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 시작! 학생들 손이 분주해집니다. 5분도 채 안 되는 사이, 김유신묘를 수호하던 십이지신상들은 학생들의 스케치북에서 기품 있고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불교미술을 전공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한 번씩 야외 스케치를 나갔고, 김유신묘와 경주박물관, 남산 등 경주의 곳곳은 그렇게 우리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지난 주말, 완연한 봄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봄의 기운을 듬뿍 느끼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20여년 전의 추억이 가득한 김유신장군묘를 제안했고, 흔쾌히 아이와 길을 나섰습니다.
대학시절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난 우리 부부는 목적지 설정과 동시에 풋풋했던 대학시절 추억을 소환시켰습니다.
김유신묘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따뜻한 날씨 탓인지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로 가득했습니다. 연애시절 남편과 자주 즐겼던 커피 자판기도 여전히 자리해 있었습니다.
겨우내 얼었던 흙은 향긋하고 풋풋한 냄새를 풍기며 아련한 옛 시절 향수를 끄집어냅니다. 대학시절 빠질 수 없는 추억 중 하나는 야간작업입니다. 그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동기들과 실기실에서 밤새 작품에 몰입하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혹시라도 늦게까지 작업을 하던 ‘차 있는 선배’라도 마주치는 날에는 새벽녘 김유신묘 주차장에서 자판기 커피까지 얻어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남편도 그 자판기 커피와 분위기를 공감했습니다. 새벽녘에 즐기는 김유신묘 자판기 커피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미술과 관습이라고 했습니다.
김유신묘를 향하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가는 동안, 봄 향기 가득한 신선한 공기는 우리 가족을 즐겁고 경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아이도 신이 났는지 지치지 않고 재잘거립니다. 사실 대학시절에 보았던 김유신묘는 저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10분, 5분, 3분 점점 빠른 드로잉을 요구하는 교수님 덕분에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북을 넘기기 바빴습니다.
그 이후에도 지인들과 김유신묘를 찾을 때면 대학시절 중요하게 여겼던 십이지신상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전 TV프로그램 스펀지에 방영돼 이슈가 됐던 ‘글자가 변하는 비석’이 그 곳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저의 관심은 오롯이 십이지신상에만 꽂혀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바뀐 사회 분위기 탓인지, 조급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나이 덕분인지 이번에 찾은 김유신묘는 조금 달랐습니다.
묘 사방에는 봄빛이 완연했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와 그 너머 보이는 산들은 파릇파릇 생동감이 흘러넘쳤습니다. 그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느껴집니다. 돌기둥 난간에 드리워진 그림자마저도 운치를 더합니다.
2022년 봄에 만난 김유신묘는 저에게 그랬습니다. 송화산 중턱에서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김유신묘는 저에게 정겹고, 개성이 충만한 공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