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왜국에 들어와 씨를 뿌리고 또 씨를 뿌리고 있지. / 마땅한 일이라면서 가래를 끌고 있으나 전례에 따라 관위를 주어야 한다네. / 그들은 언덕을 날듯이 뛰어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지. / 그들은 산과 들을 날듯이 뛰어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고위직들의 신산했던 삶을 이야기한 위의 향가는 일본서기 671년 1월달 해당 내용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산과 언덕을 개간하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험한 일을 하면서도 ‘이러는 게 마땅하다’ 라 말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우리가 무슨 면목이 있어 좋은 것을 원하겠는가. 땅을 파며 힘들게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라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산과 들에 흩어져 잊혀지고 있었다.
그때 뒷골목의 아이들이 그들의 존재를 언급하며 그들을 소환해 낸 것이다. 작품의 내용을 볼 때 고대 일본에서는 백제인들이 입국해 정착할 경우 본국에서의 신분에 따라 적절한 관위를 주는 게 관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관례에도 불구 백제의 고위직들이 백마강 패전 후 일본 땅으로 들어온 지 8년이 지났음에도 관위 수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향가는 힘을 가진 노래이다. 그러한 향가의 힘 때문이었을까. 천지천황이 이때 백제인들에게 관위를 주었다. 그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물론 지극히 현대적 시각을 가진 필자는 ‘설마 향가 때문이었을까?’하며 의심하고는 있다. 아마도 이 향가는 천지천황의 측근들이 만들어 유포했을 것이다.
천지천황은 매우 세심했던 성격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백제 파병을 앞두고도 군수물자를 공평하게 부과하고, 병력을 징발함에 있어 모두에게 공정하게 하라는 내용의 동요를 사용한 적이 있다.
그는 백제인에게 관위를 수여함에 있어서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기존 일본 관리들의 반발을 의식해 ‘유민들에게 전례에 따라 관위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의 향가를 만들어 널리 유포시켰을 것이다. 그래야 토종 관리들이 이것이 천심이자 민심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조치에 수긍할 것이라고 믿었다. 천지천황은 민심의 향배를 중시하는 지도자였음에 틀림없다.
천지천황이 의도했느냐 아니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노래는 백제 고위직들의 반성하는 마음과 관례에 따라 등용하라는 내용을 가사로 만든 것이었고 춤은 백제인들이 따비를 끌고(원문 속의 曳), 괭이질하던(원문 속의 矩) 모습이었다. 향가에 동요가 나온다. 동요는 민심이었고, 집권층은 그러한 민심에 귀를 기울였다.
이후 백제인들은 어찌 되었을까. 역사의 진행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해 말 천지천황이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후계자 경쟁에서 조카에게 밀려 탈락되었던 동생 대해인(大海人)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조카 대우황자를 살해하고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백제 유민들은 낯선 이국땅에서 그들을 잊지않고 챙겨주었던 최대의 후원자를 잃고 말았다.
한반도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대해인의 집권기간 내내 백제인들은 은인자중을 강요받게 되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일이다. 침묵의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백제 유민들을 등용하라는 내용의 이 노래를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多致播那播於/能我曳多曳多那例例/騰母陀麻爾農矩/騰岐於野兒弘爾農俱 귤나무 열매는 각각 다른 나무에 열려있지만 이를 실에 꿸 때는 다 하나가 되지요”
다 하나인데 왜 백제인들을 중용하려 하느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본 연구자들은 백제인 등용을 비난하는 작품이라고 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이러한 풀이는 오류다. 실제는 백제 유민을 받아들이라는 노래였다. 천지천황의 사망과 그의 아들의 패망으로 인해 신산했던 디아스포라의 길이 그들의 앞에 놓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