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 계열사 사장으로 지내는 지인 한 분이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은 적 있다. 부도 가졌고 지위도 얻어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믿는데 돌아보면 잃은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가족, 특히 아내와는 대부분 냉랭하고 자녀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과 담을 쌓은 듯 여겨지더니 출가한 지금까지 전화도 잘 안 하고 지낸다는 것이다. 자신이 뼛골 빠지게 일한 것은 오로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자신의 노력과 희생이 이렇게 대접받지 못한다며 한숨이었다.
그 지인은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주말에도 한가하게 집에서 쉬어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주중에는 중요한 거래처들과 밥 먹고 술 마셔야 하고 쉬는 날에는 중요한 거래처나 언론사, 법조인들과 골프를 쳐야 했다는 것이다. 그게 자신이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고 대표이사가 되는 원동력이었는데 정작 그 사이 가족들과는 대화도 제대로 못 나누고 마음 편히 어디 여행 한 번 못 해 봤다는 것이다.
그냥 여행 가면 되지 않았냐고 되물었더니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과연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그 지인이 가족들과 함께 했을까?
이탈리아 영화 ‘시간은 충분해(원제 ERA ORA : 2023/알렉산드로 아르나디오 감독)’는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일에 매달리는 직장인의 정신없이 바쁜 생활의 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충격적’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과감하게 중간과정들이 생략된 채 1년 단위로 시간을 뭉턱뭉턱 잘라내기 때문이다.
일에 쫓겨 자신의 생일도 제대로 차려 먹지 못하는 주인공은 어느날 연인과 친구들이 마련해준 생일파티에서 소원 하나를 빈다. 그런데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질려 잠들었는데 다시 일어났더니 또 다시 일 년의 시간이 가버린다. 이 사이에 연인은 임신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아기가 태어나 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을까 싶어 잠을 깨우며 버티는데 거울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또다시 일 년이 흘러버린다. 이렇게 순식간에 7년의 시간이 지나는데 주인공은 그 사이에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다. 그 7년의 시간은 생일마다 1년씩 도려내면서 지나는데 그 사이 주인공은 성공가도를 달린다. 다니던 회사의 지점장이 되고 대표가 된다. 반면 그 사이 딸이 자라고 아내는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다. 아버지는 죽고 친구는 암에 걸린다.
이쯤 해서야 주인공은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과연 주인공은 이 사라진 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심하게 헝클어진 자신의 변화된 삶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가장 긴장된 부분은 아내가 주인공에게 쏘아대는 대사다.
“당신은 언제나 멀리 떨어져 가족을 기다리게 했어. 심지어 같이 있을 때도 노트북과 스마트 폰으로 회사일 만 해댔어. 그동안 나는 늘 외로웠어!”
거기에 맞서 주인공은 아내에게 그것이 아내와 딸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항변하며 왜 그 희생을 몰라주느냐며 쏘아댄다.
영화의 백미는 과감히 일 년씩 도려내면서도 이야기 전개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가는 스토리의 탄탄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화의 의도가 그 잘려 나간 시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에 매몰되어 파묻혀 지내는 사람들은 지척의 자기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므로 그 일 년을 기억하는 것이나 기억하지 않는 것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은유를 담은 것이다. 다시 지인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영화의 내용과 지나칠 만큼 흡사하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이렇게 자랐는가 싶어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낯설고 도대체 왜 나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 싶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영화의 말미에 그 주인공이 7년 전 생일에서 빈 소원이 공개된다. 그 소원이야말로 이 영화가 시사하는 전부다. 주인공은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짐작컨대 그 지인의 평소의 소원도 같았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