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부터 18일까지 춘천시 수변공원에서는 의미 깊은 조각전시회가 열렸다. ‘2023 춘천조각축제’가 바로 그것. 여기에 경주 출신 설치미술가 최정윤 작가가 초대받아 자신만의 특화된 작품 ‘시간의 살’을 선보여 시민들과 방문객의 눈길을 끌었다. 이 축제에는 주최측의 신중한 선정작업을 거쳐 초대된 최정윤 작가 외 김윤근, 김주호, 김철민, 윤태성, 정국택, 호해란 작가 등 각 분야의 예술인이 참여해 각자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시민들과 호흡했다. 이번 조각축제가 눈길을 끄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조각전은 여느 전시와 달리 참여한 작가들이 완성된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고 만 2주 동안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시민들에게 공개했다는 것. 춘천시와 작가들이 연계해 시가 일체의 작업비용과 수고료를 지급하고 작가들은 자신의 고유한 재능을 기부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완성된 작품들은 춘천시립 예술문화회관에 영구 전시한다는 것도 특별했다. 최정윤 작가는 이번 행사기간 동안 지금까지 자신이 제작한 연작작품 중 가장 큰 작품을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높이가 무려 5.2m, 폭이 95cm의 대작이다. 이렇듯 작품이 커서 한정된 장소에서 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행사 폐막 하루 전인 10월 17일 작품을 완성해 춘천시립 예술문화회관 로비로 옮기는 작업까지 마쳤다. 최정윤 작가는 “작품 제작기간 동안 낮에는 관람객들이 질문도 많이 하고 사진도 찍는 등 작업에 집중하기 어려워 주로 새벽 이른 시간에 미리 작업을 하고 낮에는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 특히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은 일부러 작품에 드러눕게 하거나 안아보게 해 추억을 만들어주려 노력했다고도 술회했다. 춘천수변공원에는 최정윤 작가 등 7명의 작품도 한창 마무리 중이었다. 금속을 이어 붙이는 용접 소리, 돌을 연마하는 마찰음, 용광로에서 유리를 녹이는 모습, 작품들을 이어 붙이기 위해 마무리하는 모습 등으로 활력이 넘쳤다. 작가와 시민, 관람객들이 작품 속에 녹아드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예술문화도시를 지향하는 경주도 고려해볼 만한 의미 깊은 현장이었다.
이제 자서전 쓰기를 마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일반인의 자서전 쓰기와 글 좀 쓴다는 반전문가들을 위한 ‘대필작업’과 관련해 37편의 글을 올려 대략의 실무를 다루었다. 마지막 편으로 ‘출판기념회’를 골라두었다. 자서전 출판기념회는 누가 어떤 의도로 여는가에 따라 규모도 다르고 초청하는 사람들의 범위도 다르고 행사 내용도 사뭇 달라진다. 그러나 공통적인 사항은 어떻든 책을, 더 정확하게는 자신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열망이다. 자서전 대필 시장에서 가장 많은 대상은 역시 정치인들이다. 출판기념회 역시 정치인들의 경우가 가장 흔하다.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는 행사기획, 홍보, 책 판매, 행사 내용과 진행에 이르기까지 가장 리드미컬하고 온갖 기술이 다 동원된다는 점에서 출판기념회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특히 출판기념회에 나와 연설하는 유력 인사들은 매우 경험 많고 필요한 내용을 잘 알아 해당 정치인을 위해 입에 발린 말을 기막히게 잘해주는 노련함도 가지고 있다. 정치가의 출판기념회는 보통 규모가 커지기 쉬우므로 행사 시 다음의 몇 가지를 꼭 점검해야 한다. 정치를 고려했다면 출판 전에 책 내용이 선거와 관련해 문제 될 사항이 없는지를 미리 점검해야 한다. 책 내용을 해당 지역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해 사전 점검하는 것이 필수다. 행사에 임해서는 가장 먼저 접근성을 고려해 출판기념회 장소를 잡아야 한다. 지방의 경우 넉넉한 주차공간이 있는 곳을, 대도시의 경우 주차장에 더해 지하철 이동이 쉬운 곳이어야 한다. 출판기념회 장소가 접근하기 불편한 곳이라면 처음부터 나쁜 이미지를 주기 쉽다. 행사에서 내놓고 선거지지를 선언하는 식의 발언이나 연설이 나와서도 안 된다. 연설하는 사람이나 사회자가 자칫 자신도 모르게 선을 넘는 수가 있으므로 미리 충분히 조심시켜야 한다. 실제로 어떤 정치인의 행사에서 사회를 보던 유명한 코미디언이 자기도 모르게 선거지지 발언을 했다가 후에 선거법 위반으로 곤욕을 치른 사례도 있다. 대부분 출판기념회에서 동영상 상영도 보편화 되어 있는데 이 속에도 행여 선거와 관련해 정책이나 공약성 내용이 들어 있지 않은지 미리 선관위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문제없다고 확인되면 이와 관련한 선관위측 자료를 문서나 녹음 등 증거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다.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는 세(勢)를 보여주는 장이기도 하다. 때문에 누구건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유력하고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초청하는 것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여기서 유력한 인사란 공천과 관련된 인물이거나 그와 유사한 경로로 힘을 미칠 수 있는 인사를 뜻한다. 극명한 예로 이전에 경주에서 치르진 총선에서 전혀 인지도 없었던 군 출신의 모 인사는 당시 대세로 일컬어지던 모 씨가 참석한 것으로 선거의 향방을 전혀 다르게 이끌었고 공천을 못 받아 열세라 판단된 와중에서도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면서 인간미나 진정성도 어필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오래 봐오신 선생님, 발 넓은 택시 운전기사, 오래 인연 맺은 지역 대학생, 사회운동에서 만나 오래 함께 활동한 지인 등은 어떤 정치적 인사들보다 힘 있는 진정성을 발휘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는 인원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 이 세(勢)를 보고 공천권자들이 후보자의 형세를 판단하기도 하고 유권자들이 입소문을 내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선거판은 눈에 비치는 게 중요한 지표로 인식되는 매우 후진적인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세에 따라 후보자를 속단하는 어리석은 행위도 만연되어 있다. 심지어 ‘안 될 사람 왜 찍느냐?’는 웃기는 의식도 지배적이다. ‘보도의뢰서’도 미리 써놓는 것이 좋다. 어차피 중요한 인사들을 초청할 것이므로 그 인사들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공란을 만들어 두고 나머지는 다 작성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출판기념회 직후 그 부분만 보충해 바로 보도의뢰서를 발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인의 출판기념회에 일대 변혁이 생겼다. 지난해 내가 쓴 어느 정치인의 자서전 출판기념회는 위에서 열거한 모든 번잡함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변곡점이었다. 거기에는 코로나19라는 희대의 걸림돌이 있었다. 대중을 모아서 무슨 행사를 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발명적 출판기념회’가 ‘워킹 스루(Walking thru) 출판기념회’다. 코로나19 검진방법에서 나온 방식으로 걸어가면서 자서전 출판 당사자와 인사하고 축하하는 방식이었다. 행사장은 동영상이나 음향기기 대신 자서전에 나온 내용들이 각 꼭지별로 사진과 핵심을 간추려 세로형 현수막 식으로 전시되었다. 축하객들은 그 길을 지나 단상에 마련된 저자와 인사하고 사진을 찍고 책에 싸인을 받아서 퇴장하는 식이었다. 나가는 길에도 역시 책 내용을 요약한 세로형 현수막들을 지나갔다. 이 효과는 의외로 평상시의 출판기념회보다 훨씬 좋았다. 일상적인 출판기념회라면 빤한 행사를 지루하게 기다렸다 행사 끝난 후 서로 악수나 하고 눈도장이나 찍던 사람들이 일일이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고 간단하게나마 친근한 인사라도 나누니 이게 출판 당사자나 관객 입장에서나 훨씬 좋은 것이다. 그중에 좀 더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대화의 시간을 약간 더 할애하는 것으로 성의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이런 효과를 안 이상 코로나19가 사라져도 이런 식의 행사가 계속 인기를 끌 것이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가 아니라면 행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건, 내용을 어떻게 하건 아무런 구애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돈을 수억원 써서 특급 호텔에서 해도 상관없고 정겨운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펼쳐 놓고 해도 상관없다. 책을 공짜로 내주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요령 있고 효과적인 출판기념회를 치를 필요가 있다. 기왕에 심혈을 기울여 쓴 자서전이라면 최대한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한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는 좋은 표본이 된다. 다만 선거를 대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훨씬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출판기념회에 당연히 유력 인사들이 참석시키는 것이 좋다. 여기서 유력 인사라고 하면 정치적인 쪽과는 좀 다르다. 누가 책을 효과적으로 홍보해 줄 수 있느냐가 최고의 유력 인사인 것이다. 방송이나 신문 기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경제계 인사라면 경제부 기자가, 문화관련 인사라면 문화부 기자가 초대되어 오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해당 분야 권위자나 전문인들이 참석하는 것도 좋다. 자신의 책에 대해 어디에서 말 한마디라도 해 주거나 그 사람이 쓰는 SNS에 한마디 거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기자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특히 책을 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정치인이건 비정치인이건 미리부터 SNS 환경에 친숙해지는 것이 대세다. 지금은 어떤 막강한 매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SNS다. 책 내겠다는 사람이 SNS를 등한시 하고 책을 내겠다는 것은 무모하다고 할 정도다. 그러니 책을 내겠다고 생각했다면 우선 당장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록부터 시작해라. 그게 어렵거나 귀찮다면 책 내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번 장을 포함해 모두 38편으로 이 장을 마무리한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은 분들의 문의도 받고 실제로 자서전을 써보겠다는 분도 몇 분 만났다. 그들 중에는 만만치 않은 필력을 가지고 이미 상당 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써놓은 분도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세운 타이틀이 ‘누구에게나 드라마는 있다’였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번 기획 역시 기자에게 또 하나의 드라마였다는 생각이 들어 숙연하다. 긴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개별적인 문의는 신문사를 통하거나 이메일로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지난주 이 코너를 통해 정치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후보자들이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가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실상을 보면 단순히 준비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끔찍할 만큼 황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대필작가로 활동한 배경에는 광고기획사를 오래 한 내 직업이 있다. 광고기획이란게 개인이나 기업의 이미지나 좋은 기능을 종합적으로 부각시키고 알리는 일인데, 하다 보니 그 중에서도 정치기획 쪽으로 일이 많아져 이 분야에서 전문적인 경험을 쌓게 됐다. 정치하려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자서전을 쓰는데 이 역시 광고의 한 실례다. 특히 정치가의 자서전은 다분히 정치적인 역량을 드러내도록 써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작가의 역할이 크다. 정치기획을 하노라면 정치지망생들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지한지 절감하는 경우가 잦다. 자서전은 자기 이야기가 중심이 되니 어쨌거나 그런대로 쓸 수 있지만 그것을 떠나 정치를 위해 어떤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계획이 있고 어떤 정책을 제시할지 물으면 열에 8~9는 꿀 먹은 벙어리다. 도무지 아는 게 거의 없다. 심지어 해당 지역에서 오랜 기간 공직생활을 한 어느 정치지망생조차 현직에서 불과 3~4년 지났다고 해서 자기가 봉사하려고 하는 바로 그 도시의 현안은 물론 자기가 내세울 정책이나 공약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촌극도 경험했다. 그러니 그러지도 못한 정치지망생들은 오죽하겠는가? 고위 공직자, 법조계나 언론계, 군이나 경찰 등 우리가 흔히 보아온 정치지망생들의 공통점은 높은 공직이나 큰 영향력이나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유명한 사람일 수도 있다. 정치일선에 나온 아나운서, 배우, 코메디언도 많지 않았던가? 물론 그들 역시도 정치에 대해 거의 무지하고 당연하게 정책이나 공약을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 그런 정치인들을 위해 정치기획가들이 나서는데 대부분 정치기획이란 것이 지역 토호들이거나 전문성 없이 선거철 급조되는 지역 활동가들이다. 그 활동가들에는 지역의 소식을 잘 아는 지역신문 기자도 있고 지역에서 오래 활동한 시민단체 관련 인물도 있고 지역 대학에서 오래 봉직한 대학교수도 있다. 지역 동창회, 지역 향우회 관련 인사들도 대거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이 우격다짐으로 만든 정책이나 공약은 거의 때마다 나오는 상투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매니페스토 정책을 앞세우는 최근의 선거풍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주먹구구식이라 공약 하나하나를 따지고 들어가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고 구체적인 실천안 없는 말뿐인 공약(空約)들이다. 경주만 해도 이런 공약들은 차고 넘쳤다. 시민들은 선거 때마다 인구증가, 경제부흥, 관광객 증대 같은 꿈 같은 공약들을 귀가 닳듯 들었지만 누구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관광정책은 시민을 위한 것인지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였다. 대표적으로 신경주역 주변과 관련해 마치 엄청난 메트로폴리탄이나 수도권 신도시처럼 꾸며진 청사진을 선거때마다 보지만 그게 다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공염불이었음을 확인해야 했다. 선거때마다 지역별로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세우고 하는 공약이 남발되었지만 대부분 허풍이었고 열에 하나둘 만들거나 세운 것들은 실효성은 없고 과도한 운영경비만 잡아먹는 불필요한 시설로 전락해 득보다는 실이 훨씬 많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심지어 총선과 지자체 선거가 뒤죽박죽되어 총선에 임하는 선거전략이 마치 자치단체장 선거전략처럼 비치는 것도 전국적인 선거행태의 일상이 되었다. 총선은 국회의원 선거다. 국회의원은 국가정책과 나라살림을 감시하고 법을 고치거나 새로 만드는 선출직 공직자다.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 정책은 모두 어디에 무얼 만들고 무얼 유치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러니 그런 공약 내건 국회의원이 정작 국회회기 중에 좋은 법안을 만들거나 개정했다는 소식이 하나도 없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교부금 얼마를 어떻게 가져왔다는 것쯤으로 역할을 다한 듯 알고 국가정책으로 주도한 도로 건설이나 지역개발 관련 안건들에 슬쩍 숟가락 얹어 공사비 얼마를 따냈다는 식으로 의정보고서가 도배되어도 모두가 그런 양한다. 선거기획의 가장 중요한 요체를 설명하자면 수(數), 숫자다. 총선은 국가가 그 기준이 되고 지자체 선거는 지역이 그 기준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총선은 국가 운영의 수를 보는 것이고 지자체는 지역의 운영 수를 보는 것이다. 그게 과하면 줄이고 모자라면 늘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된다. 법과 조례도 그에 따라 다시 만들거나 바꿀 수 있다. 국가기관이나 지역 기관의 유치 및 존폐에 관한 것도 모두 숫자에 대한 문제다. 그것으로 인해 영향받을 국민이나 시민의 다수를 따지면 정책과 공약의 방향이 설 것이고 좀 더 장기적이고 세부적으로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 좀 더 좋은 정책을 세울 수 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는 숫자만 잘 보면 만들 수 있는 공약이 엄청나게 많다. 어느 지자체나 홈페이지에 지자체 예산과 관련한 운영보고서가 반드시 공개되어 있다. 이것만 잘 살펴보아도 실효성 있는 정책들을 무더기로 만들 수 있다. 인구 대비 예산이 부족한 곳은 늘리고 과한 곳을 줄이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구태의연한 감으로 정책을 짜고 공약을 만드니 대부분 터무니없는 엉터리 공약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기획하는 선거정책과 공약들은 다분히 거창하지 않은 정책과 공약들뿐이었다. 실효성을 염두에 둔다면 신도시 건설이니 인구증진 같은 거창한 공약은 절대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건축이나 건설도 거의 없다. 이걸 만들어 놓고 나중에 운영비도 못 댈 것을 누구보다 잘 계산하기 때문이다. 선심 팍팍 쓰는 복지제도도 없다. 선심성 복지정책을 만들려면 반드시 재원의 근거를 마련한다. 예를 들어 무상급식을 주도했다면 건설부문에서 남발되는 비효율적 도로망에 대해 몇 % 삭감한다는 식이다. 한번은 어느 지자체 단체장 선거에서 무슨 좁은 길을 넓히겠다는 공약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매니페스토 정책에 입각해 공약 옆에 예산을 적어두었더니 공천 준 그 지역 국회의원실에서 예산을 성의 없이 짰다고 발끈해서 연락했다. 당장 후보자와 그 의원실 관계자를 불러 놓고 내가 참고한 한국도로공사 표준 견적표를 들이밀었다.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딴지도 걸지 못 했다. 반면 총선이건 지자체단체장이건 의원이건 행동강령은 눈에 띄게 만들어주곤 했다. 지역에 따라 5대 강령, 8대 수칙 등으로 구분된 이 행동강령들은 이런 것이다. ‘△딱 한 임기만 일하겠습니다. △이전의 좋은 정책들은 (정파에 상관없이)이어가겠습니다. △임기 중 축사·격려사를 하지 않겠습니다. △아껴 쓰고 고쳐 쓰겠습니다. △소외된 곳을 더 잘 살피겠습니다’ 등의 약속들이다. 재미있는 일화, 이런 내용들을 행동강령이랍시고 만들었더니 후보들마다 공통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다가 진짜 당선되면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었다. 내 대답이 이랬다. “임기 한 번만 하고 말 건데 인사는 왜 합니까? 4년 안에 일 제대로 하려면 일만 해도 시간 없을 겁니다. 언제 축사·격려사 합니까? 다음 선거요? 이렇게 하고 나서 한 단계 높여서 도지자 선거 나가지요. 아마 시민들이 다 등 떠밀 겁니다. 아니면 총선(시장선거) 나가시죠!” 요컨대 정치기획은 대필의 연장선상이자 훨씬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작업이다. 자서전이 독자의 마음을 얻는 작업이라면 선거기획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 작업이다. 더 살피고 더 조심해서 만들지 않으면 결국 시민이 불행해진다. 사족 하나. 안타깝게도 이런 공약을 내건 후 당선된 지자체 단체장이 없었다. 바람 한 번 불면 다 쓰러지거나 공천만 받으면 정책이고 공약이고 다 필요 없는 개똥 같은 정치풍토가 그 원인이었다.
자서전 내는 분들 중 다수가 공직출신 정치인이다 보니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 자서전을 낸다는 것이다. 자서전 내는 이유도 비슷하다. 아쉬운 것은 이때쯤의 의뢰자들은 대부분 현실 감각이 상당 부분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공직자 출신일 경우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나 과장 시절이 최성기로 보인다. 정부행정이나 지방행정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직책들이기 때문이다. 이 과장 시기에 국민이나 시민과 밀접한 일들을 가장 잘 알게 되고 자신감과 의욕도 어느 때보다 넘친다. 당연히 구체적인 업적도 눈에 띄게 많다. 중앙부서나 지방부서는 보통 2년꼴로 한 번씩 부서를 바꾸는데 6~8년, 많게는 10년쯤 과장으로 몇 개 부서를 돌다보면 다양한 업무를 손바닥 보듯 꿰뚫는다. 가는 곳마다 왕성한 실적을 만들고 그게 국가와 시민의 정책에 반영된다. 여기서 한 단계 올라선 국장쯤 되면 실무 이야기는 조금씩 사라지고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아진다. 그도 그럴 것이 국장쯤 되면 앞의 과장들이 올린 무수한 정책들을 취사선택하는 위치이고 이 중에서 나은 일들을 골라 결재받는 역할에 집중한다. 그러나 국장 역시 실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할 수 없으므로 이들 역시 현장감각은 과장들에 뒤지지 않는다. 여기에 관록까지 쌓여 훨씬 노련하게 정부나 지방의 행정을 관리할 수 있게 된다. 비단 일반 공직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군이나 경찰도 마찬가지다. 군에서 대령 이상 되면 중앙부서 과장쯤의 직책이 되고 경찰에서 총경 이상이 되면 역시 과장쯤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이때가 실무로는 최상의 컨디션이 된다. 실제로 이 정도 계급이 연대장, 지방도시 경찰서장이 되고 본청 과장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상 더 오르면 이때부터는 행정가가 아니고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중앙부서 실장이나 차관, 지방자치단체와 관련한 지방공기업 대표나 부시장 같은 직책으로 발돋움하면 이때부터는 거의 정치가가 된다. 그러나 실무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리기 일쑤다. 이른바 ‘도장 찍는 사람’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평균적인 과정을 거쳤다면, 다시 말해 행정고시를 치렀거나 사관학교를 나오거나 경찰대학을 나왔다면 중앙부서 과장까지는 실력으로 어느 정도 오르지만 그 이상 되려면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장으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 일하는(?) 시기가 바로 이 과장 시기이기도 하다. 내가 대필했거나 대필된 다른 자서전을 통해서 보면 이런 현상은 거의 비슷하게 일어나는 평균적인 이야기다. 여기서 유명한 공통어가 하나 생긴다. ‘월화수목금금금’, 다시 말해 근무하는 요일이 따로 없이 일주일 내내 일한다는 말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 공직자 출신 정치인들은 월화수목금금금을 마치 무슨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 듯 자랑했다. 좋게 해석하면 이 말은 그야말로 열심히 일했다는 뜻이다. 쉬는 날을 반납할 만큼 일이 산더니처럼 많았다는 뜻도 되고 그만큼 멸사봉공(滅私奉公)했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가만 들어보면 과장 이후 삶은 거의 월화수목금금금이다. 국장은 물론 실장이나 정무직인 차관급이 되면 더욱더 그렇다. 대한민국 공직자들이 이만큼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고마움이 밀려들고 눈물이 나야 마땅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미묘한 함정이 하나 숨어 있다. 가만 보면 과장들이 휴일을 반납하고 일하는 이유에는 국장이 출근하기 때문이고 국장들이 휴일을 반납하는 이유에는 그 윗분들이 일하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 가지 일화가 있다. 내가 아는 어느 장관 한 분이 처음 장관에 오른 다음 이런 문제에 맞닥뜨렸다. 유명 대학에서 학장을 지낸 이 교수 출신 장관은 장관이 되고 난 뒤 예하의 고위 공직자들이 밤늦게까지 대기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이런 관행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장관은 스스로 공식 근무시간인 오후 6시가 되면 칼 같이 퇴근하는 것은 물론 예하의 차관 이하 모든 공직자들이 공식 근무시간이 되면 사무실에 불을 끄도록 훈령을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뒤에 왜 그런 조치를 취했는지 물었더니 대답이 신선했다. “그게 모두 장관에게 잘 보이려는 것 아니오. 장관이 없으면 차관은 물론 그 예하 실·국장들이 자리 차고 있을 필요 없고 그 밑의 직원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요. 또 일은 자율적으로 해야 능률이 오르는데 윗사람 눈치 보고 일없이 자리 지킨다는 게 얼마나 인력 낭비요!!” 그런가 하면 모 광역단체 공직자들은 시장이 불철주야 일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토요일과 일요일 가리지 않고 출근해 시장에 대한 원성이 하늘만큼 높았다. 심지어 시장실에 간이침대까지 두고 일했다는 그 시장은 그런 자신을 굉장히 성실한 시장인 양 자랑하고 다녔다. 그 와중에 그의 아랫사람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 시에 근무하던 어느 공직자는 내놓고 시장의 과한 성실에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다. 시장이 출근하니 국장급들이 우~ 따라서 출근하고 국장이 출근하니 과장들도 우~ 따라서 출근... 결국 실무자인 자기까지 나와 ‘대기하는 일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누구 하나 시장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나서 못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로. 결국 이런 병폐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그 시장은 자신의 과함을 깨닫고 휴일에 출근해도 국·과장을 대기시키지 않고 몰래 나와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직접 목격한 어느 도시 과장 한 사람은 자기보다 나이 적은 시장이 술을 부어주자 공손히 무릎 꿇고 술을 받은 후 몸을 돌려 마시는 ‘섬뜩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뒤에 그 과장이 국장으로 승진했는데 공직사회가 이런 것이구나 싶어 씁쓸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그 행동을 만류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던 시장은 그 역시 그런 문화에 익숙했던 공직자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뒤에 했다. ‘과장 이상 진급하려면 소신을 버려라’ 공직사회에 암암리에 도는 이 말은 기성세대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넋두리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586 이전 세대의 행태다. 고위 공직자라고 해서 다 그렇게 눈치 보고 아부해서 진급했다는 것도 억지일 것이다. 정말 실력 있는 고위 공직자도 당연히 많을 것이다. 지금은 공직사회도 많이 나아져서 무조건적인 상명하복, ‘까라면 까는’ 풍토가 상당부분 완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586언저리 세대의 공직자들은 일하기 어렵다는 푸념을 내놓곤 한다. 윗사람 눈치에 아랫사람 눈치까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위력에 눌리고 젊음에 쫓기는 기성세대 공직자들은 아래위로 낀 세대다.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이런 풍토의 정점까지 갔던 공직자들이 그 직을 다하고 나면 선출직을 탐내 기웃거리는 것이다. 그나마 지방자치단체장이라면 이전에 일해본 경험이라도 있으니 큰 탈 없이 일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나 광역의원 같은 선출직이 되면 이전의 실무능력은 없고 밑에서 일일이 수발들어주는 국장·과장은 물론 그 정도 급의 비서진조차 없으니 무슨 법안이나 조례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심사하거나 개정하는 것은 뒷전인 채 날마다 표만 모으러 다니고 인기에만 영합하는 일이 벌어진다. 혹자는 고위 관료로서의 경험과 인맥이 더 좋은 정치를 하는 힘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힘은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작용하는 것이 또한 실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어정쩡한 경력으로는 끼지조차 못한다. 그래서 일 잘한다고 소문난 중앙정부 과장 국장이나 지방자지단체 과장, 국장을 만나면 곧잘 하는 말이 있다. ‘지금처럼 일 잘할 때 출마하시라’고. 물론 그 말을 듣는 당사자들은 펄쩍 뛴다. 언감생심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된다. 일은 제대로 할 줄 알 때 하는 것이 옳다. 시간 다 지나서 힘 빠지고 머리 썩고 난 다음에는 미련과 탐욕만 남을 뿐이다. 문제는 그런 공직자들이 요직을 두루 거치고 할 일 없어지면 똑같이 선출직에 욕심내고 악순환의 고리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눈치 보고 아부하는 공직문화가 시작된다. 아직도 그 중심에 586 이상 기성세대의 상명하복, 오랜 행태가 숨어 있다. 소신껏 일하는 올바른 공직자상은 그 이후 세대가 될 수밖에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