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 1891-1953·인물사진)는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에 속하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손초프카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하는 어머니는 프로코피예프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조기 음악교육을 시켰다. 1904년(13세)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시켜 천재 아들을 후원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 시절에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행각으로 늘 화제를 뿌렸다고 한다. 음악원 졸업 후에도 그의 파격성은 자주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러시아 음악계는 이 젊은 음악가의 탁월한 실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20세), 러시아의 유명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하여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22세)년부터는 해외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중 1차대전이 발발(1914년)하자 프로코피예프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작품 경향도 변한다. 그간의 파격 일변도에서 벗어나 교향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서는 신고전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1917년(26세)에는 러시아 혁명이 터진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으로 음악활동이 위축되자 이듬해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회심의 작품이었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엎어지자 실망한 그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간다. 여기서 수년 전 만났던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한다.(디아길레프의 첫 번째 의뢰작품인 ‘알라와 롤리’ 역시 초연 계획이 불발된 아픔이 있다.) ‘어릿광대’는 1921년(30세) 파리에서 초연되어 다행히도 큰 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에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 역시 미국 시카고 초연에 성공한다. 1921년은 프로코피예프에게 새 도약의 계기가 된 해였다.
1927년(36세)에는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된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이 호평을 받게 되면서 프로코피예프는 소련으로의 복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결국 1936년(45세)에 그는 영구 귀국을 선언한다. 그리고 직전 해에 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소련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소련의 문화정책에 그의 활동은 곧바로 제동 걸린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살아남기 위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1939년 스탈린의 환갑에는 ‘건배’라는 제목의 어용 칸타타를 발표하여 정권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이후 프로코피예프는 거의 소련에 머물면서 영욕의 순간을 반복하다가 1953년(62세) 뇌출혈로 사망한다.
프로코피예프가 사망한 날, 스탈린도 죽었다. 스탈린 사망 소식에 묻혀 프로코피예프는 모차르트만큼이나 초라한 장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의 명성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사후 4년만인 1957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대표 공항은 1973년 ‘프로코피예프 국제공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냉전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와 같이 서방에서 활약했던 음악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을 받았지만, 이념의 해빙기가 찾아오면서 프로코피예프는 재평가를 받는다. 지금은 가장 자주 연주되는 현대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