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경주의 풍광들을 통해 기억을 소환하고 찾아다닌 지 수 년이 되었습니다. 주로 사라질 위기에 있거나 기록해야겠다고 판단했던 소재들이 대부분이었죠. 경주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삶의 자잘한 일상과 현장에도 주목했고요. 동국대 서양화과 김호연 교수님과도 작품으로 구현된 경주풍광과 함께 오랜 시간 연재를 해왔습니다만 교수님께서 편찮으신 바람에 저 혼자 연재를 이어왔습니다. 골목길 걷는 것이 취미인 제가, 며칠 전에도 구석지고 허름한 구황동 원효로 밤 골목길을 걸으며 상념에 빠졌습니다. 어두운 골목길을 밝고 따스하게 밝혀주는 가로등 불빛같이 노오란 희망을 김 교수님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김호연 교수님의 빠른 쾌유를 빌어봅니다. 이곳 골목 구석구석에선 오래되어서 정겹고 순박한 생활의 민낯들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골목길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년전부터 황리단길의 북적함을 피하면서 아날로그 감성을 즐길 수 있는 동네로 구황동과 황오동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시내권 여행지와 멀지 않으면서도 경주의 일상적 ‘생활의 발견’에 젖어들고 싶을 때 이 동네들을 떠올리는 거죠. 천천히 걷는데도 제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컹컹’ 굵은 볼륨의 개 짖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에 가득 찹니다. 저녁이 깊은 구황동 원효로 골목은 이제 차갑지 않았습니다. 겨울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별 변화없는 골목길인 듯해도 대기는 온화해졌고 살짜기 달달해진 온기가 얼굴에 와 닿더라구요. 구황동 골목길을 어김없이 밝히는 가로등들은 참 이상하게도 통일된 디자인이 아니었고 가로등마다 크기나 불빛의 밝기도 달랐습니다. 얼기설기 모양새도 허름했구요. 그런데도 이 오래된 동네의 골목과는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봄볕이 짙어질 구황동 골목에서는 나른하게 낮잠에 취할 고양이들을 만날테고 주민들이 일군 작은 텃밭에는 푸른 생명들이 돋아날 테죠. 담장 너머로 보이는 빨래들은 바삭바삭 햇볕에 구워질 테고요. 목련이니 모란이니 앞 다퉈 꽃들도 자지러질 테죠. 골목길에 켜진 소박한 가로등 불빛이 더욱 살갑게 다가오는 봄밤이었습니다. 좁고 구불한 구도심의 허름한 골목을 따스하게 밝혀주는 골목 속 가로등 하나는 안전하고 편하게 골목 속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길고 지리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텐데요, 그런 우리의 긴 터널과도 같은 골목길에서 그 가로등 하나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따금씩은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을 의지하며 경주의 봄밤 속을 걸어보세요. 시간은 흘러가고 오래된 동네 골목의 풍경들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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