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무 사망 3년 후 일본 천황가가 흔들렸다. 아버지를 이어 천황에 오를 초벽(草壁)황자가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초벽 황자는 천무천황과 노야(鸕野讃良)황후 사이의 외아들이었다. 황후가 섭정하며 초벽황자를 황태자로 삼았으나, 황자는 어머니의 여망과 달리 황위에 오르지 못한 채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황자의 아내였던 아폐(阿閇) 황녀의 눈물가다. 만엽집 35번가다. 此 也 是 / 能倭 尒 四 手 者 我戀 流木 / 路 尒 有 雲 / 名 二 負 勢能山 “황자의 묘를 찾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계속 이어져야 하지. / 응당 왜국의 사람들이 사방에서 와 황자를 그리워해야 하나니. / 저승 가는 길에 끼어 있는 구름. / 황자의 생전 공적을 기록한 글을 두 사람이 짊어지고 세능산(勢能山)으로 가는구나” 황자의 장례일 구름이 끼어 있었다. 저승바다에 구름이 끼면 저승배가 순항할 수 없다. 그래서 바다에 구름이 걷히고 파도가 잔잔하게 가라앉아 초벽황자가 탄 배가 무사히 저승에 갈 수 있기를 천지귀신에게 비는 눈물가를 만들었다. 두 사람이 짊어지고 가야할 정도로 수많은 눈물가였다. 일본인들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독하고 있다. 필자의 해독과 비교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거야말로 야마토(大和)에 있을 때 / 내가 그리던 키지(紀路)에 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세(背) 산이네” 초벽황자가 사망하자 대규모 향가폭발이 있었다. 엄청난 양의 향가가 이때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향가의 수는 25장이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 전해지는 향가는 만엽집에 실린 것만 해도 4516장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하여 우리의 향가가 일본에 비해 이리 적은가” 하고 필자에게 묻는다. 이러한 숫적 차이가 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초벽 황자의 장례시 일어났던 향가폭발과 관련되어 있었다. 대규모 폭발로 인해 향가의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대중화된 향가는 향가의 양산으로 이루어졌다. 아들의 죽음에 노야(鸕野讃良)황후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로하고자 했다. 당대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눈물가를 지어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본 작품에서 나오듯 두 사람이 짊어지고 갈 정도로 많은 수의 눈물가가 만들어졌다. 초벽황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눈물가로서 만엽집 1권에 게재된 것만 해도 28장(35~62번가)에 이른다. 이때의 작품들 모두 두 사람이 지고갈만한 양의 향가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제1권에 수록된 작품이 84편이니 무려 33%에 이른다. 초벽황자의 사망을 기점으로 눈물가가 대량 만들어 지게 된 것이다. 마치 지각을 뚫고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아 필자는 이를 향가폭발 현상이라 한다.   이러한 향가폭발 현상은 당연히 최고의 권력자이던 어머니 노야(鸕野讃良)황후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에 힘입어 일본에 건너간 향가가 온 들판 가득 꽃을 피웠다. 초벽황자의 사망이 뜻하지 않게 한반도애서 건너간 향가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향가가 일본 사회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아들을 잃은 그녀의 비탄이 향가의 역사를 크게 바꾼 것이다. 향가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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