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경주다운 것은 무엇일까?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를 비롯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필자는 옥적(玉笛)을 맨 앞에 두고 싶다. 경주 사람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옥적은 경주 사람이라면 많이 사랑하고 기억해야 할 유물이다. 예로부터 옥적은 금척(金尺)과 화주(火珠)와 더불어 신라 삼기팔괴 (三奇八怪)로 불려왔다. 옥적은 경주를 떠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옥적이야말로 경주의 자존과 존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옥적이야말로 가장 경주다운 유물이 라는 생각이 든다. 옥적과 옥저 옥적은 국어사전에 ‘청옥이나 황옥으로 만든 대금 비슷한 취악기(吹樂器)’로 나온다. 근데 어떤 이는 옥적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옥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옥저의 저는 원래 ‘저[笛]’는 ‘적[笛]’으로 읽어야 하나, 때에 따라 ‘저’로 읽기도 한다. 옥적일까? 옥저일까? 쓰임새에 따라 달리 사용하는 줄 알고 처음에는 다소 혼동스럽기도 했지만 다 같은 옥피리라는 말이다. 경주옥적의 기원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옥적은 황옥으로 만든 것으로 길이 53.5㎝, 구경 3.3㎝이며 대금과 같은 구조를 가졌으나 길이가 조금 짧은 편이다. 신라시대부터 전한 것으로 추정하나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고 기록도 없다. 모양은 속이 빈 대나무로 만드는 전통악기인 대금과 비슷하다. 대금에 비해서 소리가 맑고 고음을 낸다고 한다. 옥적이 만파식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맞질 않는다. 나라의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주는 만파식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대나무로 만들게 된 이야기가 분명하게 나온다. 국립국악원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옥적은 국악의 역사에서 매우 미스터리한 악기로 분류된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 사용됐는지 기록이 거의 없다. 제례 등에 사용된 신성한 악기로 추정할 뿐이다. 경주옥적 외에도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두 점이 더 있는데 모두 개인 소장품이다. 마찬가지로 신라시대 것이라는 확실한 단서는 없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옥적은 국립국악원 소장 옥적, 국립 고궁박물관 옥적, 미국 피바디엑세스박물관 소장 옥적이 있으며, 이외에도 옥산서원 소장 회재 이언적의 옥적, 병와 이형상의 옥적, 맹사성의 옥적, 장말손의 옥적 등 전국에 10여 점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옥저는 옥의 재질이나 규격이 조금씩 차이는 있을 뿐 거의 비슷하다. 특이할 만한 점은 옥적을 보관한 목함에는 황동으로 만든 자물쇠가 부착되어 있는데 경주를 대표하는 월성과 안압지, 첨성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면 첨성대 구멍으로 성덕대왕신종 모양의 걸쇠가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옥적을 대하는 조상들의 예사롭지 않은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옥적의 기구한 운명 태조 왕건이 신라의 보물인 옥적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문경새재를 넘자 옥적은 아무리 불어도 소리가 나질 않았다. 이에 왕건은 옥적이 신물(神物)로 알고 경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경주의 풍물, 인문지리지인 『동경잡기』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다수의 경주 사람들이 왕건을 따라 개경으로 갔지만, 옥적만은 따라가지 않았다며, 굴하지 않은 충절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경주읍성이 왜군에게 빼앗겼다가 치열한 전투를 거듭한 끝에 1592년 9월 7일 보름만에 되찾았다. 죽장으로 쫓겨 가 있던 부윤 윤인함이 귀환해보니 동헌과 집경전, 객사를 비롯한 관아의 부속 건물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제대로 남아있는 유물이라곤 없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옥적만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부윤 윤인함은 이때의 슬픈 심정으로 시를 남겼다. 그의 저서 『죽재유고』 1권에 수록되어 있다. 임란 때 불타버린 동도엔 텅 빈 봉황대뿐인데 참담한 슬픈 바람이 내 얼굴에 스쳐간다. 옛 우물은 간데없고 옥적만이 있어서 달빛아래 불어 본 한 곡조 더더욱 애절하구나 -죽재 윤인함(1531~1597) 『동경잡기』에 백옥적(白玉笛)에 대한 기록이 별도로 나온다. ‘불에 타고 부서져 10여 조각이 났다. 임신년(1692년)에 김승학이 땅을 파다가 주웠다. 이를 사사로이 숨겨 두었다가 그만 가운데를 부러뜨렸다. 부윤 이인징이 밀랍으로 붙이고 은으로 도장 했는데, 세 마디에 구멍은 아홉개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잃어버린 옥적을 되찾은 이야기가 있다. 조선 숙종 18년(1692) 경주 부의 객사인 동경관(東京館) 담장 아래에서 옥적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이야기인지 다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짜로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묻어 놓았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이지만 아무튼 기구한 운명의 옥적임에는 분명하다. 옥적을 탐낸 사람들 #연산군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은 연산군 때문에 생겨난 재미있는 말이다. 여색을 탐하고 노래를 즐긴 연산군은 피리 소리를 좋아했다. 흥을 돋구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주옥적을 바치게 한 내용이 「연산군일기」 54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504년 (연산군 10년) 7월 28일 연산군이 “경주(慶州)의 옥적(玉笛)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올려보내게 하라” 어명을 내렸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자 재차 다시 명을 내렸다. “옥적(玉笛)을 어찌 경주(慶州)에 두는가 내고(內庫)로 옮겨 간직하는 것이 어떤가?”하자 승정원 승지들이 아뢰기를, “신라의 옛것이므로 옛 도읍에 두는 것입니다. 내고로 옮긴들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하였다. 지혜로운 신하들 덕분에 옥적은 서울로 가지 않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다시 한 번 경주 옥적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영조실록」 80권에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가 왕에게 이르기를 “경주(慶州)의 옥적(玉篴)도 또한 기이합니다. 조령(鳥嶺)을 넘으면 피리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이야기를 논하다 경주옥적을 예를 들어 말한 것이다. #일본 통감부 소네 아라스케 1909년 4월 경주 현장 시찰에 나선 일제 통감부(統監府)의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 일행이 경주 관아 건물을 나흘간 샅샅이 뒤졌다. 관기(官妓) 뗄감창고에서 새까맣게 변색된 목재함 하나를 발견했는데 4중으로 싼 함안에 옥적이 들어 있었다. 이듬해 1910년 경성으로 반출되어 이왕가(李王家)박물관(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가 13년이 지난 1923년 옥적이 다시 경주로 되돌아오게 된 데는 경주 사람들의 힘이 컸다. 1921년 9월 금관총 발견되어 금관을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기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여론에 밀려 포기하게 되었는데 경주 유지들과 양식 있는 일본인 19명이 합세하여 총독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금관과 옥적을 경주로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분 도굴로 각종 문화재를 빼돌린 모로가 히데오 라는 자의 도움도 컸다. 그가 도운 이유는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지 쇄신과 명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일본인이 경주옥적을 찾고자 한 닭은 무엇 때문일까? 헤이안 시대(794~1185)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에 고려적(高麗笛) 이야기 여러 차례 나온다. 한반도 옛 피리에 대해 고귀함이 불러일으킨 일본인의 환상이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2017년 한국학 연구원 아라키 준은 고고학지에 발표한 논문 「일제 시기 경주지역 문화재 반출경로에 대한 역사 인류학적 고찰」에서 금관총 금관과 경주옥적을 문화재 반출을 막은 것이 가장 우수한 사례였음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연산군이, 일본인들이 마저 탐을 내었지만, 옥적은 지금 경주에 있다. 이처럼 경주의 것은 경주에 있어야 제격이고 제맛이다. 경주옥적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청와대 불상도 고향 경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려 본다. 전인식 시인(시민전문기자)
최치원의 명성에 비해 경주에는 최치원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상서장과 독서당, 숭복사비, 서악서원 등 몇 곳이 있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년~908년?)이 태어난 곳은 경주 사량부이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황룡사지 남쪽과 미탄사지 북쪽 사이쯤 된다. 동궁과 월지, 반월성 그리고 상서장, 독서당과의 거리도 아주 가깝다.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로 조기 유학길을 오를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열 두살 아들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를 못하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며 열심히 공부하라 당부하며 써 준 글이 인백기천(人百己千)이다.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상서장에 온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없을까? 상서장 경주 남산이 시내 쪽으로 가장 가까이 내려온 곳에 위치하고 있는 상서장은 고속도로 진입로와 접하고 있어 찾기도 쉽다.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으로 상서장(上書莊)이라 부른다.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지어 올렸다는 애국충절의 상징성이 강한 곳이다. 후대에 와서 고려 현종은 최치원의 학문과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곳에는 상서장, 추모문, 영정각과 조선 고종 때 세워진 ‘문창후 최선생 유허비’가 있다. 바로 옆 그리 높지 않은 곳에 고운대라는 바위가 있다. 여기 앉아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라벌 왕궁을 내려다보는 최치원을 생각해본다. 상서장으로 오르는 계단 우측에는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가 새겨진 시비가 있으며 뒷면에는 ‘한중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건립했다’는 취지가 새겨져 있다. 泛海 (범해)- 시 한 편의 우주 시 「범해(泛海)」는 최치원의 학문적 깊이와 문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掛席浮滄海 (괘석부창해) 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長風萬里通 (장풍만리통) 긴 바람 만리에 통하고 있네 乘槎思漢使 (승사사한사) 뗏목타고 떠난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採藥憶秦童 (채약억진동) 약초 캐는 진나라 아이 기억나네 日月無何外 (일월무하외) 해와 달은 허공밖에 있겠지만 乾坤太極中 (건곤태극중) 하늘과 땅은 태극의 안에 있네 蓬萊看咫尺 (봉래간지척) 봉래산이 가까이에 보이니 吾且訪仙翁 (오차방선옹) 나도 이제 신선을 찾으려 하네 -「범해(泛海)」 전문 『고운집 』 제1권에 나오는 오언율시인 이 시는 한글로 풀이하는 사람에 따라 참 다양하다. 전체적 내용이야 비슷하지만 풀이하는 사람에 따라 읽는 느낌과 맛은 사뭇 다르다. 한문이나 한시를 자주 접하지 못하는 요즘 사람에게는 주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지랖인 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시 해설에 살을 보태어 봤다. 왜냐하면 인용된 문장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 그리고 사건을 알면 쉽고 재미있게 읽어지기 때문이다. 1행과 2행의 長風萬里通(장풍만리통)은 이백의 시 「돛 달고 강에서 달을 기다리니」에서 가져와 응용했다. 3행의 한나라 사신은 장건(張騫)이다. 한무제(漢武帝)가 황하의 근원을 찾으라고 명하니, 장건이 뗏목을 타고 떠났던 일을 떠올렸다. 장건은 동서문화 교류의 선구자이자 외교관, 여행가로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4행의 진나라 아이들은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기 위해 서복과 함께 떠난 천여 명의 아이들을 말하며 서복과 관련된 이야기는 제주도 서귀포와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다. 5행의 무하(無何)는 『장자』에 <응제왕>편에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인용하였는데 아무것도 없는 고을이란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을 말한다. 6행은 왠지 우리나라 태극기가 떠오르고 주역으로 풀이가 요구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7행 봉래산은 중국 전설 속의 산으로 선인(仙人)들이 살고 불사의 영약이 있다는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이다. 8행은 최치원의 신선 사상과도 연결된다. 최치원이 어느 시기에 어떻게 썼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시는 귀국, 귀향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신라로 돌아온 직후 또는 은거 시기에 쓴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여하간 「범해(泛海)」는 최치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임을 증명시켜 주는 시이다. 최치원의 시를 좋아하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중국의 시진핑은 최치원을 좋아한다. 국제 행사에서 두 번이나 최치원을 불러내었다. 2013년 6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 때 “쾌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한다.”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의 첫 구절을 첫마디로 언급했다. 한중 우호 관계 지속과 더 친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치원의 시구절을 인용했다. 그리고 ‘2015 중국 방문의 해’ 서울개막식 행사에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최치원의 「호중별천(壺中別天)」을 또 인용했다. ‘동쪽 나라의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라는 시구를 직접 소개하며 “한국의 시인 최치원이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칭송했다. 한국 사람은 중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중국 사람도 한국 문화의 독특한 매력을 좋아한다. 양국이 인문적 교류를 확대하는데 튼튼한 기초가 되고 있다”고 했다. 시 주석이 두 번에 걸쳐 고운 최치원의 시를 언급한 것은 한중 양국 간 역사에서 문화 교류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최치원이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대 중국 관계가 호의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제관계와 정세라는 것이 정권의 이해득실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기도 한다. 한때는 일본 관광객이 많았다가 중국 관광객이 많았다가 하는 것을 관광 도시 경주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이다. 21세기의 최치원 상서장에서 올린 최치원의 상소문은 허약한 신라 말기의 왕실은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의 「시무십조」는 훗날 고려시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고려의 통치 이념의 근간이 되었다. 어쩌면 최치원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유형적인 유물이나 유적보다 그는 문장으로, 학문으로, 철학으로 세상에 나타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은 공자를 모신 사당에 최치원을 배향하려 영정을 만들고 서당을 건립했다. 유교 중심의 세상이 아닌 오늘날, 많은 변화를 거듭하지만, 지자체마다 최치원을 숭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 옛날 최치원의 발길이 닿았거나 머물렀던 곳곳마다 고운 선생의 흔적을 기념하고 있다. 기념관이나 문학관을 건립하고 문학제, 음악회, 포럼 등을 개최하며 다양한 행사들을 경쟁적으로 펼치고 있다. 긍정적이고 좋은 문화 현상인 반면에 이곳이나 저곳이나 특색 없음이 우려된다. 최치원의 숭고한 문학정신이 최우선 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글로벌 시대에 맞는 21세기형 수만 명의 최치원이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기를 바란다. 고운 선생의 시 한 편이 마른 논에 물들어가듯 가슴으로 스며든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없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 그림 속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쁘고 젊은 여인은 없고 수수한 시골 아낙네, 꼭 중년의 우리 엄마 같다. 먹고살기 위해 장터와 길거리 그리고 빨래터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들 때문일까? 소박한 일상을 그렸던 그를 서민 화가로 부르기도 했지만, 생존 당시와는 달리 그의 그림은 국내 최고 경매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7년 그의 작품 〈빨래터〉는 45억2000만원에 낙찰되었다. 20호(37*72)짜리 소품의 그림치곤 엄청난 금액이다. 대작 그림을 그릴 형편이 못 되었기에 그의 작품은 소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화가와 경주는 직접적 인연이나 연결고리는 없지만, 그의 그림은 경주를 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칠고 꺼칠꺼칠한 박수근 화가만의 특유한 그림의 비밀이 경주와 밀접하게 관련있기 때문이다. 흔히 ‘박수근표 질감’이라고 부르는 그의 마티에르는 경주의 화강암 석불과 한통속이라 할만하다. 화가는 틈나는 대로 고도 경주를 찾았다. 20대 후반에 판화에 관심 있는 국내 독학파 ‘주호회’를 조직하여 경주 남산과 신라석물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얻어낸 것이 바로 박수근표 질감이다.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토속적 미감과 질감들이 바로 경주의 회백색 화강암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흑과 백, 회색 톤의 색감, 우들두들한 질감, 직선에 가까운 선으로 대상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한 것과 생략된 배경들이 경주에 산재한 화강암 마애불 조각과 인연을 맺고 있다.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스승이 없는 대신 경주의 마애불을 비롯한 화강암 조각상들이 그의 스승이었는지 모른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화가는 경주의 석탑과 마애불 등 석조 문화재 그리고 와당과의 교감을 통해 그만의 고유한 그림을 창조해 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과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고 그것을 조형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돌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 잘 드러난 화가의 노트에 있는 글이다. 특히 화가가 경주의 화강암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박수근의 최고 후원자이기도 한 미국의 마가렛 밀러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제가 경주에 갔을 때 석 조각에서 탁본으로 찍은 것으로 동양 표구로 꾸며서 보내려고 했으나 저의 사정으로 선편으로 보내드리게 되어 봄에나 받아보시게 된 것을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저희 마음의 표시입니다” 이처럼 자주 경주를 찾아 석물과 와당을 탁본했다. 김유신장군묘의 십이지신상, 임신서기석, 석굴암 등을 비롯하여 문화재를 답사하며 신라의 문화와 작품에 몰두하였음은 가족들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경주 남산을 오르내리며 바위 속 마애불을 답사하여 거친 표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촉감의 느꼈기에 그 질감의 느낌을 그림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얼마나 화강암을 좋아했는지는 여기저기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호는 다름아닌 ‘미석美石’이다. ‘아름다운 돌’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다. 몇 해 전 방문했던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의 외형도 평소 좋아했던 화강석으로 건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수근 화가은 생전에 자신의 예술적 모태가 ‘신라의 석조 문화’라고 거듭 말한 바 있다. 박수근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탁본 59점 가운데 80%가 와당 탁본이다. 중국 와당 두 점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의 와당을 탁본한 것들이다. 연화문, 당초문, 인동문 등 신라 와당의 여러 문양과 선은 그의 그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 화가들이 유학 가서 서양 화풍에 쏠려 있을 때 흙수저였던 그는 고유의 우리 전통미술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예술혼을 찾아내었다. 2013년 지역의 어느 신문사에 기고한 최용대 화가의 말을 빌리자면 계림에는 ‘박수근 나무’로 불리는 나무가 있는데 주로 경주지역 화가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특이한 형태의 나무가 1956년 박수근이 스케치한 그림이 있고 지금 계림에도 그 나무가 있다. 이와 관련된 오래된 기사를 스크랩해 둔 것을 들고 두 번이나 방문한 끝에 어렵사리 그 나무는 찾아내어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박수근 나무 사진 참조) 비록 부목 받침대를 하여 지팡이 짚고 있는 노인 같은 모습이었지만, 나무는 여전히 푸르게 계림 한쪽을 지키며 서 있었다. 최용대 화가의 말씀처럼 ‘박수근 나무’라는 이름표 하나 달아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숲, 한때는 신라의 별칭으로도 까지 불렸던 유서 깊은 계림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포토존이 생겨나는 것은 충분히 즐거운 일 아닐까? 박수근 화가가 스케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계림의 나무 외에도 이곳에서 사생대회에 참가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두 여고생을 스케치한 작품을 비롯하여 계림과 관련된 작품이 여러 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가는 50년 후반과 60년대 초 신라문화제 사생대회 심사위원으로 여러 번 참석하였기에 가능한 그림들이다. 이외에도 경주에서 스케치한 것으로 유추할 작품이 여러 점 있지만 확증할 수가 없는 아쉬움이 크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어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더군다나 증언해 줄 지역의 원로분들 마저 사라지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저런 인연이 닿았기 때문일까? 지방 도시로는 드물게 박수근 화가의 작품은 2013년 우양미술관과 2017년도 솔거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만큼 사후에도 경주와의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박수근 화가의 그림의 주된 소재인 여인네 말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잎 하나 달지 않은 발가벗은 나목이다. 늦깍이 소설가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도 박수근 화가와 그림과 관계가 깊다. 두 사람은 미군 부대 PX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다. 그곳에서 박수근은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갔고, 박완서는 경리 일을 맡고 있던 평범한 일상적 삶을 살던 두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와 작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묵묵히 봄을 기다리는 나목과도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타고난 천재성보다는 끝없는 노력으로 일구어낸 대기만성형의 작가들이기에 더 뜨겁게 박수를 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박수근 그림 속의 나목들은 모두 계림의 나무를 닮은듯하다. 계림의 나무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림 속으로 걸어 든 것 같기도 하다. 그 옛날처럼 해마다 이곳에서 ‘박수근 그림 그리기 대회’라도 개최하면 참 좋겠다. 계림은 그림으로 새로 태어나는 숲이 될 것 같다. 신화와 설화가 있고 근·현대의 스토리텔링이 공존하는 숲에서 세계적 거장의 그림이 태어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지나간 과거는 단지 사라지지만은 않는다. 과거는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것이다. 전인식 시인(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시·서·화뿐만 아니라 경학, 불교학, 고증학, 금석학에도 밝아 해동 천재로 불리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멀리 경주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의 권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경주 김씨의 원류를 찾고 싶었던 걸까? 옛 영화가 사라진 주춧돌만 남은 서라벌 땅에 무슨 까닭으로 두 번이나 찾아왔을까? 1817년 32세 추사는 4월 하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대략 열흘에서 보름 정도 일정으로 경주여행을 시작했다. 오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경주에서 한참이나 멀고 외진 암곡동 골짜기 무장사지였다. 이곳으로 오기 한 해전 친구 김경연과 북한산에 올라 무학대사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을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그의 경주행은 성격상 철저히 준비된 행차였을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다녀온 뒤 시·서·화는 물론 금석학에 밝은 옹강방과 사제의 연을 맺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활발한 교류를 통해 금석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일찍이 경주 부윤 홍양호가 탁본한 무장사지 비문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 김생의 것이니, 황룡사 스님의 것이니, 김육진의 것이니 등등 화제작이 되었던 것 같다. 김정희도 수소문 끝에 탁본을 구해 그의 스승이기도 한 중국의 옹강방에게 보냈는데 옹강방은 왕희체를 집자(集字)한 글자로 판명했다. 완벽주의자 추사는 사실 여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장사지의 잡초 우거진 풀숲을 뒤진 끝에 찾아낸 파편 한 조각에 와! 하며 유레카의 순간을 맛보았던 추사, 깐깐하고 흐트러짐이 없던 그가 느낀 감동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느낄 수는 없을까? 억새를 보기 위해 무장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추사의 외마디 환호성을 들려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는 내친김에 사천왕사지와 신문왕릉 일대의 논과 밭을 샅샅이 뒤지며 문무왕 비석을 찾아 나섰다. 돌무더기 속에서 하단을 먼저 찾아내고 우거진 수풀에서 상단을 찾아내었다. 관아까지 고이 모시고 왔지만, 그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200여 년이 지난 뒤 동부동 민가에서 발견되었다. 어느 집 빨랫돌로 사용되어 온 우여곡절을 겪다가 지금은 박물관 신라역사관 전시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 또한 추사가 노력하여 얻은 귀중한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문무왕 비석을 찾는 일은 그가 경주 김씨였고 뿌리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무왕 비문 해독은 경주 김씨와 흉노족 김일제와 연결되는 신라사의 비밀을 알고 있는 판도라 상자와 같다. 이와 관련하여 KBS에서 ‘문무왕 비문의 비밀’이라는 프로를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추사가 문무왕 비문을 해독하였을 당시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분황사 인근에서 원효대사 공덕을 기리는 비문 받침돌을 찾아내어 이를 확인하는 글귀 ‘차화쟁국사지비적 추사 김정희(此和靜國師之碑蹟 秋史 金正喜)’라는 글씨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분황사 모전탑 뒤편에 가면 희미하게나마 돌에 새겨진 추사의 글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까닭으로 진흥왕릉을 찾아 나섰던 것이 분명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진흥왕릉의 위치를 추사가 몸소 발품을 팔아 확인하였다. 무열왕릉 뒤쪽 숲에 진흥왕릉뿐만 아니라 진지왕을 비롯한 4개의 왕릉이 있음을 밝혀냈다. 지금은 서악동 뒷산 일대가 잘 정비되어 공원화되어 있는 것은 지금 사람들의 공로이겠지만 추사의 공도 적지 않다. 1824년 39세 나이에 추사는 두 번째로 경주를 찾았다. 남산기슭 창림사지에 왔던 것을 보면 신라 명필 김생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창림사지 비문을 신라의 김생이 썼기 때문이다. 추사가 방문하였을 때 이미 절은 폐사되었고 탑은 사리장엄구를 얻고자 하는 도굴꾼들에 의해 무너진 상태였다. 폐허에서 김생의 글자 한 조각 파편을 찾고자 했다. 무장사지에서 느꼈던 큰 기쁨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경주에서 가장 쉽게 추사체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을 중건하면서 헌종이 사액 현판을 내려주는 과정에서 이를 추사에게 쓰게 하였다. 남산기슭 옥룡암에는 일로향각(一爐香閣)이라는 추사의 현판이 있다. 일로향각 현판은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해남 대흥사에서 쓴 기록이 있다. 경주와 가까운은해사와 통도사에도 있지만 옥룡암의 것은 모각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추사의 글씨는 서원뿐만 아니라 사찰에서까지 유행이었고 너도나도 따라 쓴 필사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고고학자 같은 추사가 여러 번 경주에 왔거나 몇 해를 더 머물렀다면 찾아낸 비문 해독은 그 수가 훨씬 많았을 것이며 금석학 영역도 한층 넓어졌을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적 재능과 동서남북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닌 노력이 빚어낸 결과의 산물임에 더더욱 경외심이 든다. 경주에서 틈틈이 추사의 행적을 찾아보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추사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고, 역사가 보이고, 전후좌우가 보인다. 결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가 그러하고, 일천 자루의 붓이 몽당붓이 되기까지 피와 땀이 베인 추사체가 그러하다. 깨어진 비문 한 조각을 찾으러 멀고 먼 길 걸어온 한 사내의 발걸음이 공룡발자국보다 크게 가슴속으로 걸어드는 듯하다. 전인식 시인(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을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르는 장소가 있다. ‘별일 없었습니까?’ 그리운 사람처럼 찾아가 안부를 묻고 싶은 곳은 박물관 뒤뜰의 고선사지 탑이다. 그리운 것들은 지금에 없거나 사라진 경우가 많다. 고선사지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경주에 흔한 것이 폐사지이지만 고선사지만은 좀 특별하다. 왜냐하면 탑이나 주춧돌이라도 남아 허전한 들판과 산기슭의 서정이라도 지키고 선 다른 폐사지와는 달리 고선사지는 물속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선사지는 3층 석탑과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와 같은 귀중한 유물과 원효와 관련된 사복불언(蛇福不言)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1975년 덕동댐 건설로 석탑을 비롯한 금당 터와 비각들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선사지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29대 무열왕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선사지는 1탑 1금당 양식으로, 한 공간이 아닌 두 공간으로 나눠 배치된 특이한 양식이다. 이때부터 탑 중심에서 금당 중심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학술적 비중이 높은 곳이다. 국보이기도 한 고선사지 3층 석탑은 감은사지 탑과 가장 많이 비교된다. 닮은 듯 다른 듯해서 같은 장인의 작품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감은사지 탑보다 미학적으로 우위에 두는 사람들도 있다. 사학가 고유섭 선생은 고선사지 탑에 대해서 모든 점에서 한국 석탑의 범례를 이루고 있으며 노성한 대인의 품격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한 강우방 교수도 고선사 탑이 자기 자리에 있지 못하고 수몰을 피하여 박물관 정원으로 옮겨진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그런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저서『강우방 예술론,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1997년 1월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이래, 박물관 뜰 한구석에 침묵하고 있는 고선사 석탑을 매일 찾는 일이 버릇이 되었다. 그 탑은 우람하여 그 앞에 서 있으면 나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진다. 커다란 화강암을 두부 썰 듯이 덤덤하게 판석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폼이 제법 대단하여 큰 맛이 넘친다. 고선사에는 원효보살(元曉菩薩)이 머물렀으므로 매일 이 탑을 돌았을지도 모른다. 암곡 절터는 유현(幽玄)한 자리였다. 산 중턱에 조금 넓은 평지가 있었는데, 좁은 계곡을 옆에 끼고 고선사 탑은 그 우람한 모습으로 산곡(山谷)을 메웠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원 구석에 서 있으니 집 잃은 처량한 신세여서 나의 마음조차 쓸쓸하다” 고선사지 탑에 대해 평소 느끼는 필자의 마음과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여 반갑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학자의 마음과 일반인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당화상비는 원효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어 원효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손자인 설중업이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각간 김언승의 후원으로 세운 것이다. 서당이란 원효의 어릴 적 이름이다. 1914년 고선사의 옛터에서 3편으로 조각난 채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리고 비신의 상단부는 1968년 동천동 부근 농가에서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성명은 전하지 않고, 비에 글을 새긴 사람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전체 33행에 각 행은 61자로 추정되며, 문장은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사륙변려체이다. “수공 2년(686) 3월 30일 혈사에서 마치니, 나이 70이었다. 곧 절의 서쪽 봉우리에 임시로 감실을 만들었다. 여러 날이 지나지도 않아서 말 탄 무리가 떼를 지어 장차 유골을 가져가려 하였다” 비의 파편에 남아있는 기록의 일부이다. 원효에 관한 정확하고 확실한 기록인 한편 미스테리한 기록의 일부도 엿보인다. 어떤 이유로 유해를 가져가려 했을까? 사라져서 알 수 없는 뒷부분이 궁금해진다. 원효가 고선사지에 있을 무렵 사복불언(蛇福不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온다. 다음은 원효와 사복의 대화 내용이다. “태어나지 말기를, 죽음이 괴로우니. 죽지 말기를, 태어남이 괴로우니” 사복이 “게송이 복잡하다”고 하자 다시 고쳐서 하기를 “죽고 태어남이 괴롭구나!”라고 하였다. (“莫生兮, 其死也苦. 莫死兮, 其生也苦” “詞煩” “死生苦兮”) 고선사지는 생과 사의 진중한 문답을 이리도 쉽게 주고받는 사복 설화의 배경이기도 하다. 사복설화는 불교적으로 삶과 죽음, 윤회의 업보를 통해 현생의 정진을 말하고 있다. 원효와 사복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도「사복불언찬」이란 시를 지었다. 고선사지와 이웃한 마을에서 태어난 것도 인연으로 작용했는지 필자도 시 한 편 쓸 수밖에 없었다. 문학에 뜻을 세우던 젊은 날에 쓴 졸시「사복에게 배우는 시론」을 인용해 본다. 사복에게 배우는 시론 말 많은 세상 제대로 한마디 하기 위하여 무수한 형용사와 수식어의 숲 상징과 은유의 계곡 헤매이다가 겨우 찾아낸 금빛 은빛 이파리들 자신만만 펼쳐 보일 때 말이 너무 많다 말과 말사이에 섬을 만들어라 그 여백의 공간 물결치게 하라 이르는 당신의 말에 버리기가 아깝고 쓰기도 힘들다 하면 아예 쓰지를 말라 하네 말하기 위하여 말하지 않는 법을 늦은 밤 무릎 끓고 앉아 배우는 당신의 시론! 고선사지 탑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물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물빛이라도 보이는 어느 곳 언덕배기에 다시 자리 잡을 수는 없을까? 그것마저 어렵다면 물가에 안내판이라도 설치하고 그 옛날 사진 한 장이라도 걸어두면 어떨까? 덕동호 둘레길이면 참 좋겠다. 그곳은 오어사, 기림사, 골굴사 등 원효의 길과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하다. 박물관 외진 구석 고선사지 탑에서는 원효의 숨결을 느낄 수가 없다. 탑은 산과 강,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야 제격이다. 고선사지 탑도 무장봉에서 알천으로 흘러드는 물소리와 동대봉산 넘어오는 동해 맑은 바람 소리를 그리워할 것이다. 실향민처럼 쓸쓸하게 서 있는 고선사지 탑, 남의 집 셋방살이하듯 불편한 기색으로 서 있음이 안타깝다. 눈을 감으면 종달새 나는 푸른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탑이 보인다. 물속의 절 갈 수 없는 그곳, 오늘 밤 꿈속 그 옛날 하얀 신작로 길을 따라 고선사지 찾아가면 왠지 뎅 뎅 뎅 종소리 들려 올 것만 같다. 원효의 법문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전인식 시인(시민전문기자)
7월 29일은 세계 호랑이의 날이다. 멸종 위기에 처한 호랑이를 보호하고 개체수를 늘이기 위해 201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정되었다. 호랑이의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땅에서 멸종해버린 동물에 대한 무관심 탓일 수도 있겠지만 단군신화에 호랑이가 등장하듯 우리 민족은 늘 호랑이와 함께해 왔고 경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국「위서」‘동이전’에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며 제사 지내는 민족’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일년에 반은 조선사람이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반년은 호랑이가 조선사람을 잡으러 다닌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이만큼 호랑이가 많았다는 기록들이다. 육당 최남선은 범 이야기로 천일야화를 쓸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며 호담국(虎談國)이라 했다.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이집트의 사자처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물이 바로 호랑이다.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올림픽 마스코트도 호랑이였고, 축구대표팀 엠블럼 또한 백호이다. 호랑이는 두려운 존재이면서 가장 친숙한 동물이었다. 조상들은 호랑이로 인한 호환을 두려워하였으나 오히려 호랑이를 영물로 여겼다.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존재로 여기며 매년 정초가 되면 대문에 호랑이 그림을 붙이기도 했다. 각종 속담과 민화, 설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도 호랑이는 영물인 동시에 그 특유의 위엄과 용맹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이다.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동물로 중생들에게 지혜를 전하는 현장에 등장한다. 사찰의 산신각 탱화 속에 산신과 함께하는 호랑이의 모습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영물인 호랑이가 산신의 옆에 엎드리거나 뒤따르는 모습으로 신격화되고 있다. 산신각은 우리의 토속신앙과 불교가 합해진 독특한 형태의 신앙이다. 경주는 호랑이와 밀접한 도시이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는 이 땅의 공식적 마지막 호랑이로 기록되어 있다. 하동마을 김유근 씨는 추석을 앞두고 대덕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등 뒤에서 호랑이의 급습을 받았지만 지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후일담을 인터뷰로 남기기도 했다. 당시 신고를 받은 불국사 구정 지서 미야케 요조 순사는 도로 공사하던 인부들을 소집, 호랑이 몰이꾼으로 동원시켜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포수의 총을 맞은 호랑이는 길이 2.5m, 몸무게 153kg의 대호였다. 이 이야기는 일본 황실 구미에 맞게 미화 각색된 부분도 없지 않지만, 당시 소학교 일본어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슬프게도 이 땅의 마지막 호랑이는 일본 왕실에 받쳐지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 해로운 짐승을 박멸한다는 명목의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으로 이 땅의 호랑이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일본인 야마모토 다다사로부로는 조선 포수들을 끌어모아 호랑이 사냥부대인 정호군(征虎軍)을 만들어서 호랑이 씨를 말리는 데 앞장섰다. 그의 정호기(征虎記)에는 한반도 호랑이 사냥 이야기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일제의 호랑이 말살은 바로 민족 말살과 다름없었다. 일본 작가 엔도 키미오(1933~)는 2023년 2월에 출간된『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라는 저서에서 호랑이를 멸종시킨 일제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구체적으로 고발했다. 은폐와 침묵보다는 드러내놓고 사죄한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치고 싶다. 경주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신라 원성왕 시절 김현이라는 청년이 흥륜사(興輪寺)에서 탑돌이 할 때 호랑이 처녀와 정을 나눈 사랑 이야기가『삼국유사』「감현감호金現感虎」편에 나온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호랑이 처녀의 헌신으로 벼슬에 오른 김현이 은혜를 갚고자 세운 절이 호원사(虎願寺)이다. 김현은 이곳에서 주로 법망경(梵網經)을 경전을 읽으며 넋을 위로했다. 호랑이 처녀는 죽으면서 호랑이에게 다친 상처는 흥륜사 된장을 바르면 깨끗이 낫는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이야기는 왠지 낯설지 않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약 대신 상처에 된장을 발랐다. 치료제로 쓰인 된장의 유래가 신라시대 흥륜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호원사지(虎願寺址)는 현재 경주 황성공원 변두리에 폐사지로 남아 있다. 황성공원에 절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라벌여중과 국궁장인 호림정 사이에 기단석 몇 개만 겨우 잡초 속에 보일 뿐이다. 철책 울타리만 둘러쳐져 있는 이곳이 호원사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주변을 정비하여 안내 표지판이라도 세워두면 좋겠다. 전국 최고의 공원이자 쉼터에 스토리텔링 하나 더 하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호원사지 근처에 국궁장이 있는 것도, 이름도 호림정(虎林亭)이라는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경주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들이 여러 곳 있다. 토함산 석굴암 아래 동네 범곡(범실), 함월산 기림사가 있는 호암리(虎巖里), 감포읍 호동리(虎洞里), 강동면 호명리(虎鳴里) 등이 호랑이와 관련된 동네 이름들이다.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특히 필자는 대덕산 인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현재도 살고 있다. 대덕산 기슭으로 소풀 먹이로 가고, 산딸기 따러 가던 곳이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호랑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덕동의 포수 이야기, 암곡 산고개 넘어 다닌 던 고기 장사꾼들 이야기 등등 그런 영향인지는 몰라도 호랑이에 관한 시를 몇 편을 짓기도 했던 것은 필연에 가깝다. 호랑이와 관련된 삼국유사 속의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경주의 흥륜사와 호원사지 그리고 이 땅의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죽은 대덕산 등을 하나로 연결하면 좋은 관광 자원이 되지 않을까? 표범의 마지막 서식지 합천 오도산에 표지석이 있는 것처럼 경주 대덕산에도 표지석 하나 세웠으면 어떨까. 더군다나 대덕산은 보문관공단지와 불국사를 잇는 보불로를 접하고 있으니 접근성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사라진 호랑이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은 돌아올 것 같다. 최소한 우리는 100년 전까지 호랑이와 함께 살아왔다. 첨단 과학 시대의 오늘 왜 뜬금없이 호랑이가 그리울까? 호랑이는 바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자 경주의 상징이기 때문일까? 전인식 시인
천마도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는 신비의 그림이자 수수께끼의 그림이다. 또한,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과 죽음을 잇는 형이상학적 그림이다. 천마총 발굴의 결과로 등장한 천마도(天馬圖)의 출토는 역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발견 당시 명칭은 ‘백화수피제 천마도장니’라 했다. 문화재청의 천마도 공식 명칭은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이다. 장니(障泥)는 말다래의 다른 말이다. 장니는 말이 달릴 때 튀는 흙을 방지하기 위해 말안장에 아래에 메다는 부속적 도구이다. 천마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전 무령왕 발굴에서 드러난 허술했던 점을 거울삼아 단단히 준비하고 나선 발굴이었으며,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대한 관심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가장 큰 황남대총 발굴을 지시했지만, 위험부담이 큰 황남대총 대신 상대적으로 작은 155호 고분의 시험발굴을 건의한 문화재 관계자의 설득으로 이루어진 발굴이었다. 화려한 유물발굴을 통해 최고 권력자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여러 차례 경주를 다녀갔고 발굴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경주관광개발계획의 첫 삽은 떴지만, 완성을 못 본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경주시민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정서이다. 특히 6~70년대를 거쳐 온 세대들에게는 그러하다. 황남대총 발굴을 위한 사전 연습용이었던 155호 고분 발굴은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렸다. 통치자는 화려한 왕권의 상징인 금관에 흥분했지만, 금관보다 천마도가 주는 비중은 훨씬 컸다. 금관은 이미 몇 번 발굴 사례가 있었지만, 천마도는 오로지 한 점뿐인 신라 최초의 회화 그림이기 때문이다. 천마총 발굴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발굴 당시 경주 지역은 유례없는 무더위와 가뭄이 심했는데, 이는 왕의 무덤을 건드렸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며 발굴 현장으로 주민들이 몰려와 항의하며 돌을 던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땅속에서 금관이 드러날 찰나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 번개 소나기가 쏟아져서 직원들이 무서워 사무실로 피신하는 일도 있었다. 발굴관계자와 기자들의 전쟁 아닌 전쟁이 매일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은 뭐가 나올까? 내일은 뭐가 나올까? 천마총을 둘러싼 신문사 간의 특종 보도 경쟁도 치열했다. 천마총 관련 3대 특종 보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국일보의 금관이 나왔다는 특종이고, 둘째는 천마도가 나왔다는 조선일보의 특종이며, 셋째는 추정 연대를 기원 370년 + - 70년이라고 밝힌 특종이다. 이중 마지막 특종 보도자는 국제신문 조갑제 기자라고 한다. 발굴 현장의 나무 조각을 모처에 탄소연대측정을 의뢰하였고, 문화재연구소 직원을 사칭하여 밝혀낸 재미난 이야기가 조갑제 닷컴의 ‘누가 특종을 하는가’라는 글에 자세히 나온다. 현재 천마총 발굴 50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행사가 진행 중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천마, 다시 만나다’ 특별전을 통해 천마도 실물을 약 9년 만에 공개했다. 하나뿐인 줄 알았던 천마도가 하나가 아님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행사이다. 문화재청과 협업으로 조폐공사에서는 ‘1973, 천마를 깨우다’ 비전 선포식 행사를 하며 천마도를 주제로 한 지폐형 기념 메달과 천마총 출토 금관이 새겨진 카드형 메달을 출시했다. 때를 같이하여 경주시는 ‘2023, 경주 대릉원 미디어아트’ 행사를 대릉원 일원에서 열었다. 미디어아트는 문화유산에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한 프로젝트로, 문화유산을 실감 나고 재미있게 알리기 위한 기획으로 문화재청 공모사업에 선정된 멋진 일이다. 아울러 동서남북 어디로든 드나들 수 있도록 출입문을 만들고 무료입장으로 전환한 것은 대릉원 이름에 맞는 일이다. 고분 속 왕들도 초원을 내달리던 유목민의 후손들이기에 담장이 없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천마도는 비록 가로 73㎝, 세로 53㎝로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가치로 환원하면 무한대가 아닐까 싶다. 천마도 그림은 작가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천마총과 천마도를 소재로 한 대표적 문학작품으로 양귀자의 소설 「천마총 가는 길」과 오탁번 시인의 시 「천마도장니」를 들 수 있다. 소설 「천마총 가는 길」 속에는 일제시대와 남북분단 그리고 민주화운동 등 굴곡진 현대사 가운데 가족사가 등장한다. 주인공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대구를 거쳐 찾아온 곳이 경주이다. 석굴암, 불국사를 거쳐 이곳 천마총에서 ‘천마총 가는 길’이란 표지판 앞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대구는 묘지 이장 토지보상금 일로 왔지만, 경주까지 온 것은 쉼 그 자체였다. 작가가 소설 내용과 연관성이 별로 없음에도 굳이 「천마총 가는 길」로 책 제목을 정한 이유는 따로 있을지 모른다. 천마도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였기 때문일까? 주인공은 다니던 잡지사의 사직, 고문의 후유증 그리고 시달리던 악몽과 두통을 씻고자 경주에 왔을지 모른다. 이고득락 (離苦得樂)을 위해 천마의 날개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유쾌하고 재미있는 시를 선사해주었던 오탁번 시인의 시를 읽으면 천마도 그림이 저절로 떠오른다. 오탁번 시인은 「천마도장니」라는 멋진 시를 남겨놓고 얼마 전 저세상으로 떠났다. 별을 좋아해서 별의 시인, 스타 시인으로 불리던 시인은 왠지 천마를 빌려 타고 별나라로 갔을 것 같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마(天馬)의 가쁜 숨결은 서라벌 뙤약볕 들녘을 다 지우고도 남아 치켜든 꼬리와 날리는 갈기가 오히려 가붓하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흰 몸이 하늘과 땅 아스라한 거리만큼 눈부시고 인동(忍冬)덩굴무늬 구름바다 사이로 왕국의 아침 찬란하게 밝아온다 장니(障泥)가 흔들릴 때마다 희고 붉은 흙빛 채색이 이냥 새뜻하여 신라 천년의 옛 사직은 또렷또렷 현재진행형이다 천마의 울음소리에 천오백년 깊은 잠을 자던 왕과 백성들 천마표 타임머신 타고 광속(光速)으로 달려온다. (오탁번의 시「천마도장니 天馬圖障泥」전문) 강석경 작가는 경주에 거주하며 경주와 관련된 산문집을 여러 권 출간했다. 작가의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에도 천마총에 관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곳곳에 묻어나 있다. 그 가운데 대릉원과 천마총을 거닐며 유목민의 피를 읽고 간 작가의 문장을 옮겨본다. ‘어쩌면 나는 이천 년 전 파지리크 고원의 천막에서 허리에 손칼을 차고, 평원의 거센 바람에 붉어진 빰을 털 위에 대고 잠들던 유목민 여자가 아니었을까. 멀고 먼 기억을 더듬으니 마구와 카펫을 실은 채 마차를 타고 초원을 달리던 내 모습과 화살통을 등 뒤에 걸치고 사슴몰이를 하던 오라비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내 어머니와 함께 짜던 말젖 냄새와 초원의 마른풀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맴돌고, 눈이 아름다운 기마궁사가 태양 아래서 내 손목에 끼워주던 나선형 금팔찌가 아슴푸레 기억한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역시 소설가다운 상상력 덕분에 잠시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유목의 사내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처럼 천마도는 무한 상상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만들기도 하고 그곳으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천마도가 뻔한 사실적인 말 그림이었다면 가능했을까? 천마도는 그린 이는 누굴까? 1600년 동안 땅속에서 썩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경주에 없는 자작나무 껍질들을 누가 어디에서 가져 왔을까? 연구결과 시베리아산이라 하는데, 봄날에 벗긴 껍질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의문들을 가져오는 천마도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유일한 그림이다. 천마도는 고대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진귀한 선물이며 우리나라 고고학의 축복이다. 최초의 그림이 최고의 그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천마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바람은 고대의 신라인이나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전인식 시인
이성복 시인을 두고 흔히 ‘시인들의 시인’이라고 말한다. 시를 쓰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시인, 가장 많이 영향을 주는 시인으로 해석이 된다. 그의 일곱 번째 시집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는 좀 특이하다. 시집 제목 자체가 주는 이미지가 그렇듯 시집의 내용 또한 향가로 시작해서 향가로 마무리된다.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로 시작해서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로 끝맺는다. 입구와 출구에 향가를 모티프로 하는 시를 배치한 것은 시인의 의도가 다분히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읽어내고, 또 다른 상징을 해독하는 일도 시 읽는 즐거움일 것이다. 총 82편의 시로 구성된 시집의 마지막 6부는 ‘오다, 서럽도다 1~4’, ‘來如哀反多羅 1~9’, 그리고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를 배치하여 이 시집이 신라 향가와 연관성을 확고히 한 것으로 보여진다. 시인은 시집 서문에서 밝혔듯이 2006년 여름 경주에서 신라시대 진흙으로 빚은 불상들의 전시회 표제인 ‘래여애반다라’를 관람하고 그대로 시집 제목으로 가져왔다고 밝혔다. 시인은 경주 동국대박물관 주최로 열린 소조불 특별전을 관람했다. 전시회에서 전율을 받아 리플릿에 적힌 ‘래여애반다라’만 오려내 코팅을 해서 부적처럼 책상 앞에 두고 매일 아침 친견했다고 시인은 술회했다. ‘來如哀反多羅’ 여섯 글자를 화두로 삼아 건져 올린 시편들이라 특별하다. 시 창작발생지가 경주라서 반갑다. 창작의 모티브를 제공함은 물론 창작의 배경이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 모두 경주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여타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경주는 명작 탄생의 고향이기도 하고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원문) 오다 오다 오다/오다, 서럽더라/서럽다, 우리들이여/공덕 닦으러 오다(양주동 역) ‘來如哀反多羅’는 신라 향가 「풍요(風謠)」(공덕가) 의 한 구절로 ‘오다, 서럽더라’로 해독할 수 있다. 공덕가는 천재조각가, 양지스님이 영묘사에 장육존상(丈六尊像) 불상을 만들 때, 일을 도와주려 모인 서라벌사람들이 진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고됨과 서러움을 위안하고자 불렀던 노래이다. 향가 중에서 민요적 성격과 노동요 성격이 강하다. 「풍요(風謠)」는 신라 시대 대표적 4구체 향가로,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풍요(風謠)」는 별개의 명칭이 아니라 민요라는 노래를 지칭한 것이다. 오구라 신페이는 삼국유사 나오는 그대로 「양지사석(良志使錫)」이라 하였고, 양주동(梁柱東)은 「풍요」, 김선기(金善琪)는 「바람결노래」라 불렀고, 홍기문(洪起文)는 「오라가」, 김사엽(金思燁)은 「오라노래」라 부른 것처럼 학자마다 다르다. 향가 「풍요(風謠)」의 배경이 된 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두두리, 지귀, 여근곡,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수막새 등 관한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는 곳이다. 영묘사에 대해서는 별도로 언급하고 싶을 정도로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곳이다. 양지 스님은 신라의 미켈란젤로로 부를 만큼 최고의 예술가로 꼽는다. 『삼국유사』 의해 ‘양지사석(良志使錫)’ 편에는 신통력과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양지 스님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양지가 석장을 부리다’는 뜻의 「양지사석」 편을 인용하자면, 지팡이에 포대 하나를 걸어 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마을의 집으로 날아가서 소리를 내면 그 집에서 알아서 제에 쓸 비용을 집어넣어 주었고 자루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 왔다. 신통을 부리는 스님으로 묘사되어 있을 정도로 양지 스님은 보통의 사람, 보통의 스님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은 기묘하고 치밀한 수법을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있다. 근육이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게,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완벽에 가깝게 표현했다. 출생과 고향 등 생몰에 관한 기록이 없고 그의 작품이 기존의 작품과 표현 양식이 다르다 보니, 서역이나 인도 사람이거나 최소한 유학을 다녀온 사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는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신장상과 그가 주석했던 석장사지 출토된 불상전(佛像塼)과 팔부신장등을 들 수 있다. 이외 감은사지 출토 사리함 등을 그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지 스님이 주석했던 석장사지는 동국대 WISE 캠퍼스 뒤 산속에 위치하고 있다. 석장동이라는 지명도 석장사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석장이란 머리 부분에 보통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지팡이를 뜻한다. 걸어 다닐 때 딸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동물이나 곤충들이 물러가도록 해서 살생을 막기 위한 역할을 한다. 석장사지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붓다의 갈비뼈가 드러나 있는 고행상(苦行像)이 출토되었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연기법송명탑상문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세로로 음각되어 있다. 諸法從緣起(제법종연기):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 如來設是因(여래설시인): 여래께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셨네. 彼法因緣盡(피법인연진):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소멸한다. 是大沙門說(시대사문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친 바라네. 이성복 시인이 경주에 와서 반해버렸던 전시 유물들은 바로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흙이 뜨거운 불을 만나 완성된, 어느 곳 하나 성한데 없는 조각들이지만, 시인의 가슴을 찌르며 파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픔들을 그대로 시로 게워낸 것이 「래여애반다라」 시편들이었을까 기억의 생매장이 있었겠구나 저 나무가 저리도 푸르른 것은, 지금 저 나무의 푸른 잎이 게거품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추억의 아가리도 울컥울컥 게워 올릴 때가 있다는 것! -시 ‘來如哀反多羅 1’ 일부 시인의 시론이 떠오른다. 시라는 것은 검은 보자기 속 어둠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누르는 사진사처럼 한순간 불가능을 기록하는 행위라고 했던가.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을 헤아리는지 모르면서 끓는 납물 같은 웃음을 눈 속에 감추고서 한낮 땡볕 아스팔트 위를 뿔 없는 소처럼 걸으며 -시 ‘來如哀反多羅 6’ 일부 시인은 ‘래여애반다라’ 여섯 자를 분리하여 해석한다. 래(이곳에 와서)·여(같아지려 하다가)·애(슬픔을 맛보고)·반(맞서고 대들다가)·다(많은 일을 겪고)·라(비단처럼 펼쳐지다)’를 시집 맨 앞 ‘시인의 말’에 포함시켰다. 이 세상에 와서 누구나 겪는 삶의 수레바퀴를 끝없이 굴리어야 하는 운명적인 존재라는 것은 양지 스님이 살던 그 시절 풍요를 부르던 사람이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21세기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시인은 시공을 넘어 노래하고 있다. 향가 속 사람과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기 좋은 경주이다. 바람 좋고, 햇빛 좋은 날을 골라 영묘사지, 석장사지, 사천왕사지 폐사지 속으로 걸어 들면 운 좋게 노래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래여애반다라 래여애반다라 래여애반다라 래여애반다라…… 전인식 시인
고려역사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의민(~1196년)을 들 수 있다. 고려의 500년 역사 중에 무신정권(1170∼1270) 100여년은 암흑기이다. 혼란과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후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비난받을 사람도 있다. 경주 출신 이의민도 그중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 이선은 형산강 소금장수였고, 어머니는 옥련사 종이었다. 아버지 이선의 꿈에 어린 아들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구층탑으로 올라가는 꿈을 꾼 뒤 분명 귀한 사람이 될 거라고 예감했다 한다. 이는 신분 상승을 통해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으로도 보인다. 젊은 시절 8척 장신 거구에 힘이 장사였던 이의민은 형들과 더불어 나쁜 짓을 일삼던 깡패 건달이었다. 안찰사 김자양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다가 두 형은 죽었지만 이의민은 살아남았다. 강건한 몸을 가진 그를 김자양이 경군(京軍)으로 천거하였다. 경군으로 들어간 그는 힘이 세고 수박(手搏)을 잘해 의종의 눈에 띄었고,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등 연이어 공을 세우다 보니 상장군까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문신들에게 푸대접과 홀대를 당하던 무신들이 주도한 무신정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쫓겨난 의종을 경주 곤원사에서 술 한잔 올린 다음 허리를 꺾어 시해하고는 시체를 연못에 던져버렸다. 의종은 자신을 키워주고 총애한 왕이었지만 출세와 권력을 위해서는 이일 저일 가리지 않았다. 의종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임금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대한 기록은『고려사』와『동경잡기』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비극의 현장인 곤원사지는 현재 경주 탑동 정수장 근처로 추정하고 있다. 왕정 복귀를 꾀하는 경대승이 집권하자 위기를 감지한 이의민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경주로 내려와 은거하며 숨 고르기를 했다. 경대승이 병으로 급사하자 명종은 두경승을 견제할 목적과 혹시 난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이의민을 다시 개경으로 불러올렸다. 이후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13년간 무신정권 최고 권력을 누렸다. 1193년 청도 운문 김사미의 난과 울산 초전의 효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진압에 나선 관군이 계속 패했다. 이유는 토벌군 대장으로 나선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민란세력과 내통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민심이 고려 왕조에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이를 최대한 역이용해 최종적으로는 이의민 본인이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꿈꾸기도 했다.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씨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운다는 이른바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을 혹신하며 은근한 야망을 품었다. 이런 흔적들은『고려사』권 128 이의민 열전에 나온다.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은 먼저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나중에 발생한 이성계의 난도 무관하지 않다. 이의민의 이런 헛된 야망은 최씨 형제에 의해 하루아침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발단은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데서 비롯되었다.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을 기습하여 제거하고 그의 세 아들은 물론 경주에 기반을 둔 삼족(三族)을 멸해버리자 경주의 민심은 더욱 나빠졌다.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동경민란 즉 신라 부흥 운동이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전에 발생했던 김사미의 난과 효심의 난도 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의민은 경주지역에서 널리 믿던 두두리(豆豆里) 또는 두두을(豆豆乙)이라고도 하는 신을 믿었다. 집에서 신당을 차려두고 모실 만큼 두두리를 신봉했다. 이의민이 패망할 무렵 두두리 신이 울면서 신당을 떠났다고 한다. 두두리는 목랑(木郞), 목매(木魅)라고도 한다. 나무 도깨비란 뜻이고, 도깨비방망이란 말로 이어져 왔다. 경주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의 토속 민간신앙으로 조선 시대까지 기록이 전해졌지만, 현재는 그 어디에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두두리 신앙은 신라 진지왕과 비형랑 설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비형랑과 도깨비들이 만들었다는 ‘귀교’ 그리고 ‘길달’이라는 인물 등이『삼국유사』에 등장한다. 두두리를 제사 지낸 왕가수(王家藪) 숲을 비롯해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이 모두 월성 남쪽 지역과 형산강으로 연결되는 점이 특이하다. 이의민의 어머니가 노비로 있던 옥련사도 형산강 주변에 있는 절이다. 절은 형산 왕룡사로 불리어지다 몇 년 전부터 기원정사로 절 이름이 변경되었다. 형산 정상부에 있는 이 절은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목각 문인상과 무인상을 두고 있다. 왠지 두두리 신앙과도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경순왕과 마의태자를 모시고 있는데 형산강 물길 개척과 관계된 이야기가 전해지며, 신라부흥 운동과도 연결된다. 절에서 보면 포항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형산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사진 명소로 손색이 없다. 더군다나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절임에도 불구하고 절 지붕이 무너져 내리며 쇠락해 가고 있어 안타깝다. 절 아래 부조 마을은 바다의 해산물들을 육지로 내다 팔던 보부상들이 드나들던 큰 장터였다. 구한 말까지 장이 섰지만, 지금은 나루터와 장터도 사라지고 없다. 대신 공원을 조성하여 당시를 추억하고 있다. 반월성 뒤 남천을 거슬러 오르면 보리사가 있는 마을 이름이 갯마을이다.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니 그 옛날 형산강은 경주의 중요한 교역로였음을 알 수 있다. 인기리에 반영되었던 드라마『무신정권』은 많은 배우들이 등장했지만, 이의민 역할을 한 이덕화가 실제 주인공과 다름없었다. 그만큼 이의민은 드라마틱하고 삶이파란만장했다. 다른 무신들이 대대로 무신 집안이거나 정상적 코스를 밟아가며 권력을 잡았고 허수아비 왕을 내세워 자신의 권세와 영화를 누린 스타일이었지만 이의민은 달랐다. 일자무식 노비 출신이었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욕망을 가졌던 점이 대조적이다. 한마디로 촌놈이 주먹 하나로 고려를 휘어잡은 셈이었다.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그래도 경주사람으로 신라 부흥운동을 도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이 말은 노비 만적이 노예 해방과 평등한 세상을 부르짖으며 한 말이다. 이 말의 실제 모델이 바로 이의민이었다. 만적의 난은 천민출신 이의민의 집권과 무관하지 않다. 신분과 계급사회에 벽을 무너뜨린 자로 미화시켜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덕이 부족했고 지혜도 부족했다. 한 시대의 리더가 가져야 할 철학과 사상도 없이 모두 칼로 이룬 일들이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을 절실하게 알려준 인물이다. 하지만 경주 출신 이의민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패망한 신라를 복원하고자 민란들이 일어났고 두두리라는 고유의 토속신앙이 경주지역에서만 존재했다는 것과 형산강이 교역의 중심역할을 했다는 사실 정도는 21세기 오늘날 경주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 번쯤 뒤돌아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전인식 시인
머리가 어질어질하거나 체한 듯 가슴 갑갑한 날에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종소리를 들으러 간다. 종소리는 복잡하고 불편한 마음을 치유해주는 법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곳 가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신종은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가지고 있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맥놀이 현상으로 일어나는 공명이 사람이 가장 듣기 주파수대라고 한다. 이처럼 신종의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편안하게 해주는 한 편의 시와 같다. 그리고 신종은 소리뿐만 아니라 종합예술품이다. 거대한 종을 만든 기술이 놀랍고 연꽃 방석 위 무릎 꿇고 앉은 비천상,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과 주변의 당초문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리고 비천상과 비천상 사이에는 총 830자의 명문(銘文)이 양각되어 있다. ‘지극한 도(道)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설을 열어서 삼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러운 종을 내걸어서 일승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한다. (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是故, 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鍾, 悟一乘之圓音)’ 명문 속의 일승과 삼승에 대해서는 《묘법연화경》에 잘 나온다. 《묘법연화경》의 〈비유품〉과 〈방편품〉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원효(617~686)는 저서 《법화경 종요》에서 일승으로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역설했다. 원효 사후 백 년쯤 뒤에 종이 만들어졌으니 원효의 철학과 사상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승원음(一乘圓音)에 대해서도 《능엄경》에 이근원통(耳根圓通)이란 말이 나온다. 간단히 말해서 소리를 통해서 자기 품성을 보라는 뜻이다. 덧붙이자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살피고 듣는다는 뜻의 관세음(觀世音)도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듣는 깨달음을 중요시하고 있다. 삼대의 왕위에 걸쳐 만들어진 것도 종소리의 원력을 위함일 것이다.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아들 혜공왕 때인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걸었다 하여 봉덕사종으로 불렀다. 북천과 가까운 현 경주세무서 자리에 있던 봉덕사는 큰 홍수로 떠내려가고, 덤불 속에 무거운 종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무렵 경주 금오산에 기거하던 김시습의 시속에 당시 종의 모습이 실감나게 잘 드러나 있다. ‘절집은 무너져서 자갈밭이 되고 종은 덤불 속에 버려졌네. 주나라 문왕의 돌북과 같으니 아이들은 두드리고 소는 뿔을 가는구나’ -김시습의 시「봉덕사종」 일부 이후 1460년 영묘사로 옮겨 매달았는데 종교적 용도보다는 주로 군사적 용도로 쓰이다가 1506년 영묘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봉황대 고분 서쪽에 종각을 지어 가져왔다는 기록이 《동경잡기》에 전하고 있다. 경주 읍성의 남문과 가까운 곳에 자리하다 보니 성문을 여닫거나, 군사 소집 때 종을 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사헌을 지낸 홍직필(1776~1852)은 다음과 같은 시로종소리에 대한 감상을 시로 지었다. ‘종소리가 도성 거리에 진동하여 성안에 가득하니, 저녁과 새벽 구분하려고 때맞춰 울리네. 사랑스럽도다 금경(金莖·비팀목)이 지탱하여, 아직까지 천년 고국의 소리 울리니’ 이외에도 유의건의 「봉대모종(鳳臺暮鍾)」을 비롯한 조선의 많은 시인 묵객들이 봉황대에 걸린 신종을 노래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겨 왔다가 1975년에 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30톤에 이르는 무거운 몸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이사를 한 세계 최고의 종의 아이러니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이사 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안도감 한편에 너무 튼튼하게 시멘트로 지은 집이라 맘에 걸린다. 한옥이 잘 어울리는데 양옥집에 살고 있다. 최고에 맞는 아름다운 집 하나 지어주었으면 어떨까? 한편, 어린아이를 시주하여 ‘에밀레, 에밀레’ 하는 종소리가 난다는 인신 공양의 설화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는 19세기까지 어느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민담채집 과정에서 채록된 이야기라는 게 주된 설명이다. 실제 성분조사에서도 구리와 주석이 전부였으며 뼈의 성분인 인은 제로였다. 비천상 사이의 명문 내용으로 보아 종소리는 부처 목소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도올 김용옥은 에밀레종의 인신 공양과 관련해서 도올다운 특유의 시원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야이 미친년놈들아! 어느 얼빠진 년이 그래 지아들을 부처님 잡수라고 펄펄 끓는 황동의 불구덩이에 집어넣느냐 말이다. 과연 그것이 신앙인가? 과연 그것이 예술인가? 과연 그것이 호국인가? 야이 얼빠진 놈들아! 에밀레 에밀레 좋아하시네!’ -도올 김용옥의 저서 <나는 불교 이렇게 본다> 가운데 일부 이 정도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종은 만든 취지와 불살생을 기본으로 하는 이념으로 보아 일어날 수 없는 일임에 전적으로 공감이 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에밀레종 이야기는 예술적 영감과 상상력을 가져다주었으며 시와 소설, 희곡 등 문학으로 녹아들어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고 영화와 연극 그리고 대중가요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최인수 교수는 외국 생활 중에 어떤 바람결에 들려온 에밀레종 소리에 영감을 받아 작품 ‘먼 곳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만들었는데 소리가 조각 예술로 재탄생 된 것이다. ‘세상에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어 이 종소리로 대신 한다’ 멋지고 맛깔스럽게 함축된 이 문장은 사학가 최순우 선생이 제자들에게 한 말이기도 하고, 문광 스님의 글에서도 등장한다. ‘우주 그 자체요 핵심(核心)이라는 ‘도(道)’가 무엇인지는 속인이 헤아려 알지 못할 바요, 다만 어렴풋이 현상이 보이는 외형만 바라볼 뿐 내재하는 근원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으련만 신종(神鐘)이 한번 울리면 어리석은 중생들로 하여 도를 깨우치는 심안(心眼)을 뜨게 하여 마음과 눈과 귀를 밝혀 주는 듯하다. 누구나 한 번 종소리를 귀에 담으라. 그대를 위하여 영원한 복음이 되리라’ 미술사학가 소불 정양모의 글 <한국의 종> 중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그는 경주를 제대로 알려면 에밀레종 소리를 들어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정식 명칭은 성덕대왕신종이지만 에밀레종으로 부르고 싶다. 꼬맹이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으며 이미 입에 베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고향 친구 만나면 이름보다 별명이 먼저 생각나듯 정감이 갈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사방백리를 간다는 에밀레종 소리가 오대양 육대주로 울려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일승원음(一乘圓音)의 둥근 종소리는 바로 붓다의 말씀이기도 하기에. 전인식 시인
경주 남산은 어디를 가도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용장 계곡이 가장 좋다. 특히 비 온 뒤 용장골은 환상적이다. 청량한 물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흘러내리며 귀를 즐겁게 한다. 용장사지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는 저 멀리 영남알프스 운무는 선계(仙界)와 다름없다. 그리고 솔가지 스치는 바람 소리는 매월당 선생의 시를 읊어주는 듯하다. 남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금오산과 용장사는 조선팔도를 떠돌던 김시습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1463년 29살 늦가을쯤 김시습은 경주에 당도했다.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며 우리나라 소설의 효시가 된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썼다. 『금오신화』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일면을 엿보는 것 같다. 대표작 『금오신화』가 유명하다 보니 그의 다른 작품집들은 주목을 덜 받는 느낌이다. 삼천리강산을 유람하며 쓴 기행문인 4대 유록의 평가와 언급은 부족하다. 경주로 오기 전 김시습은 승려 차림으로 관서지방과 관동지방을 여행하고 「유관서록」과 「유관동록」을 엮었다. 그리고 호남지역을 유랑한 다음 지리산 넘어 함양과 해인사를 거쳐 이곳 용장사지에서 머물면서 「유호남록」을 마무리했다. 그가 평생 운수납자로 떠돈 이유로는 가정사와 가치관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여윈 뒤 부친의 재혼, 외가살이, 평탄하지 못한 가정생활과 계유정란, 세조의 왕위찬탈, 사육신 처형, 단종유배 등 큼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느낀 무력감과 자괴감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경주에서 머문 7년여 동안 그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텅 빈 궁궐터, 잡초 가득한 절 마당, 무너져 내린 탑과 전각, 훼손된 불상들, 그 옛날의 영화가 사라진 폐도 경주의 모습과 본인의 마음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윽한 고도의 분위기가 좋았던 걸까? 1583년 편찬된 문집 『매월당집』 속 「유금오록」을 통해 경주의 모습과 그의 심사도 엿볼 수 있다. 「유금오록」에는 106제, 146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경주의 풍물, 생활과 관련된 시가 100수 가량 된다. 그는 경주 곳곳의 유적지와 사찰들을 빠짐없이 돌아보며 시를 남겼다. 분황사에서는 본인처럼 아웃사이더인 원효를 추모하며 지은 시 ‘무쟁비(無諍碑)’는 존경의 마음이 묻어나 있다. 백률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간공동체인 향도가 신라에서 조선 중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에 없는 것도 상당히 많다. 반월성 터에 있었다는 연회 장소 월성당(月城堂), 오릉 북쪽에 있었다는 남정(南亭)이라는 정자, 사계화라는 꽃을 노래했던 알천 북쪽에 있었던 동천사(東川寺), 그리고 본인의 22대조이자 강릉 김씨 시조로 알천 홍수로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의 집터 등은 시에는 있지만, 현재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곳들이다. 김시습은 매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스스로 ‘매월당’이라는 별호를 짓고, 당호로 삼았다. 매화를 찾아 나서는 탐매(探梅)에 관한 시만 14수나 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직접 매화를 심으며 지은 ‘종매(種梅’)라는 시도 남겼다. 매화뿐만 아니다. 거처 주변에 장미도 심고, 소나무와 잣나무도 심었다. 죽순을 키우고 대나무 울타리도 치며 경내 한쪽에 차나무도 재배했다. 교유하던 서거정에게 작설차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가 즐긴 ‘초암차’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차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그는 경주에 머무는 동안 두 번 한양을 다녀왔다. 효령대군 추천으로, 법화경언해 사업과 원각사 낙성식 참석으로 한양에 갔는데 꿈속에서 보일 만큼 경주 금오산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꿈에 산방에 이르다’ (夢到山房) 라는 부제가 달린 시다. 어젯밤에 금오산 꿈을 꾸었는데 산새들이 울며 돌아오라 재촉하더라. 산방에는 책들이 가지런하였지 너무도 기뻐하다가 그 끝에 슬프더라. 또한 ‘옛산이 그립다(憶故山)’를 시를 보면, 한양에서 나고 자란 그가 금오산을 고향의 옛 동산으로 여길 정도로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에 발 멈춘 지 서너 해건만 여전히 꿈속에선 옛 산으로 돌아가네. 금오산 천 겹 봉우리에 구름 걷히고 파도 그친 바다에 한 조각 배 떠 있으리. 매화 꽃봉오리 눈앞에 삼삼하고 창맡 파초의 빗방울 소리 들리는 듯. 봄 들어 죽순과 고비 우쑥 자란 때 용당 영령(금오산 산신령)은 나 돌아오길 기다리리. 잘 차려진 서울 음식보다는 고사리와 죽순, 송이버섯 같은 금오산에서 나는 산나물들을 그리워했다. 다음 시를 읽으면 책 속에서 송이 향이 새어 나오는 듯도 하다. 남산 송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온 뒤 송이꽃이 덥수룩 젖었더니 갓이 막 올라오매 향기가 진동하네 -중략- 썰거나 국 끓여도 물리지 아니하니 가을에 쌓아두어 겨울을 대비하리 -시‘송이버섯을 따다’ 중 일부 경주 남산 달 밝은 밤에 「초사(楚辭)」와 「이소경(離騷經)」을 읽으며 불우한 처지의 굴원(屈原)과 자신의 심정을 비추어 보았으리라. 자기모순과 자기분열의 사회 부적응자, 이방인, 광인, 영원한 자유인 김시습에게 경주와 금오산은 젊은 날의 방랑과 방황으로 점철된 피 뜨겁던 한 시절이 정리 정돈된 시간이었다. 한 겹 성숙한 영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금오신화』와 같은 작품이 태어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경주와 금오산은 글에 나오는 그대로 정신적 고향이었다. 21세기의 우리가 「유금오록」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15세기 당시 경주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일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한 시대를 살다간 천재의 눈에 비친 경주를 통해 우리는 눈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분황사는 작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분황사는 큰 절이다. 분황사가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 콘텐츠의 질적, 양적 크기로 보면 우리나라 단일 사찰 중 으뜸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분황사를 방문하여 국보 30호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절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10분이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분황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다 들으려면 석 달 열흘도 모자랄 것이다. 원효와 관련된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분황사는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라는 뜻으로 선덕여왕 3년(634년)에 건립되었다. 당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탑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모전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신라의 탑이다. 신라 불교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자장율사와 우리에게 익숙한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우리나라 최고의 철학가이며 사상가이자 최고의 저술가 원효가 주석하면서 「화엄경소」 외 수십 권의 저서를 집필하던 곳이다. 그의 철학과 사상은 중국과 일본으로 퍼져나갔으며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 더 인정받았다. 그를 ‘해동보살’로 칭하며 보살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곳에서 한창 저술 활동을 펼치다가 붓을 내던지고 저잣거리로 뛰쳐나갔다. 머리 기른 소성 거사가 되어 무애춤을 추며 ‘나에게 도끼자루를 달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시대의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혈사에서 원효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은 원효 유해를 부수어 만든 소상을 분황사에 모셨는데 설총의 예배에 고개를 뒤로 돌린 소상은 고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무렵까지 존재했다고 하나 지금은 소재를 알 수가 없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분황사에서 원효 조각상을 보고 “이제 계림의 옛 절에서/ 마치 살아 있는 원효를 뵙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今者鷄林古寺 幸膽如在之容)”는 시,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쓸데없이’ 또는 ‘쓸데없다’ 말은 설총의 빗자루질과 관련된 원효와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는바, 일화의 탄생 배경이 된 곳이 분황사 절 마당이다. 광덕과 염장 두 사람을 성불로 이끈 광덕의 처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광덕과 살았어도 잠자리를 하지 않은 광덕의 처는 분황사 여종으로 관음보살의 19 응신의 한 분이었다는 이야기의 배경에 분황사가 있고 원효가 등장하기도 한다. 신라의 화가 솔거가 그렸다는 분황사 천수대비 관음보살상 벽화는 신비로운 영험을 가져다주어 신의 화가로 불린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희명의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눈이 멀자 분황사 천수대비 앞에서 눈먼 자식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더니 결국 눈을 떴다는 희명의 노래 「도천수대비가」가 향가로 전해지고 있다. 경덕왕 때 구리 30 만근으로 세운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지금 전하는 것은 조선 후기에 규모를 많이 축소하여 세운 것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유일한 금동입상으로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분황사에는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으로 부르는 우물이 있는데 세 마리 호국용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때 당나라 사신이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몰래 가져가려던 것을 경산 하양까지 쫓아가서 빼앗은 후 도로 우물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우물은 불교의 핵심 기본 교리인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형의 형태로 신라 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우물이다. 고려 숙종 때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종 때는 화쟁국사비(和靜國師碑)를 경내에 세웠지만 비는 멸실이 되고 현재 비각 받침대만 남아있다. 금오산 용장사에 거처를 정한 매월당 김시습은 폐허의 고도 경주 유적지들을 돌아보며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분황사에 와서 원효를 노래한 「무쟁비(無諍碑)」와 잡초가 자라는 쓸쓸함을 노래한 「분황사 석탑」 두 편의 시를 『유금오록』에 남겼다. 추사 김정희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낸 기쁨으로 이듬해인 1817년 경주에 왔다. 암곡 동 무장사지에서 비문과 배반동 들판에서 문무왕 비석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리고는 분황사에서 화쟁국사 비부를 찾아내어 빗돌 받침대에 ‘此和靜國師之碑趺(차화정국사지비부)’라는 글씨를 새겨 넣기도 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 스님도 경주고 재학시절 인근 분황사를 수시로 찾았고, 은사인 도문스님과의 선문답에서 크게 충격을 받고 출가를 결심한 곳이기도 하다.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스님은 그 옛날 원효의 향기 가득한 분황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몽고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되고 지금 같은 작은 규모로 다시 지어졌다. 그런가 하면 경내 외곽 우물에는 훼손된 불상들이 여럿 발견된 숭유억불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아픔이 많은 곳이다. 최근 발굴결과 3만 평 가까운 대가람으로 밝혀졌지만,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복원도 현실적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다행히 매년 봄에는 원효제향대제(음력 3월 29일)와 가을에는 원효예술제(10월 2째주) 등 원효 성사를 기리는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다. 분황사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콘텐츠 활용을 통한 계승과 발전으로 국제적 명소가 되었으면 한다. 당간지주가 있는 분황사 앞마당은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봄에는 청보리, 가을에는 코스모스 등 넓은 들판에 꽃 장엄을 이루고 있다. 천년 세월 건너 전해지는 신묘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절 앞마당에 온갖 꽃으로 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원효와 설총, 엄장과 광덕의 성불이야기, 눈을 뜬 희명의 간절한 노래, 영험한 솔거의 그림, 그리고 추사와 매월당 같은 이 땅의 천재들이 분황사를 다녀간 이유와 숨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가득 담고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분황사는 결코 작은 절이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