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우리나라의 인연 1999년 4월, 남편과 함께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셨습니다. 4월 21일 안동 하회마을에 오셨을 때 1만여 인파가 환영을 했었는데, 벌써 24년째가 되었습니다. 하회마을 풍산유씨 14대 종손 유영하 씨의 부부로부터 합죽선을 선물 받으셨고, 김치와 고추장 담그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서애 유성룡 선생 종택인 ‘충효당’내실로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셨는데, 여왕의 일상에서 보기 힘든 특별한 모습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을 존중해준 예의 표시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마침 이날이 여왕의 73회 생일이라 생일상이 차려지기도 했지요. 여왕은 봉정사로 이동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 ‘극락전’을 본 뒤, 돌탑에 돌을 얹고,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라는 글귀를 남겼어요. 여왕은 ‘일념 만년거(좋은 생각은 만년을 간다)’라는 족자와 200년 묵은 오리나무로 만든 양반탈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경북 안동은 가장 한국적인 문화체험 공간으로 유명세를 탔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행운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왕의 발자취를 따라 하회마을→농산물 도매시장→봉정사로 이어지는 길을 ‘Royal way’라고 이름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지난 장례식 때 충효당 앞에 빈소를 마련하였고, 방문 당시에 찍은 여왕사진전도 열어 여왕을 조문했습니다. 여왕의 장남 찰스왕세자 (현 국왕)의 방한 1992년11월 우리나라를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함께 왕족으로 처음 공식 방문하였고,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예방했습니다. 영국 대사관 새 청사 개관식에 참석하였고, 왕세자비는 롯데백화점 영국상품전시회에 참석, 매장을 둘러보았으며, 또한 6.25 당시 한국전에서 사망한 영국군 추모비도 참배하였습니다. 지금은 고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어 국왕으로 등극하여, 한·영 우호관계에 한층 발전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여왕의 차남, 엔드류 왕자 방한 하회마을 참관 2019년에는 여왕의 차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하회마을 충효당을 방문하였으며, ‘담연재’에 들렀고, 경북도청에서 기념식수도 했습니다. 또한 봉정사와 한국국악진흥원을 관람하였고,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메시지도 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9년 안동을 방문해 하회마을에서 73세 생일상을 받은 것은 깊이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도 하회마을 주민과 안동시, 경상북도 여러분들께 좋은 일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4년 전 여왕의 한국 방문과 두 분 왕자의 대(代)를 이은 방문으로, 영국 왕실과 한국의 유대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안동이 세계의 관광지로 부상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여왕의 방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큰 영광으로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명복과 영면을 빕니다.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심어놓은 구상나무(기념식수) 이야기 여왕의 방문 때 서애 선생의 종택인 충효당 마당에 ‘구상나무’를 기념식수 하셨는데, 24년째 잘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수종을 놓고 가장 한국적인 나무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진 나무입니다, 주로 한라산, 지리산 등 한국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좋은 기운을 뿜으며,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옷을 걸어놓았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추위에 강하고, 힘찬 기상을 가진 우리 민족의 강인한 모습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무궁한 번영을 바란다는 염원에서 이 나무를 심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왕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빕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 여왕은 작년 9월 9일, 스코틀랜드 할리루드 궁전의 부속 궁인 ‘벨모럴성’에서 영면하셨습니다. 그녀의 남편 필립공이 떠나고 1년 만의 일입니다. 이틀 후 영국 국왕의 공식 거주지인 할리루드 궁전으로 이동, 하룻밤을 지내고 성 자일스 대성당으로 옮겨져 장례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여왕의 관(冠)은 참나무로 제작되어 왕기와 왕관으로, 그리고 꽃으로 장식되었으며, 8명의 군인들에 의해 런던 ‘버킹검’으로 운구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지도자와 시민들의 참배가 있었고,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그런 후 이 사원 ‘성 조지교회’ 지하 납골당에 있는 남편 (필립공)의 옆에 영면하셨습니다. 여왕의 관은 전통적인 영국산 참나무 관으로 30여년전부터 준비된 것이라고 합니다. 참나무(Royal oak)는 영국 왕실과 인연이 깊은 나무라고 전해오지요, 17세기중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당시, 국왕 찰스 1세와 아들 제임스 2세가 난을 피해 옥스포드로 피신했는데, 지인의 도움으로 우거진 숲속의 참나무에 올라,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왕정에 복귀되면서 자신(왕족)을 구해준 나무라 하여 ‘Royal oak(참나무)’라고 이름을 붙여서 신성시 해왔다고 전합니다. 서거일로부터 안장 시까지 11일간, 수많은 영국인들이 여왕의 마지막 길을 슬픔으로 송별하였고, 장례식에는 세계에서 모인 수백명의 국가대표급 인사들의 조문이 있었던 세기적인 장례였다고 합니다. 향년 96세, 재위 70년, 항상 웃는 얼굴과 인자한 모습으로 영연방의 어머님으로 모범을 보이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국가 원로 중의 원로요, 세계 어른 중의 큰 어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추모합니다 1953년 6월부터 70여년간 영국 여왕으로 재임해 오셨습니다. 영연방의 상징적인 어른으로 영국 왕실의 위상 정립에 노력해왔습니다. 세계 2차대전 때(1945년)에 여군에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마쳤고, 25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남편 필립공과는 1947년 11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오랜 재임 기간 중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항상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게 사셨습니다. 영국 시민들은 여왕이 평소 자신이 가장 사랑하든 장소(벨모럴성)에서 영면하셨다고 여깁니다. 필립공과 약혼을 했으며, 남편과 마지막 결혼기념일에도 여기서 보내셨다고 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 눈감은 곳도, 저 세상의 출발점도, 이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가 봅니다. 다시 한 번 여왕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하며 추모합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도시 풍경 작년 9월, 고 엘리자베스2세 영국여왕이 돌아가시기 전 거주하신 궁전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 있는 ‘할리루드 궁전’으로, 당시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궁전입니다. 나는 지난 유럽 가족여행 때 운 좋게 이곳을 관람한 적이 있어, 여왕의 서거로 인해 그 궁전을 회상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에딘버러는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쪽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면 이곳의 중세 전통적인 풍류를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이 들리는 곳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대표 관광지인 에딘버러성에서 ‘로얄마일’거리를 지나, 끝쪽에 있는 궁전이 ‘할리루드 궁전’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지요. 옛날 왕과 귀족들만 통행하든 길로, 길이가 1마일정도 된다고 하여 로얄마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해요. 걸어보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거리로 전통적이고 주술적인 분위기와 현재 서구문화가 겹쳐있는 느낌을 받아요. 아담스미스 동상, 스콧 기념탑이 있고, 왕관처럼 생긴 성 자임스 대성당도 있습니다. 거리에는 킬드 차림의 전통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지나가고, 아이들이 천연색의 비누방울을 불어 날리며, 곳곳마다 거리마법사들이 마술을 자랑하고 있어, 마치 마법의 고장에 온 것처럼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해리포트의 작가 JK.롤랭이 그 최초의 집필 장소로 여기를 택한 것은 이런 마법 요술적인 분위기가 이 도시에 배어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로얄마일거리 주변에 있는 칼튼 언덕에 오르니, 아테네 신전같은 대리석 구축물이 덩그렇게 서 있고, 나폴레옹 전쟁 때 죽은 장병들의 추모탑이 아직껏 남아 있으며, 200여년 전에 건립된 넬손 제독의 추모탑도 북해를 향해 서 있었습니다. 할리루드 궁전관람 영국왕실의 하계휴양지인 이 궁전은 1128년 데이비드 1세 때 건립된 궁전으로 에딘버러 할리루드 공원 옆에 있습니다. 좌우 대칭 건물로, 처음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짊어진 십자가를 보관하던 곳(홀리루드 사원)을 찾는 귀족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고 하고, 그후 16세기부터는 스코틀랜드 왕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곳은 메리여왕(1542-1587)이 좋아했던 궁으로 유명합니다. 궁전 내 메리 여왕 갤러리에는 여왕과 역대 왕의 초상화, 금장식, 옷 등 유류품이 보관되어 있고, 식탁에는 당시 그녀의 그릇 소품들이 세팅되어있어요. 궁 주변에는 옛 수도원이던 낡은 건물이 바깥 정원과 잘 어울려 오히려 옛 교회처럼 보이고, 궁전 근처에는 푸른 잔디밭에 산책길이 있습니다. 이 궁전은 건물 자체가 우아하며, 여성적인 분위기에 화려한 프랑스식 건물로 주변에는 할리루드 공원이 있어요. 할리루드 공원에서 에딘버러 시가지를 보다 할리루드 궁전에서 이어지는 엄청 넓은 녹색 잔디밭이 장관입니다. 궁전을 지나 큰 공원 안에 ‘아서시트’라는 해발 200여미터 정도의 높은 언덕이, 산처럼 넓게 펑퍼짐하게 들어차 있어요. 궁전에서 가까워 많은 시민들이 놀러 오는 힐링공원인데, 언덕에는 트래킹 코스가 있습니다. 이 코스 둘레를 돌면 에딘버러 시가지를 180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어, 사람들이 항상 많다고 합니다. 우리도 아서시트 언덕을 오르다가 잔디밭이 좋아 그냥 한참이나 놀고 왔어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모짜르트의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이었던 ‘슈테판성당’을 찾아 찰츠부르크에서 ‘빈’으로 와서 ‘슈테판 성당’으로 갔습니다. 성당 입구 거리에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립니다. 오스트리아의 최고의 고딕성당으로 멀리에서부터 뾰족한 지붕 2개가 빈의 상징건물로 시야를 아리게 합니다. 12C에 건축, 1359년 재건립된 곳으로 여기에서 모차르트가 결혼하고, 짧은 생(生)의 장례식까지 치러진 곳이라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상징 최대 성당 지붕에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가 타일로 모자이크되어 있는 성당으로, 함스부르크 제국과 왕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성당은 남탑과 북탑으로 나눠져 있으며, 남탑은 높이 137m, 340개의 계단으로 경사가 급해, 오르기 힘듭니다만 올라서면 시내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보입니다. 북탑은 지붕 높이만 67여m로 머리가 하나 달린 두 마리의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고요. 한 마리는 수도(빈)도시의 상징이요, 다른 하나는 국가(오스트리아)를 상징하고 있어, 이 성당이 이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성당임을 과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성당 이름도 최초 순교자인 성인 ‘슈테판’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성당 내부에는 찬란한 예수 성심 제대와 스테인드 그라스를 비롯한 갖가지의 성전 장식물들이 벽과 천장에서 화사하게 빛을 발하고 있어요. 지하묘지에는 왕과 왕족들의 시신이 있고,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유골도 가득 있어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36년간 짧은 인생에 낭비벽과 괴팍한 성격 탓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그의 무덤도 이곳 성당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착각을 해봅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뒤돌아 성당을 다시 보고는 이런 크고 웅장하고, 찬란하며, 엄숙한 성당을 보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짜르트 외갓집 강변 마을 찰츠부르크의 산악 열차로 ‘샤프배르크 산’ 정상을 다녀오면서, 그 주변에 있는 ‘장크르트 길겐’ 마을을 구경했어요. 모차르트의 외갓집이 있던 마을로 약 4000여명의 주민들이 산다고 합니다. 볼프강 호수 변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로 푸른 호수와 오렌지색 집과 수려한 강변 산세 등으로 경관이 뛰어났어요. 중세도시의 전통적인 강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 산뜻하고 정돈이 잘된 호반 도시였습니다. 마을 호수 변에 길게 다듬어진 공원가에 띄엄 띄엄 놓여진 붉은 화분이며, 볼브강의 잔잔한 물결은 한 폭의 그림으로 우리들의 지친 여정을 시원하게 풀어 주었어요. 모차르트의 유년시절, 음악가로서의 재능과 꿈을 키웠던 곳인데, 지금은 주변 국가 사람들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인스부르크의 거대한 ‘크리스탈 월드’ 전시장 관람 8/4일 찰츠부르크에서 200여㎞ 떨어진 인수부르크로 와서, 거대한 크리스탈 전시장인 ‘스와로브 스키수정월드 전시관’에 왔어요. 입구에는 녹색 잔디에 싸인 거인 얼굴이 두 눈을 빠끔히 부릅뜨고 있고, 큰 입에서는 물을 쏟아내는 모습이 마치 폭포를 영상시키고 있어요. 1859년 ‘스와로브스키’가 설립한 크리스탈 전문회사인데, 이곳 전시장은 회사창립 100년 때 기념으로 만든 전시관이라고 합니다. 세계 제일의 크리스탈 선도업체로 이곳에는 10만개 이상의 크리스탈 장식품이 있다고 해요. 월드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매장에 진주, 시계, 보석, 브로치, 목걸이 등 크리스탈로 만든 수많은 장식품이 진열되어 있고, 여기저기 많은 관람객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 찰츠브루크 주변 여행 8/5 일부터 10여일간 우리는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못하고 예술의 도시인 빈, 찰츠부르크에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중세도시의 전통적인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예술의 도시답게 호수, 궁전, 음악, 박물관이 있고, 바이든, 베토벤, 모차르트등 유명 음악인들의 혼이 흐르는 분위기에, 아늑한 힐링 유혹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짧은 36년간 생애에 600여곡의 많은 노래를 작곡함으로써 그의 혼이 흐르는 모차르트의 생가. 결혼식과 장례식이 있었든 웅장한 성당, 그의 얼굴이 담긴 과자, 그의 이름을 부친 박물관이 있고, 또한 외갓집 마을의 그림 같은 풍경들이 이어져 있어,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찰츠 브루크의 도시환경 찰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300㎞ 정도 서쪽으로 알프스 「잘 자르 강」 기슭에 있습니다. 도시 어원이 「소금의 산」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소금 생산지로 유명하지요. 인구 50만명 정도의 도시인데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3000만명이나 된다고 해요. 유명 작곡가들로 인한 음악의 도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어, 많은 관광객이 즐겨찾는 아름다운 관광도시입니다. 찰츠브루크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4키로 정도 지나, 중앙역에서 내리면 이 도시인데, 1996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살던 생가(生家) 사운드오브 뮤직을 촬영했던 미라벨 정원을 구경하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생가로 갔습니다. 1756년 태어나서 16년 동안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부 파손되었다가 재 건축된 건물이며, 1996년부터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그의 가족 이야기, 집 이야기가 있고, 어린 시절 그가 사용했던 바이어린, 피아노등 악기와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그에 관련된 기념품 가게와 카페도 있었습니다. 이 집은 찰츠부르크의 중심가인 게트랑데 거리에 있으며, 그가 살았던 4층 아파트는 주변 아파트와 달리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고, ‘mozarts geburtshaus’라고 길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모차르트 초콜릿(쿠겔로) 맛보기 오스트리아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찰츠브르쿠의 유명한 과자가, 그의 이름을 붙인 ‘모차르트 초콜릿’입니다. 50여개 국으로 수출된다고 해요. 그러나 이 초콜릿의 원조(모차르트 쿠겔로)는 1890년 ‘파울 피르스트’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그의 자손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는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어 판다고 합니다. 맛이 좋고, 과자 포장에 모차르트 얼굴이 새겨져 있어 더욱 사랑을 받고 있어요. 거리에는 모차르트 기념품 가게가 많고 가게 안에도 초콜릿이 가득했습니다. 원조 초콜릿은 맛이 어떤지 가족 수 만큼 사서 포장을 뜯고 먹어보니, 위대한 음악가의 얼굴을 찢는 것 같아서 안됐지만 진짜 맛이 있었어요. -찰츠부르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호엔 찰즈부르크 성(城) ‘높은 찰츠부르크’라는 의미의 이 성은 해발 120여미터 언덕 위에 있습니다. 시내 어디에서나 쳐다볼 수 있기에 이곳의 랜드마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요. 성(城)까지는 ‘후니쿠루’라는 케이블카가 왕복 운행 중이어서. 시내 구경까지 시원하게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마르세유 항을 출발, 부산으로 간 신부, 선교사들 이곳(마르세유)은 예부터 프랑스에서 동양으로 가는 조선 파견 신부, 선교사들의 출발지였습니다. 2개월씩이나 배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로 떠나는 첫 발걸음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까지 한국으로 가는 신부들은 배를 타기 전 이 성당에 들러, 부산으로 무사 항해와 주님의 순명이 잘 이루어지길 빌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신부로 ‘예수성심시녀회’와 ‘포항성모병원’ 설립자인 「루이 델랑트」 신부는 기록에, 1923년 4월 마르세유 항에서 승선, 6/5 아침 부산항에 도착, 50여일간 1만6290여㎞를 항해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성당 내벽에는 이 성당을 거쳐 간 1200여명의 신부, 선교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들의 임무 수행을 위해 출발지가 되어주고, 또 그들을 잘 지켜주어 고맙다는 감사의 글이 2021년 10월 17일 파리 외방 전교회 명의로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마르세유 사람들이 이 성당을 ‘좋은 어머니 성당’으로 부르는 이유가 잘 설명되고 있지요. -마르세유 해안 이프섬과 부산항의 상징 오륙도 좋은 어머니 성당에서 바다를 보면 3~4km 떨어진 마르세유 앞바다에 ‘이프섬’이 있어요. 하루에 2-3회씩 유람선이 왕래하는 관광섬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우리는 시간상 그곳 현지구경은 하지 못했습니다만, 이 항구의 해안 상징물로 16C경 군사용 방어시설과 또 감옥으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옛날 학창시절에 배웠듯이, 1844년 듀마의 소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지로 소설 속의 감옥이 있던 섬이라고 해요. 일당 항해사인 주인공(당테스)이 악당의 음모로 14년간,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다가 탈출, ‘몬테크리스토’ 섬에서 보물을 찾아내, 거부가 된 다음 파리 사교계에서 백작으로 행세하며, 악인들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입니다. 글로 재미나게 읽었던 작품의 배경을 현지에 와서 멀리서나마 직접보고, 그 설명을 듣다니 감개무량했어요. 부산항에는 오륙도(국가지정문화재 명승제24호)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관문 부산항의 상징물로, 선박들을 위한 길잡이로 등대가 있는 섬입니다. 섬은 날씨나 위치에 따라 5개, 또는 6개로 보인다고 오륙도라고 했답니다. ‘이은상’ 시인의 ‘오륙도’ 시의 탄생지이며, 해운대 바닷가를 지나 매일 관광선이 다니고 있어요. “오륙도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오륙도라 흐리락 맑으락 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이상 1절) “취하여 바라보면 열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빈 바다라 오늘은 비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이상 2절)(* 3절 생략) 위 두 나라의 섬은 두 항구의 상징물로, 또 각각 예술작품(소설과 시)으로 되어 그들의 앞바다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두 항구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성에 친근감을 가지면서, 좋은 관광명소로 더욱 이름나기를 희망합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