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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수난의 역사… 임진왜란 이후 수십 차례 복원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09호 입력 2025/11/20 11:16 수정 2025/11/20 11:19
경주, 근대를 거닐다[22] |불국사(中)

 

1925년 조선총독부의 보수공사 이후 불국사 모습.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확대
1925년 조선총독부의 보수공사 이후 불국사 모습.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5월. 참배를 위해 경주 불국사를 찾은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왜병들은 절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어버린다. 감탄을 쏟아내며 이곳저곳 둘러보던 그들은 뜻밖에도 절 내 한구석에서 무기를 발견한다. 경상좌병사가 지장전(지장보살을 안치한 건물) 벽 사이에 숨겨놓은 활과 칼 등을 찾아냈던 것이다. 돌연 이성을 잃은 왜군은 고색창연한 불국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독실한 불교국가였고 전사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쟁터에 승려까지 대동하고 다녔던 일본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근처 장수사로 몸을 피해있던 담화대사가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왔지만, 화마는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 등 일부 건물을 제외한 건물 대다수를 삼켜버렸다.

 


임진왜란 때 불탄 불국사를 새로 짓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604년(선조 37)부터였다. 이후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중수와 수리가 수없이 반복된다. 1740년(영조 16) 승려 활암이 쓴 ‘불국사고금창기(古今創記)’에 따르면 ▷대웅전 1659년 중수, 1765년 중창 ▷자하문 1630년 중수, 1781년 중창 ▷우경루 1612년 중창, 1715년 중수 ▷좌경루 1612년 중창, 1690년 중수 ▷범종각 1612년 중창, 1688년 중수, 1781년 중창 ▷무설전 1648년 중건, 1708년 수리 ▷비로전 1660년 중건 ▷관음전 1604년 중창, 1696년 중수 ▷문수전 1628년 중건, 1674년 중수 ▷극락전 1750년 중수, 1800년대 중창 ▷안양문 1626년 중창, 1737년 중수 등이 이뤄졌다.


20세기 초 폐허로 방치


그렇다면 20세기 초 불국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가기록원에 있는 1910년대 제작된 일제강점기 건축도면에 따르면, 당시 절은 퇴락이 심해져 대웅전과 자하문 등의 영역과 본전(극락전), 안양문 영역의 두 부분만 남아있었다. 대웅전 영역의 경우 백운교, 청운교, 그 위 석축들이 실측되어 있고, 목조·석조 건물로는 자하문, 범영루, 다보탑·석가탑, 대웅전 외에 대웅전 서쪽에 하나의 문과 작은 건물로 추정되는 ‘당(堂)’이 있었다. 당은 대웅전 서쪽 기단에 기대어 담을 두르고 지어 사찰 업무 용도에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서쪽인 극락전 영역은 대웅전 영역보다 더욱 변형이 심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화교, 칠보교 위에 통용문(현재의 안양문)이 있고, 이 문과 본전(극락전) 사이에 별도의 건물인 응접실, 주지실이 있었다. 또 본전 기단의 동쪽에도 잇대어 하나의 건물이 더 딸려 있었다고 도면에 기록돼 있다. 대웅전, 극락전 부분을 구분하는 석축은 무너져 내린 채 경사로와 계단이 놓여 있고,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인 자하문 주위의 상부 석축도 무너져 흙 언덕처럼 변했다.


불국사가 처음 일본 학자의 눈에 띈 것은 1902년이었다. 도쿄제국대 교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1867~1935)는 일본 학자로는 처음으로 공무상 경주 땅을 밟게 되는데, 그는 이때 불국사를 찾았다. 그리고 석단과 계단이 무너지고 잡목과 잡초로 뒤덮인 불국사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19세기까지 수십 차례 보수공사를 거듭하며 관리돼왔던 불국사는 어쩌다 이런 수준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학계는 지진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키노 타다시가 경주를 방문했던 1902년보다 앞선 1900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에 강진이 일어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제가 불국사 보수공사에 나서기 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청운교, 백운교의 돌계단이 심하게 파손돼 있는데, 사람이 집단으로 훼손하려 하더라도 계단에 사용된 무거운 석재가 땅 속에서 융기하듯 치솟게 만들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게 학계의 견해다.

 

1914년 일제가 촬영한 보수공사 이전 불국사 전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확대
1914년 일제가 촬영한 보수공사 이전 불국사 전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복원공사 이뤄져


한일강제병합 이후 곧바로 석굴암 보수공사에 들어간 총독부는 1915년 석굴암 공사를 마무리 짓고 다음 차례로 불국사 수리에 집중한다. 공사는 1918년에 시작되는데, 석굴암의 수리공사로 훨씬 뒤로 밀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한제국 말기의 불국사는 더 이상 파손될 게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져 있었기에 서두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을 것이다.


불국사 공사 또한 석굴암 공사에 못지않은 대공사였다. 1918년 10월부터 1925년 9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고, 거금 4만6000원이 투입됐다.

 
석단의 경우 주저앉고 나뒹굴고 매몰돼 있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단위 석재들에 일련번호를 붙이면서 원래 위치를 찾아 짜맞췄다. 그렇게 해서 하늘과 대지를 수평으로 양분하는 백색 화강암의 대석단이 옛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청운·백운교와 연화·칠보교도 안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왔고, 석가탑과 다보탑 역시 원형에 가까워졌다. 대웅전을 비롯한 목조전각들은 수선 수준으로 정비했다. 그 결과 오랜 기간 방치돼 있던 지난날의 불국사는 깔끔하고 단정한 장대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불국사 복원은 미완의 공사였다. 그들은 대석단, 청운교와 백운교, 석가탑과 다보탑 등 석조구조물을 복원하는 데 그쳤고, 대웅전 영역과 비로전 영역 등 경내를 구획 짓는 회랑과 관음전, 무설전 등의 복원은 손을 대지 않았다. 추후 2차 공사를 계획했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석조 부분만 수선을 하고 목조 부분은 외면한 것이다.


어찌됐건 수리복원이 끝난 이후 불국사 방문객은 날로 증가했다. 국내는 물론 일본 황족과 고관대작의 행렬도 줄을 이었다. 일본관광객은 시모노세끼에서 배를 타고 부산, 대구를 거쳐 경주에 왔다. 여기에 1921년 불국사~울산 간 협궤선 개통, 1936년 광궤선 개통으로 일본과 부산·경남 지역 관광객이 더욱 편리하게 경주를 찾을 수 있었다.


관광객들은 시내 관광 후 열차를 타고 불국사역에 내린 뒤 불국사를 관람하고 그 인근에 들어선 숙박시설에서 묵었다. 그리곤 꼭두새벽 석굴암에 올라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했다.

 

1935년 일본 귀족 일행이 불국사 자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확대
1935년 일본 귀족 일행이 불국사 자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억해야 할 일들


조선총독부의 공사와 함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다보탑을 해체해 그 안의 성보들을 빼돌리는 불측무도한 일이 공사 도중 발생한 것이다. 조선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현장 주변에 줄을 치고 통행을 엄중히 제한하면서 벌인 일인데, 그때 나온 보물들 중에서 금동불상 2구에 관련된 신문기사가 있고,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는 학자의 기록도 있다.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다보탑 속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 많이 나왔는데, 일본사람들이 보자기에 싸서 가져갔다는 내용이다.


이에 앞서 다보탑 기단 돌계단 위에 있던 돌사자상도 4기 중 3기가 사라졌다. 1902년 세키노 타다시가 처음 불국사를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돌사자상 4기는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이후 1909년 그가 다시 불국사를 찾았을 때는 2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어느 시점에 1기가 추가로 사라져 넷 중 하나만 남게 됐다.


앞서 언급한 2점의 금동불은 경주박물관에 넘겼다는 공사 감독자의 인계서류가 남아 있지만 행방이 묘연하다. 범인이나 빼돌린 품목, 수량 등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반출된 유물의 소재지를 밝히는 것 등의 숙제가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셈이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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