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문태준 소나기가 지나가고 활 같고 낫등 같은 무지개가 여름 하늘에 걸렸습니다 무지개는 측백나무 위에, 널어놓은 내 젖은 비옷 위에, 칸나 위에, 다시 붉은 꽃 주변을 어정거리는 흰나비 위에, 저르렁 울려오는 소읍의 유희와 소음 위에 떠 있습니다 무지개는 한가운데..
신라의 달밤 백무산 경주 남산 자락이었네 조용한 식당 창가에 중년의 부부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네 손님은 그들과 나밖에 없고 창밖엔 산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어 식당은 상자처럼 작아지고 그들은 액자 속에 담긴 듯 했네 여자가 훨씬 젊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몸 전체가 창..
전주全州 김사인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뚝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맞으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
몽돌3 전종대 몽돌에겐 없는 게 많다 몽돌에겐 손도 없고 발도 없다 그러니 악수할 수도 없고 달아날 수도 없다 무엇보다 몽돌에겐 털이 없다 털이 없으니 털을 곤두세울 일도 없다 몽돌에겐 내가 걸치고 있는 옷은 더 더욱 없다 그러니 솔기도 없다 그러니 거추장도 없다 매끈..
6월 오세영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여름 강가에서 고은 하늘 아래서 강은 하늘을 낳는다 여름 강가에 나가 물푸레나무 손풍금 소리를 듣는다 강은 저 홀로 깊어지지 않는다 항상 저 홀로 있으나 누가 그리워하게 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여기까지 온 빛과 소리 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길이다 저마다 한 굽..
천파만파 김광협 남정네들이 낫을 간다. 낫이 무디어졌다고 슥삭슥삭 낫의 날을 세운다. 보리 한 단을 베어 넘기기 위해서 숫돌의 몇분지 몇푼을 축낸다. 뻐꾸기 소리와 꿩꿩장서방 소리가 와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와 먹는다.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소리가 와서 먹는다..
첨성대 송시올 저 스스로 빈 꽃병 속에 하늘을 마주하는 우주를 꽂아 놓았다 뿌리에서 우듬지까지 좌르르 삼백예순 두 개의 돌로 나이테 굴리며 천상의 은핫물 사다리 타고 걸어오는 별들 숲을 떠밀던 새들의 지저귐으로 구름의 언저리를 떠돌던 바람 소리로 지구의 옆구리에서 빛..
강아지풀 김성춘 사랑하는 친구 멀리 떠나보낸 가을 아침. 강아지풀 하나 몸 흔들며 바람처럼 흔들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완행버스를 타고 자신의 남은 시간을 생각하며 몸 흔들며 바람처럼 흔들리며 차창 밖엔 바람소리 새소리 낙엽 구르는 소리 가득한 가을 돌아보면 힘들고 ..
너였던 꽃 이창윤 왕이 숨을 거두는 날 그 곁에, 말없이 따라 누운 사람들이 있었다 눈을 감은 순서까지 권력이었고 침묵조차 예법이었다 덧널 깊숙이 팔을 가지런히 모은 채 살아 있던 때의 신분으로 그들은 서로의 옆자리를 지켰다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것이었다 자연은 무릎 꿇..
얼룩 송아지 박목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 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 귀 귀가 닮았네 생명의 원형, 그 신비에서 탄생한 국민동요 경주 황성공원에 ‘얼룩 송아지 노래비’가 있다. 이는 1908년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몽돌 성은주 바다는 날마다 원고를 고친다 해변엔 마감이 없다 겹쳐 쓴 어제를 지우고 남길 것만 남기는 파도 제멋대로였던 문장은 ..
침묵 피정 1 신달자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
무인도 민병도 왜 여태 몰랐을까 나 또한 섬이었음을 그리움 후송해갈 배 한 척도 오지 않고 파도에 마음 베이는 뼈 하얀 저 무인도 섬과 길,..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산이 날 에워싸고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
‘평생토록 연약한 생물을 사탕처럼 까먹은’ 인간들에게 고함 총 16행 중 12행이나 반복되는 “말하길”이라는 급박한 리듬은 분명 서술의 층위를 더 비극적으로,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도록 하기 위한 시인의 전략이다. 그런데 그것을 전하러 온 사람이 하필 잉카의 공주와 그
어느 날 내 몸이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그런 일이 없는가. 세찬 바람 부는 날 산책을 하는데 긴 머리칼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식물의 긴 줄기 같이 이리 치솟고 저리 뒤덮는 경험 말이다. 이 때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내 몸의 구멍이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