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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 지원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16호 입력 2026/01/22 11:32 수정 2026/01/22 11:45
경주, 근대를 거닐다[26] 경주 최부자댁


경북 경주시 교동 교촌마을에 있는 ‘경주 최부자댁’(국가민속문화유산)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종택이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경북 경주시 교동 교촌마을에 있는 ‘경주 최부자댁’(국가민속문화유산)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종택이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경북 경주시 교동 교촌마을에 있는 ‘경주 최부자댁’(국가민속문화유산)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종택이다. 최 부자 가문은 ‘12대 만석꾼, 8대 진사’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해방 이후 전 재산을 대학 설립을 위해 내놓은 최 부자의 기부 정신은 사회 환원의 모범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이곳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마지막 최부자로 꼽히는 최준(1884~1970)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교촌마을 최부자댁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됐다.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 최시형, 손병희 등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경주 최부자댁 입구 전경이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경주 최부자댁 입구 전경이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300여 년 부의 비결은 ‘육훈(六訓)’


최 부자 집안의 파시조(派始祖)는 최진립(1568~1636) 장군이다. 최진립에서 7대 최언경(1743~1804)대까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살다가 8대 최기영(1768~1834)대에 교촌마을로 왔다. 최진립에서 최준(1884~1970) 선생까지 12대에 걸쳐 만석꾼의 지위를 누렸다.

 

교리 이전 당시의 일화가 흥미롭다. 이곳엔 경주향교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성스러운 향교 옆으로 민가가 들어오는 데 대해 유림의 반대가 거셌다. 요즘으로 치면 학교정화구역에 호텔이 들어오는 격이었을 터다. 그러자 최 부자는 땅을 두 자 정도 덜어내고 대들보를 석 자 정도 낮춰 향교보다 다섯 자 낮게 집을 짓기로 약조했다. 더욱이 재정이 어렵던 향교 측에 미곡 1000석을 기부함으로써 유림의 동의를 얻어 냈다고 한다.

부를 유지한 비결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여섯 가지 행동지침, 육훈(六訓)에 있었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물은 사회로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은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등이 그것이다.

육훈 하나하나가 가슴을 울리지만, 특히 세 번째와 다섯 번째가 압권이다. 흉년에는 땅을 가진 농민들도 생계가 어려워 땅을 헐값에 내놓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자들은 땅을 사 모으기에 혈안이 되기 마련인데,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니. 뿐만 아니라 흉년에는 아무나 와서 쌀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아예 곳간 문을 열어놨다고 한다. 게다가 이 집안 사람들은 육훈을 실천하며 높은 벼슬을 멀리한 덕분에 정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소작료 배분도 남달랐다. 관행적으로 80%를 받던 소작료를 3대 최국선(1631~1681) 때부터 절반만 받는 파격조치를 단행했다. 주민들은 생산성이 높아지고 좋은 땅이 매물로 나오면 앞 다퉈 최부자댁에 알렸고, 그 덕분에 최부자 집안은 좋은 땅을 늘려갈 수 있었다.

여기에다 생산량이 만석이 넘게 되면 소작료를 절반(5:5)에서 6:4 혹은 7:3으로 낮추는 한편 만석 이상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였다. 부를 움켜쥐지 않고 나누어주면 더 큰 부를 얻는다는 사실을, 이 집안 사람들은 이미 1600년대에 깨달은 것이다.

 

곳간채에는 최부자댁 육훈(六訓)을 전하는 안내판이 부착돼 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곳간채에는 최부자댁 육훈(六訓)을 전하는 안내판이 부착돼 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이 집안의 마지막 부자는 12대 최준(1884~1970)이다. 300여 년에 걸쳐 이어온 이 가문의 부는 최준 선생 대에서 그치고 만다. 집안을 말아 먹은 많은 부잣집 도령들이 그러하듯이, 그가 주색잡기나 도박, 마약에 빠져 재산을 말아먹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엉뚱한 사업을 벌여 재산을 탕진한 것도 아니었다. 거기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연이 있다.

 

최익현, 신돌석, 최시형, 손병희 등 항일독립지사들이 이 집안에 자주 묵고 가면서 최준은 자연스레 독립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촌매형은 대한광복회사령관 박상진이고, 장인은 안동 오미마을 영감댁 김정섭이다. 김정섭의 아우가 그 유명한 김응섭으로 최준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대다가 감옥을 가야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엔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고 골고루 사방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라고 하면서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라는 위장회사를 설립한다. 이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냈다. 임시정부의 필요자금 6할을 부담했다고 한다.

광복 후엔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소신으로 모든 재산을 기부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설립했다. 이후 두 대학은 대구대학으로 합병됐으며 대구대학은 다시 청구대와 합병돼 영남대학교로 거듭났다. 현재 최씨고택을 비롯해 교동의 대부분 땅과 가옥은 영남대 재단인 영남학원 소유로 돼 있다.

이처럼 최준 선생은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을 위한 독립자금에, 광복 후엔 교육 사업에 전 재산을 ‘탕진’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그 어느 조상들보다도 철저하게 실천한 것이다.
 

경주 최부자댁 내 곳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확대
경주 최부자댁 내 곳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김운 역사여행가>


고택 곳곳엔 겸양의 흔적이


경주 최부자댁은 문간채, 큰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으로 구성돼 있다. 솟을대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집 솟을대문은 일반적인 고택의 그것보다 낮고 수수하다. 여기서부터 최 부자의 겸손이 느껴진다.

 

문간채와 정면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큰 사랑채가 우뚝하게 서 있다. 큰 사랑채는 1970년 화재로 전소됐다가 2006년 복원됐다. 복원한 건물의 나무 부재들이 아무래도 세월의 흔적을 머금지 못해 고풍스러운 맛은 떨어진다. 큰 사랑채는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에 네모기둥을 세워 팔작지붕을 얹었다. 큰 사랑채 마당에 올림픽 성화대처럼 생긴 것은 명료대(明瞭臺)인데, 밤에 불을 밝히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다 간 사랑채에 붙은 편액도 눈여겨 볼만하다. 대우헌(大愚軒)과 둔차(鈍次).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 사는 집’과 ‘재주가 둔한 2등’이란 뜻이다. 대우헌은 최준의 조부인 최만희(1832~1879)의 아호이고 둔차는 최준의 부친 최현식(1854~1928)의 호다. 겸손이 이 집의 내력임을 잘 보여 주는 단면이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건물은 마당 동쪽에 늠름하게 자리 잡은 곳간채다. 곳간채는 곡식을 넣어 두는 만큼,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원활하도록 판벽으로 돼 있다. 박공 부분인 지붕 양쪽 옆면엔 바람막이 판인 풍판을 달았다. 고풍스러운 멋이 두드러진다. 곳간채 하단은 판벽으로 돼 있고, 상단은 통풍창과 회벽으로 돼 있다.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현존하는 국내 최대·최고의 곳간 건물이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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