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 아래에 유교(楡橋)가 있었고 귀교(鬼橋)도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1986년 2월 월정교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월정교 하류 19m 떨어진 지점에서 뜻밖의 목교 교각 부재가 발견되었다. 이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원효 스님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는 문천교와 월정교가 같
문천에 있었다는 일정교와 효불효교는 같은 다리일까? 문천 즉 남천과 그 주위에는 월정교 이외에도 춘양교, 효불효교, 유교, 귀교 등 많은 다리가 있었다. 월정교와 춘양교 두 교량은 이름만으로도 그것이 설치된 지역이 하나는 동쪽, 다른 하나는 서쪽이라는 것을 알 수
월정교는 문천 최고의 교량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60)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월정교는 신라 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이용되고 춘양교는 경주 남산과 남쪽 외지를 연결하는 다리였을 것으로
문천은 서라벌에서 중요한 하천이었다 서라벌의 옛터인 경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으로 토함산과 명활산, 동대봉산, 함월산. 남으로는 금오산, 고위산, 마석산. 서쪽으로는 송화산, 선도산, 벽도산. 북으로는 금강산, 금학산, 약산이 에워싸고 있다. 동쪽을 제
계림 속에 계림비, 그리고 향가비가 있다 경주는 예로부터 숲의 도시였다. 북천 변으로는 고성수, 오리수, 임정수가 있었으며, 서천 변에는 왕가수, 남정수, 천경림, 어대수, 고양수 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일부 숲은 남아 있으나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지금
계림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경주에는 다른 도시에 비해 숲이 많은 편이다. 왕릉을 비롯한 고분들은 대부분 숲속에 안온히 안겨있다. 이곳 계림은 그냥 숲이 아니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신성한 곳이다. 요즈음 계림은 초등학
“준이라 캤나......니가 올해 몇살이고?” 서당에서 글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준이 막 사랑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며칠 전부터 작은 사랑채에 묵고 있던 할아버지가 마침 댓돌에서 신을 꿰고 있다가 공손히 읍하는 자신을 불러 세웠다. 준이 마루에 앉은 할아버지를 마주
옥룡암 경내 삼층석탑은 바람이 매섭다. 12월 하순, 골짜기를 내려온 바람은 한기가 세서 뼛속까지 파고든다. ‘쨍~’하게 시리다는 말을 실감한다. 안양교를 건너니 하늘에 걸린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내린다. 여긴 곧 봄이 올 것만 같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
지금의 청소년들을 세대로 규정지어 보자면 이미 MZ세대를 넘어서 잘파세대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순서상으로는 Y세대가 되어야 하지만, 밀레니얼세대라는 특별한 이름이 더 익숙하게 자리 잡은 세대가 M세대이다. 그들은 이미 부모 세대로 편입했다. M세대의 자녀들인 알파
2025년 APEC(에이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개최 도시로 경주가 선정된 것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APEC 개최의 준비과정과 개최 전후를 통해서 경주, 경북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격을 다시 바르게 널리 알리고, 경주는 세계에 지속 가능한 소통·향유
첨성대는 최초 여왕의 위상과 성조(聖祖) 탄생을 형상화?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관측대로 일반에 알려져 왔다. 첨성대란 말 자체가 ‘별을 바라보는(瞻星) 대(臺)’라는 것으로 일본인 학자 와다유지(和田雄治)는 첨성대 위에 목조 건물이 있었고 그 안에 혼
경주는 거기서 태어난 사람들만의 고향이 아니요, 우리 민족 모두의 고향이다. 우리나라 민족문화의 모든 원형이 경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족문화의 고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위 문장은 일향(一鄕) 강우방(1941~ ) 원장의 저서 『강우방 예술론-예술과 미
“준아, 니 여어가 어딘지 기억이 나나?” 경주에서 소달구지에 실려 아침부터 점심나절까지 찾아간 곳에 넓고 높은 서원이 하나 있었다. 교촌의 집보다는 좀 좁지만 산의 사면을 따라 올라가며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세워진 집인데다 처마가 높아 얼핏 보기에도 장엄한 모습이다
문파 선생은 그 시대 부자로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희사한 분이다. 그렇다면 그 결연한 의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마지막 경주최부자 문파 선생에 대한 정말 궁금한 주제였다. 문파 선생은 전통적인 유생의 길을 걸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글
피안에 이르는 길 안양교(安養橋) 바람이 차다. 찬만큼 시리다. 시린 만큼 눈부시다. 탑곡마을에서 골짜기로 발을 들이면 이내 고적한 풍경에 홀리게 된다. 절집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는 하나, 매혹적인 풍경에 사로잡혀 절집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탑곡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엔
경주는 신라 천 년의 수도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다. 신라의 건국 원칙이자 정치적 협력의 모델이 된 화백정신,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 정신, 조선 후기 최부자 가문의 윤리적 자본주의, 19세기 동학의 평등사상은 모두 경주가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온 도시임을 보여준다. 화백정신은 전원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잡음을 없애는 정치수단으로 신라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화랑도 정신은 개인의 수양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을 통해 강력한 리더십과 조화를 강조하며 국가적 목표 실현에 기여했다. 특히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끌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의 화랑도 정신을 차용하여 개인과 국가가 하나로 융합되는 리더십을 강조하며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한 경험이 있다. 조선 후기 최부자 가문은 부의 축적을 공동체 이익으로 연결하며 윤리적 자본주의의 모범을 보였고,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통해 평등과 공존의 철학을 설파했다. 현대에 이르러 경주는 민주주의와 노동 운동, 생태 평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진보적 가치를 창출했다. 유시민은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위한 목소리를 내며 지식인의 책임을 강조했고, 단병호는 노동자 권익과 평등을 위해 헌신하며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법륜 스님은 생태적 평화와 사회적 조화를 실천하며, 현대 문제 해결을 위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했다. 경주의 화백정신은 미국 매사추세츠의 월든 호수에서 시작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태 철학과도 통한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단순하고 자발적인 삶을 실천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성찰했다. 그의 철학은 환경 보존, 사회적 책임, 그리고 개인적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며 현대 생태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화백정신은 이와 같은 소로의 사상을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철학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생태적 전환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내년에 개최될 APEC 2025 정상회의는 경주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탄소중립과 환경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중심지로 자리 잡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회의 장소인 화백컨벤션센터는 신라의 화백정신을 상징하며, 이해관계자 간의 협력과 조화를 통해 글로벌 비전을 구체화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컨벤션센터가 위치한 보문호수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상징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을 논의할 최적의 장소다. 신라의 첨성대가 하늘의 움직임을 읽어 미래를 설계했던 것처럼, 화백컨벤션센터는 협력과 합의를 통해 탄소중립과 생태적 전환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경주의 생태 가치는 농업과 관광의 융합을 통해 더욱 확장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주 곳곳에서 추진 중인 선진 농업 기술을 활용한 친환경 체험 농장과 지역의 자연 생태를 기반으로 한 자연 복원 프로젝트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지속 가능한 관광과 경주의 맛을 전파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관광객들에게 자연과 문화가 결합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또한, 경주의 전통문화와 현대 기술을 융합한 미디어아트와 문화 축제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관광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적지를 활용한 야간 디지털 전시나 지역 예술가들과 협력한 인터랙티브 전시는 경주의 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세계 관광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신라정신을 바탕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속 가능성과 협력을 위한 비전을 담는다면 경주의 신라정신이 환경 보호, 사회적 책임, 경제 성장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며, 경주를 세계적 협력과 번영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이다. 경주는 신라의 여러 이야기들과 화백정신과 보문관광단지를 매개로 전통과 현대, 지역과 세계를 연결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생태적 전환을 제안하는 글로벌 도시로, 경주는 글로벌 정신적 지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세계적 정상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국제회의나 다른 회의를 통한 신라정신의 현대적 해석과 생태적 가치의 전파를 통한 글로벌 도약은 경주가 세계적 중심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사서(史書)에는 첨성대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첨성대의 축조 시기를 밝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유사』 ‘선덕여왕지기삼사조’에는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만들었다[鍊石築瞻星臺]’고 하였다. 또, 「왕력(王曆)」에 제17대 내물마립간릉 위치와 관련하여 점성대(占星臺)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권12 지리지에 있는 동경유수에 관한 기록에도 첨성대가 있으며 ‘신라선덕여주(善德女主)가 쌓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권 150 경주부에는 선덕여왕 2년(633년)이라는 축조 시기와 함께 첨성대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첨성대는 경주부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633년(선덕왕 2년)에 선덕여주가 쌓은 것이다. 돌을 다듬어서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 5촌, 위의 둘레는 21척 6촌, 아래 둘레는 85척 7촌으로 속이 통해 있어서 사람이 그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 말미에 “이곳에서 천문을 관측한다.”고 덧붙였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16년(647년)에 첨성대를 만들었다. 돌을 다듬어 대를 쌓은 것인데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고 높이는 19척이다. 그 속이 통해 있어 사람이 그곳을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 경주부 동남 3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시기는 647년은 진덕여왕 원년에 해당하며 『세종실록지리지』의 633년과 차이가 있다. 이상에서 축조연대를 633년, 647년으로 달리 기록하고 있으나 선덕여왕 때 축조되었고 천문을 관측한 곳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분석 결과로 천문대가 확실하다. 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 박사는 “신라시대 축조된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첨성대가 상징적인 건물이라거나 제사를 지내던 제단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김 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린 고대 천문관측기록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640년대 이후 기록된 유성이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며 “이는 첨성대에서 유성을 관측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어 “첨성대가 완성된 이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며 “기록된 내용도 매우 정밀해졌다.”고 덧붙였다. 즉, 541년부터 640년까지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이 3건에 불과했지만, 첨성대 축조 예상 시점인 641년부터 740년까지의 기록은 38건에 달하고 있다. 또 첨성대 축조 전인 467년 10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떨어졌다.’는 식의 막연하고 간단한 내용이 있지만, 첨성대 축조 후의 718년 11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유성이 묘수(황소자리)에서 규수(안드로메타자리)로 들어갔는데…’라는 식으로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돼 있다고 김 박사는 설명했다. 김 박사는 특히 “신라가 별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문열림(文熱林)에서, 오행성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 지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도 확인했다.”며 “이는 신라가 첨성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천문과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첨성대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아님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이후 충북 청주 충북대에서 열리는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한편, 이어 영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도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지금까지는 결정적 증거 없이 그저 막연하게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말해왔지만, 신라가 남긴 『삼국사기』 기록들이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며 “영국에서 열리는 학술발표회에서 인정받으면 첨성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 첨성대에 대한 후속 논의를 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경주최부자를 취재하면서 늘 안타깝고 어이없게 생각하는 ‘옹이’ 같은 주제가 있다. 그것은 세상이 문파(汶坡) 최준(1884-1970) 선생에 대해 지나칠 만큼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고의로 가두어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 정도다. 잘라 말하건데, 문파 선생님은 경주최부자의 모든 정신을 구현한 결정판이자 당신의 조상님들을 뛰어넘은 선각자이자 애국, 애민의 화신 같은 분이다. 그런데 왜 이런 훌륭한 분이 한국사에서 이처럼 홀대받고 있을까? 왜 문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이처럼 알려지지 않았을까? 세상의 눈에서 감추어진 애국·애민의 화신! 그런 의문에서라도 지금부터 문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짚어볼 참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써나갈 문파 선생님 이야기는 손자이신 최염 선생님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문파 선생님에 대한 회고를 정리하고 그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취재해 기술한 것임을 밝혀둔다. 최염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문파 선생은 일제 강점기, 그 시대 부유층, 인텔리 젊은이들 상당수처럼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한량으로 떠돈 아들을 건너뛰어 손자인 최염 선생님을 혼신을 다해 가르쳤다. 최염 선생님은 대학생이 된 이후 할아버지 문파 선생님을 바로 곁에서 모시고 다니며 문파 선생님의 모든 삶, 그 현대사의 질곡을 함께 나누신 생생한 증인이셨다. 특히 문파 선생님이 대구대학을 꾸려나가시는 과정에서 학교의 운영권을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넘기는 사연,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정권에 학교를 바친 이유, 박정희가 영남대학 교주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경위, 나아가 전 대통령 박근혜가 영남대학교를 유린하고 문파 선생님이 희사하신 가문의 재산을 팔아치운 뼈저린 이야기를 마치 영상으로 찍어놓은 듯 기억하고 계셨다. 따라서 문파 선생님의 크고 높은 뜻이 어떻게 구현되었고 이 뜻이 어떻게 세상에서 잊혀졌는지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될 것이다. 한가지 미리 말해 둘 것이 있다. 내가 이 원고를 쓰면서 문파 선생님을 일컬을 때는 늘 선생님이라고 했고 역시 최염 선생님께도 늘 님을 붙여 써왔다. 그 이유는 비록 대중을 향한 글이라도 나의 존경심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수시로 할아버지와 손자 두 분을 표현해야 하겠기에 문파 선생님은 그냥 문파 선생이라고 쓰고 최염 선생님은 오랜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 생활로 세상에서 보통 부르듯 ‘최염 회장’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이전 조선은 밖으로 서구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 되던 때다. 안으로는 신분을 떠나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한 동학이 급격히 교세를 넓힐 때였고 천주교 탄압이 절정기를 이루는 때였다. 고종의 등극(1863년)에 따른 흥선대원군 집권은 왕권 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운 경복궁 재건으로 또 다른 민생 수탈의 역사로 이어졌고 전국적으로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철폐 등의 개혁이 일어났다. 이 땅의 민중에게 스스로 존엄함을 일깨우던 수운 최재우 선생은 역모와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순교했고 프랑스 함대와의 전쟁인 병인양요로 이어진 병인박해는 수많은 천주교 순교자를 양산했다. 이로써 나라를 걸어 잠그는 쇄국정치가 시작되었고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일파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서서히 조선 왕가는 권력투쟁의 장으로 변모해 갔다. 이 와중에 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과 서구 열강은 다투어 조선을 침범해 들어왔고 조선은 세계 열강의 동북아시아 패권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신미양요를 통해 미국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인해 별다른 소득 없이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은 침략을 전제로 운요호 사건(1875년)을 일으켜 결국 조일수호통상조약(일명 강화도 조약/1876년)을 강제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에 수신사가 파견되었는가 하면 그 결과의 하나로 최초의 근대식 군대인 ‘별기군’이 조직되기도 한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이미 10여년 전부터 조선은 국가를 영위할 수 있는 통제력을 상실했고 밖으로는 청나라의 외압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가운데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갈수록 거세졌다. 문파 선생이 태어나기 직전의 조선은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고 영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정식으로 맺었다. 그 사이 별기군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는 이른바 ‘임오군란’도 일어났다. 권력투쟁으로 나라는 풍전등화 지방은 가렴주구, 동학의 패망은 일본의 침략 가속화 해 이런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엄두를 못 내던 조정은 권력 쟁탈을 위한 힘겨루기에 급급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름뿐인 왕인 고종을 두고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왕비인 민비가 번갈아 가며 정권을 농락하면서 백성들은 외면되었고 나라꼴은 붕괴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누가 와서 손만 대면 무너질 것 같은 허약한 조정이었다. 전국은 유민들이 하얗게 산하를 메우며 떠돌았고 끄트머리 신분제 시대, 양반과 지역 토호들의 갑질과 패악에 맞선 화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국내의 선각자들이 이러한 국제정세를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동학 교조 최제우는 동학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 들었지만 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고 뒤를 이은 최시형은 전국으로 은신하며 암암리에 교세를 넓혀 나갔다. 최익현, 허유 등 지조 높은 유림의 세력들은 위정척사를 부르짖으며 조정과 유학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노력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수구적 자세로 일관했다는 평가를 떨치기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일본은 보다 교묘하고 보다 은밀하게 우리의 숨통을 죄어 오고 있었다. 문파 선생이 태어난 1884년은 이런 사정이 모두 얽혀 돌아가는 격동기였다. 그해 일어난 갑신정변은 겉으로는 나라를 쇄신하려는 개화 세력이 일으킨 혁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급진적 개화파들은 자신들의 빈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충하기 위해 엉뚱하게도 자신들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일본을 등에 업으면서 또 다른 암운(暗雲)을 예고했다. 정권 탈취에 급급하던 개화 세력이 수구세력을 일시적으로 갈아 치웠지만 준비되지 못한 어설픈 정권은 불과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풍비박산 났다. 개화파 인물들은 급거 일본과 미국 등으로 망명하고 남은 자들은 살해당했다. 소수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수구세력이 등에 업고 있던 청군과 변변한 교전조차 하지 않은 채 철수했고 청군은 비록 얼마 동안이긴 하지만 조선을 지배하는 점령국으로 행세했다. 그 어쭙잖은 정변은 서구열강들에게 침략의 기회와 구실을 제공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서구열강들이 대놓고 침탈을 시작하며 그야말로 너나없이 조선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1884년에는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가 조선에 공식 진출했다. 1885년에는 영국군이 수호통상조약을 무시하고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도 임오군란 후 청나라로 납치되어 갔던 대원군이 환국하며 친러 경향의 민비와 대치하는 등 국내 정치는 여전히 암투의 상태였다. 한편 중앙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지방 관속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전라도 고부였다.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며 들고 일어나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자 사방에서 분노한 민중들이 일어섰다. 전라도에서 교세를 떨친 동학군이 충청도, 강원도까지 일어나자 조정은 동학민중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텐진조약에 의거, 일본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조선에 침공하는 빌미만 제공한다. 결국 동학민중운동은 일본의 개입으로 우금치 등에서 비참하게 패하며 막을 내렸고 각종 개혁의 시도 역시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동학군을 괴멸시킨 일본은 강제로 갑오개혁안을 개정하고 다시 이듬해는 을미개혁이라는 2차 개혁안을 발표하도록 종용한다. 일부 저항이 있었지만 강홍집, 박영효 등 조선의 수뇌부들은 일본의 주도하에 개혁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런 한편 일본은 국내에 체류 중이던 청과 마찰을 일으킨 끝에 실질적인 조선 지배권을 두고 청일전쟁에 돌입한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조선을 깔본 나머지 마침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년)의 참극을 일으켰고 고종은 왕비가 난자되고 왕궁이 불타는 것조차 막지 못한 채 부랴부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다시 그 이듬해인 1897년은 일본이 세우다시피 한 허수아비 정권인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황제국’이라는 그럴싸한 허울뿐, 실제 권력은 일본이 거머쥐고 있었다. 그런 일본에 대해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던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인 것이 1904년.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다시 한 해가 지난 1905년 실제로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로써 전국적인 항일 운동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우세한 군사력과 신무기를 보유한 일본의 압승! 마침내 나라가 강제 병합되는 경술국치(1910년)로 치닫게 된다. 격동의 시기였다. 풍전등화의 국운..., 설 땅을 잃어버린 지사들...! 이런 시대적 격변 속에서 문파 최준 선생은 태어났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나라, 문파 선생의 삶은 처음부터 거대한 장벽에 맞닥뜨린 것이었다. 물론 그 장벽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막대한 이익을 주는 보호벽이 될 수도 있었고 권력을 쥐고 흔들 든든한 밑바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과연 최준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누구나 아는 부잣집, 그중에서도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백성 구휼에 온 힘을 쏟아온 흔치 않은 부자, 경주최부자의 마지막 후예가 역동이 현장에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 그라츠(Graz)에는 외계인 비행체같이 특이한 건축물이 있다. 이 괴상한 건물은 쿤스트하우스(Kunsthaus)로 불리는 현대미술관이다. 그라츠는 붉은색 지붕이 많은 고풍스러운 역사 도시인데, 문어 빨판처럼 생긴 촉수가 달린 기괴한 건축물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주민들의 80% 이상이 반대했다고 한다. 도시의 역사적 공간 한복판에 외부 돌기가 튀어나온 외계 생명체 같은 건물이 생기는 것에 당연히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건물이 가진 매력으로 인해 그라츠 시민들뿐 아니라 이곳을 들르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친근한 외계인’이라는 별칭으로 그라츠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쿤스트하우스는 사실 새로 지은 건축물이 아니다. 기존 건물을 구조와 뼈대를 활용하여 외관을 증축한 것이다. 밤이 되면 외벽에 조명들이 빛을 내고 정해진 시간에는 특유의 외계음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한다. 당연히 이 신기하고도 특색있는 건축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생겼고 주변은 활성화되었다. 무엇보다 이 건물의 진가는 지역 활성화와 통합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라츠를 관통하는 무어(Mur)강을 기준으로 도시는 동편의 역사지구와 서편의 상업지구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지역 모두 쇠퇴하여 도시의 활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일반적으로 그 지역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건물을 짓게 된다면 해당 지역의 중심지에 새로운 시설이나 건물을 짓기 마련인데, 그라츠의 쿤스트하우스는 무어강 서편에 지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양측 지역 모두를 활성화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쿤스트하우스가 강변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쿤스트하우스를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강 건너 동편의 구시가지가 되었다. 특히 서측 구시가지에 그라츠의 상징인 슐로스베르크(Schlossberg)로 불리는 언덕이 있어 쿤스트하우스의 외벽을 통해 발산하는 조명을 활용한 미디어 쇼를 관람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대학과 수도원, 박물관 등이 입지한 역사 도심인 동편의 구시가지에 비해 산업시설, 병원, 기차역 등 기능적인 시설 중심으로 조성된 강 서편지역도 쿤스트하우스로 인해 주변에 고급 식당과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전보다 도시가 발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무어강 동편의 구시가지도 쿤스트하우스를 감상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되면서 동서지역이 함께 활성화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경주의 구시가지에서도 쿤스트하우스와 같은 랜드마크가 필요하다. 경주 구도심은 현재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동측의 황리단길과 대릉원 일대, 중앙의 중심상가와 금리단길, 그리고 경주읍성과 그 주변 지역이다. 일명 황리단길, 금리단길, 읍리단길로 불리는 이 세 곳의 활성화 정도는 익히 알다시피 큰 차이가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지역활성화를 위한 기폭제가 필요하다면 바로 쿤스트하우스와 같은 상징적인 건축일 것이다. 새로 건물을 지을 수도 있지만, 쿤스트하우스처럼 기존 건물을 활용하거나 일부 증축하여 경주에 필요한 기능을 담을 수 있으면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옛 경주역 앞의 도로인 화랑로는 중심상가와 읍성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로 볼 수 있는데 이곳에는 공실이 된 건물도 있고 규모 있게 지은 업무시설도 있다. 또 경주역 부지도 앞으로 개발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이들 건물 또는 부지 한 곳을 이용하여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은 두 지역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건축물을 조성하는 것이다. 내부 용도는 아직 경주에 없는 도시역사관과 소규모 회의를 위한 컨벤션 기능을 담는 것은 어떨까? 필자는 2022년 봄 본지를 통해 도시의 역사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역사관 건립의 필요성에 대해 이미 기고한 바 있다. 소규모 회의장 또한 도심지역의 부족한 컨벤션 기능을 강화하여 보문단지에서의 대규모 행사와는 다른 외부 수요를 구도심 지역으로 유인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역활성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중 랜드마크 건축은 도시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확보할 수 있고 상징적인 경관 형성을 통해 지역 활성화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간 한옥과 기와지붕으로 상징되는 고도 보전의 틀 속에서 벗어나 한번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흥(興)’ ‘왕(王) 자 새겨진 기와 바람이 차다. 찬 기운도 반가운 가을이다. 숨이 막히도록 무더웠던 여름, 우리는 얼마나 힘들었던가. 여름을 잊고 이제 차갑디 차가운 계절을 반겨 맞아야 하리. 거리마다 잎들이 모여있다. 제 근원이 어디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