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개국 초부터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전국 주요 지역에 태조의 어진(임금 초상화)을 봉안했다. 경주 집경전을 비롯해 전주 경기전, 영흥 준원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등에 어진을 모셨다. 모두 태조 이성계와 깊은 관련이 있던 곳이었다.
현재 경주시 북부동 경주평생학습가족관 자리가 옛 집경전 터다. 지금은 그 자리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면서 본래의 모습을 온전히 그려내기가 쉽지는 않다. 다만 이곳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축 구조물과 함께 비석, 하마비, 계단돌 등이 남아 있어 이곳이 집경전의 옛터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조선왕조 상징한 신성공간
경주에 있었던 집경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셨던 곳이다. 태조가 살아 있을 때, 전국 주요지역 5곳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모시게 했다.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는 준원전을, 전주 이씨의 본관인 전주에는 경기전을 세워 어진을 보냈다. 또 경주에는 집경전, 평양에는 영숭전, 개성에는 목청전을 세워 어진을 봉안토록 했다. 경주, 평양, 개성은 옛 왕조의 도읍지였던 만큼 조선왕조는 정치적으로 중요시했다. 게다가 개성 목청전 터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이 있었던 곳이었다.
태조는 1398년(태조 7년) 2월에, 태학사 성석린을 시켜 고향 함흥에 자신의 진영(眞影)을 먼저 봉안했고, 3월에 판삼사사 설장수를 계림부(경주)로 보내 진영을 모시게 했다. 당시 전우는 특별한 이름 없이 어용전(御容殿)이라고 불렀다.
이후 1442년(세종 24년) 세종은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에 각각의 이름을 짓고, 전각을 지키는 관리를 배치했다. 이를테면 능을 지키는 능참봉(陵參奉)과 비슷한 전참봉(殿參奉)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집경전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는 운명을 맞는다. 집경전 참봉 정사성은 경주읍성 함락 직전 왕의 어진을 양동 수운정으로 옮겼다. 이어 왜군이 북상함에 따라 관리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어진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도산서원에 모셨다. 이후 정유재란이 발생되자 어진은 임시로 다시 강릉으로 옮겨졌으나 1631년(인조 9년) 강릉 집경전 화재로 소실된다.
강릉 집경전 화재 직후 경주지역 인사들은 집경전 전우를 다시 지어야 한다며 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1631년(인조 9년) 조정은 경주 집경전을 중건하기로 했으나 이마저도 지체됐다.
이후 1796년 11월(정조 20년) 정조는 친히 ‘집경전구기’라는 어필을 내려 보냈고, 이후 이 어필을 새긴 비석과 비각이 세워졌다. 비석 뒷면엔 건립 연월인 정조 22년(1798년) 4월을 의미하는 ‘숭정기원후 삼무오사월일립’(崇禎紀元後三戊午四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집경전은 보수되지 않았고, 대신 정조가 어필을 내려 옛 터에 비각을 세우고 참봉들이 관리를 했던 것이다.
그림으로 남은 집경전 옛 모습
온전했던 집경전의 모습은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를 통해 상상해볼 수 있다. ‘집경전구기도’는 집경전의 옛터(舊基)를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다. ‘옛터’라고 명명한 이유는 그림을 제작할 당시 집경전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경전구기도는 정조 22년 ‘집경전구기’ 비석을 세웠을 당시인 1798년 제작됐다.
‘집경전구기도’는 글과 그림이 함께 묶여있는 첩(帖)이다. 첩을 펼쳐보면 먼저 집경전의 내력 등에 대한 글이 나오고 접힌 면을 크게 펼칠 수 있는 두 장의 그림이 이어진다. 두 그림은 ‘경주읍내전도’와 ‘집경전구기도’다.
‘경주읍내전도’는 첨성대와 신라 왕릉 등이 생생하게 묘사돼있어 한눈에 경주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림의 위쪽에 사각형으로 구획된 곳이 경주읍성이고, 읍성 내부의 오른쪽 위에 자리 잡은 게 집경전 옛터다. ‘집경전구기도’는 바로 이 부분을 확대해서 그린 것이다.
‘집경전구기도’는 신성한 구역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홍살문부터 시작한다. 홍살문 옆에 놓인 자그마한 비석은 하마비(下馬碑)로 추정된다. 홍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담장으로 구획된 두 개의 공간이 보이는데 앞쪽에 있는 것이 정조 때 세워졌다는 비각(碑閣, 비석을 보호하는 전각)이고 뒤쪽 공간이 집경전 옛터다.
집경전 터를 묘사한 부분에는 여러 개의 둥그런 돌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사이에는 ‘집경전구기’라고 적혀 있다.
이 돌은 집경전의 주춧돌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집경전이 불타기 전까지 바로 이 주춧돌 위에 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태조의 어진을 모셨을 것이다.
집경전 터 바로 뒤쪽으로는 터널처럼 보이는 낯선 형태의 석축 구조물이 그려져 있다. 이 구조물은 크기가 함께 표시돼 있는데 길이가 21척(尺)이고, 높이(高)가 7척이다. 1척이 약 30㎝이므로 6m가 넘는 길이에 높이도 2m 이상이다.
이 구조물의 용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집경전과 같은 구역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집경전과 관계된 시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고 정확한 용도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폐허화
집경전 옛터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폐허화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진이나 큰비 등으로 인해 담장, 비각 등 시설물 일부가 붕괴되거나 사라졌고, 이런 모습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일제는 집경전 옛터에 남은 담장과 시설물을 일부러 허물지는 않았다. 대신 허물어져도 그대로 방치했다. 일제강점기 때 사진 등으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동아일보는 8월 6일 자 신문에 ‘슬어지는 천년문화, 집경전은 폐허로’라는 기사를 실었다. 집경전의 처함한 상황을 당국이 외면하면서 분뇨가 버려지고 걸인의 휴식처로 변했다는 내용이다.
현재 집경전 옛터엔 허물어진 석축 구조물과 인근으로 옮겨진 ‘집경전구기’ 비석, 하마비 정도만 남아 있어 유적지를 찾는 발길도 드물다. 현재 집경전 석축 구조물 주변은 민가로 둘러싸여 있다. 정조 어필이 새겨진 비석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