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5인조’에는 19세기 중반 서유럽 음악을 하는 러시아 주류 음악계가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민족주의 음악가 5명을 통째로 얕잡아 보는 뉘앙스가 들어있다.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바로크(baroque)’나 빛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그림에 담은 ‘인상파(impressionism)’도 원래는 이들 유파를 비꼬는 투의 부정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바로크나 인상파가 이런 부정적인 위상을 극복하고 후대의 재평가를 받아 위대한 예술 유파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러시아 5인조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그들도 ‘5인조(패거리)’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과감히 받아들인 후 음악사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혁혁한 성과를 낸 것이다.
5인조 멤버는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1837-1910),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 세자르 큐이(César Cui, 1835-1918), 알렉산드르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 그리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다. 연배로 딱 중간에 위치한 밀리 발라키레프가 리더 역할을 했다.
러시아 5인조의 역사는 1856년 발라키레프와 큐이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에 무소륵스키가, 1861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862년에 보로딘이 합류하면서 완전체가 된다. 이때 막내인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살에 불과했고, 최연장자인 보로딘 조차도 29살이었으니 매우 젊은 음악가 단체가 탄생한 것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이다. 직업(전공) 역시 다양하다. 발라키레프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보로딘은 화학을 전공하여 화학자로도 활동했다. 큐이와 무소륵스키는 육군장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였다. 서유럽 음악에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은 러시아 고유의 선율을 찾아 자신들의 독창적인 민족주의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이들 중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친 음악가를 뽑으라면, 그룹의 막내뻘인 무소륵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될 것이다. 둘 다 오페라와 관현악에 모두 능했다. 특히 1871년 27세의 나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악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넘어서는 관현악 작곡 기량을 선보였다.
러시아 5인조는 동시대의 천재 차이콥스키와 협조와 반목을 거듭하면서 성장해갔다. 미하일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가 물꼬를 튼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계승하여 세계적인 입지를 확보한 것은 그들의 큰 공적이다. 그리고 그 공은 보물 같은 후배 작곡가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 1906-1975)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