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정보의 시대’라는 말이 있다. 정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개인과 단체의 생활과 생존은 물론 국가와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손쉬운 것이 ‘뉴스(news)’다. 뉴스는 개인이 살고 있는 지자체와 광역단체, 국가와 세계의 소식 중 가장 중요하거나 관심가질 만한 내용을 순차적으로 간추려 대중에게 알려준다. 이 뉴스를 전달하는 매체는 과거에는 신문과 공중파 방송이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지상파 방송과 유튜브, 페이스 북 등 다양한 SNS도 뉴스 양산에 한몫 하고 있다.
그러나 뉴스 매체가 다양해지고 많아지는 것과 반대로 뉴스에 대해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정파에 따른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면서 서로 상대방을 헐뜯기 위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행위들이 넘쳐난다. 이로 인해 뉴스의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졌고 가짜 뉴스나 편향된 뉴스를 쓰는 기자를 향해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말을 넘어 ‘기더기(기자 구더기)’라는 말까지 생겼다.
가짜뉴스는 내용이 가짜인 경우도 있지만 내용과 딴판인 제목을 쓰거나 사실과 상관없이 내용의 일부분만 오려 그게 사실의 전체인 양 짜깁기 하는 것도 한 종류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누군가의 입을 통했다는 전제로 퍼뜨리는 소식도 가짜뉴스다.
이런 종류의 기사들이 우리 사회 전반에 흘러넘치다 보니 이제는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옳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가장 정확한 것이 통계를 통한 전달인데 이제는 이마저도 믿을 수 없다. 통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다는 것을 뉴스 생산자들이 알고 이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이다. ‘숫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통념을 왜곡한 채 언제 통계인가, 전체의 비율은 어떤가, 이웃 국가들의 현황은 어떤가 등을 따지지 않고 편집해서 쓰는 통계들은 오히려 더 악랄한 가짜 뉴스가 된다.
이런 뉴스들은 작게는 개인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기업을 악화시키는 정도지만 크게는 생명을 죽이고 사회와 국가를 수렁에 밀어 넣는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교묘하게 치장된 가짜 뉴스는 정적을 소멸하는 도구로 사용된 지 오래며 그로 인해 국민들이 애써 이룬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몇 십 년 이전으로 후퇴하기도 한다.
특히 아직까지 뉴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방송과 신문의 뉴스는 대중을 현혹하는 주범이 된 지 오래다. 더구나 지금 언론사 기자들은 사주의 경향을 대변하는 직장인이라는 소리를 할 만큼 기자들의 역할이 무뎌지고 무너졌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일들은 역사적으로도 흔히 일어나던 일이고 대다수의 경우 언론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살찌우고 그들에게 딸랑거리는 역할에 충실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폴레옹에 대한 일로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해 다시 지지세력을 모아 프랑스로 진격해 들어올 때 시시각각 변하던 프랑스 대표 신문 ‘르몽’지의 기사 제목이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 코르시카의 마귀 쥐앙만에 상륙 / 폭군, 리용 지나 / 보나파르트 급진, 파리 입성은 절대 안 돼 / 황제 퐁텐블로에 들어오시다”
최근 우리나라 정세도 이와 특별히 다른 점이 없다. 좀 더 엄격히 말하면 오히려 지금의 우리나라 언론은 가짜 뉴스들을 적극적으로 양산하며 권력을 떠받들고 그 권력과 동반하는 기업의 광고를 받고 그들과 함께 안락과 생계를 유지하는 형태다. 창궐하는 악성 유튜브 방송들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가짜뉴스 퍼뜨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세부적으로 간추린 책이 있다. ‘가짜 뉴스 시대에서 살아남기(2018/글로세움)’다. KBS와 YTN등에서 30년 넘게 기자 생활 후 은퇴한 류희림 씨가 쓴 책이다. 이 책은 가짜 뉴스의 다양한 행태와 사례들, 가짜 뉴스로 인해 일어난 참사, 한국언론의 고질적인 병폐 등이 체계적으로 들어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짜 뉴스들을 판별하는 방법, 가짜 뉴스들을 속 편히 볼 수 있는 방법, 궁극적으로 가짜 뉴스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가 싫다고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교통사고가 무서워 자동차를 타지 않는 것과 같다”
작가는 결론적으로 ‘뉴스를 보지 말라’고 조언한다. 쓰레기 같은 가짜 뉴스들이 앞으로 쏟아져 나올 것은 분명한 만큼 뉴스를 보지 말라는 말을 다시 바꾸어 ‘뉴스에 속지 말라’로 고친다. 그래야 현명하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