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자 보통학교 양잠 사육 모습 1930년대 경주여자 보통학교 생도들이 양잠 사육을 하고 있는 장면. 머리를 길게 땋은 여학생들이 어린 손으로 누에를 치고 있다.
1930년대 모내기 풍경 1930년대 경주읍. 줄을 대고 한 줄로 서서 모내기를 하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땅과 곡식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모내기를 돕는 어린아이와 논둑에 앉아 이야기하는 노인의 모습이 정겹다.
무열왕릉 앞 돌거북의 1930년대 사진 무열왕릉 앞 왼쪽에 있는 비신을 잃은 돌거북과 이수. 사진은 1930년대 것으로 국보 제25호인 무열왕릉비의 돌거북이 머리를 번쩍 치켜들고 기운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수 앞쪽 중앙에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여덟글자가 있어 碑身(비신) 없이도 무열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글씨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것이라 전한다.
1930년대 계림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의 숲으로 60여년 전(1993년 기준)의 풍경에서도 지금처럼 고목이 울창하다. 김알지의 탄생설화로 유명한 이곳은 현재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1930년대 경주박물관 1930년대 박물관의 전경.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불리던 이곳은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신라시대의 유물·유적을 보존·전시하고 있다.
1930년대 서악서원 전경 1930년대 서악서원의 전경. 이 서원은 김유신, 설총, 최치원 三賢(삼현)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退溪(퇴계)가 西岳精舍(서악정사)라 이름 지어 손수 쓴 글씨를 이 서원 안에 걸었다한다. 임진왜란으로 선조 33년에 중건되었고, 인조 원년에 서악서원이라 사액받게 되었다.
강서면 안강리의 日浦苗圃 1930년대 강서면 안강리의 日浦苗圃(일포묘포). 2000평에 가까운 면적에 林業(임업)을 위한 작물이 심어져 있다.
1930년대 포석정 1930년대 포석정. 신라 때 만들어진 삼체석불 북쪽에 있는 이궁 터로 현재 사적 제1호로 지정돼있다. 경애왕 4년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주연을 즐기고 있던 왕을 비롯한 수 많은 신하들이 죽음을 당한 곳으로 지금은 곡선을 이루어 돌아가는 돌홈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