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이후 낭만발레는 파리에서 발레의 대중화와 함께 오늘날의 발레에 가까운 극장예술로 자리잡는데 성공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오페라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위축된다. 이때 발레의 중심지는 러시아로 이동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미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발레를 논하려면 표트로 대제(Pyotr I, 1672-1725)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표트로 대제는 러시아 영토의 대부분을 확보하면서 최초의 차르로 등극한 사람이다. 그는 서구의 문화를 당시의 후진국 러시아에 이식하려고 노력했다. 발레도 그 일환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처럼 발레를 장려했다. 표트로 대제를 잇는 황제들도 발레에 호의적이었다. 황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학교와 극장이 만들어졌고, 사람에 대한 투자도 뒤따랐다. 발레 선진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안무가와 무용수를 불러들여 러시아 고전발레의 초석을 다졌다. 우연은 없다. 이런 황실의 투자 속에 러시아는 발레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고, 이후 발레의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 발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러시아’인 이유다.
러시아 발레의 황금기는 러시아가 영입한 외국인들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이 중에서 1등 공신은 단연 프랑스 출신의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8-1910)다. 요즘 공연되는 유명 발레 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은 거의 없다. 프티파는 1847년 무용수의 신분으로 러시아에 왔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마스터는 지젤을 안무했던 페로(Jules-Joseph Perrot, 1810-1892)였고, 프티파는 그에게 안무를 배웠다. 1859년에 페로가 프랑스로 돌아가자 드디어 프티파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러시아는 종신 발레마스터가 된 그와 함께 발레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프티파는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 1840-1893)와 함께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년 초연)와 ‘호두까기인형’(1892년 초연)을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표하고,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1877년)에 실패한 ‘백조의 호수’도 부활(1895년)시킨다. ‘백조의 호수’의 부활에는 프티파의 조수였던 이바노프(Lev Invanov, 1834-1901)의 공이 컸다. 우리는 이 세 작품을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곡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일류 작곡가가 발레곡을 만들지 않았다. 차이콥스키는 발레음악을 작곡한 최초의 일류 음악가였다.
프티파가 완성한 고전주의는 엄격한 형식과 테크닉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고전발레’라고 하기 위해서는 오페라처럼 서곡이 들어가고, 전막 공연이라는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한 의상은 접시꽃 모양의 초미니스커트인 클래식 튀튀다. 디베르티스망, 그랑 파드되, 32회전 푸에테와 같이 완성도 높은 테크닉도 들어가야 한다. 고전주의 형식과 테크닉은 따로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