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61명의 독립유공자들이 있지만 대부분 생소한 이름들이다. 이들은 건국훈장 애국장·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에 서훈된 인물들로 국내·외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며 젊은 시절을 조국을 위해 희생했다. 일부 독립유공자들은 그 후손들이 기념비나 추모비를 세워 뜻을 기리기도 하지만 다수의 유공자들은 잊혀가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현재 등록된 독립유공자들은 제출된 자료에 의해 출생지를 구분했지만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출생지 미상의 독립유공자들도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본보에서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출생지를 확정한 자료를 토대로 경주에서 출생한 독립 영웅들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신동하(1923~1984)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신동하 선생은 강동면 모서리 425번지에서 태어났다. 일본 고베에서 직공으로 있던 중 미국 비행기의 일본 공습과 이에 따른 혼란한 틈을 이용, 일제히 봉기해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규합에 힘쓰던 중 붙잡혔다. 1943년 10월 4일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손진형(1871~1919)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손진형 선생의 호는 호봉으로 강동면 오금리 601번지에서 태어났다. 을사늑약 이후 이강년의진에 참가했으며 1912년 경주경찰서에서 4개월간 구속됐다. 1914년 만주로 망명했다가 귀국, 교남교육회에서 지도하다 붙잡혀 울릉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1918년 풀려난 뒤 1919년 상해에서 김창숙의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조직에 참여해 활동하다 과로로 병을 얻어 순국했다. 1977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됐었다. 손시헌(1923~2002)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노서동 123번지에서 태어난 손시헌 선생은 1942년 7월 일본 동경 유학 중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학병 및 지원병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혀 1944년 3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1977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손석봉(1901~1965) / 2000년 대통령표창 손석봉 선생은 황오동 117번지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4월 18일 징역 6월형을 받았다. 손문익(1921~1948) /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 내남면 용장리 1102번지에서 태어난 손문익 선생은 대구농림학교 재학 중 동급생들에게 민족 음악과 한글 사용을 권장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가 붙잡혀 1943년 8월 30일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서달수(1920~1992)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서달수 선생의 호는 연봉으로 산내면 내일리 1278번지에서 태어났다. 1938년 3월 일본대학 정치과 재학 중, 항일결사 비밀동지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붙잡혀 1941년 11월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77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박상진(1884~1921)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박상진 선생의 호는 고헌, 외동읍 녹동리 출신이다. 1902년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판사였던 허위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됐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했으며 1915년 1월에는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다. 7월에 풍기광복단과 합작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 취임했다.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 강령을 정하고, 의혈투쟁을 전개, 친일부호들로부터 강제모금 시도했다.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던 중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았다. 풀려난 후 1917년 11월 칠곡 부호 장승원 처단했고 1918년 1월 충남 아산 도고면 면장 박용하 처단하는 등 의혈투쟁을 계속하다 붙잡혔다.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박문홍(1887~1957) / 1995년 건국포장 노서동 113번지에서 태어난 박문홍 선생은 1919년 3월 13일 경주 읍내 장날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박내영 등과 독립선언서 및 태극기를 인쇄·배포하다 붙잡혔다. 박문홍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는 3월 15일 발발했으며, 4월 15일 징역 10월형을 받았다. 김화섭(1892~1947) / 2006년 대통령표창 김화섭 선생은 감포읍 전촌리 962번지에서 출생했다. 1924년 12월 포항 청년회관 건립에 참여했으며 1926년 5월 28일 동아·조선일보 양 지국장 및 기자, 영일청년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 입당해 1930년 신간회 영일지회 대표회원으로 활동하다 붙잡혀 1931년 8월 5일 징역 8월형을 받았다. 김학봉(1898~1945)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서부동 259번지에서 태어난 김학봉 선생은 1919년 3월 13일 경주읍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붙잡혀 4월 15일 징역 10월형을 받았다. 김은충(1905~1980) / 2007년 건국포장 김은충 선생의 본적은 경주이나 훗날 평안북도 의주로 이주했다. 1922년 1월 중국 국민당군의 중앙 공군에 투신해 낙양항공분교 교무관 교관과 1945년 중경임시정부 주석 판공실 비서를 역임했다. 김세종(미상~1923) /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 김세종 선생은 3·1운동 이후 중국 봉천성 유하현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중위로 대일투쟁을 펼쳤다. 1923년 경 독립군 부대와 함께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노령 이만으로 이동 중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동사로 순국했다. 김성길(1892~1942) / 2008년 대통령표창 김성길 선생은 북부동 35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경주면에서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해 태극기를 제작하고 배부하다 붙잡혀 1919년 4월 15일 징역 5월형을 받았다. 김봉식(1915~1969)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김봉석이란 이명으로 활동하기도 한 김봉식 선생은 안강읍 노당리 379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2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해 1941년 1월에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됐고 1942년 5월에는 제2지대 제2구대원으로 활동했다. 김봉규(1892~1968)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감포읍 나정리 127번지에서 태어난 김봉규 선생은 월성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하다 발각되자 동지 김종철이 일경을 사살하고 함께 도피했다가 붙잡혀 1924년 11월 6일 징역 4년형을 받았다. 1977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됐었다. 김민환(1910~2003)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김민환 선생은 건천읍 대곡리 1212번지에서 태어났으며 김인수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광주농고 재학 중인 1926년 11월 3일에 조직된 항일학생결사 성진회 회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8년 3월 졸업 후 군농회 기수로 근무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와 관련돼 붙잡혀 1930년 10월 27일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80년에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김만득(1916~1959)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안강읍 안강리 316번지에서 태어난 김만득 선생은 중국 강서성 구강 주둔 일본군 군속으로 근무 중 1943년 7월 탈출해 광복군에 입했다. 제2지대 제3구대 강남분대(제3전구)의 대원으로 활동했으며 1963년에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김두오(1911~1945) / 1992년 건국포장 김진식·김화식으로도 활동한 김두오 선생은 양북면 출신이다. 1928년 3월 중앙일보 감포지국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1933년 10월 경 농민야학회를 개설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혀 1936년 3월 20일 1년 6월형을 받았다. 김기도(1922~미상)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김기도 선생은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개봉에서 홍구표와 같이 탈출해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활동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경주에는 61명의 독립유공자들이 있지만 대부분 생소한 이름들이다. 이들은 건국훈장 애국장·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에 서훈된 인물들로 국내·외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며 젊은 시절을 조국을 위해 희생했다. 일부 독립유공자들은 그 후손들이 기념비나 추모비를 세워 뜻을 기리기도 하지만 다수의 유공자들은 잊혀가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현재 등록된 독립유공자들은 제출된 자료에 의해 출생지를 구분했지만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출생지 미상의 독립유공자들도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본보에서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출생지를 확정한 자료를 토대로 경주에서 출생한 독립 영웅들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정리: 엄태권 기자 nic779@naver.com 최준(1884~1970)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최준 선생의 호는 문파이며, 교동 69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주 최부잣집’ 12대 장손으로 조선국권회복단 및 대한광복회에 관계하며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선생과는 사촌 처남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재무 담당을 맡았고 이로 인해,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붙잡혔다.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주주로 경영에 참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거액 전달했다. 1921년 9월 태평양회의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했다. 198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최수창(1893~1953) / 1992년 대통령표창 최수창 선생은 황오동 269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5일 경주읍 장날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혔다. 최성렬(1893~1938) / 1993년 대통령표창 최명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한 최성렬 선생은 성동동 290번지가 출생지다. 1919년 3월 15일 오후 3시 30분경 경주읍 장날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혔으며, 4월 15일 징역 6월형을 받았다. 최상제(1923~2008)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최상제 선생은 천군동 1092번지에서 태어났다.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해 활동했으며, 중국군 제5전구 소속 전시간부훈련단에 특설한 정공간부훈련반에서 정훈교육을 받았다. 이후, 제3공작반 제3분대장으로 활약했고 1977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최명표(1911~1981) / 2008년 건국포장 성동동 214번지에서 태어난 최명표 선생은 1934년 1월 경주적색농민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인부들 중심으로 일전회를 조직해 일제를 타파하고, 신 사회 실현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혀 1936년 5월 12일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채순봉(1928~2013) / 2006년 대통령표창 산내면 외칠리 912번지에서 태어난 채순봉 선생은 채주형·채병창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1944년경 9월 경, 경주중학교 재학 당시 항일학생결사인 명성회에 가입해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 1945년 3월 붙잡혔다. 조근만(미상~1908) /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 외동읍 구어리 출신인 조근만 선생은 1907년 정미7조약 이후 국권 침탈이 가속화 되자 마중군·탁영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경상북도 경주 후초동 등지에서 활약하다 일경에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조경규(1902~1988)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조경규 선생은 노동동 9번지에서 태어났다. 1926년 3월 광복단에 입단해 자금조달 활동하다 붙잡혀 징역 3년 6월형을 받았다. 정을기(1893~1964)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건천읍 신평리 1711번지에서 태어난 정을기 선생은 1926년 3월 17일 김창숙의 밀명으로 독립군 기지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입국한 동생 정수기를 도와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1927년 8월 22일 기소유예 됐지만 미결기간으로 1년 5개월여의 옥고를 겪었다. 정수기(1896~1936)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경주 건천읍 신평리 1711번지 출신인 정수기 선생은 1922년 8월 북경에서 의열단 고문 김창숙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했다. 이후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붙잡혀 김창숙과 함께 수감돼 1928년 10월 28일 징역 2년 6월형을 받았다. 1977년에는 건국포장에 추서됐었다. 정내영(1900~1961)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감포읍 팔조리 출신인 정내영 선생은 정죽교·정만출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1920년 4월 경북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해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일제 순사 카이의 사살사건에 연루돼 붙잡혀 1924년 11월 6일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1980년에는 건국포장에 추서됐었다. 장경탁(1923~1945)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현곡면 금장리 604번지에서 태어난 장경탁 선생은 1939년 북간도로 이주해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42년 함북 경흥 아오지탄광에서 광부들을 규합해 지하공작을 펴던 중 붙잡혔으며, 1944년 10월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이후 옥고 중 고문 여독으로 1945년 8월 10일 순국했고 1980년에는 건국포장에 추서되기도 했다. 이판득(1875~1908) /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판득 선생은 외동읍 괘릉리 출신으로 괘릉동에 거주하면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의병 활동하다 1908년 5월 28일 붙잡혀 5월 31일 경주로 호송 중 순국했다. 김철(1896~1978) / 1993년 대통령표창 김천근이라는 이명으로도 활동했던 김철 선생은 성건동 219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5일 경주읍 장날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붙잡혀 4월 15일 징역 4월형을 받았다. 김종철(1888~1941)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김종철 선생은 용당리 450번지에서 태어났다.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 의용단을 결성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하다 붙잡혔으나,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만주로 탈출했다. 이후 상해 의열단에 입단하고 활동했다. 1980년 건국포장에 추서됐었다. 김재호(1900~1969) / 1993년 대통령표창 부산 범어서 승려인 김재호 선생은 양북면 호암리 404번지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8일 범어사 승려들이 주도한 만세시위에 참여해 붙잡혀 4월 7일 징역 6월형을 받았다. 김일성(1898~1938) /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일본명 가네다 니로인 김일성 선생은 경주 출생으로만 기록돼 있다. 1928년 일본 가나가와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및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서 활동했다. 1932년에는 가나가와현에서 상남무산자소비조합을 결성하고, 격문을 배포하다가 붙잡혔다. 풀려난 후 1938년경까지 가나가와현에서 활동하다 다시 붙잡혀 고문 후유증으로 풀려났으나 같은 해 2월 경 순국했다. 이치용(1894~1950)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치용 선생은 이시우라는 이명으로도 활동했다. 출생지는 성동동 357번지. 1927년 2~3월 경 서울에서 항일운동과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직했다. 1929년 3월 경에는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개칭했으며 광주항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신간회 대구지회의 조직위원으로 활동했고 신간회 해소 이후에는 경주적색농민조합에 참여해 활동하다 붙잡혔다. 1936년 10월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다. 1982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이중근(1905~1932)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산내면 의곡리 991번지에서 태어난 이중근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청리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26년 산내청년회 조직 활동 중 유봉조에게 보낸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편지로 인해 붙잡혔다. 1927년 10월 25일 징역 1년형을 받았고 풀려난 후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서 경주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 신간회 경주지회 선전위원, 농민회 활동 중 다시 붙잡혀 1930년 7월 18일 징역 1년 6월형 받았다. 1982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이인석(1902~1929) / 2011년 대통령표창 이철이·이동천·이철 등의 이명으로 활동한 이인석 선생은 강동면 양동리 102번지 출신이다. 1921년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야경대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귀국했다. 1922년 조선총독부 경주경찰서 순사 재직 후 1923년 퇴직해 보천교에 입교했으며 독립운동 참여 군자금을 모금하다 붙잡혔다. 1924년 12월 15일 징역 8월형을 받았다. 이순구(1884~1983)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순구 선생은 강동면 안계리 65번지에서 태어났다. 1906년 4월 정환직·정용기 부자에 의해 산남의진이 조직되자 이에 입대해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8년 의성 구봉산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1912년 만주 반석현에서 광복회에 가입해 활약했다. 1968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됐었다. 이석채(1892~1948) /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 강동면 양동리 125번지에서 태어난 이석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원으로 1919년 12월 경 경남 동래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1920년 1월에 만주 유하현으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 요원인 노백린을 만나 모금한 군자금을 전달하고, 귀국해 임시정부원 모집활동하다 붙잡혔다. 1920년 4월 12일 징역 2년형을 받았다.
경주에는 61명의 독립유공자들이 있다. 이들은 건국훈장 애국장·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에 서훈된 인물들로 국내·외에서 항일 운동을 펼쳤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현재 등록된 독립유공자들은 제출된 자료에 의해 출생지를 구분했지만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출생지 미상의 독립유공자들도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본보에서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출생지를 확정한 자료를 토대로 경주에서 출생한 독립 영웅들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최상익(1869 ~ 1930) / 2022년 건국포장 1869년 천북면 갈곡리에서 태어난 최상익 선생은 1920년 음력 7월경 경북 경주에서 흠치교에 가입해 교도와 독립자금 모집 등의 항일 활동을 펼쳤다. 이에 경찰에 체포돼 징역 2년을 받았고 이에 2022년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서영달(1909 ~ 미상) / 2022년 건국훈장 애족장 서영달 선생은 강동면 국당리 출신으로 1929년 2월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비밀결사조직 ‘권대’를 조직해 활동하다 체포돼 징역 1년을 받았다. 김세덕(1899 ~ 미상) / 2022년 대통령표창 1919년 3월 대구 신명여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경주 출생으로만 기록돼 있다. 이훈구(1869~1947) / 2022년 대통령표창 경주 강동면 안계리 출신인 이훈구 선생은 1906~7년 경북지역 항일 의병 부대인 산남의진에 참여해 지방참모로 활동했다. 또 1915년 광복회가 조직된 뒤에는 우재룡 등을 통해 조직 활동을 지원했다. 외동읍 말방리 출신인 이화석 선생은 1919년 2월경 중국 봉천성 동풍현에서 남만주 지역 항일독립운동조직인 한족회 횡도하자 지부 서기에 임명됐으며, 1920년 7∼12월에는 한족회 구정(區正)으로 회원을 모집하고 회비와 군자금을 징수했다. 위장귀순 후 1921년 3월 중국 재류금지처분 3년을 받았으나 종전과 같이 회비를 징수하고 친일파 한인 처단을 시도하다 체포돼 징역 1년을 받았다. 노말수(1886~미상) /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 황남동 출신인 노말수 선생은 1919년 3월 21일 경북 안동군 임하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 독립만세를 외치고 신덕경찰관주재소와 임하면사무소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2년을 받았다. 손경익(1924~1950) / 2020년 대통령표창 내남면 용장리에서 태어난 손경익 선생은 1941년 12월 경북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4학년 재학 중 ‘문예부’를 표방한 항일 비밀결사에 참여해 활동하다 퇴학을 당했다. 김필권(1883~1973) / 2020년 건국포장 김필권 선생은 노동동 출신으로 1907년 미국에서 샌프란시스코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13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로 활동했고,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 부회장(1917), 회장(1918), 실업부원(1919) 등을 역임했다. 1927년에는 스톡턴지방회 구제, 1932년에는 회장을 지냈으며, 1943년 미국 독립신문사 이사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또 1945년 북미 조선민족혁명단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고 1913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김성권(1875~1960) /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 김성권<인물사진> 선생의 출생지는 경주로만 자료가 남아있다. 1918~19년 대한인국민회의 회원으로 의연금을 출연했으며,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43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집행위원장 겸 당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활동했다. 양태원(1904~미상) / 2019년 대통령표창 내남면 덕천리 출신인 양태원 선생은 1919년 3월초, 전남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했다. 또한 같은 달 10일 시위에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손동창(1901~미상) /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 손동창 선생은 천북면 성지리 출신으로 손동익으로도 활동했다. 1932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경북 경주군 천북면에서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야학회를 운영했다. 1933년에는 3월 적색농민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조사부 위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됐고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이무범(1888~미상) /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 경주 출생으로만 알려진 이무범 선생은 1908년 음력 2월과 4월 사이 경북 경주와 장기군(현재 포항)에서 장헌문 의진에 참여해 군자금 모금 등의 의병활동을 하다 붙잡혀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최완(1889~1927)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경주 최부잣집’ 후손으로 최준 선생의 동생인 최완 선생은 1909년 안희제 등과 대동청년당을 조직했다. 강제병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무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63년에는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이홍석(1890~1946)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성건동 출신인 이홍석<인물사진> 선생은 도순사로 있으면서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한 경북유림단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경북유림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한 단체로 이홍석 선생은 이들의 왕래에 중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에 김창숙 선생으로부터 수정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또한 1926년 4월 유림단의 동지들이 일경에 체포될 때 정수기 선생을 숨겨 주고 가족도 보호해 줬다. 이후 그는 정수기와 함께 일경에 체포돼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1928년 8월 대구지방법원에서 면소됐다. 1977년에는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이두만(1887~미상) /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 서면 출신의 이두만 선생은 1908년 음력 1월 경북 청도군 일대에서 이석조 의진에 참여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됐고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이대백(1879~미상) /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대백 선생은 안강읍 양월리 출신으로 1908년 음력 10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경북 일대에서 이석이 의진에 참여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3년을 받았다. 손진창(1852~1941) / 2014년 건국포장 천북면 화산리 출신의 손진창 선생은 1919년 3월 경북 경주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목적으로 곽종석 등이 주도한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황병기(1923~1998) / 1999년 대통령표창 황병기 선생은 안강읍 육통리 출신이다. 그는 안동농림학교 학생으로 1943년 8월 경 대구 동촌비행장의 확장공사에 동원되자 조선회복연구단 조직에 참여해 1945년 3월 10일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붙잡혔다. 허장환(1896~1946) / 2008년 건국훈장 애 국장 허장환<인물사진> 선생은 감포읍 전동리 출신으로 허병훈·탄해·한소 등의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1919년 제주도, 경주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경주에서 군자금과 여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붙잡혔다. 1920년 1월 21일에 징역 1년 2월형 받았다가 출소했으며, 1925년 3월 중국 남경에 본부를 둔 혁명사의 동경지역 책임자로 활동했다. 1927년 7월 경 귀국 후, 신간회 가입 및 경주청년동맹 양북지부에서 활동하다 붙잡히기도 했다. 1929년 8월 28일 징역 3년형을 받았고, 풀려난 후 1933년 10월 상순경, 경주적색농민조합 김두오 선생에게 사회운동의 실천방법을 지도하며 농촌 야학활동하다 붙잡혔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최해수(1925~2010)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구정동 458번지에서 태어난 최해수<인물사진> 선생은 1941년 4월 배재중학교 재학 중 비밀결사 민족주의민족전선에 가입, 활동하다 붙잡혔으나 신흥우 교장의 주선으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43년 3월 졸업 후 청년동지회를 결성해 활동하다 붙잡혀 1945년 3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