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가 흐르는 동안 발레가 궁정을 나와 대중예술로 자리 잡게 되고, 자연스레 ‘발레음악’이란 장르가 전문 예술분야로 새로 등장했다. 19세기는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에 도래한 낭만주의 시대였고, 오늘날 음악사의 한 줄을 장식하고 있는 거장들이 클래식 분야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 보자. 발레음악을 작곡했던 거장이 있었던가? 당시의 거장들은 교향곡이나 협주곡 작곡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발레음악은 이류 작곡가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발레음악에 손을 대면서 발레음악은 클래식 음악의 다른 장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람이 발레음악을 만들었을 때, 그는 이미 일류 작곡가의 반열에 있었고, 바꾸어 말하면 그는 발레음악을 작곡한 최초의 정상급 음악가였던 것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1840-1893)다.
과거 반공이 국시였던 우리나라에서 구소련 출신의 작곡가들을 자유로이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의 발레음악만은 예외였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이른 바 3대 발레작품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차이콥스키의 감미로운 음악은 사람들의 귓속을 파고 들었다.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처럼 멀티 플레이어였다. 교향곡이나 오페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이콥스키가 발레음악의 작곡가로만 편향적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진면목이 과소평가되는 시기도 있었다. 어쨌거나 프티파(Marius Petipa, 1819-1910)와 함께 만든 3대 발레는 요즘도 인기리에 무대에 오르고 있다.
백조의 호수는 지그프리트 왕자와 오데트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되었지만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대체로 의상과 안무(초연 안무는 프티파가 하지 않았다)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책임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 후 13년이 흘러 1890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한 두 번째 작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그래도 백조의 호수 만큼의 실패작은 아니었다. 문제는 세 번째 작품이다. 오늘날 12월의 효자상품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호두까기인형은 1892년 마린스키 극장 초연에서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발레를 한 단계 후퇴시켰다는 참담한 혹평까지 들었다. 차이콥스키 걸작 발레곡 세 편의 시작은 이렇게 미미했다.
백조의 호수는 차이콥스키가 죽은 후 마린스키 극장의 프티파와 그의 조수 이바노프(Lev Ivanov,1834-1901)의 새로운 안무로 화려하게 부활(1895년)한다. 2막과 4막의 호숫가 정경을 안무한 이바노프의 공이 특히 컸다. 초연이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1921년 런던 공연에서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한편 호두까기인형은 1934년 바실리 바이노넨(Vasily Vainonen, 1901-1964)의 수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1954년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이 뉴욕에서 공연하면서 세계적인 유행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차이콥스키가 죽은 지 반세기가 더 지나서야 비로소 명작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