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유대인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기 낭만파 작곡가들, 특히 말러를 성자(聖者)로 여길 정도로 숭배했다. 같은 음악적 지향점을 가진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 1883-1945),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를 제자로 두면서 2차 빈 악파(1차 빈 학파는 18세기 말 고전파)를 형성하게 된다.
쇤베르크의 후기낭만주의적 작품의 정점은 1910년에 작곡한 ‘구레의 노래’이다. 이 곡은 5명의 독창자, 8부 혼성 합창단, 3부 남성 합창단, 해설자, 그리고 140여명의 관현악단을 동원한 대작이다. 말러의 8번 천인교향곡에 필적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동시에 쇤베르크가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낸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장조와 단조에 기반한 조성을 점점 허물어 가다가 완전히 조성을 포기한 노골적인 무조음악(無調音樂)으로 옮겨갔다.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연가곡 ‘달에 홀린 피에로’가 이즈음의 대표작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한동안 작곡을 중단하게 된 그는 전후에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12음 기법을 만들어낸다. 그는 이 기법에 대해 향후 100년 동안 독일 음악을 최고봉에 올릴 발견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기법을 사용하여 피아노 모음곡, 관현악 변주곡, 현악 4중주 3번 등을 작곡하게 된다. 그는 1925년 베를린 예술학교의 교수에 임용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면서 이 유대인 작곡가는 나치의 명령으로 학교에서 해임되고 뉴욕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다시는 유럽에 오지 않았다. 1936년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그는 UCLA의 교수로 부임하고, 한동안 중단했던 작곡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한편 나치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사회 참여적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12음 기법에 기초한 쇤베르크의 작품은 음악계에 충분한 논란거리를 제공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진 못했다. 한때 전위적인 작품으로 경쟁했던 스트라빈스키가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전향하게 되자 쇤베르크의 소수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인생 말년에 접어들면서 재평가를 받게 된다. 젊은 작곡가들이 그의 무조 음악과 12음 기법에 기초한 음렬주의(※ 2차 빈악파가 발전시킨 기법)에 관심을 갖고, 이에 기초한 곡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12음 기법을 음정뿐만 아니라, 길이, 강약, 음색에 까지 사용하는 총렬주의로 확장시켰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이러한 흐름은 음악계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고, 쇤베르크는 선구자로서 추앙받게 되었다.
서양음악의 토대를 이루었던 조성을 해체하고, 12음 기법을 창조한 쇤베르크는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소수파 천재작곡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과거의 음악을 답습하지 않으려 했다. 20세기 초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5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영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