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훈을 잘 살펴보면 경주최부자 가문이 세계의 많은 부자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다른 다섯 가지의 가르침도 물론 남다른 면이 있지만 이것은 어지간한 부자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굳이 벼슬을 살지 않아도 경제력이 곧 권력이 되고 자선이 부의 또 다른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느리 삼 년 무명옷을 입게 하라는 가르침은 확실히 눈에 띄는 덕목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겸양을 뜻하는 듯하지만 그보다 공감이란 측면에 더 무게를 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감이란 아랫 사람들과의 공감을 뜻한다. ‘시집온 며느리에게 무명옷을 입게 하라’는 가훈은 5대 최승렬 공 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최승렬 공의 부인은 당시 청렴하기로 유명한 토포사 집안에서 시집오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토포사는 포도청이나 지방관아에서 도둑이나 산적을 잡아들이는 무관의 직명이다. 청렴한 토포사 집안의 따님이었으니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따님이 부잣집에 시집왔으니 생활 수준이나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특히 자신은 귀천을 알아서 근신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윗사람들이나 아래로 들어오는 집안 며느리들은 대체로 명문가의 여식들이어서 귀천(貴賤)을 잘 모르는 공주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며느리들에게 만석지기 부잣집의 안살림을 맡기려면 무언가 특별한 가르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무명옷 입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무명옷을 입는다는 것은 아랫사람의 고달픔을 이해하는 것, 가복들에게도 귀한 무명옷을 입힌 최부자 인심 최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렸을 때 본 집안의 가복들도 무명옷을 입었다고 한다. 심지어 신발도 가복들이 신는 짚신을 신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부자댁 여성들은 집안의 중대사가 있으면 손수 가복들을 지휘해 집안일도 함께 했다고 증언하셨다. 다시 말해 며느리가 삼 년 동안 무명옷을 입는다는 것은 옷만 무명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삼 년 동안은 집안일을 함께 하면서 집안 형편도 알고 노동의 고달픔과 아랫사람들의 노고를 알게 함으로써 귀하고 천한 것을 제대로 깨닫게 한 것이다. 이런 경험은 최염 선생님께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염 선생님은 대학시절 경주 남천 건너편 사과밭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손수 밭을 갈고 나무를 심고 심지어는 똥물까지 퍼서 거름으로 주는 일을 한 해 내내 한 적이 있다고 회고하셨다. 경주 최부자댁 귀한 종손이 똥지게를 져 날랐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이렇듯 최부자댁은 후손들로 하여금 가복들이나 소작인들의 고충을 함께 겪게 함으로써 좀 더 야물고 겸손한 부자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친 것이다. 이 가훈에서 ‘무명옷’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별도로 생각할 만하다. 무명은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서 지은 옷감이다. 여름에는 땀 흡수를 잘 하고 겨울에는 보온성이 가장 뛰어난 옷감이다. 부잣집에서는 비단옷을 즐겨 입었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속옷이나 일상복에서 무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또 조선에 상평통보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가장 중요한 화폐 대용품으로 쓰일 만큼 무명의 가치가 높았다. 다시 말해 가복들에게 일상적으로 무명옷을 입혔다는 것은 가복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좋았다는 뜻도 될 수 있다. 무명은 19세기 이후 외국에서 기계식 무명이 들어오고 특히 일제강점기 전후로 일본과 교역이 늘어나면서 일본산 무명인 ‘광목’이 들어오면서 무명의 가격과 질이 함께 떨어지는 무명 수난 시대를 겪는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비단(명주) 다음 가는 최고의 옷감으로 귀한 대접을 받던 옷감임에 틀림없다. 최부자댁에서는 아랫사람들에게 무명 옷을 입힐 만큼 기본적으로 인심이 두터웠고 그 무명옷을 며느리들이 함께 입도록 함으로써 아랫 사람들과의 교감도 넓혔던 것이다. 흉년에 땅 사지 않고 만석 이상 재산을 늘이지 않은 최부자, 카네기 100년 적선 뛰어넘어 ‘흉년에 땅 사지 말라’는 가훈 역시 경주최부자만의 철학이 돋보이는 가르침이다. 이 가훈은 명화적의 난을 몸소 경험한 최국선 공이나 재산분배법을 만든 최의기 공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는 것은 재산증식이란 면에서는 얼핏 우둔하게 보인다. 농경사회에서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많은 땅이 필요하다. 그러나 땅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만약 더 많은 땅을 가지려면 누군가의 희생을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 기회가 사실은 흉년 들 때였다. 이를테면 흉년이 들면 큰 부자들은 축적된 곡식이 있어서 타격이 덜 하지만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땅을 팔아서라도 곡식을 사야 한다. 당연히 땅값이 싸질 것이고 곡식은 귀할 것이다. 이때 부자들이 귀한 곡식으로 값 떨어진 땅을 사서 늘인다. 그야말로 빈익빈 부익부가 되는 것이다. 옛말에 ‘흰죽논’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죽 한 그릇에 한 마지기의 논을 판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나 흉년에 땅을 사는 것은 땅과 함께 원망과 원성을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최부자댁은 대대로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제하고 과객맞이에 소홀함이 없도록 배려하며 인심을 쌓아왔다. 그러니 남들이 굶어 죽는 어려운 시기를 악용해 값싸게 땅 사는 일을 진정으로 부도덕하고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요즘은 적대적 M&A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된다. 재벌들의 재산 형성과정을 보면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탈세하거나 정치권과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거나 카르텔을 통해 가격을 담합하거나 나쁜 재료를 써서 눈을 속이거나 하는 방법들이 횡행한다. 땅을 주식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주식은 값이 떨어질 때 사고 값이 올라갈 때 팔아야 수익성이 커진다. 그런데 가격이 떨어지는 시기는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있거나 기업이 어려울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농사로 치면 흉년인 것이다. 경주최부자는 이럴 때 주식을 사지 말라고 가르친 셈이니 그 철학이 가히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부자들은 너도 나도 흉년에 땅을 사서 더욱 큰 부자가 되곤 했다. 농경사회에서 이것보다 쉬운 재산증식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모으는 땅은 반드시 원망과 한숨이 서려 있게 마련이다. 땅을 판 입장에서는 당장 연명하기 위한 몇 자루 쌀이나 곡식과 가족의 생명이 걸린 땅을 바꾸어야 했을 것이니 그 애환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렇게 땅을 파는 것은 빼앗긴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고 땅을 사간 부자에게 고스란히 그 원망이 맺힐 것이다. 이런 가훈은 자연스럽게 ‘만석 이상 재산을 늘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연결된다. 이 가르침은 만석이라는 상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만석은 농경사회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재산이지만 굳이 따지면 조선에서 손꼽을 만한 부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경주만 하더라도 만석지기 부자가 몇이나 되었고 경산에는 경주최부자보다 몇 배 더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만석을 뛰어넘어 몇 만 석지기 부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쟁쟁한 부잣집 중에서 경주최부자댁 만큼 존경받은 부자는 아무도 없었다. 흉년에 땅을 사거나 과객맞이를 덜 하거나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경주최부자 역시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주최부자는 만석의 땅을 유지하면서 조선 제일의 부자가 아닌 조선 제일의 가치를 실현한 부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최부자댁의 가훈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나눔과 상생, 소통과 공유다. 그렇기 때문에 부를 쌓으면서도 원망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만인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부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자선재단인 카네기 가문이 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쌓았던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엄청난 자산을 쏟아부으면서도 그 나쁜 이미지를 씻는데 무려 100년이 걸렸다고 알려져 있다. 카네기 가문이 미리부터 경주최부자식의 나눔과 상생을 알았다면 100년의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도 명문 부자가문으로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가훈들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최대의 가훈 ‘사방 백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전조일 뿐이다.
최부자댁 육훈 중에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못하게 단속’한 것이다. 세상의 많은 부자들은 부가 생기면 대부분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곤 했다. 부를 이루는 것도 쉽지 않지만 권력을 가지는 것은 더 어렵고 일단 권력을 잡으면 부가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 일반적인 세상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세계사에서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피렌체의 대표적인 부자이자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만 해도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무려 4명의 교황을 배출하며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에 맹위를 떨쳤다. 우리가 아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예술가들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예술가들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고 지동설을 주장하고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후원하고 군주론을 써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던 마키아벨리가 목숨 걸고 잘 보이고자 노력했던 가문 역시 메디치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그 어떤 나라의 왕족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명성을 가졌다. 4명의 교황을 만든 피렌체 메디치 가문, 진시황을 만든 거상 여불위, 과연 부와 권력이 함께 한 결과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춘추전국 시대를 통털어 가장 많은 부를 이룬 거상 여불위는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잡기 위해 조나라에 와 있던 진나라 서자를 도와 왕위 계승자로 만들었고 마침내 그 가계에서 왕을 세우는 공을 세움으로써 왕을 제외한 진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왕에게 바쳐 훗날 자신의 아들인 영정이 진시황제가 되고 자신은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이런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고 넘친다. 그러니 부귀(富貴)라는 말이 자연히 생긴 것인데 여기서 귀는 다름 아닌 권력이다. 그런데 왜 최부자댁에서는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을까? 심지어 진사는 벼슬도 아닌데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최염 선생님은 부(富)와 귀(貴)를 다 가지는 것은 과욕이라 여긴 조상님들의 관념이 이런 교훈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성리학적 가치가 존중되던 조선 중후기에는 청빈낙도 혹은 안빈낙도가 선비의 큰 자랑으로 여겨지던 때다. 그런 시대, 관리가 되려면 청빈해야 하고 부자가 되려면 아예 벼슬을 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겼음직하다는 말씀이었다. 최염 선생님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나름대로 또 다른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최부자댁이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가르친 것은 2대 최동량 공에서 조금씩 형성되어 3대 최국선 공에서 자라 4대 최의기 공에서 매듭지어졌을 것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최동량 공이 벼슬에 염증을 느꼈을 법한 이유는 아버지인 정무공이나 작은 아버지 계종공이 무공이 많았음에도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한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동량 공 자신은 용궁(지금의 예천군)현감을 지낸 사람이다. 현감이면 종6품으로 지방 수령 중에서는 가장 말직이다. 당연히 녹봉도 적고 영향력도 작다.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면 밥 먹고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동량 공이 낙향한 이유도 청백리인 부친의 명성을 지키려면 일찍 낙향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을 마련하는 것이 급했을 것이다. 최부자댁 내력에 따르면 잠업(蠶業)을 집안에 권장한 것으로 전해져오는데 이로써 미관말직을 전전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최국선 공은 할아버지 정무공 덕분에 음직(蔭職)으로 사옹원 참봉으로 서울살이한 분이다. 그러나 쥐꼬리만한 녹봉으로 살기 힘든다는 것을 깨닫고 전격 낙향해 부를 이룬 인물이다. 당연히 벼슬살이가 고생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사옹원이면 궁중의 음식을 관장하던 곳으로 음식만 관장한 것이 아니고 궁중의 식자재와 관련한 살림살이 도구를 다 관리해야 했다. 만약 시쳇말로 납품비리를 저질렀다면 만만치 않은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가문의 명예를 중시한 것이 틀림없고 이때 이미 실사구시적 학문이 한양에는 활발하게 논의되는 때였으니 그런 와중에 이앙법을 공부한 것이 틀림없다. 마침 광해군 이후 전란으로 황폐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면 소유권과 상속권을 인정해주는 제도도 안착되어 있었다. 경주로 돌아와 획기적인 농사법과 파격적인 분배법으로 부를 이룬 최국선 공은 어지간한 벼슬살이가 조금도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9명 진사 내면서도 벼슬 살지 않은 최부자댁, 당쟁과 사화 피하며 과객맞이로 꾸준히 인심 쌓으며 정보 얻어!! 숙종 대를 살았던 최의기 공 당시에는 허무맹랑한 예송논쟁으로 중앙권력들에 수시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이런 풍파에는 권력은 하루아침에 절단나고 권력이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서는 부 역시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런 미증유에서 살아남으려면 권력투쟁과 멀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벼슬을 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최의기 공은 벼슬을 살지 않았다. 대신 앞 장에서 밝혔듯 스스로 이룬 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과객맞이다. 흉흉한 세파 속에서 부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중앙이나 지방의 권력들과 교류하고 많은 과객들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들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5대 최승렬 공 역시 벼슬을 살지 않는다. 그런데 최승렬 공은 ‘통덕랑’이라는 직급을 받았다. 통덕랑은 벼슬 명칭이 아닌 정5품의 직급을 일컫는 명칭이다. 최근으로 치면 사무관, 서기관, 이사관 식인데 그중 5급 사무관 정도 될 것이다. 이후로도 최부자댁에서 구체적으로 벼슬살이한 후손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은 엄연히 양반만의 법도가 있었다. 만약 3대가 넘도록 과거를 보지 않으면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다못해 3대에 한 명은 과거에 급제해 양반으로서의 체통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양반은 ‘잠반’이라고 해서 비아냥거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때문에 최부자댁도 벼슬은 살지 않을망정 부자로서의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과거를 보았다. 그래서 최승렬 공 이후 6대 최종률 공이 생원과에 합격한 이후 7대 최언경 공만 과거를 보지 않았을 뿐, 과거가 사라진 12대 최준 선생 이전까지, 전 세대 가주들이 모두 소과에 합격해 모두 9명의 후손이 생원 혹은 진사가 되었다. 생원이나 진사가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벼슬살이할 기본을 갖춘 것으로 인정되었다. 특히 생원이나 진사가 되고서도 대과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학식과 소양을 갖추었으면서도 벼슬을 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은근히 우러러보는 경향도 있었다. 특히 당쟁이 심해지고 외척과 관련한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부터는 벼슬하는 것을 멸시하는 풍습도 생겼다. 조선시대 후기로 오면서 최부자댁이 더 큰 명성을 얻은 이면에는 이렇게 벼슬을 초개같이 생각한 최부자댁만의 고집이 당쟁이나 사화 등으로 얼룩진 조선의 양반사회에 좋은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경주 최부자가문이 앞에서 말한 메디치 가문보다 훨씬 훌륭한 사례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벼슬을 살지 않은 최부자댁은 독립운동과 대학설립으로 그 부를 위대하게 끝냈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으로 존재하는 동안, 최준 선생이 세운 대구대학이 영남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 순간까지 경주최부자는 살아 있는 셈이다. 그에 비해 메디치 가문은 끝내 7대 200년 만에 그 명성을 접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에 흡수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문의 명맥을 스스로 끊은 것이다. 부와 권력을 양손에 거머쥐고 진제국을 호령했던 여불위는 당대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부와 권력, 부귀를 함께 탐한 부자들의 끝이 어떻게 끝났는지 최부자댁 선현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음이 틀림없다.
경주최부자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최부자 가훈이다. 흔히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을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많은 독자들이 육훈을 더 기억하실 것이다. 굳이 언급하면 1.사방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2.진사 이상 벼슬하지 마라 3.흉년에 땅 사지 마라 4.과객을 후히 대접하라 5.만석이상 재산을 불리지 마라 6. 며느리 3년 무명옷을 입혀라 등이다. 3268명 아너소사이어티, 동반성장위원회의 정신적 지주가 된 경주최부자 정신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1612호에서 ‘사랑의 열매’와 관련해 이 기획란에 쓴 기사를 잠시 떠올려 보겠다. 사랑의 열매는 기사에서 썼다시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는 문화를 장려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준정부 기관이다. 그런데 기자는 이 사랑의 열매 1층 로비에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사진이 크게 걸려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이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나라 기부와 자선, 상생의 정신을 대표하는 곳이 경주최부자댁이란 사실을 증명한다고 믿은 것이다. 취재 당시 사랑의 열매 2층 1억 이상 기부자인 ‘아너소사어티 라운지’에는 3268명의 명단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기부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경주최부자가 중시한 정신의 일부가 스며 있을 것이다. 내가 쓴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 책에는 2009년부터 2010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회장의 일화가 있다. 이분이 2012년 경주 힐튼 호텔에서 열린 경주최부자 학술 심포지엄에 특강 차 참석했다가 행사 주최측에서 특강비를 지급하려 했더니 이 사례비를 한사코 거절하면서 최부자댁 종손인 최염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 제가 이번 경주최부자 심포지엄에 특강하기 위해 육훈을 공부하면서 배운 게 훨씬 많은데 그런 제가 어찌 특강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정운찬 회장은 특강비를 끝내 사양했고 그 후 동반성장위원회 관련 행사를 할 때면 자주 경주최부자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기업 간 사회적 갈등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기 위해 합의를 도출하고 함께 성장하는 문화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으로 설립된 단체다. 그 수장이었던 정운찬 총리가 동반성장 위원회의 성장 해법을 경주최부자의 육훈에서 찾았다고 하는 것 역시 사랑의 열매가 중시한 경주최부자 정신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경주최부자댁의 교훈에 대한 기업들과 방송 언론, 각 방면 학자들의 관심이 해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방송과 언론에서 다룬 경주최부자 관련 프로그램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학자들이 최부자댁을 주제로 낸 연구논문과 책도 늘어나고 있다. 내가 쓴, 경주최부자댁의 전범이라 할 만한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를 인용한 사례도 많아지는데 그 이전에는 이런 내용으로 다룬 책이 없었기에 좋은 모범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나친 허구로 인해 일찍 방송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경주최부자댁 시조격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과 실제 부자로 입신하기 시작한 최국선 공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명가’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공통점은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근간이 육훈(六訓)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육훈이 어느 시기에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최부자댁 종가에서 정식으로 전해져 오는 게 없다. 나는 이점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보기로 하고 하나씩 육훈이 두른 베일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2대 최동량 공이 가거십훈(家居十訓)을 남기신 것과 3대 최국선 공이 명화적의 난을 겪은 후 나눔을 시작했다는 집안의 내력으로 미루어 육훈은 최국선 공 이후에 하나씩 더해졌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려 보았다. 나는 그 과정을 소설형식으로 하나씩 꿰맞추어 놓았는데 출간하게 되면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것이다. 최부자댁 기록과 내려온 구전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부를 일으킨 최국선 공은 사옹원 참봉 벼슬을 버리고 낙향,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의 기본을 마련했다. 여기에 이앙법, 즉 모내기를 도입함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부를 이루었을 때 뜻하지 않게 명화적을 만나 곡식을 빼앗긴 이후에는 크게 깨들은 바가 있어서 이때 장리쌀 내준 장부를 태워 버리고 단갈림, 다시 말해서 소출에 대한 반분작을 시작한다. 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스스로 구휼미를 내어 백성들을 구제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최국선 공은 부자는 되었지만 천석 정도의 부를 이룬 것으로 집안에서는 추측했다. 이것은 최염 선생님의 말씀이니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늘 들어온 선생님의 말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만석꾼이 된 분은 4대 최의기 공으로 짐작된다. 최의기 공은 최국선 공의 둘째 아들로 이때는 재산 상속이 장자(큰아들) 중심이 아니고 여식까지 포함해 자식들이 균등 상속받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최국선 공의 재산은 자식들에게 분할된 결과 누구도 두각을 드러낸 부자가 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최의기 공이 다시 재산을 모아 만석꾼 소리를 되찾았으니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최염 선생님은 최의기 공 역시 2~3000석 정도의 재산을 이룬 것으로 짐작했다. 구체적인 수치 개념이 부족하던 시대, 천석꾼이나 만석꾼은 재산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의 의미가 있고 당연히 그 기준에는 과장이 섞였을 것이다. 그러니 2~300석 정도만 되어도 천석꾼으로 흔치 않은 부자, 2~3000석을 이루면 만석꾼으로 과대포장되었을 법하다. 육훈의 출발은 최의기 공! 과객 맞이·사회 환원·가용으로 삼분, 구체적인 재산 사용법 시작 그런가 하면 최의기 공은 재산을 사용하는 방법들을 구체화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즉 매년 수확하는 곡식 중 삼 분의 일은 빈민구제를 위해서 쓰고 삼 분의 일은 과객 맞이에 쓰고 나머지는 가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삼분법은 육훈과도 사뭇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육훈 중에 만석 이상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말은 그 초과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말이다. 어쩌면 최의기 공은 벼슬하지 못한 대신 덕을 쌓는 한편 중앙이나 지방 관리들과의 교분을 쌓아 집안의 입지를 다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중앙 관원이나 지방의 관원들이 공무로 경주를 들리거나 지나칠 경우에는 경주 부에서 지은 정식 객사인 동경관(東京館)이 있어서 이곳에서 묵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관원도 아니고 공무로 여행 오는 것도 아닌 중앙의 관료 출신 양반들이나 세도께나 있는 인사들이 경주로 올 경우 마음 편히 묵을 수 있는 곳이 최부자댁 같은 부잣집 이외에 별달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과객 맞이는 비단 최의기 공이 아니라도 조선 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지역 유지들은 자연스럽게 감당해야 할 일종의 의무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편, 과객맞이를 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도 있다. 옛날에는 요즘 같은 숙박업이 전무할 때이므로 부자들뿐만 아니라 여염집에서도 과객맞이가 일상적이던 시절이었다. 길을 가다가 아무집이나 들러서 ‘이리 오너라’하고 들어가 재워주기를 청하면 그를 굳이 내쫓지 않았던 것이 우리 선조들의 미풍양속이었다. 그런 시대에 부자로 사는 사람들은 과객맞이를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정무공 이후 최동량 공은 현감 벼슬을 지냈고 최국선 공은 음직으로 찬봉을 지냈지만 최의기 공은 벼슬을 살지 않았고 과거에 급제도 하지 못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공부보다 재산을 늘리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나 최부자댁 과객 맞이에는 다른 부자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마지막 경주최부자인 최준 선생 대의 경주에는 이른바 4대 부자가 있었다. 정부자, 배부자, 이부자 그리고 최부자가 그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주사람들 말에 ‘3대부자를 모두 더해도 최부자와 안 바꾼다’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부자들에 비해 최부자댁이 받는 존경의 정도나 유명세가 다른 부자들보다 각별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12대의 시간이 쌓은 전국의 인맥, 요즘 표현으로 네트워크의 다양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경주최부자가 가치있게 조명되는 이유는 매우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눔과 상생정신이 대를 이어 꿋꿋하게 전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경주최부자의 정신적 지주인 최진립 장군으로부터 따져도 12대, 실제로 부를 이룬 최국선 공으로부터 따지면 10대를 이어오며 나눔을 실천해 옴으로써 모름지기 대한민국 나눔문화의 정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주최부자 정신을 전면에 내세워 현대의 나눔문화를 이끄는 곳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곳이 바로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로(정동)에 자리잡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회장 김병준)다. 아너소사이어티 라운지에 동창회 연 한주식 회장 ‘친근한 동문들에게 나눔 정신 알리기 위해!’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의 열매 총본부인 중앙회 1층 로비에 경주최부자댁 사랑채가 재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경주최부자댁 사랑채에 걸린 둔차(鈍次), 대우(大愚), 용암우택 등의 현판 글씨까지 뚜렷하게 나와 있다. 사랑의 열매가 우리나라 나눔문화의 저변을 관통하는 정신으로 경주최부자의 정신을 모토로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사랑의 열매 2층 아너소사이어티 라운지에서 지난 24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경주 사방초 서울 동창회 모임이 열린 것이다. 아너소사이어티 라운지는 말 그대로 아너소사이어티 회원(1억 이상 고액 기부자들)에 한해 공개되는 특별한 곳인데 경주 사방초 동창회가 열린 것에는 또 다른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이날 행사는 사랑의 열매 중요 후원자인 지산그룹 한주식 회장의 부탁으로 열린 행사였다. 한주식 회장은 사랑의 열매 940호 아너소사이어티이며 가족인 공봉애 여사, 아들인 한재승 씨, 딸인 한재현 씨 등 가족 모두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등재된 ‘경기도 1호 가족 아너소사이어티’다. 특히 한 회장은 지난 5월에는 경기 사랑의열매에 10억원을 기부, 15번째 ‘한국형기부자맞춤기금’ 가입자가 되는 등 지금까지 사랑의 열매에만 20억원 넘는 기부를 한 최대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한주식 회장은 자신이 오랜 기간 교유해 온 가장 친근하고 편안한 고향 동문들에게 나눔 정신과 상생 문화를 전하고 싶다는 뜻에서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사방초 동창들은 아너소사이어티 라운지에서 아너소사이어티에 대한 소개와 의미를 들은 후 나눔과 관련한 한주식 회장의 인사말을 들은 후 실제 행사는 근처 참치집으로 옮겨 진행했다. 한주식 회장은 이날 행사 전부터 로비에 마련된 경주최부자 댁 사랑채를 언급하며 사랑의 열매가 경주최부자댁 정신을 모토로 삼은 것은 매우 적절한 조치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한주식 회장은 그 자신이 어릴 때부터 경주최부자댁의 나눔정신을 자주 들어 알게 모르게 자신의 나눔 정신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회고한 바 있으며, 2020년 7월에는 가족들과 집안사람 20여명을 이끌고 경주최부자댁을 방문해 최부자 정신을 기린 바 있다. 이날 동창회에서 한주식 회장은 “나는 종교가 없어 천국 가는 것을 믿지 않는다. 대신 살아서 천국을 만들고 싶은데 그 방법이 나눔이다”며 자신의 나눔철학을 강조한 후 “내가 부자로 성공한 이유가 평소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꾸준히 도운 것이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돌아온 덕분이었다”며 부를 이룬 이유를 설명했다. 한주식 회장은 ‘나눔이나 후원은 어떤 목적이나 일이 있어 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라 강조해 동문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한편 이런 한주식 회장의 뜻을 알고 흔쾌히 아너소사이어티 라운지를 열어 준 또 한 명의 경주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바로 이 사랑의 열매 실무를 총괄하는 경주 출신의 황인식 사무총장이다. 황인식 사무총장은 “평소 경주 선배님이신 한주식 회장의 나눔 정신을 깊이 흠모해 그 정신을 함께 키워나가고 싶던 중 마침 ‘아너소사이어티 라운지에서 동창회를 하면 또 다른 아너소사이어티가 탄생할 것이다’는 한주식 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라운지를 열었다”며 이번 행사의 의미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또 한주식 회장과 오랜 친분을 나누어 온 사랑의 열매 ‘김병준 회장’의 각별한 배려도 전달하며 이날 행사가 소중한 인연의 결과임을 강조했다. 경주출신 복지 전문가 황인식 사무총장, 사랑의 열매 총괄하며 공직자로 보람 느껴 황인식 사무총장은 경주 내남면 출신으로 워싱턴대 대학원 사회복지과, 연세대 대학원 사회복지학 박사로 1998년 공직을 시작해 서울 서초구 생활복지국장, 서울시 장애인복지과장을 거친 복지 전문가로 서울시 기획조정실 경영기획관, 행정국장과 대변인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지난 2022년 10월부터 사랑의 열매 사무총장으로 활동한 황 사무총장은 복지와 관련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한 자신이 사랑의 열매에 근무하며 나눔정신을 실천하는 뜻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 사회에 올바른 나눔문화를 이끄는 것이 매우 큰 보람이라 소개했다. 이날 사방초 동문들은 라운지에 빼곡이 표시된 아너소사이어티 이름들을 살펴보면서 ‘나도 아너소사이어티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아너소사이어티 명단은 현재 3268번까지 등록되어 있었다. 1998년 이후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가 3268명이나 된다는 말이다. 사방초 동문들은 특히 아너소사이어티 명판 가운데 돋아난 ‘사랑의 열매’ 엠블럼을 어루만지면 그 사람도 아너소사이어티가 된다는 사무국 직원의 말을 듣고는 앞다투어 엠블럼을 어루만지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건물에 들어서면서부터 경주최부자의 정신을 만나 현대판 경주최부자로 꾸준히 입지를 쌓아가는 한주식 회장과 함께 3268명, 우리시대 나눔을 실천한 또 다른 경주최부자들의 이름에 둘러싸인 사방초 동문들은 이 행사에 참여하는 자체로 나눔에 대한 마음을 쌓아가는 분위기였다. 이런 뜻 깊은 동창회가 전국 초중고 동창회를 통털어 처음으로 사방초등학교에서 시작된 것은 경주최부자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한주식 회장과 황인식 사무총장이란 특별한 경주 사람이 랑데부한 결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사랑의 열매’는 우리나라 나눔문화의 중대한 한 축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1998년 설립된 이후 전문적인 모금 및 배분을 통해 나눔문화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민간복지기관으로 나눔에 관한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응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열매’ 자체는 1970년 초부터 수재의연금과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금할 때 보건복지부 산하 ‘이웃돕기추진운동본부’에서 사용해 왔다. 사랑의 열매 형태는 우리나라 야산에 자생하고 있는 산열매를 형상화 한 것이었지만 2003년 2월 산림청에서 ‘백당나무’를 이달의 나무로 선정하며 사랑의 열매와 닮은 점을 착안해 본격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의 나무에 달린 세 개의 열매는 나와 가족, 이웃을 각각 상징하며 나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회벽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는 정동의 중앙회를 중심으로 서울특별시와 부산광역시를 비롯한 광역시, 경기도를 비롯한 각 도, 세종시 등 모두 17개 지부를 두고 운영되며 ‘착한 나눔’을 기초로 한 기부문화를 이끄는 것을 핵심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걸친 나눔 관련 지원 사업, 착한 가게 운영 등 지속가능한 나눔 정착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한편 3268명의 아너소사이어티 중 경주는 모두 20명으로 경북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자들의 높은 도덕적 책무를 강조한 신라와 12대의 대를 이어 나눔을 실천해 온 경주최부자 정신이 면면히 깃든 경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경주최부자를 주제로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 나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은 나를 말렸다. 그 이유는 경주최부자와 관련된 책이 이미 많이 나와 있다는 점과 경주최부자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까지 나와 있는데 뒤늦게 그 책을 써서 무엇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경주최부자를 처음 떠올린 후 바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반디엔루니스, 종로서점 같은 대형 서점들을 찾아보았다. 전체적으로 20종 가까운 책이 나와 있었다. 심지어 동화책도 있었다. 비록 도중에 흐지부지 막을 내렸지만 드라마 ‘명가’도 제작되어 한때 인기절정을 달렸던 김영철 씨가 경주최부자댁 정신적 지주가 된 최진립 장군 역을, 탤런트 차인표 씨가 실제 부자의 틀을 닦은 최국선 공을 연기하기도 했다. 이만하면 경주최부자를 다룰 만큼 다루었다고 누구나 생각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지금까지 나온 경주최부자 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라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책들의 내용이 천편일률이었다. 모든 책이 최부자댁의 육훈과 육연, 최준 선생(1884~1970)의 독립운동에 대한 짧은 내용을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최진립 장군(1568~1636)으로부터 따지면 12대 400년에 가깝고 부자로 운신하기 시작했던 최국선 공(1631~1682)의 청년기부터 최준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1970년까지만 따져도 10대 32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역사상 최장기, 최대 부자였던 경주최부자댁이 이 정도로 허술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의 책들을 써주면서 느낀 나름의 절대적인 명제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드라마는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할 말이 없는 일반인들도 그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물을 쏙 빼놓을 기막힌 이야기들이 책 한 권 분량씩은 있다는 것이 내가 자서전 대필을 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그런데 하물며 조선 중기와 후기를 관통하며 영남일대 최고의 부자로 명성을 얻었던 명가라면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겠느냐는 것이 내 기대였다. 게다가 궁금한 것도 많았다. 도대체 최부자댁이 얼마나 부자였고 그래서 무엇을 먹고 살았고 옷은 어떻게 입었고 집은 어떻게 꾸몄고 과객을 대접했다는데 어떤 과객들이 있었고, 만석꾼이었다면 실제로 땅은 얼마나 가지고 있었고 진사 벼슬 이상 살지 않았다면 양반의 체통은 어떻게 행사할 수 있었고 진사는 또 몇 명이나 나왔는지..., 더구나 부자 3대 가기 힘든다는데 어떻게 10대, 12대를 부자로 보냈는지. 그 부자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심지어 부자댁 가문에서 엄청난 건달 보스까지 나왔다는데 그것은 어떤 연유인지... 궁금한 것이 차고 넘쳤다. 내가 궁금한 것만 찾아서 써도 책 서너 권은 충분히 쓸 자신이 있었고 당당히 베스트셀러를 기록할 자신 있었다. 결론을 말하면 4년 동안 3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책을 무려 5권이나 썼다. 그 중 제 1권은 최부자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가 주된 내용으로 내가 가진 원초적인 의문들을 풀어나가는 데 할애했다. ‘The 큰 바보 경주 최부자’라는 제목의 이 책에는 모두 34편의 글이 들어있는데 이 34편 속에 든 이야기들은 장담하건데 이전에 나온 경주최부자 책을 전부 끌어보아도 정보의 면에서 내가 쓴 책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다른 책에서 책 한 권을 다 써서 다룬 육훈이나 육연이 내가 쓴 책에서는 한 편 한 편씩으로 집약된 대신 그만한 가치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34가지나 찾아서 썼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야기할 게 있다. 이 책의 제목을 정하는데만 거의 1년이 걸렸다. 제목 속에 있는 ‘큰 바보’라는 단어 때문이다. 책이 작가인 내가 아닌 최염 선생님의 입장에서 기술하는 식으로 서술되다 보니 최염 선생님께서 “조상님들을 향해 후손인 내가 어떻게 감히 ‘바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느냐?”고 꺼리신 때문이었다. 충분히 염려하실 만한 일이라 여겨져 그 문제를 들고 여러 분과 상의하기도 하고 조동걸 교수님, 박병호 교수님 등 각계의 원로 석학들을 일부러 만나 조언을 구하시는 등 검증을 끝내는 끝에 제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제2권은 최준 선생님 일대기였다. 여기에는 최부자댁에서조차 미처 알지 못하는 최준 선생님에 대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비사와 삼성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최부자댁 재산의 이동에 관한 기막힌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나는 최준 선생님을 초인(超人)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에 대한 확고한 철학도 초인에 가깝고 나눔에 대한 마음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자선사업가들을 완전히 뛰어넘은 초월적 용단을 내리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의 일대기가 우리 현대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고 더구나 경주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기록이 소수에 의해 독점될 때의 일이다. 더구나 최준 선생님은 패배자도 아니고 역사 속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자임에 분명한데 이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애석한 정도를 넘어 통탄스럽다. 이런 선각자를 제대로 되새기고 배우지 않으면서 정치와 경제 쪽의 인물들에 집착하는 것은 대한민국 지성의 한계다. 제3권은 최염 선생님의 삶을 통해 본 조상님에 대한 회고, 할아버지이신 최준 선생님과 나눈 평생 동안의 일화와 교감을 그렸다. 대학 창립에 가문의 전재산을 기부하고 더 이상 부자가 아닌 상태에서 최염 선생님이 할아버지 최준 선생님을 모신 것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더구나 최염 선생님 당신의 일화를 통해 본 최준 선생님의 또 다른 신념들은 갑질을 일삼는 현재의 재벌들과 이른바 교육재단을 운영하며 교육자라 하는 사람들이 엎드려 받들어야 할 교훈들이다. 유감스럽게도 디자인까지 다 해둔 이 책들은 당시의 어떤 상황과 사정으로 인해 출판을 미룬 채 지금까지 노트북과 외장하드 메모리 속에서 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조만간 이 실체들이 세상으로 나와 그 밝은 빛을 우리 사회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머지 두 권은 ‘소설’이다. 최진립 장군으로부터 최준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12대를 관통하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사실에 내 나름의 취재와 역사 속 인물들을 동원해 소설을 썼다. 예를 들어 최진립 장군과 관련해서는 권율 장군과 사명대사, 당시의 경주부윤 박의장, 도산성에서 고전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명나라 장수 양호, 광해군과 인조, 최명길, 강홍립 같은 인물이 동원되고 최국선 공의 이야기에서는 실학의 태두인 유형원과 실학자들이, 최의기 공에 이르러서는 김창흡, 정선, 당대 문장가였던 김병연, 금강산 정양사 방장 설제스님 등이 나오는 식이다.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최준 선생님과 관련해서는 최익현, 의친왕, 신돌석, 박상진, 손병희, 김성수 등 근대사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인물과의 관계도를 만들고 그들의 개인사를 찾는 과정 덕분에 조선 중후기 역사와 구한말에서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도 모르게 많은 지식이 쌓이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었다.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들을 먼저 출간하고 싶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탄탄하게 고치겠다는 생각에서 퇴고를 거듭하다 보니 지금까지 밀렸다. 더 솔직하게는 요즘 작가들이 얼마나 치밀하고 대단한 작가들이 많은지 그들의 책과 그 책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들을 보다 보니 적어도 그에 필적할 만큼의 재미와 구성을 갖추지 않고서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오기가 생겨 책 출간을 미루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체득한 요점이 있었다. 경주최부자는 정말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게 가치 있고 재미있는 가문이라는 점이다. 이 정도의 가문 이야기는 어지간한 왕조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한 저력을 가졌다. 특히 최부자 가문이 대대로 이어온 나눔과 상생의 정신은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높고 귀한 정신이고 가풍이었다. 세상에 어느 부자가 300년 넘게 지속할 수 있었고 설혹 부는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 어느 부자가 이렇게 인심을 얻으면서 지속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 기본적으로 인심을 얻으면서 부를 이룬 부자들이 있기나 했다는 말인가? 이전 호까지 최부자댁을 둘러 싼 교촌 주변의 이야기를 했다면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최부자댁 정신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 예정이다. 이번 호에는 그에 앞서 이끄는 말씀을 드렸다. 다음호를 기대하시기 바란다.
교촌을 다녀갈 때마다 아쉽게 지나치는 곳이 있다. 지금은 완전히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 ‘놋전거리’다. 놋전거리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이것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유기공방거리’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놋그릇이라는 좋은 우리말이 유기(鍮器)라고 어렵게 표현되는 것이 좀 아이러니하고 불만스럽지만 오래도록 이 근처에 놋전거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놋전거리라는 이름처럼 이곳에 놋그릇 만드는 공방들이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흔히 ‘놋전’이라고 불렀던 이곳은 지금의 교촌한옥마을 남서쪽 200여 미터쯤에 있었다. 교촌길을 따라 교촌에서 대릉원쪽으로 가다 다시 왼쪽으로 난 길 안쪽에 있었다. 다행히 지도를 찾아보면 도로명으로 ‘놋전길’이 나와 있어서 아직도 경주시가 행정적으로는 그 길을 기억하는 듯하다. 지금은 몇 채의 집이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놋전에는 적어도 30여 호는 됨직한 집들이 퍼져 있었다. 그 놋전을 지나면 다시 3~40여 호의 인가들이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교촌일대도 그렇지만 그 많은 집들이 유적지 정비사업으로 전부 헐린 것이다. 내가 최염 선생님을 뵈면서 이 길에 대해 여쭈어본 것은 순전히 그 길을 자주 다닌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놋전을 하루 두 번 이상 지나다녔는데 지날 때마다 왜 그 거리가 놋전이 되었고, 놋전이라는 이름과 달리 놋그릇 만드는 공방이 하나도 없는지 궁금했다. 최부자댁 글을 쓰면서 혹여 그것이 최부자댁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 어느날 문득 그 질문을 해본 것이다. 그런데 최염 선생님 대답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얻어냈다. 교촌은 소가 엎드려 있는 지형, 소가 떠나면 땅의 기운도 사라지기에 방울을 달아 놓은 것! “놋전은 당연히 우리 집안과 관련이 컸지요. 우리 집안에서 한 해 소비하는 놋그릇만 해도 놋그릇 가게 몇 개는 먹고 살았을 거라. 그래서 놋그릇 가게들이 번성했던 것이고 거기에 놋전이 있다고 소문나니 사람들이 더 몰려들어 사가면서 가게들도 차츰 더 늘어났던 것이지.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그쪽에 공방들이 즐비했다네!” 최염 선생님 말씀에 귀가 번쩍 띄었다. 놋전이란 거리 이름의 유래를 확인하기도 했고, 그 거리가 왜 생겨났는지를 단박에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조선시대는 유학과 유교가 절대적으로 신봉되던 때였고 그 유학의 정점에는 제례의식이 있었다. 그 제례에는 거의 놋그릇이 쓰였고 그게 아니라도 근대 이전 부자들은 당연한 듯 놋그릇을 늘 썼다. 더구나 교촌의 기와집들 대부분이 최부자댁 식솔들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집집마다 과객들도 끊임없이 드나들 시대, 놋그릇 수요가 많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감탄하자 최염 선생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시면서 더욱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런데 왜 하필 놋그릇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다. 도자기나 옷 가게, 신발 가게, 모자 가게 등도 충분히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인데 왜 하필 놋그릇이었을까? 내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드러내자 최염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셨다. “사실은 여기에 묘한 사연이 숨어 있다네!” 최염 선생님 말씀은 그야말로 흥미로웠다. 원래 교촌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소가 엎드려 있는 듯한 형상이란다. 소가 엎드려 있다는 것은 소에게는 가장 태평스런 모습이다. 엎드려 여물이라도 씹고 있다면 그건 소에게는 더 이상 좋은 시간이 아닌 것이다. 띠를 이야기할 때 소띠 사람이 겨울에 태어나면 복이 많다는 민간의 속설도 따지고 보면 겨울에는 소가 일은 하지 않고 평안히 엎드려 여물만 받아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촌이 소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소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소가 일어나 떠나 버리면 지력이 쇠해지므로 어떻게든 소를 붙잡아 두어야 했다. 소가 일어날 때 방울을 달아두면 짤랑거리는 소리로 인해 소가 일어선 것을 알 수 있고 그에 맞추어 소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부자댁에서 지금의 자리에 일부러 놋전을 열도록 길을 열어주어 사시사철 놋그릇 두드리는 소리, 쇠방울 소리가 들리도록 했었다는 것이다. 실로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 많았던 놋그릇 공방들은 왜 다 없어졌는지 다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염 선생님은 거기에 대해서도 막힘 없이 말씀해주셨다. “그건 일제 때 공출로 놋그릇이며 놋숟가락·젓가락들을 전부 빼앗기면서 그렇게 되었지!” 대동아공영 운운하며 전쟁을 일삼았던 일본은 급기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막대한 군비를 늘이게 된다. 그중에서도 놋그릇은 구리와 아연, 주석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이것은 총알이나 폭탄의 탄피 성분과 거의 비슷하다. 당연히 유기는 공출 대상 1호였고 집집마다 놋그릇이며 놋숟가락 젓가락들이 몽땅 털려 나갔다. 그러니 놋그릇 사는 사람도 생기지 않았고 새로 만드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다. 놋전의 숱한 가게들도 재료를 전부 빼앗긴 채 문을 닫거나 다른 일로 바꾸어야 했다. 이게 일차적으로 놋전이 쇠퇴한 이유였다. 그런 놋전이 해방 이후 다시 활황을 띠기 시작해 60년대 후반까지 옛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놋그릇 수요가 다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복병을 만나 결국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70년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스텐 그릇과 수저들 때문이었다. 일본의 공출대상 1호인 놋그릇의 수탈로 놋전의 많은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거나 다른 일로 바꾸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니에게 성가신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놋그릇을 닦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두어 달에 한 번쯤은 정기적으로 놋그릇을 닦으셨다. 양잿물을 풀어놓고 짚으로 양잿물을 찍어 놋그릇을 닦으면 그릇에 핀 푸르스름한 녹들이 시꺼먼 녹물이 되어 녹아 나왔다. 가끔 어머니는 연탄재를 곱게 빻아서 양잿물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양잿물은 서양에서 온 잿물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잿물은 콩깍지나 짚을 태운 재를 우려내 만드는데 이게 알카리성을 띠고 있어 전통적으로 세탁이나 세척에 사용되었다. 그러다 서양에서 강력한 세척력을 가진 수산화나트륨이 들어와 잿물을 대신하면서 이것을 녹인 물을 서양의 양(洋) 자를 붙여 양잿물이라 불렀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한눈에 보기에도 광채가 번쩍번쩍 나는 그릇들을 펼쳐 놓으시고는 “이제 그릇 닦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좋아하셨다. 말씀인즉 시내에 스텐 가게가 생겼는데 거기에서 놋그릇과 스텐그릇을 1대1로 맞교환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골칫거리인 놋그릇을 평생 사용해도 광채가 사라지지 않은 현대식 스텐 그릇과 바꾸었으니 얼마나 기쁘셨을까? 어머니는 집안에 있던 놋그릇이란 놋그릇과 온갖 놋수저를 전부 쓸어 모야 스텐 그릇과 맞바꾸어 오신 것이다. 물론 그 이후로 이전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양잿물로 놋그릇 닦는 불편을 영원히 면하실 수 있었다. 최염 선생님 말씀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스텐의 등장으로 더 이상 놋그릇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전국적으로 놋그릇 만드는 장인들이 급격히 사라진 것은 바로 이 스텐 그릇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는 그 후 놋그릇의 가치와 스텐 그릇의 가치가 비교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텐은 스테인레스강(stainless steel)의 줄인 말이다. 스테인레스강이란 말 그대로 녹이 없는 강철이다. 주재료는 10.5~11%의 크롬 또는 몰리브덴과 니켈 등을 철과 섞어 만든 금속이다. 강철에 비해 구리가 몇 배나 비싼 재료인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녹이 설지 않는다는 이점 하나로 귀한 놋그릇을 스텐과 맞바꾼 것이다. 2000년대 경제력이 좋아진 이후 놋그릇에서 건강에 좋은 각종 이온이 나온다고 해서 다시 놋그릇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반면 스텐에서 발산되는 광택이 싸구려 티가 난다고 해서 스텐을 쓰는 가게나 가정들이 거의 사라졌다. 만약 이런 가치 판단이 70년대에 알려졌다면 놋전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놋전이 사라지면서 최부자댁 기운도 쇠한 셈이 되었다. 최부자댁 지기를 지키던 소가 떠났고 최부자댁 기운이 서려 있던 교촌은 이제는 관광객과 그들을 만나는 상업화된 반쪽 한옥들이 들어섰다. 한때 놋전 자리에 다시 유기공방을 연다는 설이 나돌았다. 과연 그 자리에 다시 쇠방울 소리가 들리면 최부자댁이 예전의 번영을 찾을 수 있을까?
앞장에서 예고했듯 최언경 공 부자는 향교, 다시 말해 유림과 화합하기 위해 파격적인 계획을 제안한다. 그것은 만만히 보아 넘길 일이 결코 아니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향교에 대한 조선의 정책적 배려를 잠깐 살펴보면 향교는 제도적으로 국가에서 그 규모에 따라 교수를 배정하고 토지와 노비를 지급해 안정적으로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러 가지 자료에 따르면 향교가 융성한 성종대에는 성균관을 비롯 주·부·군·현 등에 각각 400결·10결·7결·5결씩을 정해 지방 수령이 각 지역에서 거둬 해당 향교에 지급하도록 조치되었다. 경주는 ‘부’였으므로 10결의 세수만큼을 할애받은 셈이다. 조선시대 1결은 농민 한 명이 혼자서 지을 수 있는 평균적인 땅 넓이로 요즘 평수로 하면 약 3000평에 해당하는 넓은 땅이다. 10결이면 3만 평이나 되는 넓은 땅이니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후대로 내려올수록 적어진 것은 물론 도처에서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향교가 제 기능을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숭유했다고 할 수는 있을까? 절 수리 잦았던 조선이 억불했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조선이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절대적 다수의 백성이 떠받드는 불교를 함부로 괄시할 수 없었다. 얼핏 봐도 태조 이성계부터 무학대사를 가까이했고 경복궁 내에 불교행사를 여는 함원전(咸元殿)을 지어둔 것,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가장 먼저 편찬한 서적이 석가모니의 집안과 관련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이었다는 것을 봐도 불교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경주의 유적을 봐도 가장 유명한 절인 불국사의 경우 세종, 성종, 중종, 명종대에 대웅전, 관음전, 자하문, 극락전 등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후에는 광해군, 인조, 효종 대를 거치며 보수한 기록이 있다. 석굴암도 숙종대와 영조대에 중수한 사실이 있다. 참고로 항간에 잘못 알려져 있듯 석굴암이 오랜 기간 사라졌다가 일제강점기 우체부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속설과 달리 겸재 정선의 화첩에도 나오고 조선말기 울산병사 조예상에 의해 중수된 기록도 있다. 분황사 역시 광해군 때 보광전을 중수하고 약사여래를 주조·봉안한 기록이 있고 숙종 대에 다시 보광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중창이나 수리, 봉안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불교 유적들이 조선시대 전반에 수시로 꾸준히 중창되거나 보수된 사실들을 두고 본다면 불교의 재정이 그다지 궁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활발한 중창이나 수리를 한 불교가 억압당했다고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교가 국교로 여겨지던 통일신라나 고려에 비해 승려의 신분이 낮아지고 권위도 떨어진 것은 사실일 테지만 흔히 상상하듯 막무가내로 억압당하지는 않았을 성싶은 것이다. 반면 유학이 국시인데다 과거가 관료진출의 등용문이고 향교가 그 과거를 지지하는 국책교육기관인데도 불구하고 재정적 지원이 불안해 제대로 교육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 것은 숭유(崇儒)의 나라에서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심지어 향교의 담장이 무너져 오랜 기간 보수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최언경, 최기영 부자는 이런 향교의 재정적 후원을 자청했다. 향교를 전격 수리하고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고 책과 문방구를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다. 향교를 다녀보면 경주 향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큰 규모다. 이런 향교의 규모를 감안하면 쉽게 지원할 대상이 아닐 텐데 향교를 지원하겠다고 했으니 유림이 내심 반가웠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사마소(司馬所)를 함께 지원한 것도 눈에 띈다. 사마소는 16세기 초인 성종말~연산군 시대의 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 소과라 불렀다)에 붙은 선비들이 자기들 나름의 지방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만든 사설 시설이다. 처음에는 학문과 정치를 토론하는 듯했지만 지역의 터줏대감 노릇으로 전락한 곳이 사마소다. 최씨 부자는 사마소를 전면 수리하는 것은 물론 이때 병촉헌(炳燭軒)을 새로 짓고 책과 문방구를 전격 지원했다. 이를테면 주요 명분상으로는 유학을 숭상·장려하고 토호세력화 된 지역 선비들과 두루 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참고로 사마소는 기자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기자의 부모님이 젊은 시절,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병촉헌에 몇 년 세들어 산 적 있었다. 그런데 당시 계약을 최염 선생님의 부친이신 최식 선생님과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미루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마소의 실질적 소유권을 최부자댁이 가지고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사마소는 지금의 월정교 북측에 있던 것을 유적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월정교 복원을 대비해 1984년 300미터쯤 서쪽으로 옮겨 지금의 자리로 잡았다. 기자의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던 시기였다. 대문과 집은 낮고 안채는 부잣집 답지않게 초라해 보인다. 이게 경주최부자댁의 차별점이다. 이쯤에서 그쳤다면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두 부자분들은 경주의 유림들에게 단순히 보여주기가 아닌, 감동을 주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게 아니면 비록 벼슬을 살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유학도임을 자부하고 있었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아래 조치들이 교촌 시대를 연 최부자댁의 진면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최언경, 최기영 두 부자는 집을 옮기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결행한다. 첫째, 향교를 존중해 집터를 석 자 이상 깎는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발상이다. 어떻게 땅을 낮추어 집을 지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향교는 그냥 학교일 뿐이다. 요즘 같으면 학교 건물 옆에 집을 짓는다고 터를 일부러 낮춘 것이다. 그러나 두 부자분들은 향교를 단순히 건물로 보지 않고 그 속에 배향된 유학의 성현들을 우러러본 것이다. 향교에는 성균관과 똑같은 이름과 기능의 ‘대성전’이란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중국 유학의 성인들과 우리나라 유학 성현들을 모신 사당이다. 향교에 배향된 선현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집터에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다. 실제로 향교와 맞닿은 최부자댁 터를 보면 향교보다 좀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깎아낸 흙을 최부자댁 후원 뒤쪽에 가산(假山)으로 쌓았다는 이야기는 역시 7편에서 했다. 둘째, 집의 위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지금 최부자댁은 그 옛날 이조리에서 옮겨온 집으로 알려져 있다. 이게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옥은 ‘가구식’이라고 해서 위에서부터 하나씩 드러내면 해체와 이전을 쉽게 할 수 있다. 지금도 경주에는 전국 각지에서 옮겨온 한옥들이 많고 안동에는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된 지역에서 많은 한옥을 옮겨 간 사례가 있다. 여하간 최기영 공은 이조에서 집을 옮겨올 때 모든 기둥들을 두 자씩 깎아 집의 높이를 스스로 낮추었다. 또 일부러 대문도 작게 만들었다. 최부자댁을 방문하는 분들은, 그래서 최부자댁을 좀 관심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문가를 방문해 보면 지붕이 높고 대문도 솟을대문이라고 해서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대문을 달고 특히 문짝 위로 지붕을 올려 엄청난 위용을 부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영남 일대 가장 소문난 부자인 경주최부자댁은 어딘지 모르게 집도 좀 포근하고 대문도 낮아 다른 명가에서 보는 위엄이나 위용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안채는 영남일대 최고의 부잣집치고는 얼핏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터를 낮추고 기둥을 깎았다는 것은 단순히 터를 낮추고 집을 낮춘 것이 아니라 유학과 향교, 성현에 대한 마음으로의 겸양을 나타낸 것이다. 아마 이런 부자는 단연코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겸손하고 검소하게 살아간 부자들은 많지만 멀쩡한 자기 집 기둥을 깎아 낮추고 집터를 일부러 깎아낸 부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그게 경주최부자가 다른 부자들과 확연하게 차별화된 출발점일 것이다. 나는 종종 최부자댁을 방문하는 관광객들과 만나면 반드시 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러면서 최부자댁은에서는 육훈이나 육연 등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최부자댁 집 자체다. 낮은 대문과 위압적이지 않은 지붕 높이, 일부러 낮춘 집터를 돌아보면 세상과의 조화를 꾀한 최부자댁의 현명함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아버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집터를 깎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기둥을 깎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많은 기둥들을 어떻게 일일이 두 자씩 깎는다는 말입니까?” “어허~~! 그쯤은 해야 유림들이 우리 성의를 받아들일 것 아니겠느냐? 땅을 깎는 것은 달리 쓸 곳이 있으니 염려 말고 기둥을 깎는 일은 기왕에 집을 뜯어 옮기는 마당이니 조금 더 신경을 쓰면 되겠지. 그보다 너는 유림들이 원하는 게 무언지 의중을 살피는 일에 좀 더 신경을 쓰도록 해라”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교육열, 향교는 공교육의 현장 경주최부자댁은 알다시피 교촌에 있다. 이 교촌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향교’에서 왔다. 전국적으로 교촌 혹은 교동, 교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많은데 그 유래 역시 향교가 있는 동리의 대명사다. 향교(鄕校)는 고려 시대부터 있던 지방의 공교육 기관으로 본격으로 전국에 설치된 것은 조선시대 유학의 진흥을 위해 이루어졌다. 향교가 전국의 주·부·군·현에 고르게 배치된 것은 성종대인데 이때 향교의 재정 지원과 교수(敎授)의 임명 등에 대한 뚜렷한 원칙이 생겼다. 당시 군현만 해도 무려 330개소에 달하였으니 주와 부를 합하면 360개 소에 이르는 광범위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향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전문서나 자료에서 보면 될 것이지만 이 장에서 최부자댁과 상관없이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 하며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지만 기자는 다른 나라와 확연히 다른 ‘교육’열에 있다고 믿는다. 현명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많은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에 비해 잘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 교육의 중심에 국립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다. 따지고 보면 조선은 동시대 어떤 나라보다 교육이 장려되는 나라였다. 위에서 말했듯 전국적으로 향교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지방 사립 대학격인 서원(書院)이 있었고 이와 유사한 사우(祠宇)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47개소의 서원을 남겨두고 철폐하기 바로 전까지 전국에는 무려 1000여개의 서원과 사우가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립학교가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초보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서당이 어지간한 마을마다 있었으니 이런 광범위한 교육환경은 동시대 어느 나라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서원이 저지른 패악이나 그것을 기반으로 한 양반 토호들의 문란은 부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배움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우리나라처럼 뿌리 깊게 내린 조선은 언제라도 비상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교육열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6.25 이후에는 폐허가 된 나라를 초현대식으로 건설하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머리 잘 돌아가는 국민, 문맹률이 어느 나라보다 낮은 나라가 효과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민주주의 역사가 짧으면서도 훨씬 빨리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교육의 탁월성에서 찾을 수 있다. 무식하고 무지한 나라는 왕정이나 독재의 기간도 길다. 교육은 자의식을 일깨우는 가장 적절한 수단인데 자의식을 가진 국민이 자신을 억누르는 독재를 가만두지 않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이 당연한 이치를 정치인들만 제대로 몰라 섣불리 국민을 기만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개돼지가 아닌 이상, 더군다나 절대다수 국민이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정치권력이 멋대로 휘두르는 대로 휘둘릴 리 없다. 교육 수준 높은 국민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향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잡설이 길었다. 그렇다면 향교가 왜 최부자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그것은 최부자댁이 내남면 이조리에서 교촌으로 오게 된 것에서 비롯된다. 원래 최부자댁은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의 집이었으나 교촌으로 오면서 그 규모도 줄었다. 그 이유가 향교 때문이었다. 과객 많기로 소문난 최부자댁이 교촌에 온다면 면학분위기도 망가지고 오물도 많아지지 않을까? 최부자댁이 교촌으로 옮겨온 것을 최부자 가문에서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으로부터 8대, 부자로 알려진 최군선 공으로부터 6대인 최기영 공(1768~1834)대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사를 논의하고 완료 것이 최기영 공이 20대 초반인 1792년인 것으로 미루어 지금으로부터 230여 년 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기영 공의 아버지인 최언경 공(1743~1804)이 건장하던 때였기에 이사한 주체가 최언경 공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최기영 공이 이사했다고 하는 이유는 이때 이미 가문의 대표 자격을 최기영 공에게 넘겼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실례로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 선생도 19세에 아버지로부터 가권을 넘겨받았는데 이렇게 젊은 시절에 가문의 주도자가 되는 것도 최부자 가문의 특색으로 보인다. 교촌으로 이전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무렵 부의 규모가 커져 더 이상 이조리에서 관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최언경 공부터 최기영 공까지는 조선의 제2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영조~정조 시대를 관통하던 때다. 사람들의 왕래도 어느 때보다 잦던 때였고 실사구시 학풍이 바야흐로 전성기를 이루던 때였다. 경주 성내에서 무려 30리는 족히 떨어져 있는 이조리에서 가세를 관리하고 외부 환경에 대응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최부자댁 육훈 중 하나인 ‘과객을 후히 대접’하기 위해서도 이조리로서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전과 관련해 최염 선생님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또 한 가지 말 못 할 사정도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추후로 미루어 두기로 한다. 여하간 최언경 공과 최기영 공 부자는 이조에서 교촌으로 오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한 것이 분명하고 제7편에서 말했듯 그 이전 최종률 공(1724~1773)부터 땅을 사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장기간의 포석을 두고 교촌 이전 작업이 진행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생들의 반대였다. 당시 유생들은 최부자댁이 교촌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 만만치 않은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만한 것이 향교는 공부하는 곳인데 부잣집이 바로 옆으로 이전해 오면 아무래도 면학 분위기를 해칠 것이 분명하다. 부잣집이 들어오면 달랑 그 집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식솔이나 가복들도 늘어나 연이어 집이 많아지고 사람들도 늘 것이다. 더구나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과객이 많기로도 소문난 최부자댁 아닌가? 그 많은 과객이 드나드는 만큼 시끄럽고 사람이 많아지면 이런저런 오물도 많이 나올 것이다. 특히 당시의 선비들은 청빈을 덕목으로 삼던 시절인데 그와 반대되는 부자가 들어오니 상식적으로 반대의 명분이 많았을 법하다. 또 한 가지, 지금 추측해 보면 유림의 입장에서는 소문난 부자가 근처로 온다는 사실에 일종의 기대도 가졌을 법하다. 아무렴 몇 대에 걸친 큰 부자가 향교의 이웃이 되는 마당에 최소한의 기여는 하지 않을까 싶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 반대’의 목소리를 은근히 내는 것이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장에서 말하겠지만 실상 향교가 나라에서 규정해놓은 전답으로 운영되는 기관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올수록 재정 충당이 어려워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실정이었다. 이런 마당에 향교를 둘러싼 일부 유림 인사들이 최부자댁 이전이라는, 당시로서는 가장 떠들썩하고 엄청난 비용이 드는 이전을 가만히 앉아 먼 산 불구경하듯 앉아서 승인할 리가 없다. 최언경 공이나 최기영 공 역시 이런 유림의 반대를 익히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어지간한 선심으로는 이전이 쉽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상세하게 전해져 온 바는 없지만 아마도 양자 간에 심상치 않은 교섭과 화의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 결과 다음 장에서 펼쳐질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진다. 그 결과에는 향교라는 이름의 걸림돌을 상생이라는 디딤돌로 바꾸는 멋진 이야기가 들어 있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교촌 남쪽, 남천을 건너면 ‘일정로’를 따라 넓은 사과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다. 대체로 근래 재건된 월정교가 시작되는 부근부터 김유신 장군의 유택지로 알려진 재매정 맞은 편까지 약 300미터 거리의 거리가 온통 과수원이었다. 폭도 넓어 6~70미터는 족히 되는 과수원은 교촌 인근에서는 보기 드문 큰 과수원이었다. 평수로 치면 만 평은 족히 될 이 넓은 과수원은 도중에 천원동으로 난 좁은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 있었고 관리하는 주인도 따로 있었다. 내가 어릴 적, 이 과수원은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풋사과부터 익은 사과까지 언제나 사과를 먹을 수 있는 친근한 과수원이었다. 사과를 먹으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한데 우리는 굳이 돈을 내지 않고도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 볏단으로 사과를 바꾸어준 주인들의 속내는 사과 서리를 막기 위한 비책이었다. 과수원 주변 동쪽과 서쪽은 논과 밭이었다. 밭에는 보리가 심어졌고 논에는 벼가 심어졌을 것이 당연했다. 남천변에는 관리소홀을 틈타 지대가 높은 곳에는 작은 논과 밭도 만들어져 있었다. 이들 논밭의 주인들은 추수 후 알곡을 털어낸 볏단을 논이나 밭 가운데 쌓아 두었다. 이렇게 볏단을 쌓아 두는 것은 볏단을 삭여 소에게 먹이거나 이듬해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볏단을 쌓아 둔 것을 노적가리라 하는데 이런 노적가리들이 그때는 논이나 밭에 드문드문 만들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이런 노적가리에서 볏단을 몇 개 뽑아 과수원에 가져다 주었다. 그럼 과수원 주인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사과를 내주었다. 그런데 이때 내주는 사과는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멍이 들었거나 한쪽이 곪은 것이었다. 아이들이 이 사과들을 한 보시기 가져와 곪은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집에 들고 갈 것도 없이 그냥 남천물에 설렁설렁 씻어 먹기도 했다. 그 사과들이 정상적으로 파는 사과가 아니라 낙과(落果)라는 것은 아이들도 알았다. 버리거나 거름으로 쓸 사과를 아이들이 들고 오는 볏단을 핑계로 대충 내주는 것이었다. 사방에 볏단은 널려 있었고 사과는 언제나 자연적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썩은 사과를 도려내는 약간의 수고만으로 언제나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성한 사과가 먹고 싶었던 아이들은 몰래 사과서리를 감행하는 대범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수원은 전체가 탱자나무로 둘러져 있었다. 탱자나무는 뾰족한 가시가 사방으로 돋아난 매우 성가신 나무다. 키도 커서, 높이 올라가는 탱자나무는 4미터 넘게 가지를 뻗어올렸다. 때문에 과수원 사과를 서리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과수원에는 사나운 개들도 지키고 있었다. 개들은 과수원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면 컹컹 소리를 내며 짖었고 아이들이 과수원 주위로 몰려다녀도 여지없이 큰 소리로 짖었다. 그래도 탱자나무에는 허점이 있었다. 탱자나무 아래쪽 둥치가 한창 굵어지는 쪽에는 좁은 개구멍이 만들어질 정도의 빈 공간이 생기곤 했는데 이 좁은 공간으로 덩치 작은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몇 차례 그런 공간으로 사과 서리를 하고 나면 과수원 주인은 잽싸게 철조망을 엮어 그 공간을 막아두곤 했다. 뒤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 과수원에 정식으로 사과를 사러 간 적 있었는데 그때 주인 아저씨에게 어릴 때 볏단으로 사과 바꾸어 먹던 이야기를 했다. 그 즈음에는 볏단으로 사과 바꾸어 먹는 아이들이 없을 때인데 그런 기억을 들려주자 주인 아저씨가 큰 소리로 웃으며 그게 사실은 아이들이 사과 서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먹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 과수원은 아이들이 눈독 들이기 딱 좋은 먹거리였으니 자칫 그런 욕구를 적절히 처리해 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도둑으로 만들 수 있었고 낙과는 언제나 생기니 과수원 주인이 볏단 받은 것을 핑계로 아이들에게 사과를 내준 것이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추억을 안고 있는 과수원이 실상은 최부자댁에서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 책을 쓰면서였다. 과수원 이야기는 최부자댁이 중점적으로 생산하던 특산물에 대해 최염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던 중 드러난 뜻밖의 사실이었다. 뒤에 상세하게 말하겠지만 최부자댁 특산품에는 남산돌안경과 한지를 중심으로 가내에 쓰기 위한 다양한 산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과수원은 이전의 선대 최부자 어른들이 아니고 최염 선생님의 할어버지, 즉 마지막 경주최부자이신 최준 선생님이 젊은 시절부터 직접 일군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과수원은 6.25 전쟁 와중에 관리인들마저 피난 가버린 통에 관리가 되지 않아 못 쓰게 된 것을 최염 선생님이 작심하고 손수 다시 일군 것이기도 했다. “아니, 회장님이 손수 그 넓은 과수원을 다시 일구셨다니 그게 사실입니까?” 믿을 수 없을 만큼 의외의 말씀에 최염 선생님은 허허 웃으셨다. “정말 내가 만들었지. 그때 고생 참 많이 했다네!” 최염 선생님 말씀인즉 과수원을 다시 일군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관리가 되지 않던 과수원을 아버지께서 팔아버릴 것 같아 할아버지 정성이 서린 과수원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는 것이 하나였다. 그만큼 중요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귀하게 자랐어. 누구나 다 아는 부잣집 주손으로 태어나 아무런 고생을 해보지 않았지. 심지어 6.25로 친구들은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는 동안 나는 후방에서 경찰서장의 비서로 지내면서 목숨도 몸도 다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거든. 그런 나 스스로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시키고 싶었네....” “똥물을 입찰받아 소달구지에 실어와서는 과수원에 뿌렸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시키고 싶었어...!” 최염 선생님은 그런 결심을 한 후로 그 넓은 과수원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기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했노라 회고하셨다. 만석군의 손자로 태어나 굳은일이라고는 털끝만큼도 해보지 않았으니 농사에 관한 한 눈뜬 봉사와 마찬가지였을 선생님이었다. 다행히 오래 전부터 과수원을 돌보던 일꾼 한 사람을 찾은 선생님은 아침 일찍 소달구지에 똥물까지 실어 나르고 과수원에 따로 만들어둔 똥물 저장고에 옮기고 이것을 밭에 뿌리는 고생을 철마다 되풀이하셨다. “그때는 똥물도 귀한 자원이라 이걸 입찰을 붙여서 사와야 했다네. 월성초등학교가 학생수가 많아 그때 똥물이 많이 나왔어요. 그걸 내가 직접 입찰해서 퍼왔다오!” 똥물은 보통 새벽녘에 퍼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새벽 3~4시에 일어나 소에게 여물을 쑤어 먹여야 했단다. 똥물을 운반하러 가는 길에 아침 일찍 일 나가는 인부들을 위해 여는 선술집이 있었는데 매일 막걸리 한두 잔으로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그 집을 들러다보니 선생님을 향해 인부들이 ‘최농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최염 선생님은 당신께서 손수 탱자나무를 심은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과수원에는 사과나무가 대부분이고 드문드문 복숭아, 자두 같은 것도 심었어. 그런데 이게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산짐승들이 몰려 내려오는 거라. 맷돼지, 노루, 고라니 같은 것들이 쉴 새 없이 내려왔어. 이놈들이 열매만 따먹는 게 아니라 나무껍질을 통째 갉아먹고 뿌리를 파 뒤집어버리는 거라. 결국 그놈들 막느라 탱자나무를 심었지. 그래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놈들이 많아 철조망도 두르게 되었고. 그 작업하면서 손 많이 찔렸지”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최염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큰 감동을 느꼈다. 특히 재벌 2세나 3세들의 옳지 못한 일들과 이른바 금수저 집안의 갑질을 대하면 선생님의 젊은 시절 발심이야말로 경주최부자댁의 오랜 정신이란 생각에 새삼스러운 경외심을 가지곤 한다. 아쉽게도 지금 그 과수원은 사라지고 없다. 무수한 사과가 열리던 과수원은 지금은 월정교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과 일반적인 밭, 일부 음식점 건물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교촌에 들러 이 길을 걷거나 차로 지나다 보면 그 울창했던 과수원과 탱자나무 위로 눈부시게 피어 있던 아카시아꽃들이 문득 떠오른다. 그것이 경주최부자댁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과수원과 함께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내가 교촌에 살았다는 것은 돌이켜 보면 아주 큰 혜택이었다. 더구나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달리 사물이나 현상에 호기심이 많았던 데다 탐구심까지 강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교촌과 최부자댁에 대한 많은 의문들을 내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다. 그게 내가 최부자 관련 책을 쓰면서 귀중한 자양분이 되어 준 것도 사실이다. 내가 혼신을 기울여 쓴 책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는 어쩌면 그런 호기심과 탐구의 결과일 것이다. 그 호기심과 탐구가 4년 가깝게 최부자댁 종손이신 최염 선생님을 모시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들은 동력이었다. 그 질문과 대답의 기간 동안 최염 선생님이 가장 자주 하신 말씀 중의 하나가 “아니, 그런 걸 다 물어보는가?”였고, 그런 다음에는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런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네!”라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이를테면 선생님 기억 속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었기에 기억의 어느 구석에 갈무리하신 채 잊어버리신 옛날 이야기들을 내가 하나씩 하나씩 찾아서 기억 밖으로 꺼내드리는 작업을 한 셈이다. 토르에 나오는 바이프로스트가 교촌의 곳곳에 널려 있다니, 믿을 수 있는 말인가?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교촌에만 있는 최부자댁 ‘웜홀(worm hole)’이다. 독자들은 전통적인 한옥 마을에 웜홀이 있다고 하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의아해하실 것이다. 웜홀은 우주현상을 말할 때의 용어로 빛의 속도 보다 빠르게 우주의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최단 거리를 말한다. 인기 마블 SF영화 중 하나인 ‘토르’에 보면 우주의 중심 아스가르드의 관문을 지키는 헤임달이 ‘바이프로스트(Bifrost)’라는 다리를 만들어 아스가르드와 다른 우주 공간을 연결시키고 그 다리를 통해 순식간에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바이프로스트 역시 웜홀의 한 가지인 셈이다. 조금 전문적으로 말하면 웜홀은 우주가 우리가 평범하게 알고 있는 3차원적인 평면이나 공간의 기준에 있지 않고 불특정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가정에서 성립하는 이동 통로다. 기왕 웜홀 이야기가 나온 걸음에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막대 고무풍선을 둥그렇게 말아서 끝과 끝을 서로 마주 보게 해 두었다면 우리가 아는 일상의 우주는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가기 위해 한 방향, 이 고무풍선에서 본다면 a지점에서 b지점까지 가기 위해 화살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웜홀은 a와 b 사이인 c 지점만 건너뛰면 된다. 때문에 아무리 멀리 있는 곳이라도 웜홀을 통하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웜홀이 한옥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시골마을 교촌에 있다고 하니 이게 얼마나 황당무계한 말인가? 그러나 실제로 교촌에는 웜홀이 있다. 그것도 교촌의 오래된 기와집들의 집집마다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과 통한 작은 아버지댁 뒷담에 나 있는 쪽문을 통해 자주 뒤솔밭으로 다녔다. 이 쪽문을 열고 나가면 뒤솔밭으로 가는데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대문을 열고 동네를 돌아 뒤솔밭으로 가려면 최소한 5~6분은 걸렸다. 이런 쪽문이 우리 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네 큰 기와집들에는 어김없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응당 옛날 큰 기와집에는 뒤로 통하는 쪽문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한옥 마을을 방문해 보니 쪽문이 이렇게 일괄적으로 달린 마을이 한 곳도 없었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안동이나 강릉의 큰 기와집들도 유심히 살펴본 바 이런 쪽문이 달린 곳이 없었다. 심지어 경주의 큰 기와집들을 둘러봐도 집 밖으로 난 쪽문을 달고 있는 한옥은 없었다. 내가 불민해 쪽문 있는 집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쪽문을 둔 집이 없었고 집들이 이렇게 일괄적으로 쪽문을 가지고 있는 마을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쪽문에 대해 최염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최염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셨다. “그건..., 친척들이 빨리 모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문이었지. 무슨 회의를 하거나 급히 전할 일이 있으면 그 쪽문으로 나다니면 쉽지 않았겠나?” 그 말씀을 들으며 나는 무릎을 쳤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그 쪽문들이 웜홀의 기능을 정확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최염 선생님은 그런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이셨는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되물어보셨다. 내가 그 쪽문이 경주 교촌에만 있는 ‘웜홀’이라 말씀드렸더니 재미있는 비유라며 허허 웃으셨다. 지금까지 다소 우스개처럼 말했지만 이 쪽문은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게 볼 수 있다. 먼저 최염 선생님 말씀처럼 이 문은 집안의 급한 일을 전하기 위한 최단거리 웜홀이라는 점에서 교촌의 기와집들이 모두 최부자댁 가솔들이 살았다는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점이다. 이미 몇 차례 언급했듯 교촌의 오랜 기와집들은 모두 최부자댁 나름의 댁호가 붙어 있을 만큼 어느 집 하나 빼놓지 않고 최부자댁 가족과 친인척들이 모여 살았다. 집과 집이 남이 아니고 언제건 드나들 수 있는 가족이고 친척이니 서로 왕래하기 편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 쪽문이었던 것이다. 만약 최부자댁 본가만 덩그러니 있었다면 이런 쪽문을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쪽문 하나만 봐도 교촌 전체가 최부자댁이었다는 말이 성립한다. 최부자댁의 실용성을 보여주는 쪽문은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신비의 문이다. 또 하나 중요하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최부자댁 사람들이 얼마나 실용적으로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한옥을 관심 가지고 둘러보면 알겠지만 어지간히 큰 집이라도 담을 헐고 담 뒤나 옆에 쪽문을 만드는 일은 흔치 않다. 담을 헐어 문을 낸다는 것 자체가 꺼리는 일이기도 하고 보안상의 문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불편해도 돌아서 다니면 그뿐, 굳이 문까지 내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대문을 나와 길을 돌아다닌다고 가정한다면 대가족이 어울려 살고 가복들까지 드나드는 와중에 그 많은 식솔들이 겪는 불편들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 쪽문은 대문이 남쪽으로 트인 곳은 동쪽이나 서쪽 혹은 북쪽으로, 대문이 서쪽으로 트인 곳은 북쪽이나 동쪽으로 나와 있는 등 편의에 맞게 뚫어놓았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러니 이 쪽문이 있음으로 해서 절약되는 이동 시간의 총합은 어마어마하지 않았을까? 지난번 경주에 갔을 때 일부러 이 쪽문들을 둘러보았다. 몇 군데 집의 쪽문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곳곳에 쪽문, 그 나지막하고 좁은 웜홀들이 남아 있어서 적잖이 반가웠다. 빛바랜 작은 문으로 200년 넘게 드나들었을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빨리 감기’로 머릿속에 감아 보았다. 아마 수백만 번의 왕래가 이 작은 문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이 쪽문을 통해 어쩌면 조선 후기의 내로라 하는 유생들과 전국의 이름 높은 과객들이 드나들었을 것이고 또 어쩌면 독립운동하던 열사들도 몰래 드나들었을지 모른다. 그런 한편으론 대문으로 드나들기 어렵거나 민망한 일들이 이 문을 통해 이루어지지도 않았을까? 이쯤 생각하니 쪽문이 그냥 쪽문이 아니고 엄청난 비밀을 품은 신비한 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살던 구새댁, 우리집은 오래전의 위용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했고 작은 아버지댁은 집 주인이 오래 비워둔 탓인지 마당에 풀이 우거지고 집도 조금 내려앉아 예전의 위용을 찾아보기 어려워 안타까웠다. 한옥은 아무리 고대광실 좋은 집이라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주저앉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크고 위용 있던 집이 옹색하게 퇴락하는 모습은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SF영화 토르에 나오는 바이프로스트는 세상의 종말, 나그나로크를 겪으면서 사라졌다. 그 덕분에 토르는 먼 길을 갈 때마다 수고스럽게 묠니르 망치를 휘둘러서 날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다행히 지금도 교촌의 웜홀, 최부자댁 바이프로스트는 곳곳에 남아 있다. 세상 바람들이 그것을 몰라보는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아무 생각없이 쫓아다니던 뒤솔밭이 최부자댁 기운을 북돋우는 보비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보통 어지간한 땅뙈기만 있어도 소나무나 전나무, 잣나무 같은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를 심었음직 한데 보비림에는 활엽수인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주로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보비림으로 괴목을 택한 이유는 침엽수에 비해 화재 가능성이 적고 수종 자체가 웅장하고 커서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소나무 같은 침엽수종은 우리나라 가옥 구조상 중요한 목재로 사용되기 때문에 심어 놨다가 쉽게 베어낼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소나무는 특징상 불붙기 쉬운 나무다. 소나무로 숲을 이루려면 나무와 나무 사이가 가깝게 붙어 있어야 하는데 건조한 시기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들끼리 마찰이 일어나는 정도로도 불이 쉬 나는 나무다. 소나무의 마른 잎사귀들은 ‘깔비’라고 해서 나무를 주로 때던 시절 불쏘시개로 널리 활용되었다. 기운을 보하는 나무로 심었는데 현실적인 유혹에 의해 쉽게 베어내면 허사가 될 것이고 근처에 많은 인가가 있는데 불이라도 나면 그것을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소나무나 전나무, 잣나무 같은 침엽수는 애초에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은행나무 같은 수종도 고려할 만하지만 아무래도 열매가 익을 무렵 냄새가 문제였을 것이다. 게다가 은행나무는 가을에 노란 물이 들어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산의 위용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된 나무가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흔히 ‘괴목’이라 부르는 나무들이었을 것이다. 이 두 나무는 높이가 30미터 가깝게 자라고 가지가 넓게 뻗어나가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는 족히 작은 산처럼 보일 만큼 자란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어느 마을이나 동네 어귀에 느티나무를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고 그 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키 크고 가지 넓은 나무가 수십 그루 가지를 맞대고 우거져 있다면 그야말로 산처럼 웅장하게 보일 것이다. 최부자댁 보비림에는 지금도 20수 가까운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그러나 이 보비림은 원래 지금보다 훨씬 많은 괴목들이 심어져 있었고 위용 역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다시 보비림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숲에 빈 곳이 많이 드러나 있음을 알게 된다. 산이 가지런히 이어져 있지 않고 군데군데 허리가 끊어져 있는 듯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최부자댁 기운을 지키던 이 중요한 나무들이 중간중간 베어졌을까? 일제강점기, 대동아공영권 운운하며 한반도 일대와 중국, 필리핀과 사이판 등 동남아시아 쪽은 물론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1941. 12월~ 1945. 8월)까지 일으킨 일본은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해 우리 국민을 괴롭혔다. 이른바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집안의 쇠붙이, 특히 탄피의 재료가 되는 유기에 대해 철저한 수탈을 감행했다. 집안의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과 젓가락조차 남아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할아버지 노여움은 말할 수 없이 컸어요. 이 나무들은 대대로 집안의 기운을 지켜온 나무 아닙니까?” 최부자댁 후원의 보비림도 바로 그 공출의 대상으로 들어갔다. 괴목은 목질이 단단하고 나뭇결이 아름다워 가구용으로 많이 쓰이는 장점이 있다. 또 한편으로 나무 자체의 탄성이 좋아 대포의 포신이나 포 운반용 바퀴를 만드는 데 이 괴목이 유용했다. 괴목 공출이 확정되고 나자 군청 관계자들이 뻔질나게 최부자댁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당시 가주이셨던 문파 선생님(최준 : 1884-1970)이 이를 쉬 허락할 리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회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문파 선생님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군청 관계자들은 몸이 달았다. 이에 대해 최염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한다. “그때 할아버지 노여움은 말할 수 없이 컸어요. 이 나무들은 그냥 보기 좋자고 심어 놓은 게 아니고 대대로 집안의 기운을 지켜온 나무 아닙니까? 이걸 베어내면 집안의 기운이 절단나는 거라요. 더구나 그 나무가 일본놈들 전쟁치는 대포에 쓰인다 카니 이게 말도 안 되는 기라...! ‘내 죽기 전에는 안 된다’고 한 마디로 잘라 거절하셨지요” 보비림에 대해 회고하는 최염 선생님 얼굴이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상기되셨다. “그렇게 몇 며칠을 군청 관계자들이 드나들었어요. 그러다 하루는 군청 담당자가 할아버지께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최염 선생님의 주름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최염 선생님이 회고한 군청의 협박은 의외였다. “참봉 어른, 만약에 이 괴목들을 내주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이 계림의 괴목들을 베어야 합니더. 일본이 계림은 신령한 숲인 걸 알아서 함부로 공출 대상에 넣지 않았는데 참봉 어른이 이렇게 버티시면 계림의 괴목들을 베어가겠다 캅니다” 이 말을 들은 문파 선생님은 깊은 고뇌 끝에 결국 공출에 응하고 말았다. “계림은 나라의 보배고 우리 숲은 한낱 집안에 딸린 나무일 뿐이다. 우리 집이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계림을 망칠 수는 없지 않겠나!” 당시 문파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는 최염 선생님은 어느새 눈물이 글썽해지셨다. 그 말씀을 들을 때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진한 감동과 함께 소름이 돋음을 느낀다. 결국 그런 이유로 최부자댁 보비림은 반 넘 게 잘려 나갔다. 지금의 보비림이 웅장한 산의 자태를 잃어버린 채 그냥 괴목 많은 숲으로 전락한 데는 바로 이런 사연이 숨어 있다. 그러나 최부자댁 보비림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6·25전쟁이 지난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또 한 번 잘릴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이 일은 엉뚱하게도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관련되었다. 독자들이 기억하다시피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미상~1593)가 일본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 순절한 것으로 전해진 역사적인 명소다. 6·25로 인해 진주의 촉석루가 폭격으로 불타버린 것을 안 이승만 대통령이 이에 대해 전격 복원을 지시하면서 최부자댁 보비림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공교롭게도 촉석루가 괴목으로 지은 정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 일을 맡은 건설사에 이종하 교수란 분이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 일에 적극 개입했다. 이종하 교수는 문파 선생님이 설립한 대구대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마침 최염 선생님의 대구대 시절 은사님이셔서 최부자댁에 대해 소상히 알았고 자연 최부자댁 후원에 괴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때 이종하 교수는 문파 선생님께 이렇게 청했다. “참봉어른, 이 나무들이 그냥 이렇게 서 있다가 사라지면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촉석루 짓는 데 쓰이면 대대로 공이 될 게 아닙니까? 더구나 이 나무들을 경주 최부자댁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조상님들을 빛낼 수도 있습니다” 값은 부르는 대로 쳐 줄 테니 촉석루를 짓기 위해 괴목을 내 달라는 이종하 교수에게 문파 선생님은 거꾸로 새로 촉석루를 지을 거면 소나무로 지어라고 훈계하며 이를 끝까지 거절하셨단다. 뒤에 나는 일부러 촉석루에 가 나무를 확인해 보았다. 촉석루는 괴목 아닌 소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결국 괴목을 구하지 못한 건설사는 대통령을 설득해 괴목 대신 소나무로 지은 것이다. 촉석루는 앞에서 말한 대로 6.25때 불탄 것을 1960년에 복원했다. 자칫 최부자댁 괴목들이 목재로 사용되었다면 촉석루는 그 멋을 되찾았을지 모르지만 지금 보는 최부자댁 보비림은 그나마 지금보다 훨씬 옹색해졌을 것이다. 일제의 서슬 푸른 협박에도 굴하지 않다가 계림을 지키기 위해 나무를 내주셨던 문파 선생님의 고뇌를 되새기면 이 숲에 서린 비분강개가 느껴져 새삼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인자 집을 옮겨도 될 만큼 나무들이 자랐디라, 이사 함 해보자” 교촌을 둘러보고 온 최기영 공(1768~1834)의 한 마디가 집안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이 큰 집을 옮겨야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가복들은 일사불란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싼 짐은 우선 근처의 집들로 옮겨 두었다. 짐을 싸고 바로 이사할 수 없었다. 교촌에는 아직 집이 지어지지 않았고 이 큰 집을 교촌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큰 공사가 시작됐다. 우선 기와를 내리고 위에서부터 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해체된 집들의 기둥은 정확하게 두 자씩 잘라내 옮겨갈 준비를 시작했다. 높이 지어 올린 솟을대문도 작게 줄였다. 교촌으로 가려면 무엇이건 작게 낮춰야 했다. 한편 교촌에서는 더 큰 토목공사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집터를 전부 깎아내기 시작한 것은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수수께끼처럼 보였다. 사실은 바로 옆에 향교가 있어서 이 향교보다 정확하게 석 자 낮도록 땅을 깎아낸 것이다. 땅을 깎아내자 흙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인부들은 집터 뒤쪽으로 이 흙들을 쌓아 올렸다. 땅을 거의 깎아내고 보니 쌓아올린 흙더미가 마치 작은 산처럼 보였다. 이곳에 일제히 나무를 심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흙을 나르고 나무를 심던 인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피로를 호소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커다랗게 가지를 뻗은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아래 마련된 멍석으로 올라가 드러누웠다. 이미 공사 뒤쪽으로는 심은 지 수십 년 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울창한 괴목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최부자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 보비림, 교촌 사람들에게는 삶의 휴식처이자 놀이터 교촌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최부자댁만 보고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요즘은 월정교가 재건되어 있고 교촌 한옥마을이 있어서 그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최부자댁을 답사하기 위해 방문한 사람에게는 정말 수박 겉핥기와 같은 일이다. 그러나 최부자댁을 일부러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다보니 오직 최부자댁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코스가 되고 말았다. 이미 독자들은 교촌에서 근래 새로 지은 현대식 한옥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기와집들이 최부자댁과 관련한 집들이라 한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집들만큼 귀한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 최부자댁 집 뒤로 넓게 펼쳐져 있는 보비림(補備林)이다. 이 보비림에 가면 수령(樹齡) 300년 이상, 둘레가 족히 3~4미터는 되고 높이가 30미터는 쉽게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져 있고 최근에 심은 감나무가 밭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들은 교촌 최부자댁의 출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이야기를 안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이 숲을 교촌 사람들은 ‘뒤솔밭’ 또는 ‘뒤송지’라고 부른 곳이다. 솔밭 혹은 송지(松地)라는 말을 보면 소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솔밭이 없어져 버렸다. 솔밭이 있던 자리는 오래 관리를 하지 않아 변이를 거쳐 아카시아나 잡목으로 뒤덮여 있다. 솔밭은 보비림으로 들어서다 왼쪽 9시 방향으로 보이는 곳에 10여 미터 높이의 둔덕이 있는 곳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족히 10여미터는 될 만한 높이의 소나무가 100여주는 넘게 심어져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뒤송지나 뒤솔밭이라 부른 이 숲 이름은 이렇듯 소나무가 있어서 불린 이름이었던 것이다. 소나무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 숲은 교촌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쉼터 같은 곳이었다. 특히 여름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들이 넓은 그늘을 드리운 덕분에 평상을 두거나 멍석이나 가마니를 깔고 마을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즐겼다. 나에게도 이 뒤솔밭은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먼저 이곳은 토끼풀과 염소를 위해 풀을 베던 곳이었다. 그 시절 시골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에 가축들을 키우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 역시 집에서 키우던 토끼와 염소 같은 가축들을 위해 이곳으로 자주 풀을 베러 다녔다. 뒤솔밭 둘레에 아카시아가 우거져 있어서 이 나뭇잎을 따서 먹이기도 했고 뒤솔밭 이곳저곳에 무더기로 나 있는 바랭이풀을 뜯어 가축들에게 주기도 했다. 큰 나무들이 많다 보니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 뛰놀던 아이들 누구 하나 이 숲이 왜 그곳에 있었고 누가 숲을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어른들도 그저 뒤솔밭이 있는 것만 알았지 왜 만들어 놓았는지 설명해주는 사람들의 없었다. 추측컨대 최부자댁 후손들은 당연히 내막을 알았을 테지만 그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해줄 필요도 기회도 없었을 성싶다. 그런 놀이터이자 쉼터였던 곳이 최부자댁과 명운을 함께 한 보비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최부자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10년 이후부터다. 그렇다면 보비림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위에 소개한 이사 현장에서 잠깐 소개했듯 최부자댁은 원래 지금의 내남면 이조리에 있었다. 흔히 경주최부자의 정신적인 시조로 알려진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명성에 비해 부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청백리로 공식인정될 만큼 청렴결백하였기에 나라로부터 받은 녹봉 정도로 사신 분이다. 그 셋째 아들인 최동량 공은 현감정도의 벼슬을 살았고 역시 녹봉 받은 만큼 살았던 분이다. 부자가 된 것은 그 뒤를 이은 최국선 공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이앙법을 도입하면서부터였는데 최의기 공과 그 후손들인 최승렬 - 최종률 -최언경 - 최기영 공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조에서 지냈다. 결정적으로 부족한 배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이사하기 두 세대 전부터 나무를 심은 최부자댁 선조들 최부자는 최기영(1768~1834) 공 대에 이르러 교촌으로 옮겨왔는데 이때는 경주 인근에 첫손 꼽히는 부자로서 완전히 입지를 굳혔을 때다. 이조에서 교촌으로 옮겨온 구체적인 사연은 이후에 다시 말하겠지만 교촌으로 이사하는 데는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오랜 계획과 꾸준한 준비를 거쳐야 했다. 기본적으로 교촌은 풍수학적으로 터가 아주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때는 요석공주가 살았던 곳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였으니 적어도 왕가의 기운을 품었던 터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부자댁에서 보면 경주의 성산(聖山) 남산이 정면으로 뚜렷이 보인다. 교촌 앞으로 흐르는 남천은 예로부터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젖줄로 배산임수에서 임수의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배산 즉, 집 뒤쪽으로 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착안한 것이 보비림이다. 보비란 말은 ‘모자란 것을 갖춘다’는 뜻이다. 즉 보비림은 모자라는 풍수학적 약점을 채우기 위해 조성한 숲이라는 말이다. 경주 최부자는 이런 풍수적 사실을 간파하고 이사하기 훨씬 이전부터 철저한 이사계획을 세운 후 미리 실현했다. 실제적인 이사는 최기영 공 대에 이루어졌지만 그 시작은 최기영 공의 할아버지인 최종률(1724~1773) 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최기영 공이 아주 어릴 때나 그 이전부터 미리 교촌의 땅을 사들이고 기운을 보충하는 보비림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보비림이 충분히 커서 넉넉히 산처럼 보이는 배산(背山)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사한 셈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곳이 또 다른 교촌의 명소 중 한 곳인 ‘숙연당’이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와 구체적인 보비림에 대한 긴 이야기는 다음 호에 쓰겠다.
“할매요, 이거는 먼기요?” “어, 거거는 유자다” “그라믄 묵을 수 있는 건기요?” “묵기는 하는데 아직은 새고로버가 안 대고 냉자 익으면 차로 끼래 마시는 기다” 할머니는 커다란 유자 열매를 가리키며 아직은 딸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내심 하나 얻어먹으려던 빤한 속셈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배영신 할머니의 자상함은 경주최부자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를 내 가슴에 심어놓았다. 교촌이 최부자댁 일가로 이루어진 마을이면서도 최부자댁 사람들이 마을에서 거의 활약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배영신 할머니의 기억은 무척 인상적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뵌 배영신 할머니는 전통적인 할머니 모습을 거의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이를테면 참빗으로 곱게 빚은 머리를 비녀로 쪽지어 계셨고 늘 계절에 맞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계셨다. 최부자댁의 오랜 일가이신 배영신 할머니는 마을 일에도 관심이 많아 마을 부녀회 회장을 맡아 오래 활동하셨다. 말랐지만 온화한 인상의 할머니는 그때 이미 연세가 70세쯤으로 실제로 동네일은 돌보지 못하셨고 부회장인 어머니와 상의하시면서 부녀회 일을 돌보셨다. 할머니는 특히 마을 아이들 독서에 관심이 많아 할머니 댁 집안 대청에 커다란 책꽂이를 마련하고 4~500권은 족히 되는 책을 꽂아놓고 동네 아이들을 위해 ‘마을문고’를 운영하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어린이들을 무척 귀여워하셔서 내가 책을 빌리러 가면 과자나 사탕을 내주면서 따듯이 칭찬하고 격려해주시곤 했는데 지금도 그 자애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특히 그 시대에 풍금을 치실 줄 아는 아주 신식 할머니셔서 그 모습 자체로 무척 신기했다. 할머니는 화초를 아주 잘 기르셨다. 할머니는 유자와 선인장 같은, 다른 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화초들을 많이 가지고 계셔서 꽃 좋아하는 어머니가 자주 꽃구경을 다니곤 하셨다. 추위에 약한 화초들이 많다 보니 할머니는 집 기단 아래쪽에 땅을 파고 약 반 평쯤 되는 온실도 만들어두었는데 겨울의 찬 기온에 약한 화분들을 이 온실에 넣고 겨울을 나도록 하셨다. 할머니 댁 화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파초’인데 어린 나는 그 파초를 ‘바나나 나무’로 알고 신기해했다. 어머니께서 할머니께 파초 싹 하나를 얻어 우리집 꽃밭에도 옮겨 심었는데 그해 겨울 얼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집에도 온실을 만들어 삭아서 떨어진 잎은 제거하고 둥치를 짚으로 둘러싸 보존했던 기억이 새롭다. 배영신 할머니는 최부자댁 바로 옆집, 지금의 교동법주 간판이 걸린 집의 안주인이셨다. 교동법주라는 말에서 보듯 최부자댁 전통주로 알려진 교동법주를 담그신 장본인이시다. 뒤에 경주 최부자댁 전통 가주를 직접 맛볼 기회가 있었는데 교동법주와는 당도와 점도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교동법주는 그 나름의 운치와 향기가 있어 그 자체로 명주라 하기에 손색없고 교촌의 명산품이 된 것 역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할머니는 원래 안동 출신으로 ‘안동 배부자댁’ 집안의 후손이신데 어쩌면 그 댁 전통 가주일지도 모른다. 교동법주는 전국의 어느 술보다 향기롭고 맛이 좋아 나도 즐기는 술인데 교동법주를 마실 때면 언제나 할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윤경렬 선생님께 배운 경주와 이종룡 선생님께 배운 글쓰기의 기본이 내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최부자댁 일가는 아니지만 교촌에는 대단한 분들이 세 들어 사셨다. 먼저 알려드릴 분이 경주의 향토사학자이자 인형연구가로 경주 신라문화동인회의 창립 주축이셨던 윤경렬 선생님이다. 윤경렬 선생님은 우리 뒷집인, 바로 위에서 소개한, 채영신 할머니 댁에서 새 들어 사셨는데 늘 한복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다. 여름에는 흰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 겨울에는 검은 두루마기에 검정 고무신 식이었다. 머리는 반곱슬의 웨이브 진 머리를 길게 길러서 자연스럽게 풀어헤치거나 아주 가끔 핀으로 머릿결을 고정하고 다니셨는데 그 휘날리는 백발의 모습이 표표한 신선처럼 여겨졌다. 어릴 때부터 인사 잘하기로 소문났던 나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어김없이 작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선생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답례해주곤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경주시립도서관이 있던 서라벌문화회관 별실에서 토요일마다 열린 어린이 향토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 이유도 윤경렬 선생님 덕분이었다. 뒤에 어린이 향토학교는 경주국립박물관이 생기면서 그 별관 지하강당으로 자리를 옮겨 ‘어린이 박물관학교’로 확대되었다. 나 역시 자연스럽게 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게 내가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원초적인 계기였다. 선생님은 특히 칠판에 부처님 그림을 순식간에 그리시거나 탑이나 나무 등을 쉽게 그리면서 열강을 해주셨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윤경렬 선생님의 기억은 ‘무서운 인형’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가지고 놀 게 별로 없었던 시골에서 윤경렬 선생님 댁에서 가끔씩 굴러나오는 인형들은 아주 특별한 장난감이었다. 붉은 토기에 거친 재질의 실 같은 것으로 수염을 붙여 놓은 다소 무서운 형상의 인형은 그때는 몰랐지만 고청사가 만든 최고의 한국형 경주 토산품으로 알려졌다. 나는 바로 그 기막힌 인형의 파편을 가지고 놀았던 몇 안 되는, 어쩌면 유일한 아이였다. 윤경렬 선생님은 남산을 무척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기셔서 각별한 연구업적을 남기신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학입시시험을 치른 후 윤경렬 선생님의 ‘남산연구’ 책을 기반으로 한 달 동안 샅샅이 남산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그게 모두 선생님과의 인연 덕분이다. 또 한 분, 교촌에 오래 사시면서 마을 일에도 적극적이셨던 분이 경주고등학교에서 오래 국어 교사로 근무시면서 경주의 야간학교인 ‘한림학교’를 이끄셨던 이종룡 선생님이시다. 이종룡 선생님은 내 어릴 때 우리 집 바로 앞,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셨는데 공교롭게도 슬하의 네 자녀분들이 우리 누나들과 형과 비슷한 연령대였고 사모님께서 어머니와 친숙하셔서 서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다. 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 호박을 심었는데 선생님댁 호박넝쿨이 우리집을 넘어와 호박을 맺으면 우리가 그 호박을 담장 위에 올려놓았고 우리 호박이 선생님 댁으로 넘어가 맺으면 선생님 댁에서 우리 담장에 올려놓곤 하셨다. 한번은 선생님과 아버지께서 서로 호박을 담장에 올리다 마주쳐서 ‘이러지 말고 앞으로는 그냥 자기 것처럼 따먹자’며 웃으신 일도 있다. 선생님은 사모님께 무척 자상하셨고 집안일도 일일이 세심히 챙기셔서 사모님이 그 자랑을 어머니께 하셨던 모양이다. 집안일에 무덤덤하셨던 아버지는 그로 인해 자주 어머니 원성을 들었고 그때마다 의문의 패배를 맛보곤 하셨다. ‘앞집 이선샘 반만 쫌 해보이소!’ 어머니의 역성이 들린다 싶으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출근길을 서두르셨다. 선생님은 경주의 선생님들 중 가장 많은 주례사를 하신 분이지 싶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잘 난 학생들보다 집안 어렵고 문제성 있는 학생들을 더 챙기셨고 때로는 어려운 제자와 졸업한 여유 있는 제자를 이어주는 가교역할도 하시며 힘든 제자들을 돌보셨다. 그 엄혹하던 독재시절 시국에 대해서도 엄정한 비판을 서슴지 않아 편중되지 않은 가치관을 심어주는 선구자이기도 하셨다. 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동문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은 동문들이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추앙한 분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경주고를 은퇴하신 이후에도 한림학교에 진력하시면서 어려운 학생들을 돌보는 일을 오래 더 하셨다. 한때는 본지, 경주신문의 대표이사를 맡아 경주의 참언론을 이끌기도 하셨기에 그 발자취를 아는 나로서는 본지에 몸을 둔 자체로 영광스럽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경주고에 다녔던 나는 운 좋게도 선생님을 담임으로 모시며 내 평생 쓸 글쓰기의 기본을 제대로 익힐 수 있었기에 그 감사함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로 이종룡 선생님은 우리 앞집에 오래 세 들어 사셨는데 그 주인분이 선생님과 친분이 깊어 수십 년 동안 집세를 올리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그 주인댁 역시 경주최부자 후손이신데 이 역시 최부자댁 후손다운 배려와 아량이었지 싶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두 분 선생님은 내가 교촌에 각별한 향수를 느끼는 아주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신 분이어서 언젠가 이 이야기를 꼭 한번 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경주최부자 이야기의 발판이 두 분 선생님에게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옷깃이 여미어진다. 마침 두 분 모두 이북 출신으로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주을’이 고향이시다. 그 먼 곳을 떠난 두 분 선생님께서 자유와 민주를 찾아 남한으로 오셨고 그 많은 도시 중 경주에, 더구나 교촌에 터 잡고 사신 인연은 경주에나 교촌에나 여간 놀랍고 고마운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역사문화의 산실 경주에, 자손대대로 백성들에게 나눔을 배푼 경주최부자댁 일가들에서 한 분은 경주의 역사문화 발전과 후진 양성을, 또 한 분은 경주의 문학발전과 수 만 명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니 우리 시대 또 다른 경주최부자의 현신이랄 수 있다. 삼가 두 분 선생님을 기린다.
“새로 왔으면 고마 조용히 지내지 말라꼬 나무 아를 이래 뚜디리 팼노 말이다!” 대문을 밀고 들어온 어느 아주머니가 숨넘어가 가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머니는 그저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뒤에서 형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내가 암만 가마 있을라 캐도 저노마 저게 맨날 한판 붙자 카는데 그라믄 우야는기요?” 우리가 처음 교촌에 이주해 갔을 때 어린 나는 문밖출입을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자주 들었다. 당시 교촌은 ‘교리’라는 말로 더 불렸는데 그 교리라는 명칭 뒤에 쉽게 따라붙은 말이 깡패였다. 돌이켜 보면 교촌이 깡패와 조합을 이룬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교촌은 기본적으로 향교가 있는 마을이었다. 교촌이라는 명칭 역시 조선시대 관립학교인 ‘향교’의 교(校)에서는 나온 말이다. 더욱이 교촌은 영남일대의 거부 경주최부자와 그 가문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고 대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나눔을 실현해온 집안이다. 이런 마을이 깡패라는 끔찍한 말과 조합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조화다. ‘교리깡패’는 어린 시절 은근한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다른 동네에 비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런 말의 이면에는 절대적이라 할 만한 이유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요석궁의 존재 때문이었다. 요석궁은 경주 최부자댁 일가인 최모 회장님이 경영하는 곳이었는데 이 분이 젊은 시절부터 강단이 세고 용력이 남달라 오래도록 전국을 아우르는 건달들의 대부로 알려져 있었다. 요석궁은 당시 전국에 소문난 요정이었고 술을 파는 곳이다 보니 자연 이런 저런 소문에 휩싸였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직접 들었던 말로는 요석궁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건달들이 다 찾아와 최모 회장님을 모시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누구도 함부로 하기 힘든 독보적인 건달들의 아성이 됐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들었던 이 소문은 아주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경주최부자 책을 쓰면서 최부자댁 종손이신 최염 선생님께 여쭤본 바나 내 경험에 비추어 건달들이 떼로 몰려다닌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최염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요석궁 최 회장님이 도량이 넓어 곤궁에 처한 건달들을 잘 보살펴준다는 소문이 전국에 나 있었고 그 소문을 듣고 이름깨나 있는 건달들이 찾아와 몸을 의탁한 경우가 가끔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을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고 만약 있었더라도 누가 건달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은근한 두려움의 근원이었던 ‘교리깡패’라는 낙인과 달리 마을은 특별한 폭력사태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험악한 별칭 때문인지 타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도 지레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요컨대 ‘교리깡패’가 유명했던 이유는 실제로 깡패가 횡행해서가 아닌 요석궁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이런저런 소문들이 부풀려져 생긴 말이었다. 물론 아주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시의 교촌에 사는 젊은이들이 다소 거센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이전에 언급했듯 교촌 인근에는 최부자댁 일가들 이외에 놋전을 제외하고도 80여호의 인가가 있었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그런데 이들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다소 거칠게 대하는 면이 있었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교촌에 들어와 살 때만 해도 나보다 열서너 살 이상 차이 나는 내 사촌 형들이 먼저 터 잡고 살던 젊은이들과 적지 않게 신경전을 벌였을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 집안 형들이 체격이 크고 완력이 좋은데다 운동까지 잘해 삽시간에 마을을 평정하면서 텃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형 역시 고교 시절 교촌으로 이사 오면서 동네의 또래에게 며칠이나 갈굼을 당한 끝에 대판 싸움을 벌여 상대를 묵사발 낸 적이 있다. 이 글 서두에 쓴 드잡이는 바로 그때의 일이다. 그렇듯 그 시대는 어느 지역이나 그 정도의 텃새와 그로 인한 사건이 흔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교촌 말고도 바로 인근의 놋전깡패, 건천깡패, 안강깡패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는데 정작 그쪽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오히려 교리깡패라고 불렀던 험악한 분위기에 비해서는 지극히 평화로웠던 마을이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교리깡패가 다분히 과장된 말인 이면에 교촌은 묘하게 사람들이 나뉘어 사는 분위기였다. 내가 교촌에 살았던 것은 다섯 살 적부터 고교졸업할 때까지였고 그 후로도 집이 헐리기 한 해 전이었던 2007년까지 본가가 교촌에 있어서 누구보다 교촌의 최근 현황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을 거의 모른 채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냈고 그 후로도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이 지냈다. 최부자댁 일가들은 마을 일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런 존중과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그럴 만했던 것이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은 마을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마을 공동사업에도 나오지 않았고 반상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되짚어보면 내 또래 연령대가 없기도 했지만 최부자댁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을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당시 어머니가 부녀회 부회장을 하시면서 동네를 내집 드나들 듯 다니셨는데 온갖 집안 형편을 미주알고주알 꿰고 계셨으면서도 유독 최부자댁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거의 정보가 없었던 것도 최부자댁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았던 정황이다. 다만 어머니는 최부자 일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어느 집을 지칭해 그 집 아들들의 이름을 붙여 ‘OO이 최선생댁’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 이유는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늦게, 내가 교촌 최부자댁 일가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 이미 경주 최부자댁 일가들은 교촌을 다수 떠나 있었다. 내가 모시고 책을 쓴 최염 선생님만 해도 젊은 시절에 할아버지이신 최준 선생님을 모시기 위해 대구와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셨고 본가에서 지내신 일이 많지 않으셨다. 자제분들도 자연히 최염 선생님을 따라 경주를 떠나 살았으니 마을 사람들과 섞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최부자댁 일가들이 살던 다른 집들도 비슷한 사정이었다. 내 또래 후손들은 교촌에 거의 없었고 최소한 4~5년 이상 선배들이 몇 명 남아 있을 뿐이었다. 중요한 최부자댁 일가였던 또 한 곳은 요석궁으로 상업지가 되어 역시 일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집이 되어 있었다. 그 외 몇 그러니 불과 이런 집들을 빼면 교촌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기와집 중 최부자댁 일가들이 사는 곳은 겨우 다섯 곳뿐이었고 그나마 젊은이들은 대부분 외지로 떠난 채였던 셈이다. 그나마도 원래 최부자댁 일가들이 살던 집 중 중요한 두 곳이 우리 아버지 형제분들이 사서 들어와 사셨다. 구새댁과 파훼댁이 아버지 형제분들이 살던 집이었다. 이렇듯 최부자댁 일가들이 교촌에서 조금씩 멀어져 살아가기 시작할 무렵 반대로 아버지 형제분들은 교촌에 대거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5남1녀, 6남매 중 막내이셨는데 앞 회에서 말했듯 둘째 작은아버지와 함께 우리가 살던 최부자댁 권속인 구새댁을 사오셔서 작은아버지는 안채를, 아버지는 사랑채를 나누어 사셨다. 두 분 이외에 위로 고모님과 큰아버지, 셋째 작은아버지가 교촌에 이주해 사셨다. 이렇다 보니 원래 최부자댁으로 인해 최씨가 많이 살던 동네에 갑자기 박씨가 부쩍 늘어서 살게 되는 현상이 생겼다. 더구나 아버지 형제분들은 모두 6~8남매씩 자녀들을 두셨는데 내 사촌들만 30명에 이를 만큼 박씨가 복닥거리게 되었다. 그중에서 절대적으로 아들 비율이 많았던 우리 집안 특성으로 인해 어느 사이엔가 마을을 나서면 어디서나 사촌 형들이 나와 있을 만큼 우리 집안은 짧은 시간에 교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교촌은 최부자댁 일가들이 조용하게 전통을 잇는 가운데 우리 집안을 비롯해 교촌으로 이주해온 새로운 구성원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동네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조화의 바닥에는 존중과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최부자댁 일가를 자연스럽게 예우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존중에는 교촌의 터줏대감이자 경주의 가장 대표적 양반가인 최부자댁에 대한 존경심이 넓고 깊게 깔려 있었다. 더욱이 백성을 아끼는데 누구보다 열의가 높았던 댁이 최부자댁이었으니 그 후손들일망정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부자댁 일가분들이 마을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던 것은 그런 분위기를 알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편하고 자유롭게 존중하려는 배려였을 수도 있다. 5~60년 전만 해도 은근히 집안을 따지던 시대였는데 누구나 아는 최고의 집안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 사이게 섞이게 되면 그 자체로 분위기가 어색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뒤에 교촌에 살았던 최부자댁 선배님들에게 이때의 일을 물어본즉 비슷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존중은 반드시 함께 해야 생기는 것이 아님을 이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교리깡패가 유명했던 것에는 최부자댁의 전통에 반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입방아에 오르면서 생긴 헤프닝일 것이다. 내 눈에는 교촌은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교촌의 중심은 당연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경주최부자댁 종택이다. 경주최부자댁이 교촌으로 이사온 이후 대대손손 지키고 살고 있으니 달리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최부자댁을 진정으로 최부자댁 답게 하는 중요한 공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최부자댁 앞에 넓게 펼쳐진 공터다. 넓이가 15미터, 길이가 60미터 정도 되는 이 공터는 마을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곳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 이 공터를 왜 만들었는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이 공터는 최부자댁이 처음 생길 때부터 있었던 공터였음은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공터를 큰마당이라고 불렀는데 마당치고는 이름 그대로 정말 넓은 마당이었다. 큰 기와집이 많다는 것 이외에 한적한 시골이었던 이 교촌에 도대체 왜 이런 넓은 마당이 필요했을까? 큰마당은 소통의 장이었고 정보전달의 공간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누구 한 사람 뭐라 하지 않았다. 비록 만들어진 의도는 몰랐으나 큰마당은 마을 사람들이 크고 작은 일을 벌이는 중심지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마을에서 철마다 여는 풍물놀이의 시작과 끝도 큰마당이었고 마을 공동의 큰 행사를 열 때도 이곳에서 했다. 아주 가끔씩 경주시에서 시민들 대상으로 영사기를 돌렸다. 그때마다 동네 통장 아재가 ‘오늘 밤에 큰마당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며 반드시 나와보라고 집집마다 알리고 다녔는데 ‘영화’라는 말에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시간에 맞추어 큰마당으로 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럴 때 큰마당에는 응당 넓은 차양이 하나 쳐진 후 그 아래 영사기 놓을 책상이 설치되고 영사기 맞은 편 10여 미터에 하얀 스크린이 설치되었다. 스크린 앞으로는 멍석과 가마니가 깔리고 동네 주민들은 다투어 좋은 자리를 찾아 않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영화란 것이 ‘대한뉴스’ 수준도 안 되는 홍보성 흑백 영사물이어서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도 시골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영사기를 통해 사진과 동영상이 자막에 비춰진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좋은 구경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큰 역할을 하는 곳이 이 큰마당이었다. 이 큰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윗마을이라 했고 서쪽은 아랫마을이라 불렀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수시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패를 갈라 공차기도 하고 걸핏하면 전쟁놀이도 했다. 전쟁놀이라고 했지만 이때의 놀이는 고무줄 새총과 활까지 동원하는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아이들끼리의 전쟁이어서 간혹 돌맹이나 화살에 맞아 다치는 아이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긴 몽둥이와 대나무 장대를 들고 휘두르다 보면 머리가 터지고 손이 깨지는 일도 흔했지만 된장 한 덩이를 바르는 것으로 대부분 부상이 무마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마당에서 하루종일 욕설과 함성이 난무하고 악쓰는 소리, 우는 소리, 웃는 소리와 온갖 난리굿을 떨었는데도 최부자댁은 물론이려니와 그 근처의 어느 큰 기와집에서도 동네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못 놀게 하거나 야단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최부자댁이 바로 근처에 있다고 해서 조심하거나 망설이는 아이들도 없었다. 가끔씩 공을 차다 공이 근처 큰 집들의 담장을 넘어가면 누구랄 것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대문으로 달려가 공을 주워오기도 했다. 큰마당의 기능은 또 있었다. 6~70년대는 텔레비전은 거의 없고 라디오도 한 집 건너 한 대씩 있었던 시대였다. 신문이 있었지만 신문 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살만한 사람이고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야 했다. 그런 만큼 국민들이 나라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국가에서 비행기로 삐라를 살포했다. 내 기억에 일 년에 서너 차례, 아마도 3개월에 한 번쯤 삐라를 뿌렸을 것이다. 삐라가 뿌려지는 날은 파란 하늘에서 비행기가 날아가고 그 꽁무니로 하얀 종이가 마치 반짝이 비닐 가루 떨어지듯 흩날리며 내려왔다. 그 종이의 대부분이 큰마당과 최부자댁으로 떨어졌다. 하늘에서 보면 최부자댁 사랑채가 불에 타 공터처럼 변했고 큰마당이 목표점으로 보였을 테니 교촌에 삐라를 뿌린다면 그 두 지점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삐라가 뿌려지면 동네 아이들은 벌떼처럼 큰마당과 최부자댁으로 달려 들었다. 아이들은 경쟁하듯 삐라를 주운 이유가 딱 하나, 딱지를 접기 위해서였다. 종이 자체가 귀한 시절, 삐라는 딱지 접기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재료였다. 그 내용은 대부분 대통령이 그려져 있었으니 보나마나 정부를 홍보하는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그런 내용은 볼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삐라는 딱지로 사용되다 종국에는 아궁이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로 사용되며 원래 목표보다 훨씬 다양한 기능을 하며 최후를 마쳤다. 이런 대략의 일로 미루어 큰마당은 동네 주민들의 소통의 장이었고 정보전달의 공간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최부자댁이 교촌에 들어오면서부터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나눔의 공간, ‘사방백리에 굶어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 그 역사적인 장소 이 큰마당에 대해 어린 시절 내가 들은 아주 특별한 쓰임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 할매’가 해주신 말씀이었다. “한 번은 억수로 큰 숭년이 져가 사람들이 마케다 굶어 죽을라 캤디라. 그때 이 마다(마당)서 가마솥을 질다랗게 걸어놓고 죽을 쏘가 농갈라 줬디라” 우리 할매는 돌아가실 때 연세가 여든넷이셨는데 그때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역산하면 1891년생이시니 경주의 근현대사를 다 보고 살아오신 셈이다. 그런 할매가 당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할매의 말씀은 내가 본격적으로 최염 선생님을 통해 최부자댁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떠올랐다. 큰마당을 왜 만들었느냐는 내 질문에 최염 선생님은 풍수적으로 대문 앞이 탁 틔어야 복이 들어온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내가 할매께 들은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당신도 무릎을 치셨다. “맞아, 내가 어릴 때는 일제 강점기고 가산이 다 일본놈들에게 빼앗겼을 때라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흉년 들면 거기서 구휼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 보통 죽을 쒀서 나눠주었는데 그걸 알려주신 분이 계셨구만!” 최염 선생님 당대에는 백성들에게 무얼 나누어 주지 못했지만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휼 이야기를 오히려 우리 할매의 증언을 통해 들으신 최염 선생님은 무척 감회롭게 생각하셨다. 그때 문득 내가 경주의, 교촌에 살게 된 것에 대한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방백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큰마당은 바로 경주최부자댁의 가장 큰 가르침인 이 가훈을 실현한 역사적인 자리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큰마당이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또 다른 쓰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큰마당이 본격적으로 ‘요석궁’의 주차장으로 쓰인 것이다. 요석궁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있었지만 초등학교 들어간 후 일본인 관광객들이 밀어닥치면서 그들을 실어나르는 대형 버스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점심시간이나 저녁 시간이 되면 연이어 몰려드는 관광버스들로 인해 우리들의 놀이터는 중요한 하나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아이들이 사라진 큰마당에는 동네 아지매들이 기념품을 들고 나타났다. 요석궁에 관광버스가 들어오고 버스 문이 열리면 동네 아지매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파는 물건은 자수정 목걸이, 조개나 복숭아 또는 살구씨로 만든 목걸이, 페넌트, 석가탑이나 다보탑 모형, 기타 경주 인근에서 파는 관광기념품들이었다. 그게 시중 상점과 품질은 비슷하면서 가격은 반 이하였다. 성가셔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내밀어 보이는 아지매들의 호객 소리와 짧은 일본어들은 큰마당의 새롭고 오랜 변화였다. 대형 관광버스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교촌을 둘러싸고 있던 길에도 변화가 생겼다. 계림을 지나 들어오던 작은 길이 어느 날 두 배 이상 넓어졌고 남천교 쪽에서 오던 길도 두 배 이상 넓어졌다. 취로사업을 통해 동네 주민들 상당수가 이 공사에 투입되었고 일요일에는 동네 학생들이 동원되어 크고 작은 돌을 골라내 길을 고르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길로 하루에 수십대씩의 관광버스들이 드나들었다. 요컨대 지금 교촌을 드나드는 길의 기본적인 형태가 이때 만들어진 셈이다.
내가 처음 본 교촌마을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우선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무슨 기와집들이 그렇게 많은지 어린 내게는 무척 낯설고 신기했다. 교촌으로 이사 오기 전 황남동 고분 아래 초가집에서 좁은 방에 육남매가 뒤엉켜 살았는데 이사 온 집은 반듯한 기와집이었고 방이 무지무지 넓었고 방앞에 길게 가로 놓인 쪽마루와 큰 대청도 있었다. 뒤에 아버지께서 큰아버지와 함께 경주최부자댁의 권속인 ‘구새댁’을 사서 안채는 큰아버지가, 사랑채는 아버지가 각각 나눠 살게 된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그냥 넓은 마당이 딸린 기와집에 사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우리집과 큰집은 원래 한 집이었던 만큼 담이 없어 좋았다. 그런데 이 집 뒤쪽에 작은 쪽문이 하나 있었다. 쪽문의 크기는 겨우 어른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높이와 넓이였다. 나는 단순히 이 쪽문이 문 뒤쪽을 통해 그 뒤의 숲으로 가는 문쯤으로만 알았는데 뒤에 이 문의 쓰임을 제대로 알고 나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부자댁 뒤쪽 뒤솔밭은 최부자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놀라운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하간 쪽문을 나서서 골목길을 조금만 걸어 약간의 경사가 진 언덕길을 올라가면 최부자댁을 앞으로 둔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 숲에는 나 같은 아이들이 서너 명은 손을 잡고 둘러야 할 만큼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이 숲 역시 내가 어릴 때는 그냥 단순한 숲일 뿐이었고 우리는 이곳을 ‘뒤송지’ 혹은 ‘뒤솔밭’이라 대충 불렀다. 그런데 이 숲 역시 경주최부자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놀라운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경주최부자댁 책을 쓰면서 알 수 있었다. 그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넓은 밭이 있었는데 그게 딸기밭이었다. 그 딸기밭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솔밭이 나오고 그 솔밭 가운데는 능이 있었다. 이게 내물왕릉이란 사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뒤에 안 일이지만 이 능은 동네 아이들에게는 좋은 놀이터였다. 그 능 앞에 크고 반듯한 돌을 깎아 제단을 만들어 놓았고 그 제단에 붙여 어른 엉덩이가 들어가도 될 만큼의 돌의자도 놓여 있었다. 이게 제단이건 아니건을 떠나 아이들에게는 이른바 ‘임금놀이’하는 놀이기구일 뿐이었다. 그 내물왕릉을 지나면 녹슨 철조망이 가로쳐져 있었고 그 철조망을 지나면 동네 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밭뙈기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 밭을 지나면 다시 철조망이 나오고 그 철조망 안쪽에 거대한 숲이 펼쳐졌다. 그게 바로 계림(鷄林)이다. 이 계림도 앞의 뒤솔밭과 연관되어 매우 감동적인 사연을 가지게 되는데 이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 안 일이다. 뒤솔밭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 아주 얕은, 산이라기보다 얕은 언덕에 가까운, 어찌 보면 큰 무덤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곳에 소나무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었다. 이 숲이 뒤솔밭이라 불린 것은 바로 그 소나무 구릉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구릉을 넘어가면 넓은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포도밭 맞은편에 놋전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포도밭 아래로는 아주 작은 샘이 하나 솟아나고 있었는데 샘의 크기보다 수량이 많아 그 아래쪽 논과 미나리꽝에 농사지을 물을 대고도 남았다. 우리 집 앞쪽으로 약 120~130미터쯤 걸어 나오면 남천이다. 남천은 그야말로 보물단지 같은 곳이었다. 맑은 물에는 올챙이와 개구리가 지천으로 살고 있었고 붕어, 송사리, 버들치, 돌고기, 미꾸라지, 갈겨니, 종개, 모래무지 같은 물고기들이 쉴 새 없이 헤엄치고 있었다. 남천은 물이 깊지 않아 깊어봤자 어른들 허벅지까지 물이 흘렀고 보통은 무릎 아래쪽 정도로 흘렀다. 그러나 교촌에서 좀 위로 3~400미터쯤 올라가면 ‘문디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물이 회돌이하면서 어른들 가슴께까지 물이 찼다. 거기서 더 올라가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아래쪽으로 남천 물길을 빼는 보막이 공사를 해놓았는데 이곳도 보막이 탓에 물이 깊었다. 아이들 키로는 한 길이 넘을 만큼 깊어 물 색깔이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남천은 사시사철 인근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놀았으니 천렵은 당연한 사시사철 놀이고 여름에는 천연 수영장이었고 겨울에는 얼음 썰매장이었다. 남천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지금 교촌 앞 남천에는 그 모습이 대거 사라지고 말았지만 3~40년 전만 해도 남천에는 빛깔 고운 황금 모래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남천은 원래 모기내라는 의미의 문천(蚊川)으로도 불렸는데 이 문천의 모래가 어찌나 곱던지 물길을 거슬러 거꾸로 흐른다는 뜻의 문천도사(蚊川倒沙)라는 유명한 고사가 있을 정도다. 경주에 대해 조금만 공부해본 사람이면 모두 알만한 ‘삼기팔괴(三奇八怪)’ 중의 하나가 바로 남천에서 비롯된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뒤에 안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남천에는 빛깔 좋은 모래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 때문에 남천에는 소달구지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모래를 퍼날랐다. 황금색 모래들을 가득 실어 나르는 아저씨들이 모래 무게에 눌린 소와 뒤엉켜 용쓰는 모습은 굉장한 구경거리였다. 기운 없는 소에게 매질하면서 억지로 힘을 쓰게 하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한 번은 매질에 못이긴 소가 용을 쓰는 바람에 소달구지가 부숴지고 멍에에서 벗어난 소가 미친 듯 날뛰며 동네로 들어와 우리집 대문을 들이받는 사고가 생겼다. 다행히 그때 우리집 대문이 철문이었는데 그 문이 안쪽으로 휘어진 것은 물론 콘크리트로 세워놓은 문설주가 와짝 금이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었다. 만약 철문이 아니었다면 폭주하던 소가 집으로 들어와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남천에서 모래를 퍼나르는 일은 뒤에 경운기가 보급되면서 소 대신 경운기가 퍼나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계속되다가 ‘자연보호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단속이 강화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남천 너머에는 과수원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주로 사과를 심어놓았는데 한창 사과가 열리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근처 아무 볏단이나 가지고 가서 사과와 바꿔 먹었다. 볏단을 가지고 가면 사과밭 주인 ‘아재’나 ‘아지매’가 떨어져 상한 낙과를 골라서 내주었다. 비록 상하고 멍든 사과일망정 아이들에게는 그런 사과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나중에 알았지만 이 과수원들에도 최부자댁 이야기가 깊숙이 녹아 있었다. 남천 너머 사과밭과 마을에 심어진 닥나무의 사연을 알았을 때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사과밭을 지나면 도당산이었다. 여기부터는 내가 갈 수 없는 구역이었다. 뒤에 나무하러 가는 어른들을 따라 가거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전쟁놀이 한답시고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어린 나에게는 도당산은 ‘꼼지’가 나오는 무서운 산이었다. 교촌마을 서쪽으로는 향교를 지나면서 작은 개울이 흘렀고 그 개울 너머로 미나리꽝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 미나리꽝을 넘어가면 반월성이 펼쳐졌다. 반월성도 무궁무진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 반월성에는 쥐똥나무가 많아 이 가지를 잘라 고무줄 새총을 만들어 놀았다. 당시의 반월성 안에는 석탈해왕을 모시는 사당인 숭신전이 있었는데 그 주변에 대나무를 많이 심어놓아 아이들은 그것을 잘라 활을 만들며 놀았다. 반월성 안쪽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서 이곳에 활쏘기 과녁이 놓여 있고 수시로 활 쏘는 궁사들이 드나들었다. 남천과 면한 성터 주변에는 삼, 대마(大麻)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삼이 마르면 ‘재랍’이라고 해서 속이 빈 채 쪽쪽 곧은 마른 삼대들이 만들어지는데 이 나무들은 중요한 불쏘시개로 사용되었다. 아이들은 그 재랍을 잘라 한쪽 끝에 못을 박아 화살을 만들어 쏘며 놀았다. 재랍 화살은 쪽쪽 곧은 자태만큼 바람에 대한 저항력도 좋아 쏘면 멀리까지 날아갔다. 반월성의 비스듬한 성벽에는 봄이면 참새들이 새끼를 부화하는데 새집을 찾아 참새를 꺼내면서 놀기도 했다. 마을 안에는 곳곳에 닥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보막이 공사 해둔 곳에도 닥나무가 많았고 골목 어귀 빈 공터들에도 닥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다. 닥나무는 목질이 가볍고 부드러운 반면 잘 부러져 목재로는 아무 쓸모가 없었는데 희한하게 닥나무가 많았다. 대신 닥나무는 나무에 칼집을 내고 껍질을 살살 벗겨 내면 쉽게 나무껍질을 벗길 수 있었다. 이걸 가지고 아이들은 장난감 칼을 만들어 놀거나 쌍절곤을 만들어서 놀았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교촌에 왜 이렇게 닥나무가 많았는지 아는 어른들은 한 명도 없이 그냥 으레 이전부터 심어 오던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닥나무 역시 교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내가 밝히려는 경주최부자댁 이야기의 중요성에 새삼스럽게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교촌을 이야기하면 절대 빼놓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이 있다. 그게 바로 교촌 사람들에게 ‘큰마당’이라고 불리던 경주최부자댁 앞 넓은 공터다. 이 공터는 지금은 경주 최부자댁과 한정식집 ‘요석궁’을 방문하는 차들을 대는 주차장으로 쓰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아주 큰 쓰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 쓰기로 하겠다.
내가 교촌에 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1969년부터다. 내가 다섯 살 때 교촌으로 이사가 교촌한옥마을 정비공사가 시작되기 한 해 전에 시에 집이 유치되면서 이사 가던 2008년까지 우리집은 거의 40년을 교촌에서 살았다. 한옥마을 조성을 위해 경주시는 2008년부터 모두 45채의 집을 사들여 지금의 22채로 공사를 다시 했다. 나는 그 과정을 보면서 과연 그게 교촌의 역사성과 문화성에 합당한가에 대해 많이 고심했다. 2008년에도 무려 45채나 되는 집을 수용해 철거했지만 내가 처음 교촌에 이사했을 때는 이보다 두 배는 많은 집들이 교촌 곳곳에 빼곡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집들이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면서 헐리고 사라지면서 2008년까지 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처음 교촌에 살기 시작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80여 호 집들이 사라졌지만 최부자댁과 관련한 집들은 거의 보존됐다. 그것이 경주교촌한옥마을의 뼈대다. 좀 구체적으로 변화를 말하자면 인가가 있던 곳이 지금의 첨성대 앞 반월성 진입로 오른쪽 공터와 계림 사이, 지금의 문화재연구소부터 시작해 남천에 이르는 지점까지 집이 10여채 있었다. 계림 앞에는 포도밭이 있어서 포도가 나는 철이 되면 사람들이 놀기 삼아 많이 드나들었다. 지금의 향교 주차장 앞쪽도 대여섯 채의 민가가 있었다. 이들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었다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석면이 주원료인 슬레이트 지붕 집으로 바뀌었다. 교촌 북동쪽으로도 집이 많았다. 교촌에 놋그릇을 만들어 공급하던 ‘놋전’이라 불리는 동네였는데 교촌에서 황남초등학교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가다 왼쪽으로 놋전 골목이 있었고 그 골목 좌우로 10여채의 집이 있었고 그 안쪽으로 100여미터 들어가면 역시 10여호는 됨직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교촌 안쪽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사마소(司馬所)가 지금의 월정교 남측에 남천과 붙어서 지어져 있었는데 그게 1984년 지금의 교촌 서편으로 옮겨간 것이 가장 큰 변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촌을 중심으로 놋전까지 아우르면 당시에는 무려 100세대는 족히 교촌에 살았다는 결론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대가족의 영향이 살아 있을 때고 6.25전쟁 후 한창 베이비 붐이 일어나던 시기다. 교촌과 놋전에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넘쳐났고 온동네가 낮에는 사람 사는 소리 밤에는 개짖는 소리 이른 아침에는 장닭 홰치는 소리로 요란했다. 줄잡아 인구가 5~600여명 되는 동네이다 보니 없는 것도 없었다. 동네에는 이발소도 있었고 구멍가게를 겸한 선술집도 서너 개 있었다. 연탄을 찍어내는 가내수공업 연탄 공장도 하나 있었다. 이렇게 많았던 집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 것은 교촌 일대는 물론 경주전역에 긴 세월을 두고 단행된 ‘경주유적지정비사업’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철거된 곳이 향교와 계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5~6채의 집들이었다. 이어 반월성 남측 지금의 문화재연구소 쪽에 자리잡고 있던 집들이 없어졌고 그 다음으로 반월성 남쪽 집들이 모두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놋전 마을들도 급격히 사라졌다. 계림 맞은 편 포도밭과 교촌 남서쪽, 최부자댁 후원 뒤 솔밭과 맞닿아 있던 포도밭도 사라졌다. 이게 약 내가 교촌에 이사간 후 약 15~6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이렇듯 많은 집들이 사라졌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집들이 있었다. 그게 모두 골기와집들이었다. 지붕도 보통의 집들보다 훨씬 높았고 그런 골기와 집을 막고 선 담장들도 여느집 담장보다 훨씬 높았다. 담장이나 지붕 위에는 와송들이 자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큰댁은 그런 골기와집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큰댁의 집 구조는 우리집과 또 달랐다. 1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마루와 대청이 있고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방이 있는 식이었다. 방문은 들어 올리는 바깥문이 있고 밀어서 여는 미닫이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고대광실’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멋진 집이었다. 신기한 것은 마루 앞쪽으로 몇 개의 구멍이 깊숙이 파져 있었던 것이다. 마루 두께가 족히 10cm는 넘어 보이는 나무들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에 구멍이 뻥 뚤린 것이 신기했다. 아버지께 그런 구멍이 왜 났느냐고 여쭤봤더니 양반집이라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옛날 이 집에 살던 양반들이 세수를 마당이나 우물에서 하지 않고 세숫물을 받아 마루에 놓고 씻다보니 늘 세숫대야 올려놓는 곳이 무르고 삭아 이렇게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때는 아무렴 세수 좀 했기로 그 두꺼운 나무가 삭았을까 싶지 않았지만 뒤에 아버지 말씀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큰댁뿐 아니라 동네의 대부분 골기와집들은 큰댁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집 앞은 경주고등학교에 재직하시던 이종룡 선생님 댁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큰새댁’이라는 택호로 불린 최부자댁 권속인 최모 선생님의 댁 안채에 새 들어 사셨다. 이 댁 사랑채도 큰댁과 비슷하게 축대 위에 마루와 대청이 있고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방이 배치되어 있었고 뒤에 막내 큰아버지께서 사서 이사하신 댁 역시 최부자댁 권속으로 ‘큰세댁 손자집’이라 불린 집인데 이 집 구조도 마찬가지였다. 최부자댁 옆으로도 기와집이 이어졌다. 지금 경주법주 만드는 집은 ‘적은댁’으로 알려진 집인데 이 집 역시 건물구조가 비슷하게 지어져 있다. 이밖에도 기와집이 많았다. 경주법주 옆이 ‘뒷새댁’으로 불리던 독립운동가 최완 선생님댁도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우리집 앞쪽으로는 ‘파훼댁’으로 불린, 서당이 있던 집인데 이 집은 구조가 좀 다르긴 했지만 역시 부잣집으로 손색없는 집이었다. 마지막으로 큰 기와집이 최부자댁 앞 공터 왼쪽에 있는 밭가운데 댁이라 불린, 지금의 요석궁이 있는 집인데 이곳은 당시의 마을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별개의 집이었다. 이 댁 주인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전국구 어느분의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뒤에 요석궁으로 집이 개조되고 그 요석궁이 지금처럼 한정식집이 되고 나서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역시 최부자댁 못지 않은 고대광실임을 알 수 있었다. 교촌의 큰 기와집들은 제각각 택호가 붙어 있었다. 이것이 최부자댁 마을임을 입중하는 좋은 증거들이다. 지금 나열한 이 집들은 모두 최부자댁 권속들이 살거나 살던 집이었다. 이 밖에도 교촌에는 기와집들이 몇 개 있었지만 그집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지어진 집들이거나 그 뒤에 교촌에 이사해 와서 살던 사람들이 지은 집들이었다. 이 몇 집 이외에는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이런 집들은 오래전에는 경주최부자댁과 음으로 양으로 인연을 맺어오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내가 이사오던 시기에는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다. 그 나름대로 역사성이 있었으나 경주시는 이들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이 모두 철거해버렸다. 그런 분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고청 윤경렬 선생님이다. 윤경렬 선생님은 함경북도 주을 출신으로 위에 언급한 이종룡 선생님과 동고향이시다. 당시 지금의 교동법주 집에 세들어 사시면서 토기로 이상하게 생긴 인형들을 만드셨는데 나는 가끔 그 집에서 버린 실패작 인형들을 주워와서 놀곤 했다. 선생님은 늘 두루마기에 고무신 차림이셨고 풀어헤친 긴 머리가 매우 인상적이셨다. 참고로 이 글에서 쓴 기와집들에 ~~댁, ~~~댁 등 택호들을 쓴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택호들은 최염 선생님께 들은 택호들을 쓴 것으로 선생님조차 이 택호들을 오랜만에 다시 떠올리시면서 매우 신기하고 놀라워하셨다. 나는 이런 택호들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했다. 바로 택호들을 통해 교촌의 경주최부자댁은 본댁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교촌최부자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경주최부자로 알려진 최준 선생님(1884~1970)의 형제분들과 일가친지들이 한 동네 살았다는 아주 중요한 흔적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경주교촌한옥마을’이라는 제목에 아주 큰 저항감과 실망감을 안고 있다. 비록 향교도 중요하고 한옥도 중요하지만 경주최부자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세계사적 정신적 문화적 콘텐츠를 어지간한 도시 어디에나 있는 향교나 한옥과 바꾸어버렸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나마 교촌에 경주최부자아카데미와 경주최부자선양회가 있는 것이 다행일 따름이다.
이번호부터 경주최부자댁과 관련한 박근영 기자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경주최부자는 현시대 우리나라 시대정신인 ‘나눔과 상생’을 가장 분명히 알려주는 명가이지만 아직까지 알려지지 소중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본지를 통해 그 숨겨진 이야기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출향인면에 연재되던 ‘셔블&서울·경주사람들’은 중요한 출연자가 있을 경우 간헐적으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마을 청년들과 어른들은 너나없이 불을 끄기 위해 쫓아다녔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채 전부가 타서 무너졌다. 그날 큰불이 났다. 최부자댁이 온통 벌겋게 타올랐다. ‘불이야, 불이야’ 하는 외침이 끊임없었고 기왓장 튀는 소리가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어른들의 눈에 공포와 불안, 놀라움과 염려가 서려 있었다. 몇 시간 동안 계속된 불은 새벽녘에야 겨우 꺼졌다. 이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잠을 설치다시피 하며 최부자댁 불난리를 지켜보았다. 마을 청년들과 어른들은 너나없이 불을 끄기 위해 쫓아다녔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채 전부가 타서 무너졌다. 여섯 살, 어린 내 기억에 너무나 선명한, 하늘을 찌를 듯 타올랐던 무시무시했던 불길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쓴 책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가 2018년 4월에 나왔다. 당시 이 책을 내고 이어 2권과 3권을 연이어 낼 작정으로 작업을 모두 해놓았지만 뜻밖에 생각이 바뀌어 출판을 미뤄뒀다. 소설도 한 권 분량 써두었는데 그 역시 오래 갈무리해 둔 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경주최부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었다. 무려 5년 동안 다른 일 모두 접어두고 이 책에만 매달렸다. 경주최부자에 집중했던 이유는 21세기 경주가, 세계화의 전위에 선 대한민국이 가장 가치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시대정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 열정과 땀으로 제대로 써보고 싶었다. 다행히 나는 경주최부자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5살 되던 해 교촌으로 이사한 우리집은 경주최부자댁과 대각선으로 불과 50미터도 안 떨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대학 진학하기 이전인 1985년까지 교촌에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경주최부자댁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경주최부자댁 하면 최부자댁 본가만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교촌의 대부분, 특히 기와집의 대부분은 경주 최부자댁 권속들이 사는, 동네 전체가 경주최부자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곳에 살았으니 누구보다 최부자댁 분위기를 많이 알 수 있었고 동네 돌아가는 형편도 잘 알면서 청소년기까지 넘겼다. 대학진학 후에도 여전히 본가가 교촌에 있었기에 40대 초반까지는 일 년에 네댓 번은 교촌을 찾았다. 어린 시절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마을이었지만 장성해서 아이들 손을 잡고 찾는 교촌은 이전과 다른 무엇인가가 늘 가슴 한쪽을 끌어당겼다. 대학에서 관광경영학을 전공한 나는 1990년부터 2012년까지 해외여행업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세계의 유명한 관광지를 내 고향 경주와 비교하는 습관을 길렀다. 지금이야 우리나라가 세계의 표준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다방면에서 대한민국이 앞서 있지만 내가 처음 해외여행을 시작했던 1990년만 해도 세계는 온통 배울 것이 많았다. 우리보다 선진화된 나라를 둘러보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다. 특히 내가 주목한 것은 도시마다 그 도시를 대표할 만한 역사적인 인물과 그 인물의 사상, 이야기가 아주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단순한 구성요소로서의 인물이 아니라 그 도시가 오히려 그 도시에 살고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로 인해 더 빛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피렌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라는 거장이 그 도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의 빈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라는 악성들이 이 지역 관광의 뼈대를 이루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런던은 세익스피어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파리는 루이 14세 왕과 로베스 피에르 같은 혁명가, 화가 들라크루아와 피카소, 에밀졸라나 모파상 같은 작가 등이었다. 경주를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해외여행을 하며 끊임없이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을 얻었다. 그런 도시들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경주는 어떤 인물이 세계사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곤 했다. 그러나 경주는 신라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무수한 인물이 많은 이야기를 남겼지만 세계에 내놓을 만한 인물로 선뜻 누군가를 꼽기 힘들었다. 우리가 아는 김유신과 김춘추는 마침 불어닥친 민족사관과 가상역사의 열풍에 휘말려 평가절하되었고 그나마 기껏 전쟁영웅일 뿐이었다. 문무대왕이 무기를 산에 묻고 스스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을 내비치며 호국과 평화의 상징으로 떠올랐지만 세계화에는 어딘지 약해 보였다. 경주 문화의 현주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덕왕과 최고의 석학 최치원이 있지만 그들의 가치는 경주사람들조차 잘 모를 정도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경주에서조차 동학의 시초를 전라도 고부로 아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다 2008년 경주중고등학교 서울동창회에서 간사를 맡으면서 뜻밖에 경주를 대표할 만한 역사적 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게 바로 ‘경주최부자’였다. 마침 동창회에는 경주고 1회 졸업생인 경주최부자 종손이자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이신 최염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해 동창회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실 때였다. 최염 선생님을 만나는 그 순간 교촌에서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물론 경주최부자댁에 전해오는 오랜 정신이야말로 세계화 시킬 수 있고 시켜야 하는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에 앞서 2003년부터 인터넷 블로그와 카페 등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던 나는 2007년 3월, 어린 시절 교촌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야기를 엮어 ‘니 꼬치 있나?’라는 책을 펴낸 바 있었다. 단순하게 우리 시절의 놀이와 작은 이야기들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 쓴 이야기들을 책으로 펴낸 것인데 당시 치솟던 내 블로그의 인기에 힘입어 그 해 daum 베스트 책 17위에 오를 만큼 인기를 끌었다. 그런 한편 여행업과 별도로 2010년경부터 별도로 광고기획사와 출판사를 겸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자서전 출판이었다. 이때부터 정치기획도 하고 자서전도 내면서 생업을 유지했고 급기야 여러 가지 요인으로 변동이 심한 여행업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자서전 출판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2012년 12월, 운명처럼 경주 힐튼 호텔에서 열린, 경주최부자선양회(당시 이사장 고 조동걸 교수)가 주최한 ‘경주최부자 심포지엄’에 사용된 논문집을 우리 출판사에서 인쇄하게 되었다. 당시 경주최부자선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최창호 사무국장(현재 경주최부자선양회 이사장)이 적극 추천해준 덕분이었다. 최창호 이사장은 내 초등학교 동기로 경주최부자 정신을 밝히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혼신을 다해 경주최부자선양회를 지키고 가꾸어온 장본인이다. 이 책 인쇄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경주최부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나는 이듬해 최염 선생님을 찾아뵙고 경주최부자댁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겠다고 말씀드리고 협조를 부탁드렸다. 다행히 최염 선생님은 한 동네 산 인연과 동창회의 인연, 최창호 사무국장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책 내는 것을 도와주기로 약속하셨고 이때부터 다른 모든 일을 폐하고 본격적으로 경주최부자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오랜 인터뷰와 자료조사 끝에 2018년 4월, 만 5년의 작업 끝에 경주최부자 시리즈 제1권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오랜 기간 잊고 지내던 경주최부자가 다시 내 마음에 들어온 계기가 있었다. 코로나19 기간 시작된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별채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7월 최부자댁을 방문했다. 잘 복원된 사랑채 별채는 한순간에 내 기억을 50여 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시뻘겋게 불타오르던 최부자댁 불길을 보며 느꼈던 가늠할 수 없는 열기가 가슴에 ‘확’ 달려들었다. 문득 강렬한 욕구가 솟구쳤다. 이번에는 나만의 언어로 내 마음속 추억과 내가 겪고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최부자댁과 교촌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써두었던 또 다른 경주최부자 이야기도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내보낼 때가 된 것이다. 불타 없어졌던 사랑채가 별채까지 복원되었으니 최부자댁 감추어진 이야기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 지면을 통해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