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 우리나라는 노령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비단 우리뿐 아니라 여러 선진국에서 노년인구는 다수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의료시설과 의학의 발달, 적절한 영양공급, 노인들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사회적 시설들의 증가가 노년 인구의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생명을 연장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노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사회적 노력도 뒤따라야 하는데 정작 법과 제도는 노년을 외면하고 예산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노인들에 대한 복지나 혜택을 줄이려 든다. 법과 제도를 다루고 예산을 결정하는 결정권자들이 노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고 노인을 쓸모없이 예산만 축내는 부류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인복지와 노인예산을 쉽게 생각하는 이면에는 자신은 노인이 안 될 것 같은 착각이 동반된다. 언제나 청춘일 줄 아는 젊은이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 역시 노인이 되어 젊은 사람들에게 짐으로 여겨지고 걸림돌로 치부되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반복적 진리이지만 젊은 사람들이 그 젊음을 누리는 동안의 달콤함에 탐닉한 나머지 자신은 영원히 젊을 것처럼 착각하기에 노인에 관한 일은 멀고 먼 남의 일로 여기기 쉬운 것이다. 사람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인이라고 해서 감정이 둔하고 노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초월하거나 달관하지 않는데도 젊은이들은 으레 노인이기 때문에 가져야 할 많은 원칙들이 있는 줄 안다. 그래서 홀로 된 노인이 연애라도 할라치면 노망들었다고 우스워하고 혹시라도 좀 더 깊은 관계로 번지면 어떻게 하나 근심하게도 된다. 특히 가진 것이 많은 노인들일수록 자식들의 등쌀에 짓눌려 새로운 삶을 꿈꾸기 어렵게 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식들은 노인을 돌보거나 가깝게 살기를 꺼린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제인 폰다가 열연한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Our souls at night / 2017 라테쉬 바트라 감독)’은 노년의 노인들이 느끼는 결핍과 그 결핍에서 헤어나기 위한 노력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그냥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그 상대가 되어 달라” 오랜 이웃인 메디(제인폰다 분)의 난데없고 엉뚱한 질문에 루이스(로버트 레드포드 분)는 며칠 고심하지만 결국 그 이야기의 상대가 되기로 한다. 두 사람 모두 짝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자식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 매일 적적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이들은 밤마다 만나 자신들의 내면에 갈무리된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이상하게 본다. 그 눈길을 의식하면서도 결국 그 눈길을 이겨내야 한다고 믿은 두 사람은 초연하게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다. 가족들 역시 낯설어하고 어려워한다. 특히 루이스의 과거를 잘 아는 메디의 아들은 자신의 엄마가 루이스를 사귀는 것에 못마땅해한다. 영화에는 메디의 손자를 정성껏 돌보면서 메디의 신임과 손자의 신임을 동시에 얻은 장면이 나온다. 부자지간에 볼 수 없는 애틋한 정이나 살가움이 조손(祖孫)간에 진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루이스는 메디의 손자와 자연스럽게 교감을 이룬다. 영화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단지 루이스가 손자를 잘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노인이 사회의 여러 면에서 충분히 대접받을 만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메디의 아들을 떠나, 이런 상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럽다. 특히 사회가 성숙하지 못할수록 여성에 대한 압박히 훨씬 심하기 마련이다. 궁극적으로 젊은이들은 병이나 사고로 요절하지 않는 이상 모두 노인이 된다. 이 절대불변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메디와 루이스의 만남은 지금 젊은이들에게 곧 닥칠 내일의 일이 될 수 있다. 영화는 노인들의 감정도 완전히 젊은이와 같을 뿐 아니라 제약이 따르고 몸이 움직이지 않아 더욱 간절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과연 메디와 루이스는 노년에 찾아든 사랑을 다시 꽃 피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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