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에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 기고자는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이다. 함 선생은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석굴암 최종결정 내릴 제1차 복원공사’, ‘천룡사 기와 가마는 사찰 전용’ 등 200여건에 달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특히 1973~1975년까지 천마총, 황남대총 등 황남동 일대의 신라 능묘가 발굴될 때는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문화유산뿐 아니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신라문화동인회,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에밀레극회, 경주시립국악원 등 경주의 문화단체 및 예술인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견습이발사로 이발소에서 쪽잠을 자면서도 무료로 고아들의 머리를 깎아줬던 이상민 씨의 이야기, 입어권 조정에 한 숨 쉬는 감포의 해녀, 병에 걸려 하얗게 말라가는 벼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월성의 농민 등 애정 없이는 포착할 수 없는 일상의 모습을 담았다.그의 기자 생활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지방주재기자 철수가 단행되면서 막을 내렸다. 국림경주박물관은 지난 2017년 9월 함종혁 선생이 기록했던 경주를 만나볼 수 있는 특별전시 ‘경주를 기록하다, 특파원 함종혁展’을 개최한 바 있다. 당시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하려했던 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다시 소개하면서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신라시대 손순, 애틋한 효심으로 얻은 석종,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新羅孝子文孝公孫順遺墟碑) 삼국유사에 따르면 손순(孫順)은 경주군 건천읍 모량리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부인과 더불어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쌀을 얻어 노모를 봉양했으며, 노모의 이름은 운오였다. 순에게 어린 아이가 있어 매양 노모의 밥상음식을 빼앗아 먹자 민망하게 여기어 오던 중, 어느 날 그 부인이 이르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다.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심하다. 차라리 이 아이를 묻어버리고 어머니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아이를 업고 취산(남사리 북쪽골)에 가서 땅을 파다가 홀연히 땅속에서 기이한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이 종을 걸고 두드려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퍽이나 아름답고 귀여웠다. 부인이 “이 석종을 얻음은 이 아이의 복 같으니 묻지 맙시다”고 하였다. 아버지도 아이를 업고 석종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이 석종을 대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반월성 대궐에도 들렸다. 흥덕왕이 그 종소리를 듣고 좌우에 이르기를 서쪽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청원함이 짝이 없으니 속히 조사하라 하였다. 신하가 손순집으로 가서 조사하고 사실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옛날 한나라 곽거가 아들을 파묻을 때 하늘이 금솥을 내렸었다.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하매 땅이 석종을 냈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에 같은 귀감이라”고 말하고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었다. 순은 옛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고 ‘홍효사’라고 하여 석종을 안치했다. 진성왕대에 후백제의 도적이 그 마을에 침입,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는 현재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에 위치해 있다. 비각이 있는 자리가 손순의 집터라고 전해진다. 남편 살리려고 자신의 살 베어 내 이식한 열녀 기려, 이부인영양남씨창렬비(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 이부인영양남씨창렬비는 분황사 동쪽에 세워져 있는 비각이다. 6.25전쟁 때 북한군의 총에 맞은 남편 이진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붙여 살려낸 열녀 남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비문을 해석한 당시 보도에 따르면 영양남씨 분이씨는 18세 되던 해 8세 연상인 이진우 씨와 결혼, 경주군 양북면 용동3리 속칭 오암골에서 살았다. 자연부락 오암골은 오지마을로 30여가구가 골짝골짝 한집씩 살고 있는 산골마을이었다. 8·15 해방직후라 무장공비들이 밤마다 마을에 내려와 쌀과 곡식, 닭 등을 약탈해가고 소고 끌고가며 심지어 청장년들도 끌어갔다. 이 같은 피해를 계속 당할 수만 없다고 해서 당시 이 마을 반장일을 맡아왔던 진우 씨가 앞장서서 마을청년들을 규합, 마을 경비를 서게 했던 것이다. 6.25동란이 발발하던 해인 1950년 음력 2월 3일 밤 진우 씨는 마을청년 10명과 함께 마을회관에 모여 경비를 하고 있던 중 밤 12시가 되어 무장공비 10여명이 갑자기 나타나 마을경비원 10명을 전선줄로 손목을 묶어 방안에 세워놓고 장총으로 마구 쏴 죽이고 죽은 시체 위에 짚단을 덮고 그 위에 기름을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이 경비실뿐아니고 마을 전체 민가에 불을 질렀다. 왼쪽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진우 씨(당시 42세)는 생명은 건졌으나 불에 타 화상이 심했다. 다음날이 밝아왔다. 마을 전체가 불타 잿더미로 변했다. 남씨 부인은 남편을 찾아 마을회관을 가서 살아 움직이는 남편을 발견했다. 남편을 업고 도로가에 나와 감포에서 생선을 싣고 대구 방면으로 가는 생선트럭 위에 남편을 태우고 경주까지 왔다. 남편의 다리는 흐늘흐늘 떨어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이때 한 원장은 “이대로는 생명을 구할 수 없다. 형제간이나 집안사람의 생살을 베어 이식하는 것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때 남 여사는 내 생명 다해 남편의 생명만은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궁둥이와 허벅지 깊은 살을 예리한 칼로 마취하지도 않은 채 생채로 12편을 베어 병원에 주어 남편의 썩은 다리에 이식수술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심하게 부패된 부분은 살을 이식했어도 살아나지 않았지만 부패가 심하지 않은 부분은 살이 살아나기 시작하여 생명을 구하게 됐다. 목숨은 살았으나 다리가 시원치 못해 절뚝절뚝 절면서 1982년 74세 돌아가실 때까지 불구의 몸이 되어 부인이 구걸행상으로 남편을 공양했다. 이 같은 일이 문중에 알려지자 1973년 3월 이곳에 높이 140cm, 두께 20cm 화강석에 이영우 씨의 글로 비석을 세우고 창렬각(彰烈閣)이라 했다. 1992년 10월 16일자 신문에는 이 비의 사진과 함께 당시 77세로 생존해있던 남분이 씨의 사진도 함께 담아 보도했다. 목숨 바쳐 지키려했던 효심, 최진간 부부 이야기, 고독효월성처사최공열부오천정씨기적비 오릉 인근 흥륜사 건너 도로변에 최진간과 그의 열부 오천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각이 있다. 고독효월성처사최공열부오천정씨기적비(故篤孝處士月城崔公烈婦烏川鄭氏記蹟碑)다. 경주시지에 따르면 지금부터 400여년전 이곳에는 월성 최씨들이 살고 있었다. 성균관 진사를 지낸 최신린의 4형제 중 둘째아들 최진간 부부의 효심어린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당시 보도에 정리하면 선조 25년(1952년) 뜻하지 않았던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은 많은 병력과 신병기인 소총으로 침략해 경주읍성이 여지없이 함락되고 말았다. 최신린 진사는 최진립(정무공)·최계종·최봉천 등 집안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이 됐다. 그는 의병장인 김호의 진으로 달려가기에 앞서 아들들을 불러놓고 “내가 어머님의 말씀에 쫓아 싸움터로 나가니 병환에 계시는 할머니를 너의 형제들에게 부탁해야겠구나”하고 적진으로 달려갔다. “아버님 염려마십시오. 할머니는 저희들이 목숨바쳐 모실 것이옵니다” 형제들은 늙은 할머니를 모시로 난리를 피하여 황룡산(지금의 덕동호 안쪽 황룡골) 깊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갔다. 하지만 산속에서 왜적의 무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적대장이 번쩍이는 칼로 할머니를 내려치려할 때 진간은 큰 소리로 “이들아 내게 덤벼라. 나를 죽여도 좋으니 우리 할머니는 손도 대지 말아다오”하면서 할머니를 덮어 가리었다. 왜적의 칼날이 다시 한 번 번쩍이는 순간 검붉은 피는 하늘 높이 치솟고 진간의 몸은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남편 진간을 따라 황룡산으로 피난갔던 정씨부인은 피비린내 나는 남편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할머니는 왜적의 손에 무참히 돌아가셨고, 남편 진간은 지극한 효도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아내된 도리로 어찌 죽기가 싫어 구차스럽게 살아 있겠는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진간의 갸륵한 효성의 얘기를 전해 듣고 그 효행을 드높이기 위해 독효자(篤孝子)로 표창했다. 정씨 부인에게는 백미 100석을 내리면서 정렬부인으로 높여 포상했다.1972년 세운 이곳 효열각(孝烈閣) 비석에는 이 같은 공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경주에서 태어나거나 경주를 사랑했던 시인들의 노래 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 감성의 계절이다. 1990년 초 경주신문 시비순례(詩碑巡禮)을 통해 세상과 가까워졌던 시인들의 시비와 우리 삶을 더 성숙하게 물들일만한 단풍은 가을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목월의 시비를 비롯해 청마시비, 고무신 시인과 이경록 시인의 시비다. 본지에 소개된 지 3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의 흔적을 찾아봤다. 목월의 노래비 ‘송아지’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 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 귀 귀가 닮았네. 송아지는 유년 시절 누구나가 다 부르던 노래말이다. 경주 황성공원 내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 있는 獨山 서쪽아래에는 박목월의 송아지 노래비가 있다. 이 노래비는 1968년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경주의 뜻있는 어른들과 새싹회 후원으로 세워진 노래비다. 박목월은 ‘나그네’로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진 경주의 시인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으로 1916년 1월 6일 경주군 모량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한 목월은 경주금융조합에 재직하던 1940년 조지훈의 추천으로 ‘文章’지 9월호에 가을 어스름, 연륜 등으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했다. 문단에 등단하던 그해 결혼하고, 이듬해 휴직해 문학수업을 위해 2회에 걸쳐 일본으로 갔으나 문학은 홀로 공부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믿고 귀국했다. 해방이 되던 해 경주에서 대구로 이사해 4월 김동리, 서정주, 유치환, 조지훈, 박두진 등과 조선청년문학가 협회를 결성했다. 이어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했다. 1948년 서울로 이사, 서울대 음대 강사를 역임. 시문학(1950년), 심상(1973년)을 발행하고 1969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대 학장에 취임한 2년 후인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뒤 지병이던 고혈압으로 영면했다. 시집으로는 청록집의 7권과 4권의 동시집, 20여권의 에세이집을 남겼다. 의지의 시인 청마 유치환 생명파 시인으로, 의지의 시인, 사상(思想)의 시인으로 불리는 청마 유치환의 시비가 불국사 남쪽 석굴암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에 있다. 목 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라 시비에는 유치환 시인의 시 ‘석굴암 대불’의 앞부분을 새겨놓았다. 유치환 시인의 시비는 그가 1967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한 이듬해인 1968년 가을 건립됐다. 유치환 시인은 경주와의 인연이 매우 깊다. 시인이자 교육자인 청마는 1908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해 극작가인 형 유치진과 함께 잡지 ‘부여부’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고, 1931년 시 ‘정숙’이 문예월간에 발표되며 문단에 등단했다. 한 때 평양에서 사진업을 하기도 했고, 만주를 방랑하기도 했으나 해방 후 경주고·경주여고 교장으로 재직하며 우리에게는 더욱 친숙한 시인이다. 유치환 시인의 대표작은 국정교과서에 실린 ‘깃발’이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고무신 박종우 시인 ‘鐘’ 선도산 동남쪽 기슭에는 古無新 박종우 시인의 시비가 있다. 아직은 아직은 건드리지 말라 도사린 설움 설움을 터뜨리지 말라 그의 작품 ‘종(鐘)’의 일부가 음각으로 새겨져있다. 울주군이 고향인 박종우 시인은 많은 학교를 다녔으나 보통학교와 고대 경영대학원을 제외하고는 한 군데도 졸업증서를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고무신 시인은 1950년 시집 조국의 노래를 발표하고, 1957년 작푼 ‘나’가 사상계에 신인상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그의 아호인 고무신(古無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이에 대해 정민호 시인은 “그의 아호는 자기가 지었는데, 고무신이란 말은 ‘옛 것 뿐이요 새것은 없다라는 뜻’이라고 한다”며 “또 어떤 이는 ‘옛것은 없고, 모두 새것이다’고 풀이하는 이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아호에 걸맞게 항상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했으니 그의 아호는 그대로 고무신과 연관 있는 것으로 되어버렸다”고 전했다. 고무신 시인은 그의 호처럼 거무티티하고, 질기고, 마구잡이고, 구수하고, 인정미가 넘치는 일면과 천재같이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박종우 시인은 1950년대 후반 경주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경주공고 교사로 재직했었다. 시비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77년 5월 25일 고향만큼 사랑했던 경주에 세워졌다. 천재 요절시인 이경록 ‘사랑歌’ 그대 며칠 전 八百里(팔백리) 밖 阿火(아화) 안말에서 띄워보낸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오늘 아침 東南風(동남풍)과 함께 닿아 내 몸의 숨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오다. 흘러 들어와 그 말의 숨결이 내 心臟(심장)의 피 덥히며 온몸을 흐르다. 八百里 밖 사람아, 그대 사랑한다는 말의 하늘 길로 또 내 말을 보낸다. 오늘밤 錦江(금강)이나 秋風嶺(추풍령) 上空(상공)에서 내 말은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소리치며 떠 헤매 가리라.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이 나라의 사랑하는 마음들아, 한 마디씩 씨받아 팔 괴고 잠들어라. 29세 아까운 나이로 요절한 시인 이경록 시비에 새겨진 그의 대표작 ‘사랑歌’다. 이경록 시인은 1948년 1월 8일 경주군 강동면 다산리에서 출생해 경주중·고교를 거쳐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고교시절부터 문학적 재질을 널리 떨친 이 시인은 1973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달팽이’와 이듬해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 ‘이분법’이 각각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등단 후 1977년 지병인 백혈병으로 요절할 때가지 4년여간 많은 시를 발표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시비는 그와 함께 활동했던 ‘자유시동인’의 발의로 경주중 24회, 경주고 15회 동기회가 추진해 1986년 1월 진현동 우정의 동산에 건립했다. 이후 2015년 황성공원으로 시비를 옮겼다. 이번에 찾은 이들 시인들의 시비와 주변 환경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경주에는 이들 시인 외에도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과 소설가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다수 있다. 경주는 문화·관광도시이자 문학도시이기도 하다. 이 비들 간을 연계할 수 있는 문학지도나 문학기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3년 현재의 나정 경주시는 현재 나정 복원 사업 1차로 기단을 복원한 상태다. 향후 예산이 확보되는대로 우물과 정자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사진: 이상욱 기자> 1930년대 당시의 나정 오릉에 동남쪽으로 바라보면 소나무 숲이 보이고 그 가운데 조그만 비각이 있다. 그 비각 옆에 있는 우물 ‘나정’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으로 사적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시 탑동에 위치해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옥산서원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조선 선조 5년에 경주부윤 이재민이 건립했다. 이 옥산서원 안에는 회재 선생의 글씨, 퇴계 선생의 글씨, 삼국사기 완전 1질 등이 보관되어 있어 학술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금척리고분군 경주군 건천읍 금척리 국도 좌우에 위치한 크고 작은 무덤 50여기가 금척리고분군이며, 사적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분들 중 어느 한 곳에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 하나인 金尺(금으로 만든 자)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어 금척리라 동네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괘릉의 모습 광대한 능역 가운데 석조호석을 돌린 원형토분의 능침이다. 양각된 12지신상이 자유롭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석조기술의 능숙함을 맛볼 수 있으며, 전형적인 신라능묘제도를 갖춘 능으로 사적 제26호다. 1930년대 안압지(동궁과 월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정원으로 주목된다. 지난 1975년 3월부터 약 2년간 실시한 문화재관리국의 발굴조사에서 화려한 금은장식품과 궁중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생활용구, 놀이할 때 사용하는 주사위, 나무배와 많은 기와 등 약 1만5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돼 통일신라시대 궁중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석굴암 본존불상 국보 제24호인 석굴암 석굴은 토함산 중턱에서 동남쪽으로 동해를 향해 화강암을 이용해 석굴을 건축하고,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주벽에 39체의 불상을 조각했다.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에 가까운 본존불상은 3.26m로, 한국불교조각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백률사 경주시내 북쪽 소금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백률사는 신라 23대 법흥왕 때 불교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그의 머리가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지금의 소금강산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자추사라 불렀다고 한다. 백률사에는 현재 주춧돌, 석동옥개석, 바위에 새긴 7층 석탑과 조선시대에 세운 대웅전이 남아 있으며, 국보 제28호인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도 이 절에 있던 불상이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경주여자 보통학교 양잠 사육 모습 1930년대 경주여자 보통학교 생도들이 양잠 사육을 하고 있는 장면. 머리를 길게 땋은 여학생들이 어린 손으로 누에를 치고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모내기 풍경 1930년대 경주읍. 줄을 대고 한 줄로 서서 모내기를 하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땅과 곡식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모내기를 돕는 어린아이와 논둑에 앉아 이야기하는 노인의 모습이 정겹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무열왕릉 앞 돌거북의 1930년대 사진 무열왕릉 앞 왼쪽에 있는 비신을 잃은 돌거북과 이수. 사진은 1930년대 것으로 국보 제25호인 무열왕릉비의 돌거북이 머리를 번쩍 치켜들고 기운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수 앞쪽 중앙에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여덟글자가 있어 碑身(비신) 없이도 무열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글씨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것이라 전한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계림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의 숲으로 60여년 전(1993년 기준)의 풍경에서도 지금처럼 고목이 울창하다. 김알지의 탄생설화로 유명한 이곳은 현재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경주박물관 1930년대 박물관의 전경.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불리던 이곳은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신라시대의 유물·유적을 보존·전시하고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서악서원 전경 1930년대 서악서원의 전경. 이 서원은 김유신, 설총, 최치원 三賢(삼현)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退溪(퇴계)가 西岳精舍(서악정사)라 이름 지어 손수 쓴 글씨를 이 서원 안에 걸었다한다. 임진왜란으로 선조 33년에 중건되었고, 인조 원년에 서악서원이라 사액받게 되었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강서면 안강리의 日浦苗圃 1930년대 강서면 안강리의 日浦苗圃(일포묘포). 2000평에 가까운 면적에 林業(임업)을 위한 작물이 심어져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포석정 1930년대 포석정. 신라 때 만들어진 삼체석불 북쪽에 있는 이궁 터로 현재 사적 제1호로 지정돼있다. 경애왕 4년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주연을 즐기고 있던 왕을 비롯한 수 많은 신하들이 죽음을 당한 곳으로 지금은 곡선을 이루어 돌아가는 돌홈만이 남아 있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과거 경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은 오늘과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다. 1900년대 초 경주지역 곳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본지를 통해 소개됐다. 1992년과 1994년에 걸쳐 본지에 화보로 실렸던 사진은 독자들이 제공했고, 사진에 대한 해석도 달았다. 이들 사진은 창간 34주년을 맞은 경주신문과 독자, 그리고 시민들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에 당시 보도됐던 신문 속 과거 사진과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지면을 통해 몇차례 소개하며 향수를 소환해본다. -편집자주 1930년대 전통혼례 장면 1930년대의 결혼식 장면. 요즘 젊은 세대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쓴 신랑·신부의 표정이 어색하다. 결혼 축하를 위해 걸려있는 만국기가 재미있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예물식 장면 1930년대 예물식(禮物式) 장면. 신부가 시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린다는 예물식에서 신부는 삼종지도(三從之道)에 따라 한평생을 살아갈 것을 약속하며 절을 올린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사이인 고부간이 예를 갖추고 마주 앉아 있는 모습에서 엄격함과 며느리의 조심스러움이 엿보인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군중 천막이 쳐진 마당에서 거행되는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군중(1930년대). 아낙네들은 신랑·신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발뒤꿈치를 들고 있지만, 남정네들은 점잖은듯 뒷짐을 진채 구경하고 있다. 요즘 보기 힘든 사립문도 있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중류 가정의 환갑잔치 기념사진 1930년대 중류 가정의 환갑잔치 모습이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데 병풍을 두 겹으로 치고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서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상류 가정의 장례식 풍경 1930년대 상류 가정의 장례식 장면. 화려하게 장식된 상여와 만장, 상주가 말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유한 가정임을 알 수 있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한지를 만드는 작업 모습 ① 딱나무를 쪄서 펄프를 분리한다. ② 분리된 펄프로 종이를 떠낸다. ③ 철판에 가열하여 종이를 건조한 후 권으로 묶어낸다. 한지 만들기에 필요한 펄프를 얻기 위해 딱나무 껍질을 가마솥의 끓는 물에 넣어 찌고 있는 광경. 이 당시만 해도 문명 산업의 한 분야에서 제몫을 톡톡히 해왔던 한지 생산 공장이 경주 시·군 관내의 오지에 여러 곳 있었지만 이젠 산내면 대현리에서 몇몇 가내공업만 명맥을 겨우 유지해오고 있을 뿐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우리 한지는 원래 질이 좋기로 멀리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소문나서 국산 인삼과 함께 질 좋은 교역상품 중 주종이었다고 하는데 한가닥 향수만 남겨 놓은 채 명맥이 끊겨 간다고 생각하니 민족사에 점철된 애환과 함께 격세지감 누구에게나 없지 않으리라 여겨진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우물가의 여인들 모습 한(恨)과 체념의 세월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아 또 한 번 가슴 저며들게 하는 이 사진 한 장. 5천년 기나긴 세월이야 우리 민족사의 경우엔 차라리 숙명의 굴레 아니였을까? 부는 바람, 비치는 햇빛 어느 것 한가진들 서러움 아닌게 없었으련만 이렇게 함께 여인네들끼리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동구 밖의 우물터. 사랑과 꿈·삶과 인생을 두고 남모르게 겪어야 했던 갈등을 여기 아니었던들 어이 손톱만큼이라도 풀어보기라도 했었으랴. 막혔던 입과 귀와 눈이 트여 밝아지던 곳, 샘터야말로 여인들이 물처럼 솟구쳐 오르는 생활정서를 두레질하여 질그릇 동이 하나 가득 퍼담아 보는 실로 개방된 유일의 광장, 그 것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물오른 다래 부풀어 터지면 하얀 목화이듯 내밀한 꿈이 늘 그렇게 순박한 삶으로 표출되어 왔거늘 희가 검다 할 뿐인 단색무명 옷밖에 입을 줄 몰랐던 사진 속의 한국 여인상이란 부정 없는 순결의 생명 바로 그 자체 아니었나 싶을 뿐이다.<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과거 경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은 오늘과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다. 1900년대 초 경주지역 곳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본지를 통해 소개됐다. 1992년과 1994년에 걸쳐 본지에 화보로 실렸던 사진은 독자들이 제공했고, 사진에 대한 해석도 달았다. 이들 사진은 창간 34주년을 맞은 경주신문과 독자, 그리고 시민들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에 당시 보도됐던 신문 속 과거 사진과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지면을 통해 소개하며 향수를 소환해본다. -편집자주 1930년대 경주의 옛 읍성 지금의 경주시 북부동, 동부동에 걸쳐있는 경주의 옛 읍성. 1930년대의 모습. 고려 현종 3년에 쌓은 토성을 조선 초기 석축으로 개축하였다. 당시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 4개소의 성문이 있었으며, 동쪽이 약 660m, 서쪽이 약 648m, 남쪽이 약 564m, 북쪽이 약 636m였다고 한다. 온전히 나타나 있는 성벽의 고풍스러움과 우람한 노목의 자태에서 옛 도시의 풍정(風情)을 느껴볼 수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경주읍성 남문 밖의 난전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살기 위한 생계수단엔 예외가 없는 것 같다. 읍성 남문 밖의 난전(옹기전 골목)에서 무늬 없는 백도자기를 내다 팔고 있는 광경의 1930년대 사진. 토담벽 아래 맨 땅바닥에 전을 펴고 안경집과 담배 쌈지를 허리춤에 싼 무명옷 바지저고리의 가장이 아내, 3형제 아이들 할 것 없이 식솔들 모두와 함께 우두커니 모여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음이 곤궁한 당시의 서민들 생활상을 한 눈에 보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놋그릇 제조장 일정 때 전쟁물자로 징발해갔던 놋쇠그릇. 이의 사진을 보노라면 한반도의 문물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고 말았던 이네들의 침략사가 불현듯 되살아 또한번 우리들 가슴을 아프게 한다. 수공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1930년대)의 놋그릇 제조장. 기능별로 세분된 공정과정을 사진으로 보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다. 쇠를 두드리는 사람, 그릇 표피를 쇠칼로 깎아 내는 사람, 이를 윤기 나게 닦는 사람. 이렇게 각자의 일을 분담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장소 미상의 유람 자동차 사무소 오는날 관광버스의 효시였을까? 경주 고적지 순회를 위한 유람 대여 차량들이 손님을 기다리며 대기 중에 있다. 현재의 어느 장소인가는 알 수 없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이야말로 당시 상황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 서울의 창덕궁에 보존되어 있는 李왕가 전용차와 같은 차종으로 보이는데 ‘순종의 캐딜락’, ‘고종의 리무진’ 중 어느 것일까마는 여하튼 지금으로서는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안경 제작의 장인 모습 오두막 초옥에서 혼자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안경 제작의 장인. 여닫이 방문을 열어 젖혀 뜨락에 전을 편 상품 진열이 지금 보기로는 사뭇 초라할 뿐이건만 그 시대 상황으로서야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럽기만 한 자기 긍지였으랴. 일본시대 신문명의 도래와 함께 볏짚 추녀 끝에 매달아 놓은 카나리아(?) 새장이 이채롭다. 1930년대.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과거 경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은 오늘과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다. 1900년대 초 경주지역 곳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본지를 통해 소개됐다. 1992년과 1994년에 걸쳐 본지에 화보로 실렸던 사진은 독자들이 제공했고, 사진에 대한 해석도 달았다. 이들 사진은 창간 34주년을 맞은 경주신문과 독자, 그리고 시민들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에 당시 보도됐던 신문 속 과거 사진과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지면을 통해 몇차례 소개하며 향수를 소환해본다. 1920년대 경주 시가지 전경 경주 시가의 옛 모습. 1920년대 경주읍은 이층집 한 채 눈에 띄지 않고 띄엄띄엄 있는 골기와 지붕의 몇몇 古屋(고옥)들을 에워싼 초가들이 즐비한 그런 성내 풍경을 이루었다. 이것이 해방되고 1955년 9월에 시로 승격되면서 변화되어온 현대도시 구조의 골격으로 커 온 것인데, 오늘에 이르러서도 겨우 14만 수용인구로 밖에 신장되어지지 않은 것이고 보면 사적 보존 위주로만 발전하여온 도시개발의 속도감이란 느리기가 이만저만이 아닌 듯하다. 이 사진 촬영은 황남동 98호 고분 위에서 북쪽을 향해 본 것이다. 전면 가운데 교차로 왼쪽 빈터 논밭이 지금의 시청자리이다.(노동동 청사 구 시청 부지를 이름)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1930년대 구 경주박물관을 찾은 덕혜옹주 한·일 합방 후인 1930년대 사진으로 조선왕조 德惠翁主(덕혜옹주, 사진의 좌측부터 여섯 번째 시녀 바로 앞의 나이 어린 옹주)가 신하 및 시녀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경주시 동부동 소재 건물인 구 박물관 경내를 시찰하고 있는 모습으로, 당시 관아의 의전 모습을 부분적이나마 한 눈에 엿볼 수가 있다. 맨 앞에 양복차림의 관리가 행렬을 끌고 그 뒤로 대취타와 대금, 징 등을 연주하는 소규모 고적대가 뒤따르고 있어 퍽 이채로워 보인다. <자료제공: 김정국(경주시 황남동)> 1910년대경 촬영한 경주향교 1910년대 쯤일까? 내물왕릉을 등 뒤로 하여 촬영한 경주향교.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아해 보이는 맞배 골기와 지붕을 배경으로 소나무 몇 그루 보기 좋게 어울리는 풀밭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나란히 서 있는 무명 한복차림의 이곳 동네(현재의 교리) 사람들 포즈가 참 소박해 보인다. 지게를 어깨에 진 채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막 농사일을 나서던 참이었던지……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1930년대 계림의 풍경 잎새 무성한 느릅나무 가지가 고색창연한 비각 위에 드리워져 있음이 한여름을 느끼게 하기 족한 1930년대 계림의 풍경. 의젓하게 서서 포즈를 취한 떠꺼머리총각. 한 켠에 있는 나무의 밑둥이 60여년 세월이 지난 지금과 대조되리만큼 어린 것임을 보면 세월의 흔적이 자연스레 실감되어진다. 비각 안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비석이 있고, 비의 앞면에는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명(鷄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銘)이라 새겨져 있다.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1930년대 훼손된 원원사 3층 석탑 도굴된 채 흩어져 있는 탑신과 옥개석들이 아픈 역사의 생채기인양 느껴지는 1930년대 경주군 외동읍 모화리의 원원사지 3층석탑. 일정치하 우리의 많은 역사 유물이 일본인에 의해 도굴, 훼손 등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신라 때 세워진 원원사 3층 석탑은 그 시대 석조미술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는 탑으로서 개화기의 양복을 입은 사람들의 기념사진을 위한 촬영의 배경물로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볼 때 안타까움이 앞선다. 1938년 5월 3일 사적 제46호로 지정, 보호되어 오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복원됐다.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1930년대 경주읍성 남문의 모습 지금의 경주법원 앞 포항물회식당과 복다방 사이길 네거리가 옛날의 남문터였다. 이 사진은 고려 때 토성으로 축조, 조선 초기에 석축으로 개축했다는 1930년대 경주읍성 남문의 옛 모습. 비록 퇴색되긴 했어도 이렇게 한 장의 사진으로서나마 전해져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古都南樓(고도남루)라는 현판 하나 걸려진 남문의 망루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그 때 그 사람들의 무명한복 차림이라던가, 등 뒤로 길게 땋아 늘어뜨린 떠꺼머리총각의 뒷모습에서 가난하고 소박했던 구시대 우리의 살림살이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자료제공: 김기문(시인·글밭출판사 대표)>
과거 경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은 오늘과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다. 1900년대 초 경주지역 곳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본지를 통해 소개됐다. 1992년과 1994년에 걸쳐 본지에 화보로 실렸던 사진은 독자들이 제공했고, 사진에 대한 해석도 달았다. 이들 사진은 창간 34주년을 맞은 경주신문과 독자, 그리고 시민들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에 당시 보도됐던 신문 속 과거 사진과 본지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지면을 통해 몇차례 소개하며 향수를 소환해본다. 1992년 말부터 1994년까지 본지는 ‘사진으로 보는 그 때’라는 제목으로 독자들이 제공한 1900년대 초 경주 곳곳의 사진을 연재했다. 당시 명문당서점 李淸市 씨를 시작으로 이재건 씨, 김기문 시인, 서울의 최진환 씨 등이 사진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달았다. 1910년대 첨성대 전경 계림 쪽에서 본 1910년대의 첨성대. 왼쪽편의 나즈막한 초가집이 보이고, 늘어진 수양버드나무가 인상적이다. 흰 페인트로 칠한 안내판이 한적한 길목을 지키고 서있다. 1920년대 석굴암 1920년대의 석굴암 전경. 초겨울 날씨에 잎진 나무가 을시년스럽고 소로옆에 세워진 어느 나무꾼의 지게가 당시의 곤궁한 농촌을 떠올리게 한다. 입을 벌린 감실 입구는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말이 없는데 보수작업을 위해서인지 절개된 채 드러난 앙상한 입구 위쪽이 역사의 생채기인양 아프게 느껴온다. 1920년대 경주 안압지 태고의 신비가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정적인 호면(湖面). 목선 한 척을 수초 사이에 띄워둔 채 어부는 물속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고······. 1920년대의 경주 안압지 전경이다. 발굴과 복원을 꿈도 못꾸던 그 때. 마음은 시간을 거슬러 옛날로 걸어본다. 경주군 감포 바닷가 풍경 구한말 동해안 풍경의 노상소견(路上所見). 사진으로 보아 경주군 감포 바닷가 일대의 어떤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정치하에 생겨난 신작로에는 포푸라 가로수가 식민연륜의 민족 아픔을 되삭이며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듯 커가고 5월인가 싶게 미끄러질듯 가파른 농경지엔 지금 한창 보리가 피어 푸르르다. 너스레한 바지저고리 차림의 촌로들이 길에서 반갑게 만나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데 그 뒤켠으로 물지게를 지고 총총히 멀어져 갈 뿐인 농부의 뒤를 쫓아 마음은 옛날에 대한 향수에 부푼다. 경주 읍내장 솥전거리 1910년대의 경주 읍내장 솥전거리 풍경. 매 2일, 7일 5일 간격으로 열리던 이 장은 지금의 동부동 경찰서 옆에 섰는데 남문 밖에서 4일, 9일 열리던 사정장과 함께 당시 경주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던 동맥으로 이름이 높았다. 갓을 쓰로 흰 두루마기에 장죽을 든 노인네들이 보이고 좌우로 빼곡이 내민 골기와집에 질세라 새끼로 단단히 엮어맨 나지막한 초가집이 인상적이다. 1910년대 장날 나뭇전 풍경 1910년대의 경주 장날 나뭇전 풍경. 뒤쪽에 ‘월성아문(月城衙門)’이라 쓰인 현판이 보인다. 나무에 잎이 무성한 것으로 미루어 때는 여름이 가까운 그런 절기이리라. 즐비하게 쌓아놓은 장작이며 소깝단 사이를 갓 쓰고 두루마기 걸친 채 떼지어 오가는 촌로들 모습이 무척이나 한가하다. 당시 경주에는 봉황대 옆에 샅자리전이 있었고, 경찰서 옆에 솥전이 있었다. 지금의 법원 앞 물회식장 자리에 ‘아문(衙門)’이 있었다는데, 사진으로 보아 나뭇전은 구 ‘옹기전’ 자리가 그곳이라 추측된다. 무열왕릉 귀부상 비바람 막아주는 누각도 없이 당그러니 초석 몇 개 남은 풀밭에는 천년 영화의 아쉬움을 더듬는듯 목줄기 길게 뽑아 꿈틀거리는 돌거북···. 1910년대의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동쪽 곁에 있는 귀부상이다. 청솔 푸른 나뭇가지 아래 저편 시가 쪽으론 길 한줄 집 한 채 보이지 않는데 까마득한 역사의 신비를 쫓아 적막함이 아지랑이처럼 감돌아든다. 1920년대의 경주시가지 전경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을 간데 없고···. 그러나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한 오늘날의 경주 모습과는 판이한 1920년대의 경주시가지 전경. 수도산(선도산) 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 사진은 각각 방향을 바꾸어 찍은 4장의 사진을 연결한 것으로써 당시의 사진술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오른쪽 끝의 숲이 삼릉이오, 왼쪽 끝부분은 지금의 준공업단지 용강동이다. 서천 다리 옆에 구역사(舊驛舍)가 있고, 바로 그 앞이 도시개발로 철거가 돼버린 농창(農倉) 자리이다. 사정동 쪽에 공고 건물이 보이지 않고, 구황동에 경주중·고 건물이 보이지 않는 당시의 경주는 한껏 고즈넉할 뿐이다. 읍내와 충효동을 잇는 서천에는 지영다리가 있고, 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이 마냥 한가롭다. 지금의 경주JC 건물 뒤쪽에 있는 느티나무가 애동목인 그 때. 줄지어 늘어선 강가의 오리(五里)숲이 성벽처럼 감싸고 있다. 경동노회 건물이 들어서 있는 자리엔 일제 때 지은 피(避) 병원이 보이며, 정수장 앞으로 경포선의 목탄 철길이 장난감처럼 뻗혔는데 그 앞의 하얀 모래밭이 되어진 하상(河床)으론 천년영화 덧없이 실어가 버린 듯 형산강 물줄기가 말없이 세월 따라 흐르고 있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다. 계묘년은 육십간지의 40번째로 계(癸)는 흑색, 묘(卯)는 토끼를 의미하는 ‘검은 토끼의 해’다. 토끼는 사람과 친숙한 동물이다. 또 다산과 행복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강한 번식력으로 다산과 번성을 상징하고 달과 여성,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등 우리에게 토끼는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된다. 또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지니며, 우리 일상 문화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친다’, ‘가는 토끼 잡으려다 잡은 토끼 놓친다’, ‘꾀가 많은 토끼는 굴을 셋 판다’, ‘토끼 같은 자식’ 등 속담이나 일상적인 표현 속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영특한 토끼(卯)와 인간의 지혜를 상징하는 검은색(癸)이 조화를 이뤄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이겨내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새해 시인의 시와 그림, 그리고 사진 본지가 창간한 1989년 11월 이후 맞이한 첫 새해는 1990년 경오년(庚午年) ‘백말띠의 해’였다. 1990년 1월 5일자 신년호(제5호)는 국보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慶州 天馬塚 障泥 天馬圖)’로 장식했다. 창간 후 맞은 첫 새해 신문에 ‘백마 타고 오는 경오년 눈부신 해’라는 제목을 붙여 천마도와 조동화 시인의 시를 함께 실었다. 조동화 시인은 당시 문화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화암」이 당선된 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첨성대」, 부산일보에 시 「낙동강」이 각각 당선됐다. 시집에 『낙화암』, 『산성리에서』, 『강은 그림자가 없다』등 다수가 있다. 조동화 시인이 본지 1990년 신년호에 보낸 시다. 금관처럼 찬란한 아침 저 푸른 하늘 드높이 대망의 연을 올립시다. 지난 밤 에밀레종이 곱게 헹궈 걸어 놓은 우리에게 뜻이 있다면 길도 거기 있습니다. 더 많은 세계 사람들이 바다 건너 올 것입니다. 이 오랜 터전 위에 새 서라벌 꽃피는 날 뜨거운 땀방울 앞엔 황무지고 옥토이듯 저마다 가까운 둘레부터 쓸고 닦고 밝혀야지요. 막힌 데는 뚫어 놓고 꼬인 것은 풀어 놓고···· 허울도 꾸며야겠지만 더 귀한 건 알맹입니다. 기필코 우리는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일찍이 이 고장에 피고 졌던 한 떨기 영화 이제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더불어 가야할 이웃들과 인사부터 나눠야지요. 바야흐로 활짝 열린 90년 지방화 시대 얼마나 우리 모두가 기다려 온 오늘입니까. 빙그르 천년을 돌아 새로 눈을 뜹니다. 칠불암바위 벼랑 이끼 낀 돌부처도 보셔요. 서라벌의 금관처럼 찬란한 아침 지금 막 토함산 머리에 첫발을 디딥니다. 동해바다 대왕암 위를 단숨에 훨훨 날아 천마를 타고 오는 경오년 눈부신 해 디지털기기가 보편화되기 전인 2000년대 초까지 새해 첫 신문에는 한 해를 맞이하는 감성을 담은 시인의 시와 일출 풍경의 그림이나 사진이 함께 지면을 채웠다. 1993년 신년호에는 정민호 시인의 글과 고 이재건 화백의 그림, 그리고 조동화 시인, 고 서영수 시인, 이희복 시인 등이 주옥같은 새 희망의 글들이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그 중 1996년 1월 10일자 신년호(제262호)에 게재된 고 서영수 시인의 시다. 새 하늘을 날자 통나무 가슴속에서만 돌고 있던 나이테가 이제 먼 벌판 넓은 大地를 휘감고 일어서는 아침 불국사 석굴암이 지구촌 높은 둔덕에 제자리를 차고 앉아 千年의 숨소리로 白衣의 몸짓으로 전 인류의 품속에 뿌릴 내리어 우주속 역사의 계단에 울려퍼질 鐘-鐘閣을 세우며 一九九六年 새 아침은 열리는데 맞대인 총구에 쓰러진 숲은 외나무 가지로 하늘 어귀에 남아 계절을 싣고 떠나는 강물에 슬픈 그림자를 지우고 있다 우는듯이 찾아온 丙子年 새벽 바람은 차기만하다 一千年 피가 끓는 우리의 吐含山頂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을 보라 저것은 분명 어둠을 녹이고 찬 기운을 밀치는 모두의 넋을 밝힐 봉화불이다 청솔개비같이 매서운 눈과 눈 사이 오염된 탄피 냄새를 동해 쪽빛으로 풀어내는 겨레여 겨레여 훌훌 털고 솟아오르는 저 맑고 밝은 해처럼 너와 나 알몸 그대로 새 하늘을 날자 일출 풍경과 띠별 동물 사진 통해 새 희망 전해 2000년대를 맞으면서 본지 신년호에는 새 희망을 담고 새 출발을 의미하는 ‘일출 풍경’이 주를 이뤘다. 그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일출장소는 역시 문무대왕 수중릉이다. 문무대왕은 최초 해양행정기관인 선부(船府)를 설립했고, 바다를 통해 활발하게 국제교류 활동을 벌였으며 삼국통일 대업을 달성했다. 그는 죽어서도 동해의 큰 용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 왕의 업적과 호국해양 정신이 깃든 문무대왕릉의 일출 장면은 맑은 날이면 언제 어느 때 봐도 장관이다. 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양남면 주상절리의 일출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을 선사한다. 이외에도 본지 신년호에는 열두 띠 중 그 해의 띠를 상징하는 동물을 배경한 사진도 등장했다. 2018년 무술년(戊戌年) ‘황금 개띠의 해’에는 경주개 동경이로 한 해의 시작을 알렸다. 2019년 기해년(己亥年) ‘황금 돼지의 해’는 불국사 극락전 복돼지상을 만지는 아이의 사진 한 장으로 꿈과 희망이 가득한 새해 아침을 전하기도 했다. 시대상에 맞춰 변해 온 본지 신년호에는 앞으로도 새해 풍경을 담은 사진과 글로 새 희망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2023년 계묘년 새해. 글로벌 경기침체로 그 어느 때보다 큰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본지 창간 34년간 새해 신년호에서 전해왔던 새 희망의 출발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경주를 향한 첫 걸음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