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성악가였지만, 아들이 음악보다는 법학을 전공하길 원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이 사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법학을 그만두고, 당대의 거장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의 수제자가 된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20세기 초 활동무대를 당시 첨단 유행도시였던 프랑스 파리로 옮긴 스트라빈스키에게도 드디어 행운이 찾아온다. 동향의 다재다능한 공연기획자 디아길레프(Sergei Pavlovich Diaghilev, 1872-1929)를 만난 것이다. 디아길레프는 단번에 스트라빈스키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챘다. 그리고는 자신이 운영하는 발레뤼스(러시아발레단)의 레퍼토리를 위한 발레음악을 스트라빈스키에게 의뢰하는데, 이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불새(fire bird, 1910)다. 불새는 파리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스트라빈스키는 일약 파리의 스타 작곡가로 등극한다.
불새의 성공으로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두 번째 발레음악을 의뢰한다. 두 번째 작품은 페트로슈카(Petrouchkah, 1911)다. 이 작품도 성공을 거두자 스트라빈스키는 차기작에서 전례 없이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 1913)이란 작품이다. 봄의 제전은 타악기의 강력한 리듬으로 원시주의를 표방했다.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모두 흥행을 점쳤으나 이 생경한 작품의 결과는 처참했다. 공연장은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 장면은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도입부에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초연은 분명 실패였다. 하지만 봄의 제전의 유명세는 오히려 커져 갔고, 오늘날에도 무용가들의 중요한 창작 원천이 되고 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이어서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스트라빈스키는 (1962년에 소련의 공식 초청을 받기 전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191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음악가로 평가받았지만, 제1차 대전 이후에는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새로운 파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은 3대 발레음악으로 불리는 불새, 페트로슈카, 봄의 제전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생애 후기에 작곡된 쇤베르크식 무조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성 짙은 초기 작품들의 아우라는 대단했다.
스트라빈스키는 1934년 프랑스에 귀화하고, 1939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미국에 귀화한다. 대부분의 망명 작곡가들이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교류할 정도로 사교적이었다. 1962년(80세)에는 소련 작곡가 연맹의 초청으로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조국의 땅을 밟는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머무는 동안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 1906-1975),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과 같은 걸출한 후배들과 만나 교류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1951)가 죽은 후 스트라빈스키는 현대음악의 독보적인 거장으로 존경받았다. 1971년(89세) 뉴욕에서 사망했고, 베네치아 산 미켈레 성당에 잠들어 있던 필생의 은인 디아길레프의 곁에 묻힌다. 현재 프랑스 파리의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 앞에는 스트라빈스키 조각분수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가 프랑스 파리에 미친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