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는 “굉장히 슬플 때는 누구나 저녁노을을 좋아하게 되어요”라고 했었죠. 우리의 경주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저녁이 오면서 번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은 아주 잠깐의 황홀한 우주 쇼 같습니다. 기자는 한 달 전 아버지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다시 제 삶터인 경주로 돌아왔습니다만 슬픔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골목에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저녁시간일 즈음 ‘어둑어둑’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아릿한 복통을 동반하는 슬픔이었습니다. 문득 노을을 마흔 네 번이나 바라보았던 어린 왕자의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평소 좋아하던 보문 마을 진평왕릉에 미치도록 가보고 싶었습니다. 급히 캠핑 의자를 챙겨둔 차를 몰고 해가 지기 직전이라 서둘러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여섯시를 갓 넘겼을 뿐인데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혹여 노을을 보지 못할까 콩닥거리며 도착한 왕릉 주위에는 이미 해넘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며 혹은 담담하게 진평왕릉에서 바라보는 일몰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왕릉을 에워싼 고목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제게, 와있던 사람들의 풍경이 또 다른 감상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입니다. 어느덧 그들과 한 풍경이 되어 가만히 앉아 일몰이 진행되는 짧은 순간을 바라본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해는 넘어갔어도 오래도록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연이 선사하는 찰나적 붉은 노을과 문화유산이 콜라보를 이루는 장관을 바라보며 한없는 상념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숨을 가다듬고 호흡을 고르려 했지만 얼핏 눈물도 흘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은 고요해지고 맑아졌습니다. 금세 더욱 진한 어둠이 잦아들었고 아릿하게 저렸던 가슴 한켠이 후련해지는 듯했습니다. 헛헛하기만 했었던 마음이 데워졌던 것일까요? 어린 시절 자주 업어주셨던 따스한 아버지 등에서 느낀 체온 같은 그리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러고는 왕릉 주위를 천천히 걸어보았습니다. 영면에 드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골똘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하는 아버지를 여의고 눈물방울 매달고 있었던 제게 진평왕릉 노을이 불현듯 스친 건 왜였을까요? 다시 한 번 자연에서 큰 위안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작가이기도 한 유홍준은 ‘꼭 보아야 할 경주의 세 가지 중 하나’로 진평왕릉을 꼽았습니다. 책에서 그는 ‘왕릉으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고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경주의 숨은 명소이기는 하나, 그 고졸한 아름다움에 대해 아는 이들은 다 아는 곳이 바로 진평왕릉입니다. 누구나 한 번씩은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겪겠습니다. 크고 작은 상처나 아픔으로 힘들 때 이곳 진평왕릉에서의 노을은 담담한 위로로 당신을 ‘복구’시켜줄 것입니다. 저도 얼마나 많은 노을을 바라봐야 어린 왕자의 마음을 따라갈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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