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생태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손바닥 안의 작은 문명 어딜 가나 손바닥 안의 작은 액정에 빠진 장면을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찻집에서 만난 친구와 연인들도 거기에 눈은 거기에 두고 대화를 한다. 기차와 버스 안, 찻집 어디서나 나와 너, 나와 주변 생명체의 관계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우주를 품고 있는 여성의 몸 양쪽 가슴을 도려낸 불모의 여성을 그려낸 아픈 시를 읽는다. 상황과 맥락의 전개에 미학적 완결성이 있고, 수일한 문장을 갖추고 있으며, 한 군데도 풀어진 부분이 없다. 각 수 초·중·종장의 연결이 자연스러움은 물론, 각 수 사이의 여백도 웅
떠난 사람의 ’그늘’ 아래 자신을 되비쳐 보다 유월,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한 해의 중간, 호국 보훈 같은 것도 생각나겠지만 뜨거운 햇살과 함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달이라는 말이 가장 피부에 체감될 법하다. 요즘같이 더위가 지속되는 날은 그늘을 찾
꽃시를 읽는 마음의 빛과 그늘 이렇게 아름답고 애련한 꽃시가 있었는가 싶다. 시는 서경에 잔잔한 서사가 결합된 구조로 진행된다. 서사의 중심은 “오늘 두돌을 맞”은 아기다.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그 아기가 풍경을 온통 꿈틀거리게 하며, 특유의 여백과 파문을 이
쥐 김덕남 초침을 갉아먹는 오밤중 쥐 한 마리 손가락 침을 발라 콧등을 톡톡 친다 쥐뿔도 중뿔도 없이 뻣뻣해진 종아리 미지에 닿으려나 검색창 두드린다 문장을 다듬는 손 모니터에 눈을 꽂고 꽃문 앞 오체투지로 마우스를 당긴다 클릭도 스크롤도 밤을 깔고 누웠다
사투리 박목월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
저물 무렵의 종이 박스 손수성 벚나무 성화 아래 수행 중인 그를 만났다 어찌 그리 자신을, 납작하게 만드느냐니까 목이며 팔 다리 접어 중심을 잡는다 했다 처음엔 다 반듯한, 사각형 꿈을 꾸지만 중심을 잡지 않아서 모서리가 자꾸 자라 모서리 쌓은 집 한 채 그
의자들의 경영학 손수성 의자들이 바닥을 팔아 경영을 시작했다 시간의 후미진 골목, 영세한 그늘에서도 묵인된 밀수를 하듯 엉덩이들을 찍어냈다 싱싱하고 헐렁하고, 납작하고 축 처진 그 엉덩이가 갈아 탈, 보험까지 찍어냈다 접이식, 의자를 피하고 회전의자를 찾게 했다
내성천 신필영 발목이 가느다란 초식동물 눈빛 같다 상류쪽 맑은 물에 은어 떼로 튀는 햇살 길나선 외나무다리 혼자 내를 건넌다 ‘사이’로 발견하는 존재의 비밀 한 폭 그림 같은 단수다. 사물이 순한 동물의 모습으로 화육되면서 우리의 시각이 범하는 구분
기다렸다는 듯 권선희 종합운동장 맞은편 2층 유방외과에서 오른쪽 악성 종양 진단 받았을 때 기가 찼다 계단에 주저앉아 도로를 질주하는 낙엽들 바라보며 암만, 시인 생에 병마 하나쯤은 다녀가야지 암 병원에서 오른쪽, 왼쪽, 림프 전이까지 있다는 말 들었을 때 아
왜 이렇게 가슴 뛰느냐고 이성복 새 학기에 고3이 되어야 할 여자 아이는 머리 박박 밀고 입에 마스크하고 신승훈인가, 이승환인가 요즘 나오는 발라드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래, 노래라도 해라, 얘야, 노래라도 자꾸 불러라, 시어머니 병수발하던 옆 침대 아줌마
거울 속 거울 강현덕 폐쇄된 채석장에 내가 잘려있네 울음이 함께 남아 고요에 물려있네 수직의 암벽 아래에 그런 내가 모여있네 안개에 떠넘겼던 모든 부끄럼과 순정이라 믿었으나 무용했던 노래와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언젠가라는 말들이 일시에 붙들려 와 이 감옥
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김해자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뻬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러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날, 세우다 정지윤 동대문 원단 상가 등이 굽은 한 노인 햇살의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숫돌에 무뎌진 손가락 쉼 없이 갈고 있다 지난밤 팔지 못한 상자들 틈새에서 쓱쓱쓱 시퍼렇게 날이 서는 쇳소리 겨냥한 날의 반사가 주름진 눈을 찌른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눈
햇소금 古代 장석남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신청한 김장용 햇소금을 받았다고 그것도 세포씩이나 받아 뒤꼍 처마 밑에 작년 것의 후배로 나란히 쌓아두고 돌아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자는데 집 어디선가 조용한 흥얼거림이 시작되었다고 집 안에는 나 혼자뿐이니 귀
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 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音聲)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소화하는 목월의 방식 ↑↑ 손진은 시인 죽음을 다룬 한국 현대시 가운데 백미로 필자는 소월의 「초혼」과 목월의 「하관」을 꼽는다. 두 편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격절과 거리를 노래하지만 시의 어조는 완전히 다르다. 소월이 격정적 어조를 통해 화자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면, 목월은 절제된 어조와 표현으로 깊은 슬픔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의 아우의 하관과 그 이후의 심정을 차분한 독백과 대화와 진술로 드러낸다. 1연은 화자가 마음속에 아우를 묻으며, 기도하고 작별을 고하는 화자의 단정적인 서술과 독백이다. 빈번하게 사용된 마침표는 이러한 화자의 절제된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2연의 꿈에서 아우를 만나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대화는 아연 이 시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형(兄)님!”부르는 목소리에 화자는 반가움에 겨워 온몸으로 화답하는 경상도 남성의 절실한 음성 “오오냐”의 대화는 막막하고 불완전하다. 아우의 음성을 나만 듣는, 슬픔에 겨워 있음을 암시하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에 화자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3연은 소월과 목월의 시 전체를 비교하는 준거로 작용하는 구절이 나온다. 소월이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초혼」)의 수직의 공간으로 목소리를 침투시켜 이승과 저승의 공간을 나누고 있다면, 목월은 생명체(열매)가 죽으면 “툭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표현으로 죽음에 대한 화자의 적막감을 먹먹하게 드러낸다. 감정이입과 격절의 소월과, 내면화의 목월. 두 시인이 깊은 슬픔을 소화하는 방식이다.
물에 잠긴다는 것 박상봉 아이들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물에 잠긴 세월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 귀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해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산다 물에 빠져 귀를 잃고 사람의 말귀 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살았어 물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겨우 구조된 아이는 반 귀머거리가 되어 말도 잊어버리고 바다 깊은 물속에 두고 온 귀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데 물에 잠긴 귀가 듣는 소리는 아이들 우는 소리만 들린다 작은 그늘로 큰 그늘을 보듬어 안는 귀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을 통하여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죽은 250여명의 어린 영혼을 애도하는 시로 읽힌다. “아이들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물에 잠긴 세월이 떠오르지 않는다”에서 ‘물에 잠긴 세월’이라는 말은, ‘물에 잠긴 그간의 시간’과 ‘세월호’라는 배 이름이 함께 내재된 이중적 발화로 읽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 ‘나’는 “물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겨우 구조된 아이”로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의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을 가진다. “물에 잠긴 세월”은 그대로 시인 자신의 그간의 세월이 되는 절묘함이 있다. 그 세월을 시인은 “귀를 잃고 사람의 말귀/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살았”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지만, ‘귀’와 ‘말귀’의 이 말놀이 유머는 “바다 깊은 물속에 두고 온 귀는/아직 찾지 못했다”는 깊이로 연결된다. 시인은 “반 귀머거리가 되어 말도 잊어버리”는 끈질긴 고통의 시간을 살아왔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의 귀가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살면서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자신의 개인적 불행이 타자의 더 큰 불행을 만나면서 시인의 존재가 확장되는 지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시의 결구 “물에 잠긴 귀가 듣는 소리는 /아이들 우는 소리만 들린다”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감정의 흐름을 전달하는 의도적 표현이다. 굳이 그렇게 표현한 것은 물속에 잠긴 귀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나 왜곡되는 상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이명’ 상태의 감각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주체로 놓고, ‘우는’은 현재 분사형으로 감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전달하여 ‘들린다’는 수동태로 그 소리가 귀에 전달되는 상태를 강조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은 아직도 계속 울고 있고, 내 귀는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애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 체험과 공동체적 경험이 만나 새로운 시야와 깊이를 열어놓은 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분고분 가을 고분 서숙희 천년 세월쯤은 한 손에 얹고 비추는 환한 볕살 나눠 덮고 벌초에 든 고분들 머슴애 뒤통수처럼 고분고분 순하다 가을볕이 손수 든 바리캉 아래에서 슬며시 금관 벗고 수굿하니 디민 머리 바람이 쓰윽 쓰다듬어 고분고분 고분들 참하니 잘 다듬어진 평화로운 저 위엄 천년 이불 가벼이 다시 또 당겨 덮고 혼곤히 맑은 잠에 드는 고분고분 고분들 위엄과 천진, 성과 속이 넘나드는 경지 언어를 이렇게 유연하고 재치있게 다루는 시인이 근래에 있었던가 싶다. 시집 『빈』(작가, 2024.7)만 살펴아도 말놀이(pun)가 사용된 작품이 열 편이 넘는다. 그 중 “깨어진 거울 속에선/대소 없는 파안만 있다”(「파경」)거나, “자꾸만 목화이불이/목하이별로 읽혔지”( 「비문非文의 밤」), 또 “막다가 받아주다가 위안이다가 통곡인//너는 늘 난해했고 나는 자주 오해했어”(「벽의 이중성」), “허무도 힘껏 허무한/슬픔도 힘껏 슬픈”(「미스 보디빌딩」)이라는 구절에는 한없이 쓸쓸하고 애잔한 정서가 묻어난다. 그런가 하면 “닦는 일에 길들여진 나긋나긋 티슈 티슈, 독이 번져 다 헐은 이슈의 밑구멍을”(「이슈와 티슈」)에 이르면 실시간 쏟아져나오는 티슈보다 가벼운 이슈라는, 현실의 얼룩과 어두움에 예리한 메스를 가하기도 한다. 확실히 그의 날렵하고도 빛나는 언어에는 명랑하고 아픈 개인과 타자, 시대를 넘나드는 정서와 진단이 겹쳐 있다. 아무래도 그의 시가 깊어지는 지점은 언어의 말맛이 다층적인 함의의 조화를 거느릴 때다. “무채와 시가, 썬다는 것과 쓴다는 것이”(「무채를 쓰고 시는 썰고」)할 때 ‘무’는 채소 ‘무’이면서 ‘무無’이고, 마찬가지로 ‘무채’는 ‘무채無彩’이다. 「빈」은 그 정점에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에서 ‘빈’은 ‘빈貧’이나 ‘공空’에 가깝다면 “비워둔 내 시의 행간에/번지듯 빈, 너는 오지”의 ‘빈’은 ‘빛나다’라는 뚯인 ‘빈彬’의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다. 오늘 우리가 다룰 그의 시의 특징은 명랑성과 유머다. “예전엔 이팝꽃이 밥, 밥하며 피었지요//요즘엔 이팝꽃이 팝, 팝하며 터져요”( 「이팝꽃 변천사」)에 나타나는 명랑성 말이다. 첫수의 풍경은 아마 고분의 가을 벌초 풍경일 것이다. 인부들이 예초기를 들고 다가가는데, “천년 세월쯤은 한 손에 얹고 비추는” 가을 고분들이 일순 “고분고분 순”한 “머슴애 뒤통수”가 되는 천진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둘째 수에서 시인은 금관을 쓴 지체 높은 분이 그걸 벗고 “수굿하니 디민 머리”를, “바람이 쓰윽 쓰다듬어” 고분해졌다고 한다. “가을볕이 손수 든 바리캉”의 통찰 때문에 시가 더 깊어진다. 셋째 수는 벌초가 끝난 후의 풍경이다. 어느새 고분들은 “잘 다듬어진 평화로운 저 위엄”을 회복했는가? 아니다. “혼곤히 맑은 잠에 드는/고분고분 고분”에 이르면 아직 영락없는 철부지다. 그렇다. 시인의 말놀이의 재능과 운치 때문에 한 편의 시에서 우리는 위엄과 천진, 햇살과 천년 이불, 영원과 현재, 성과 속이 넘나드는 경지를 맛볼 수 있었다. ‘일물일어一物一語’를 주장한 사람은 플로베르이지만, 이 시인의 손이 닿으면 어떤 사물도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새롭고도 경이로운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시조가 운문적인 맛을 회복해야 한다면, 언어의 재치, 말놀이도 소중한 자산이 아니겠는가.
저녁의 소묘 한강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고통과 치욕 끝에 남은 사랑의 시 시인은 ‘저녁’이라는 시간의 단어를 시어로 많이 사용한다. 시집의 이름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이고, 시의 제목만 살펴봐도,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저녁의 대화」, 「저녁 잎사귀」 등 여러 편이 있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을 우리는 흔히 거울을 보듯 찬찬히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는 시간으로 부른다. 그 몇 분의 시간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자아를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시인이 그리는 저녁은, 그런 성찰의 시간을 멀찍이 뛰어 넘는다. 새벽의 시간과 뚜렷한 구분도 없다. 바로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피 흐르는 눈」) 할 때의 눈이 가진, 고통받는 존재들과 내밀하게 교감하는 지점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이 시는 “어떤 저녁”이 “피투성이”일 때 나의 깊은 곳에서 고통과 침묵 사이에서 뿜어나오는 “고요히 붉은/영혼의 피 냄새”(「마크 로스코와 나2」)에 가깝다.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오랜 지옥”을, 어둠이 대신 그들의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있는데, 나는 그들을 위무해줄 수는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시인은 고심한다. 여백 끝에 시인은 이들의 ‘피투성이 삶’이 안 보이도록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하고 소망한다. 그래야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노랗고 주황빛인 “외등은 희”어지니까. 화자의 마음처럼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 되니까.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오토바이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는 개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이 나온다.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얼마나 고통과 마주하는 일이 끔찍했으면 그림자와 빛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고 할까, 그렇다고 해도 처절한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힐 수 있다면 오랜 지옥을 견뎌온 사람들의 삶이 조금은 위무될까. 그리하여 우리 눈이 흑백렌즈였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소망과 한탄이 뻑뻑한 치욕을 사랑으로 바꾸는 행위임을 알겠다. 그런데도, 그 사랑이 따뜻하면서도 서늘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비록 그 렌즈로 바라본다고 세계의 상처가 숨겨지기야 않겠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그의 눈을 적신” 붉은 빛이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는 걸 보고 싶다는 말이다. 다시 고통과 치욕, 그 끝에 남는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