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인류가 국가라는 집단을 만들면서부터 개인의 삶은 훨씬 종속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국가가 만들어진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거대집단의 강력한 힘을 통해 보호받으려는 다수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욕구가 성립했기 때문이다. 보다 강력한 지배체계가 존재함으로써 걸핏하면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낯선 침입자들로터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망이 씨족과 부족 사회를 거쳐 국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태평성대를 이룬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 국민들은 수시로 전쟁의 위험에 내몰리기 일쑤였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세금을 내기 위해 뼛골 빠지게 일해야 했다. 다행히 개인이 그 국가에서 지배적 위치에 올랐다면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 국가의 덕을 보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지만 반대로 피지배적 위치에 있다면 그 삶은 가난과 고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국가나 지배적 위치의 사람들은 피지배적 위치의 대중들에게 대해 대놓고 지배적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국가의 존재가 안정과 희망을 줄 것이라 가르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여하한 경우라도 충성하라고 강조한다.
이 국가 이데올로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교육’이다. 유사 이래 교육은 개인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순기능적 매개체로 존재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국가를 떠받치는 ‘세뇌’를 전담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교육의 주체가 국가이거나 그 국가와 함께 지배력을 공유한 기득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매우 당연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 희생을 훌륭하고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교육을 계속함으로써 지배자들을 위한 무지한 국민의 희생을 조장해왔다.
이런 국가주의에 가끔씩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따지고 보면 그들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대철학자나 종교의 태두들이다. 부처나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짧은 노력은 절대다수 정형화된 교육을 받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다시 악용되어 이번에는 국가는 물론 종교까지 국민과 신도들을 속이고 줄 세우기에 급급했다. 급기야 국가에 대한 과한 충성은 전체주의를 양산하고 과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계급화된 거대종교를 만들었을 뿐, 피지배층들의 고난과 가난은 아직도 지구상의 절대다수의 국가에 고쳐지지 않고 있다.
따지고 보면 경주사람들은 이런 국가주의에 가장 자주 노출된 국민들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삼국통일의 대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화랑 관창의 희생과 용맹에 매료되어 너나없이 화랑의 후예임을 자랑삼아 살았다. 그런 와중에 고작 15~6세밖에 안 된 어린 아이들을 사정없이 전쟁터로 몰아넣은 어른들의 파렴치는 털끝만큼도 비판되지 않았고 삼국통일로 인해 수십 년간 이유 없이 싸우다 죽은 수십만 병사들과 그보다 훨씬 많았을 백성들의 기구한 삶은 역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 무지렁이들이 국가와 왕을 위해 싸우다 죽을 때 과연 그 시대 국가와 왕은 얼마나 백성 개개인의 안녕과 안전을 지켜주었을까?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그나마 신라왕조와 귀족들은 관창과 반굴을 영광스럽게 포장해 자손 대대로 칭송이라도 했으니 아직도 우리는 오로지 국가에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고 믿은 채 살고 있다. 국가의 가장 숭고한 존재 이유인 ‘단 한 사람의 국민일망정 국가가 책임지고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대전제는 잊어버린 채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맹신마저도 무너지게 되었다. 최근 군에서 일어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숭고한 희생을 책임져주지 않는 국가를 위해 국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역설을 여지없이 일깨운 꼴이다. 이것이 영화 ‘봉오동 전투’를 제목으로 걸어두었을 뿐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은 이유다. 다행히 이제는 그 많은 세뇌교육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이 국가에 우선한다는 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많아졌다. 그 시민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가족을 희생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모습을 지금의 정권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