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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관광과 함께한 100년… 굳게 닫힌 건물만 덩그러니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01호 입력 2025/09/18 13:58 수정 2025/09/18 14:01
경주, 근대를 거닐다[18] |불국사역

 

불국사역 전경.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불국사역 전경.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경주는 언제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을까. 경주는 국내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유명하지만, 신라의 수도였다는 점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얼핏 수도와 관광도시 사이엔 괴리감이 있어 보이지만, 경주가 1천년이란 긴 시간 동안 신라의 수도였다는 점이 지금의 경주를 관광도시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경주가 관광도시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신라가 멸망한 이후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경주는 일제강점기에 왕릉을 비롯한 각종 유적이 발굴되면서 다시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여기에다 근대적 교통망인 철도가 들어오면서 ‘관광도시 경주’를 가속화시켰다. 불국사역은 이 시기부터 100년 동안 경주역과 더불어 경주 관광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관광도시’ 출발점 된 일제강점기 고적조사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관광’이란 단어는 100년 전만 하더라도 ‘유람’(遊覽), ‘탐승’(探勝)이란 단어가 대신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유람지는 단연 금강산이었다. 금강산 유람은 선현들이 남긴 무수한 글과 그림으로 확인된다.


선조들이 경주를 다녀간 뒤 남긴 글도 적지 않다. 다만 금강산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게다가 경주는 주요 유람 대상지도 아니었다. 경주가 신라의 수도였고 찬란한 역사 유적을 지닌 곳이었지만 금강산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의 중심은 한양이었고, 유람지는 빼어난 자연이 제일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경주는 지리적으로 한양에서 먼데다, 자연 경관 측면에서 선호도가 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불국사와 석굴암, 남산의 수많은 불상들은 숭유억불 분위기 속에서 유람의 대상과는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경주 유람은 특별한 목적에 국한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배경 속에서 대한제국기였던 1902년 세키노 타다시가 두 달 일정으로 한반도의 건축물을 조사하면서 고적조사사업이 시작됐다. 당시 세키노는 경주를 방문해 읍성과 월성, 분황사, 오릉, 불국사 등을 조사했다. 1906년 9월에는 동경제국대학 이마니시 류가 경주를 방문해 사천왕사 터, 분황사, 월성 등지에서 기와와 문양이 있는 벽돌을 수집하였고 일부 고분을 조사하며 유물을 수습했다.


1909년에는 세키노가 통감부 탁지부의 의뢰를 받아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고적조사에 나섰다. 이 조사는 1915년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조사를 기반으로 고적의 가치를 판단해 갑·을·병·정으로 분류했다. 갑과 을은 특별보호가 필요한 것, 병과 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경주에서는 향교, 객사, 숭덕전, 불국사, 백률사 대웅전이 ‘을’로 분류됐고, 백률사 봉서루가 ‘병’으로 분류됐다. 이 조사에서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다보탑·석가탑, 석굴암, 첨성대, 포석정, 분황사석탑, 태종무열왕릉비 등 훗날 경주의 주요 관광자원이 된 유적이 조사된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이를 바탕으로 경주의 대표적 유적지에 대한 수리 공사도 이뤄졌다. 석굴암은 1913년 수리공사가 시작돼 1915년 8월 마무리됐다. 하지만 누수와 결로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며 1917년과 1920년 등 몇 차례 보수 공사가 이뤄졌다.

불국사는 1918년 10월부터 수리 공사가 진행되었고, 1925년에는 다보탑을 전면 해체 수리했다. 1915년부터는 고분 발굴도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세키노의 주도로 이뤄진 황남대총 발굴을 시작으로 돌무지덧널무덤의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1921년에는 금관총이 발굴되면서 금관이 세상에 소개됐고,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과가 신설됐다. 고적조사과는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고적조사업무를 담당했다. 3년 뒤인 1924년에는 금제 방울이 출토된 금령총과 금동신이 출토된 식리총에 대한 발굴 작업이, 1926년에는 서봉총 발굴이 이뤄졌다.

 

불국사역 입구 문 앞에 붙은 안내포스터. 오른쪽으로 불국사역이 ‘한국철도공사지정 철도문화재’란 것을 알려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불국사역 입구 문 앞에 붙은 안내포스터. 오른쪽으로 불국사역이 ‘한국철도공사지정 철도문화재’란 것을 알려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철도·도로 등 교통망 확충도 한몫


관광이나 유람의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여행지로 가는 교통이나 편의 시설이 얼마나 잘 갖춰져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경주가 관광도시로 성장하게 된 데는 철도를 비롯한 교통망 확충이 큰 밑거름이 됐다. 경주에 처음으로 개설된 노선은 서악역~경주역 구간으로 1918년 12월 29일 운행을 시작했다. 이어 1919년 1월 14일 경주역~불국사역 구간에 열차가 운행을 시작하면서 대구와 불국사 사이의 노선이 완성된다.


철도 부설과 더불어 경주읍성 일대의 도로가 정비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연구에 따르면 도로망 정비는 네 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경주읍성 일대와 1918년 새로 건설된 경주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신설됐고, 읍성 내부의 도로가 신설되거나 정비됐다. 이 과정에서 읍성 성벽이 다수 철거됐고, 무열왕릉과 김인문묘, 월성과 동궁과월지가 도로 개설로 인해 단절되게 됐다. 그밖에 포항 등 경주 외부 지역과의 연결을 위한 도로 등이 정비됐는데, 그 골격이 지금까지도 상당부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와 함께 1912년 8월엔 경주에서 자동차 운수업이 시작됐다. 당시는 대구와 경주 사이 철도 노선이 부설되지 않았던 탓에, 대구에서 경주로 관광객을 운송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는데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행됐다고 한다. 이 무렵 서울이나 부산 등에서 경주를 찾은 이들은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열차를 이용해 대구에 도착한 뒤 자동차로 바꿔 타고 경주로 이동했다. 이후 1921년 7월엔 경주와 포항을 오가는 운행노선이 개설되는 등 관광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었고, 1930년대 이후에는 경주와 주변 도시 사이의 도로와 경주 내부의 관광지를 연결하는 도로가 정비되면서 철도와 자동차를 이용한 관광이 활성화됐다.


그 결과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주에서는 일본인을 중심으로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지금의 봉황로 일대인 본정통(本町通)을 중심으로 번화가를 형성했다. 도심엔 안동여관, 월성여관, 동도여관 등의 조선식 여관과 시바타여관, 아사히여관 등 일본식 여관이 있었고 불국사 근처에 불국사 호텔이 있었다. 불국사 호텔은 당시 대표적인 숙박시설이었다. 경주를 찾는 관광객은 1931년 10월 말, 그해 고적 방문객이 2만명을 넘었고, 1935년 9월엔 4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불국사역 전경.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불국사역 전경.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경주 관광과 함께한 100년


불국사역은 1918년 영업을 시작한 이후 1936년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됐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불국사와 석굴암 등지를 방문한 수많은 관광객이 거쳐 간 불국사역은 2021년 12월 28일 동해남부선 철도 이설과 함께 마지막 열차를 보내며 문을 닫았다. 이런 이유로 폐역 당시 많은 이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불국사역 앞에 섰다. 역사로 입구 문 앞엔 동해남부선 철도 이설에 따른 새 역사와 운행노선을 안내하는 빛바랜 낡은 포스터 하나가 쓸쓸히 붙어있다. 문 오른쪽으로는 ‘한국철도공사지정 철도문화재’ 현판이 걸려 있다. 한국철도공사는 지난 2013년 불국사역과 경주역, 포항역, 동래역 등 동해남부선 4개 역사를 철도기념물로 지정했다. 동해남부선 복선화 사업이 끝나 폐역이 되더라도 건물만은 보존해 지속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취지였다.


불국사역은 경주역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지만 조선시대 전통 건축양식을 도입한 역사다. 역사가 지어질 즈음 역사적 배경을 지닌 기차역에 전통양식을 적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전주, 남원, 수원 등에 전통양식의 기차역이 등장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곳은 불국사역과 경주역뿐이다. 하지만 불국사역은 굳게 닫혀있고, 목줄을 맨 개 두 마리가 이따금씩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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