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후배들과 남산 산행이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석산 신선사에 대해 계속 글을 쓰고 있어 후배들과 동행할 처지가 아니다. 홀로 또 신선사를 찾아 길을 나선다. 산을 오르다 보면 지금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다. 헨리 소로우는 산책한 시간만큼만 글을 쓰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했다. 니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렇게 일갈하고 있다. “가능한 한 앉아서 지내지 마라.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면서 얻은 게 아니라면 어떤 사상도 믿지 마라” 이런 대단한 분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필자 또한 등산이나 산책을 하면서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해 구상을 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신선사 석굴 앞이다. 신선사 석굴 북편 작은 입구 쪽에 ‘미륵전’이라는 팻말이 있다.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서편의 주 출입구를 들어서면 맞은편인 동면 불상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그런데 이 불상이 주불은 아니다. 남면에 있는 조상명기(造像銘記)에 의하면 주불은 북면 안쪽에 있는 미륵불이다. 그리고 동쪽과 남쪽 바위에는 각각 보살상을 조각하여 삼존의 형식을 이루었다. 주존불의 좌측과 맞은편이 협시불이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이라면 주불을 가운데로 하고 좌우로 협시불을 모신다. 그렇다면 동면 불상이 주불이어야 하지만, 바위 규모와 형태 등을 고려하여 부득이 이와 같은 변화를 꾀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올라오는 길 100여m 아래에 있는 안내판에는 동암이 관음보살, 남암은 지장보살, 북암이 미륵본존이라고 한다. 본존인 미륵불은 입상으로 동안에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머리 위로는 육계가 이중으로 우뚝하다. 삼도는 없고 양손 모두 다섯 손가락을 펴서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을 하고 있다. 옷차림은 통견의로서 좌우대칭의 조각 기법을 따랐으며 옷자락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 발 아래까지 이르고 있다. 비록 딱딱하고 다소 서툰 듯 하지만 전체 높이가 약 7m로서 삼국시대 초기 마애불의 최고 최대의 작품이다. 동쪽 면에 새겨진 보살 입상은 보관이 생략되었으며, 왼손을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을 잡고 있다. 마멸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지만 남면에도 광배가 없는 1구의 보살입상을 새겨 앞의 불보살상과 함께 삼존을 이루고 있다. 남면의 안쪽에는 이 불상군을 만들 당시에 새긴 400여자의 경주상인암조상명기(慶州上人巖造像銘記)가 있다. 상인(上人)이란 최고의 덕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혜가 있고 덕이 뛰어난 스님들을 높여 부르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불보살을 아울러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미륵불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김유신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용화’는 미래불인 미륵이 후세에 인간세계에 하생(下生)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3회에 걸쳐 설법을 행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며, ‘향도’는 불교신앙단체이다. 즉 김유신을 따르는 화랑도가 불교의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고문헌에서 김유신과 단석산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 있으나, 이곳에 주존불로 모시고 있는 불상이 미륵불이라면 이곳 단석산과 김유신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조상명기 14행에 ‘높이 3장의 미륵석상 1구와 보살상 2구를 만들었으니…’라는 구절이 판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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