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를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원래 지도 제작업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서쪽으로 가다 보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허황하기 그지없던, 한낱 지도 제작업자의, 말을 믿고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이 그를 후원하기로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 콜럼버스 대항해에 투자했다. 조선의 역사로 치면 정확히 임진왜란 100년 전인 1492년이었다.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를 위시한 배 3척으로 선단을 꾸려 90여명의 선원과 함께 스페인을 떠났다. 2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하였다. 콜럼버스는 그 곳을 인도로만 알았다. 스페인으로의 귀환 길에 나선 콜럼버스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증거물을 챙겨 가기로 했고, 고심 끝의 증거는 그곳의 원주민과 앵무새였다. 그가 내놓는 증거를 보고 유럽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다녀왔듯이 필자 역시 향가라는 망각의 세계를 다녀온 바 있다. ‘내가 그곳에 다녀왔고 그곳은 놀라운 세계였다’라고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떠들었다. 그러나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어느 신문사는 보도에 앞서 공인받기를 원했고, 교수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떠드는 나를 멀리하려 했다. 겨우 몇 사람만이 나의 말을 인정해주었다. 콜럼버스가 원주민과 앵무새로 사람들을 설득하였듯이, 나에게도 사람들을 설득할 무엇인가 증거가 필요하였다. 만일 필자가 향가 세계에서 발견해낸 사실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필자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지금은 별세하셨지만 이영희 포스코 교수 등 몇몇 한국의 만엽집 연구가들은 ‘일본의 만엽집이 한국어로 읽힌다’고 주장해 왔다. 만일 이 사실이 증명될 수 있다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일 두 나라에 일파만파의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영희 교수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일부 근거를 제시하였으나, 일본의 연구자들을 설득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녀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자, 급기야 부작용까지 생겨났다. 이솝의 ‘양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우리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들을 탓할 수 없다. 충분한 입증의 책임은 언제나 주장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우연에 힘입어 향가의 세계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 일본의 만엽집이 있었고, 만엽집의 작품들은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었다. 만엽집 4516장의 작품 중 1000여 장을 검토해 본 결과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배척 받았지만 이영희 교수 주장은 비록 일부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만엽집 한 작품을 예로 들어 보이겠다. <15번가>는 다음과 같이 한자로 씌어 있고,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다. <15번가>는 서기 661년 왜국의 제명 천황 장례식 때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며 지은 눈물에 젖은 향가이다. 渡 津 물을 건너가는 나루 * 渡 물을 건너다 도, 津 나루 진. 海 乃 豊旗 雲 尒 바다 에 에끼 구름이 (끼어 있구나) * 乃 노젓는 소리 애, 豊 굽 높은 그릇 례, 旗 깃발 기, 尒 아름다운 모양 이. 伊 理 比 沙之 그대는 다스림에 (나와) 나란하 삿지. * 伊 너 이, 理 다스리다 리, 比 나란하다 비, 沙 사공 사, 之 가다 지. 今 夜 乃 오늘 밤 에 *今 오늘 금, 夜 밤 야, 乃 노젓는 소리 애. 月 夜 淸 明己 曾 달이 밤 깊도록 맑아 (길을) 밝히 겠찌 * 夜 깊은 밤 야, 淸 맑다 청, 明 밝다 명, 己 몸 기, 曾 찌다 증, 明己 밝기다. 위의 작품은 한자로 써놓고 한반도어로 읽었음이 분명하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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