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폴란드계 이민자 3세로 태어났다. 어릴 적 또래보다 월등한 피아노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13세인 1919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곤궁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당시 원장이었던 글라주노프의 지원으로 겨우 음악원을 마칠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1번 교향곡을 작곡(1925년)했다. 1번 교향곡은 러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10대 작곡가가 쓴 교향곡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등에 의해 소개될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이후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쇼스타코비치에게 위기가 닥친다. 1934년(28세)에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Lady Macbeth Of Mtsensk)’이 문제였다. 스탈린이 오페라 공연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후 소련 공산당 당간지 프라우다에 이 작품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비판 기사가 난 것이다. 비판은 보통 숙청으로 이어진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공산당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 필요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사활을 걸고 러시아혁명 20주년을 기념하는 교향곡 5번(1937년)을 작곡한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암시하는 팡파르로 귀결되는 대작으로, 초연에서 갈채가 40분 이상 이어질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이렇게 쇼스타코비치는 첫 정치적 위기에서 간신히 넘기고, 모교인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 임용된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쇼스타코비치가 거주하던 레닌그라드도 위험해지기 시작한다. 이즈음 나온 작품이 7번 교향곡이다. 나치에 대한 승리를 기원하는 80분 길이의 이 대작은 모스크바 초연 이후 서방세계에서도 자주 연주되었는데, 1942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NBC 교향악단의 연주는 미국 전역에 중계되어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쇼스타코비치에게는 두 번째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1945년에 발표한 9번 교향곡이 스탈린의 심복이자 소련 문화계의 거두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Andrei Zhdanov, 1896-1948)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스탈린은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대단한 걸작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9번 교향곡은 그렇지 못한 평이한 작품이었다. 이 즈다노프 비판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사망하는 1953년까지 교향곡 작곡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스탈린 선전용 영화음악을 주로 작곡하면서 숙청의 위기를 넘긴다. 쇼스타코비치는 1953년 스탈린이 죽자 10번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풀었다. 저승사자가 9번을 쓴 쇼스타코비치를 잡아가야 하는데 스탈린을 잡느라 못 잡아갔다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당대의 라이벌 프로코피예프가 스탈린과 같은 날에 사망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사실상 소련의 대표 음악가가 남게 되었다. 그는 1975년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비올라 소나타를 마지막으로 완성하고 4일 뒤 세상을 떠났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생을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에서 활동했었기에 당대 서방음악의 주류였던 무조음악이나 아방가르드 성향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가 작곡한 15곡의 교향곡은 현재까지 교향곡 분야 최후의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