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일본으로 간 향가에 대한 칼럼을 쓰는 중이다. 향가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향가에 어떠한 내용을 담았을까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일본인들이 우리에게서 바구니를 사갔는데 그 바구니에 무엇을 담았나 살피는 것과 같다. 이번 칼럼에서 다루는 향가에는 백제 망국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유민들의 삶이 들어있었다.
백마강 패전 이후 수많은 백제인들이 남해안에 위치한 ‘대례성’이라는 곳에서 일본 수군의 배를 얻어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초기 정착은 만난을 무릅써야 했을 것이다. 낯선 땅에서 어떻게 살다가 일본 민족 속으로 스며들어 갔을까. 사실상 이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자료가 부족하기에 온갖 추측과 상상만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확실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의 흔적이 함박눈 내리는 날 눈 위를 걸어갔던 나그네의 발자국처럼 일본서기에 찍혀 있었다.
백마강 대패 후 신라와 당나라의 보복공격에 대비해 아스카에서 오미(近江)로 도읍을 옮긴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천지천황은 화급했던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이때쯤이면 균열되었던 민심도 어느 정도 봉합하여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671년 1월 5일자의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천지천황은 아들 대우황자를 태정대신(당시 일본 최고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백제로부터 온 좌평 여자신과 사택소명에게 대금하(大錦下)라는 관위를 주었다... 달솔 등 50여 인에게는 소산하(小山下)라는 관위를 주었다”
아들을 최고위직에 임명하고, 백제 유민들에게 관위를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다는 말이다. 천지천황은 오미로 천도한 후 민심 수습을 위해 동생 대해인(大海人)을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혹시라도 권력을 넘볼 수 있는 동생을 후계자로 삼아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그것은 겨우 3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했던 천지가 이제 그 조치를 철회한 것이다. 그가 동생을 버리고 아들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 전쟁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라는 관점의 문제였을 것이다. 자신은 백제 구원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동생 대해인은 형과 입장을 달리했다. 그러했기에 천지는 백제를 구하러 가던 배 위에서 끓는 탕처럼 화내며 활로 동생을 겨누기까지 했던 것이다.
황위세습에 있어 동생을 배제한 것은 이러한 관점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가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백제 유민들에게 관위를 주었다는 기록은 천지천황이 이러한 시각을 가졌음을 입증한다. 그는 냉혹한 국제 관계에서 이제는 쓸모없어져 버릴 수도 있었던 망국 백제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천지는 오히려 자신과 아들의 집권기반에 백제 유민들을 대거 포함시키고자 했다. 백제에 대한 부정은 자신에 대한 부정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동요 하나가 유행하였다. 아이들이 농부가 따비로 밭을 일구고 곡괭이로 땅을 파는 동작을 흉내내면서 뒷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이때의 동요는 매우 유명하다. 백제 멸망 후 일본에 간 망명 유민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일 역사가들은 역사 해석의 힌트를 얻을까 하여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또 소설가들도 그들의 상상력을 다하여 글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다. 노래는 일본으로 떠난 백제 고위직들의 고된 삶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多致播那播於/能我曳多曳多那例例/騰母陀麻爾農矩/騰岐於野兒弘爾農俱
‘많은 사람들이 왜국에 들어 와 씨를 뿌리고 또 씨를 뿌리고 있지. / 마땅한 일이라면서 가래를 끌고 있으나 전례에 따라 관위를 주어야 한다네. / 그들은 언덕을 날듯이 뛰어 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지. / 그들은 산과 들을 날듯이 뛰어 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