둑 제방을 쌓고 철로를 깔았다. 철도는 이처럼 직선화를 통한 최단거리를 우선시했고, 이를 통해 시간 단축과 안전 운행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직선화 방식은 경주의 많은 유적지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 경주역~불국사역 구간의 대릉원 일대와 사천왕사 터, 경주읍성 등이 철길로 인한 유적지 훼손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렇다고 일제가 놓은 경주의 모든 선로가 유적지를 통과하거나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일제가 조선의 맥을 끊고 혼을 자르기 위해 주요 명산 등에 쇠말뚝을 박거나 의도적으로 철로를 깔아 문화재 파괴를 일삼았다고 분개한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미약한 감정적 판단일 가능성이 높다.


경주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일제가 경주에 놓은 철도 노선도 어디까지나 그들의 목적에 따라 결정됐다. 그 과정에서 유적지가 훼손되거나 파괴가 되기도 했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차선의 방법을 택한 경우도 있었다.


황오리고분군을 지나간 협궤선로


경주역이 사정동에 자리 잡을 때만 하더라도 이 주변은 인가가 거의 없는 들판이었다. 때문에 철길을 놓고 역을 세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철길은 경주역을 벗어나자마자 경주의 중요한 지점들을 통과한다.


1918년 이 구간에 협궤노선이 개통되고 3년 뒤인 1922년 간행된 ‘경주고적도휘’(慶州古蹟圖彙)에 딸린 지도에 따르면, 서악역에서 서천을 건너 경주역으로 이어진 협궤선로는 천마총 곁을 지나고 미추왕릉과 옛 쪽샘마을 고분군을 지나 안압지(지금의 동궁과 월지), 낭산 자락의 능지탑과 사천왕사 터, 신문왕릉, 성덕왕릉을 거쳐 불국사역으로 이어진다.


특히 천마총 옆을 지난 협궤선로는 옛 경주시청 앞 태종로를 따라 지금의 쪽샘유적발굴전시관을 끼고 올라가 팔우정로터리 근처에서 방향을 틀고 있다. 당시 팔우정로터리 인근 황오리고분군(2011년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통합 재지정)에는 크고 작은 고분이 많았는데 땅 속 유구와 함께 협궤선로 건설 당시 많은 고분이 훼손됐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무덤이 70여 기 정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봉분이 깎여나가 무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 10여 기 정도만 정확히 확인되고 있다.

 

장군교.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장군교.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동궁과 월지에서 급격히 휘어진 광궤선로


반면, 유적지 보호책으로 추정되는 사례도 있다. 일제가 성동동 경주역사 신축에 맞춰 광궤선로를 건설하면서 동궁과 월지 쪽 철길을 급격히 휘어지게 만든 게 그것이다.


당초 협궤선로는 동궁과 월지 앞쪽(남쪽)으로 7번국도(원화로 구간)와 나란하게 놓여 불국사역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1936년 성동동 새 역사 신축에 맞춰 광궤선을 놓을 때는 철로를 동궁과 월지를 감싸듯 뒤로(북쪽)으로 돌아나가게 했다. 위성지도를 보면 쉽게 확인되는데, 경주역을 빠져나온 선로는 선덕여자고등학교 인근에서 급격하게 꺾여 동궁과 월지를 피해 낭산 방향으로 이어진다. 기존 협궤선로처럼 원화로를 따라 철길을 놓아도 무리가 없었을 텐데 선로를 급격하게 휘어지게 만든 것이다. 운행의 안전 등을 위해 일반적으로 직선을 택하는 철길 설계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상식 밖의 설계’로 비친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기존 협궤선의 운행 차질을 피하고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존 협궤선로 바로 옆에다 광궤선로 공사를 하면 협궤열차 운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데다, 지형에 따라 두 선로를 교차시켜야 하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피하면서 주요 유적지 피해를 줄이는 방안으로 이 같이 설계했다는 게 이들의 논리다.


광궤선로 건설로 만들어진 장군교


1936년 성동동 경주역사 신축에 맞춰 경주에 광궤선로가 놓이게 되는데, 광궤선 철길이 경주 중심부로 진입하게 된 것은 1939년의 일이다. 광궤선은 서천을 건너 경주읍성 북문 옆으로 지나갔는데, 당시엔 민가가 거의 없던 지역이었다.


당시 공사는 서천에 철교(현 장군교)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평탄한 지형에서 이뤄진 작업이라 무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철길 조성을 위한 땅 다짐용 흙과 돌이 많이 필요했는데, 다량의 북천의 자갈과 모래흙을 사용했다.

 
또, 허물어진 경주읍성 북쪽 성벽의 돌도 사용됐다고 한다. 별다른 가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성벽의 네모난 돌은 열차 무게를 감당하는 노반용 석재로 유용했기에, 이런 점들이 읍성 성벽 훼손을 가속화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100년 전 경주에 들어선 철길은 결과적으로 경주의 많은 유적을 훼손시켰다. 특히 읍성 북쪽 마을은 1992년 경주 시내를 가로지르던 중앙선 철길이 이설돼 철로가 걷어내 지기 전까지 남쪽과 북쪽으로 나눠져 시가지 확장에 큰 장애를 겪었다. 이 노선에 깔린 읍성의 크고 작은 석재를 발굴, 성벽복원에 활용해 다시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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