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1873-1943)의 부친은 러시아의 귀족으로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여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다. 네 살 때 스스로 피아노를 연주하더니 10대에 접어들며 작곡을 시작했고, 17살 때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완성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전도유망한 청년 음악가였다.
그랬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24살(1897년)에 발표한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는다. “화려한 경력을 쌓으려던 내 꿈이 산산이 부서졌다” 교향곡 1번 초연 후 라흐마니노프는 우울의 나락에 빠졌다. 교향곡 1번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더 이상 연주되지 않았다. 그의 우울증은 최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심해졌다.
라흐마니노프는 3년여 동안 주치의 니콜라이 달(Nikolai Dahl)의 치료를 받으면서 건강을 회복해간다. 그리고 1901년(28세) 희대의 히트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세상에 내놓는다. 피협인데도 피아노가 반주하고, 오케스트라가 멜로디를 연주하는 독특한 시도로 1악장을 연다. 누가 들어도 애수에 가득 찬 러시아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성공의 1등 공신이었던 달박사에게 헌정된다. 라흐마니노프는 비로소 자신감을 되찾고, 성공가도를 다시 질주하기 시작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라흐마니노프는 공산화된 조국을 뒤로 하고 망명길에 오른다. 일단 노르웨이에 갔다가 이듬해인 1918년 미국으로 떠난다. 1928년에는 동족의 망명 연주자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를 만난다. 호로비츠는 라흐마니노프보다 30살 연하였지만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다.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연주 실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특히 1909년(36세)에 발표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다”라고 말하며 극찬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망명 후에 피아노 협주곡 4번(1926년)을 만들긴 했지만, 눈앞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실상 전업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2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손을 펴면 엄지와 새끼손가락 사이가 30cm를 넘는 신체를 가진지라 그의 연주는 범인이 불가능한 영역에 있었다. 그가 한국인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은 이유는 탁월한 신체조건을 활용한 기교와 러시아적 애수를 담은 멜로디 때문이다. 그의 선율은 차이콥스키와 같은 듯 다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조국 러시아를 그리워했지만 다시는 그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43년 70세에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피부암(흑색종)으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